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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 申錫九(1875 ∼1950)】 "끝까지 일제에 맞선 신석구 목사"
1875년 5월 3일(음력) 충북 청주군 미원면(米院面) 개동(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금관리)에서 아버지 재기(在綺)와 어머니 청해(靑海) 이씨 사이에서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윤재(允哉), 호는 은재(殷哉) · 혹은 죽촌(竹村) · 춘정(春汀)이다.
가난한 유교 선비집안에서 출생하여 7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8세 때부터 할아버지 광소(光紹)로부터 한문을 공부하였는데 13세 때부터 『소학』을 3년 동안 무릎 끓고 공부하면서 충과 효, 예와 의를 정신수행의 가치로 삼았다.
15세 때 아버지와 할머니의 별세를 겪으며 정신적으로 방황하여 한 때 유부녀와 동거생활까지 하였지만 19세 때 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읽고 불륜생활을 청산한 후 고향에 서당을 차리고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897년(23세) 조치원에 거주하던 전주 이씨 치헌(致憲)의 딸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泰華, 泰獻) 1녀(泰惠)를 두었다.
결혼 후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틈틈이 양반 자제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업을 삼다가 1901년(27세) 고향 친구 김진우(金鎭宇)의 부탁을 받고 전당포 사업에 참여했지만 5년 만에 파산하였다. 그리고 횡령 혐의로 구속될 친구를 대신하여 3개월 옥살이를 하고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거짓 사망신고를 내고 1906년 연말에 고향을 떠났다.
서울로 올라온 후 도사 벼슬을 지낸 윤자정(尹滋貞)의 자제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친구 김진우를 만났다. 김진우는 그 사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 선교사 도움을 받아 임진강 고랑포에서 약방을 하고 있었다. 친구 김진우의 초청으로 고랑포로 갔는데 그곳에서 김진우와 고랑포교회 교인들로부터 집중적인 전도를 받았다. 이후 그는 “기독교와 유교 중에 어느 종교가 참된 종교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중국 고서 『통감』에 나라가 어지럽고 위태한 것은 “도무지 도가 없음이라(太無道)”라는 구절에 비추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참 도’가 필요한데 기독교에서 그 가능성을 찾았다. 그래서 3개월 ‘심중전(心中戰)’ 끝에, “참으로 나라를 구하려면 예수를 믿어야겠다. 나라를 구원하려면 잃어버린 국민을 찾아야겠다. 나 하나 회개하면 잃어버린 국민 하나를 찾는 것이다. 내가 믿고 전도하여 한 사람이 회개하면 또 하나를 찾는 것이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국민을 다 찾으면 나라는 자연스럽게 구원받을 것이다.”라고 결단하고 1907년 7월 14일부터 고랑포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은재(殷哉) 신석구(申錫九, 1875-1950) 목사는 하나님을 믿는 한 인간이 민족을 위해 얼마나 헌신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인생의 전반기 35년을 쓰러져가던 조선조 말기의 혼란 속에 살았다. 후반기 35년은 일제의 식민지 체제 속에서 독립을 꿈꾸며 살았다. 생의 마지막 5년은 해방 이후 소련 군정하의 북한에서 공산주의의 억압 속에서 저항의 삶을 살았다.
신석구 목사는 1875년 음력 5월 3일 충북(忠北) 청주군(淸州郡) 미원면(米院面) 개동(介洞)에서 선비인 아버지 평산 신씨 신재기(申在綺, 1844-1889)와 어머니 청해(靑海) 이(李)씨(1845-1881) 사이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덕분에 어려서부터 유학을 공부하며 자랐다. 신석구는 어렸지만 효를 바탕으로 한 조선조의 유학 전통 따라 이름난 효자였던 아버지에게서 큰 감화를 받았다.
그가 6세가 되던 1881년 어머니를 여위었다. 9세가 되던 1884년 아버지가 그렇게 효도를 바쳐온 할아버지 신광소(申光紹, 1812-1884)도 세상을 떠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86년에는 양아버지였던 큰아버지가 사망한 데 이어 14세가 되던 1889년에는 아버지가 임종하였다. 또 한달 뒤 할머니마저 돌아가셔서 졸지에 그는 천애고아(天涯孤兒)가 되고 말았다. 이 기간 동안 한문을 어른들로부터 익힌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신석구는 당시의 관혼상제의 의례에 따라 3년 상을 치러내면서 건실한 생활을 해왔으나, 삶의 스승이 될 어른들이 모두 없어지면서 점차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게 되었다. 17세가 되던 1892년에는 고향 주변의 시골에서 하층 계급의 유부녀와 동거도 했다. 훗날 신석구 목사는 스스로 이 시기를 자신이 ‘1차 타락’을 경험한 시기라고 칭하였다.
신석구가 유혹을 떨치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지은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읽고 마음을 바로잡은 덕택이었다. 그리고 가문의 내력으로 서당 훈장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가 당시로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22세가 되던 1897년에 조치원(鳥致院)에 살던 선비 이치헌(李致獻)의 딸 전주(全州) 이(李)씨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던 그에게는 이 결혼이 그리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신석구는 결혼 후 경제적으로 힘든 속에서 어느 군수(郡守)의 아들을 가르치는 훈장의 자리를 제안 받고 이에 응하였다.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이 넘쳐나던 당시 한 몫 챙겨보라는 주위의 권유로 신석구는 ‘2차 타락’을 경험하게 된다. 다만, 이번에도 다행히 그는 청빈한 삶을 강조하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분연히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빈곤한 집으로 돌아온 그는 가문의 호주이면서 하나 남은 형마저 사별하는 일을 겪게 된다. 졸지에 형수와 조카들의 생계까지 떠맡아야 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 힘든 것은 “왜 착한 이들이 불행한가?”라는 문제에서 기인한 정신적 고통이었다. 정승(政丞)을 바라보며 공부하던 젊은 유생(儒生)에게는 감당하기에 너무도 벅찬 현실이 고통스러웠다. 이 시기 그는 ‘3차 타락’을 겪었다.
1901년 신석구는 어릴 적 친구이자 청주 지역 유지의 아들인 김진우(金鎭宇)를 만나 전당포 사업을 도와주면서 서기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사업 5년차, 그의 나이 31세인 1906년 사업은 망하였고, 살길을 찾아 부양할 가족이 많은 친구를 대신하여 사기죄로 감옥에 갔다. 3개월 뒤 병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거짓으로 사망신고까지 내고 가족을 처가로 보낸 뒤 고향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떠나는 날 부인이 해 주는 아침을 먹으며 달아날 준비를 하던 이 치욕의 순간이 “새 생활의 시작”을 이끌었다고 후일 고백하였다. 신석구 목사의 자서전에 나타난 당시의 기록을 현대어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때가 나의 신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부엌에서는 새벽밥을 짓느라 불을 후둑 후둑 때고 나는 밝아오는 동편을 향하여 묵좌(黙坐)하여 과거를 회상하며 미래를 계획하여 보았다. 십오 세 이후로 이십오 세까지 아무리 표랑생활(漂浪生活) 할지라도 거의(‘감히’라고 못함은 간음죄를 범함) 양심생활을 할 때에는 아무리 더디더디 될 지라도 차츰 차츰 길이 열리어 가더니 십칠 년 양심을 저버린 생활을 한 결과 오늘 여지없는 실패를 당하였다. 타인들은 내가 친구를 위해 대신 고생한다고 동정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실은 나의 죄로 인하여 이렇게 되었다. 내가 살려면 다시 죄를 짓지 말아야겠다고 하는 이 한 가지 계획을 세우고 동서남북 어디로 갈 방향을 모르고 떠났다. 나는 그 때 몰랐지만 이후에 생각하면 그 시기가 곳 성신(聖神)께서 나를 부르신 시간이었다. 때는 1906년 음력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가족과 헤어져 일자리를 찾던 신석구가 선택한 곳은 서울이었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으면 일자리도 많으리라 생각한 까닭이었다. 운 좋게 그는 선비 집안에서 자라난 것을 인정받아 고향친구 김규흥(金奎興)의 도움으로 도사(都事)를 지낸 윤자정(尹滋正)의 자제를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신석구 목사의 실력을 인정한 김규흥은 그가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서울 인근에 집까지 마련해 주겠다고 제안했고, 선생의 생활은 점차 안정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갑자기 고향친구 김진우가 찾아와 느닷없이 ‘약(藥)장사’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고민 끝에 신석구는 의리를 쫒아 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하여 좋은 직장을 버리고 다시 서울을 떠나 1907년 봄에 경기도(京畿道) 장단군(長湍郡) 장남면(長湍面) 고랑포(高浪浦)에 정착하게 된다. 그런데 장단면에서 약국을 시작할 때 친구 김진우는 “예수님을 믿자”고 제안하였다. 사실 김진우는 서울에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선교사들의 약을 받아 지방에 팔면서 예수를 전하는 전도인이 되었던 것이고, 약국 앞에는 고랑포 교회가 있어 선교의 거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친구를 위해 감옥 까지 가고, 친구 때문에 가짜로 사망신고서까지 내고 도피한 그였지만, 신석구는 이때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러나 친구와 교인들의 집요한 전도로 마침내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유교의 이념들이 기독교 안에서 충분히 구현될 수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가 망해가는 조선의 “잃어버린 국민을 되찾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을 결심한 날은 1907년 7월 14일이었다. 자신을 극단의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친구 김진우에 의해 영원한 삶으로 인도된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라 하겠다. 그리고 한국교회사에 있어 대부흥의 해로 기억되는 1907년에 신석구는기독교로 회심이 일어난 것도 주목할 점이다.
그런데 이 시기 신석구는 남감리회 순행전도사인 정춘수(鄭春洙, 1875-1951)를 만나게 되는데, 정춘수는 신석구와는 동향(同鄕)으로 1903년 원산(元山) 대부흥운동에서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河鯉泳, 1865-1949) 목사의 설교를 듣고 미국선교사 왕영덕으로 부터 1904년 2월 세례를 받았다. 곧 이 둘은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되었다. 김진우의 지원에 힘입어 신석구는 정춘수와 함께 1907년 8월 말에 개성(開城)으로 떠났다. 당시 기독교인이 크게 증가하고 있던 개성에서 신석구는 1907년 4월 초기 감리교 선교사인 부친 리드(C. F. Reid, 李德)에 이어 조선에 의료선교사로 온 리드(W. T. Reid, 李尉萬)의 어학선생이 되었다. 성실한 신석구에게 감동한 리드 선교사는 신석구에게 의사의 길을 제안하였고, 신석구 목사 역시 많은 빚 때문에 이를 고민했지만,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를 전도하는 이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신석구는 1908년 33세의 나이로 개성남부교회에서 왓슨(W. A. Wasson, 王永德, 1880-1964)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같은 해 4월 감리교신학대학교(監理敎神學大學校)의 전신인 감리교협성신학교(監理敎協成神學校)에 입학하였다. 다만 어려운 형편으로 인해 졸업은 1922년(8회 졸업생)에 하게 되었다. 한편 신석구는 주변의 추천으로 1909년부터 개성북부교회에서 전도사역을 시작하였는데, 7월 29일 화장산(華藏山)에서 기도 중 중생(重生)을 체험하였다.
한일합방(韓日合邦)이 일어난 1910년 신석구는 처음으로 전도사 면접을 보게 되었지만, 60원에 달하는 부채문제로 탈락하게 되었다. 상심한 그는 기도 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겸손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고 회상하였다.
이번에 내가 전도사직을 받지 못한 것은 큰 행복인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받기를 간구하였다. 만일 그 때에 내가 전도사 직분을 받았던들 나는 꼭 교만한 마음이 나서 하나님 앞에 떨어졌을 것이다. 하나님은 어찌 그리 나를 사랑하시는지 참 감사하다.
이후 신석구는 같은 해 홍천읍교회(洪川邑敎會)에서 봉사하였고, 1911년 인제교회(麟蹄敎會) 부흥회를 인도였으며 1912년 「그리스도회보」에 “신자의 거듭남”을 기고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마침내 같은 해 9월 12일 남감리회에서 전도사 직분을 받게 되었다. 이후 42세가 되던 1917년 9월 24일 집사 목사로 안수된데 이어, 1918년 11월 4일 남감리회 최초의 한국 단독 연회(年會, Annual Conference)에서 서울에 있는 수표교교회(水標橋敎會)로 파송되었다.
그러나 서울의 유명한 교회 담임목사로 처음 맞게 되는 안정된 생활도 잠시 뿐이었다. 신석구 목사는 결코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위해 민족이 당하는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다. 1919년 3.1 독립운동 때에 신석구 목사는 기독교 대표 중 한 명으로 3.1 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받고, 목사의 정치 참여 문제와 천도교, 불교와 연합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였다. 신석구 목사는 “누천년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빼앗긴 것도 큰 죄인데 이제 찾을 기회가 와서 함께 참여하지 않으면 더 큰 죄가 아닌가?”라는 주님의 응답을 받고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감리교의 오화영, 이필주, 박희도, 김창준목사와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독립선언 직후 일제에 의해 체포된 신석구 목사는 일본인 검사와 판사의 회유 앞에 오히려 앞으로도 계속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각오를 명확하게 언급하였다. 이에 그는 1920년 10월 12일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이승훈(李昇薰, 1864-1930) 등과 함께 관련자 중 최고형인 3년형을 선고받았고, 결심공판에서는 미결수로 복역한 1년을 인정받아 2년형이 선고되었다. 1920년 9월 22일 신석구 목사에 대한 심리의 내용을 동아일보(東亞日報)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문 : 일한합병에 대한 감상은?
답 : 그것은 물론 반대지요. 사람치고는 다 한 가지가 아니오. 일본 사람이 조선 사람이 되어서 지금 재판장이 나의 처지에 있더라도 물론 그러하겠지요. 재판장이 묻는 것이 오히려 실수가 아니오. 물을 것도 없는 것이 아니오. 독립사상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 법정에 선 이때까지 조금도 변함없이 내 가슴 속에 사무치었소. 일본 사람이 조선을 통치함에는 말하지 못할 압박과 핍박 강제를 당하여 참고 견디지 못하게 하였지만 나는 지금까지 생명을 끊지 못하고 있소. 허나 그것은 한 가지 바라는 희망이 있는 것이니 그것은 언제든지 조선 사람의 조선이 되겠다는 것이오.
1921년 11월 4일 47세의 나이로 만기 출소한 신석구 목사는 원산 남촌동(南村洞) 상리교회(上里敎會)로 파송되었고 강연회, 부흥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여러 신학지에 기고를 계속하였다. 49세가 되던 1924년 그는 감리교의 장로 목사로 안수를 받았고, 교파 간 연합운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6년 7월 28일에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서 열린 장감연합목사수양회(長監聯合牧師修養會)에 강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전국적 명성을 얻은 그는 같은 해 10월 20일부터 26일까지 장로교회인 서울 승동교회(勝洞敎會)의 부흥회를 인도한 데 이어, 이듬해인 1927년에는 서울의 중앙전도관(中央傳道館)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계속되는 헌신적인 사역 속에서 신석구 목사는 참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선포하고 다녔지만, 1930년대 후반에 시작된 신사참배 강요 문제로 또다시 큰 고초를 겪게 되었다.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國民儀禮)’라고 주장하는 일제의 참배 명분론에 굴복한 장로교 총회는 1938년 9월 신사참배를 가결하였다. 이는 천주교를 비롯한 다수의 교단도 마찬가지였으며, 감리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즉 1938년 10월 5일 서울 감리교신학교에서 감리교 지도자들인 양주삼(梁柱三, 1879-1950) 총리사와 총대 일동이 남산의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참배하고 돌아와 회의를 진행하는 일도 있었던 것이다.
대다수의 감리교 목회자들이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는 신사의 비종교화 이론에 넘어 갔지만 신석구 목사는 단호하게 신사참배를 거절하였다. 당국은 1938년 3월 10일 63세인 그를 천안경찰서에 2개월간 구금되었으나 등창으로 인해 석방되었다. 석방 후에도 신사가 없던 평안남도 용강군 신유리 교회에서 목회했다. 1939년 9월 김종우(金鍾宇, 1883-1939) 감독이 임종하고 후임 감독으로 신석구 목사의 친구인 정춘수 목사가 선출되면서 상황은 오히려 엉뚱하게 바뀌었다. 독립운동가였던 정춘수 목사는 일제의 강압에 굴복하여 오히려 그 앞잡이의 모습을 확연히 띄게 된 것이다. 한결같이 일제의 탄압에 저항해온 신석구 목사에 대해 1941년 조직된 ‘기독교조선감리교단’은 목사의 정년을 70세에서 65세로 낮추면서 강제로 은퇴시켰다.
압제에 대해 신앙인으로 저항하였던 신석구 목사는 1941년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일어나면서 예비 검속되었다. 심지어 1944년 4월 일본기독교조선교단(日本基督敎朝鮮敎團)에서는 그의 목사직을 면직시키는 처분까지 내렸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설교를 하며 일제와 친일파들에 대해 저항하였다. 끝내 신석구 목사는 70세가 되던 1945년 전승기원예배(戰勝祈願禮拜) 및 일장기 게양 지시를 거부하다가 용강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마침내 광복을 맞이하였다.
바래 마지않던 일제로 부터의 해방이 되었지만 신석구 목사가 시무하던 북쪽 지역에는 소련군이 앞세운 김일성(金日成, 1912-1994)을 필두로 하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무신론을 주창하는 공산주의에 의한 기독교 탄압은 일제에 의한 것보다 오히려 더 가혹하였다. 신석구 목사는 1946년 3월 1일 평양중앙방송의 ‘3.1절 기념방송’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개입하지 않은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을 실패한 것으로 규정하는 공산정권의 홍보문구를 그대로 읽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신념을 고백하다가 정치보위부에 연행되었다.
이어서 그는 1947년 2월 15일에는 감리교와 장로교 인사들이 포함된 반공(反共) 정당인 기독교자유당(基督敎自由黨) 창당에 참여하였지만 결국 공산정권의 방해로 정당 창당마저도 좌절당하였다. 신석구 목사는 같은 달 북조선인민위원회(北朝鮮人民委員會)에 공산당 정책을 비판하는 “감상문”을 제출하는 등 굳건하게 공산주의의 기독교 탄압에 맞서서 저항하였다. 신석구목사는 74세가 되던 1949년에는 남조선 정부가 미군과 함께 5월 1일 북침하여 온다고 거짓 정보를 흘리던 ‘비밀정보원’을 후원한 기독교인들을 북한 정부가 체포한 이른바 ‘진남포(鎭南浦) 4.19 사건’에 연루되어 강제 연행되었다. 이 사건은 공산 정권이 사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신석구 목사는 이로 인해 평남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최고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마침내 선생은 평양 인민교화소에서 복역하던 중, 1950년 6.25 동란(動亂) 속에서 순교하였다. 그 해 9월 26일 평양이 수복되기 전 가족들이 인민교화소에서 물품의 차입통보 엽서를 받아 그때까지 그가 생존하였음을 알 수 있었으나, 10월 19일 평양이 국군과 UN군에 의해 수복된 후 가족들이 인민교화소에 찾아 갔을 때에는 안타깝게 그의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 총소리가 많이 들렸다는 10월 10일 경 퇴각하는 공산주의자 일당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목사는 제자들과 동역자들이 수차 남으로 내려가라고 권고를 하였지만, “많은 교인들을 공산정권에 남겨두고 목사인 자신만 남으로 갈 수는 없다.”고 하며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사역에 임하였던 것이다. 1950년 12월 4일 부인만 남고 가족은 월남하였다. 신석구 목사의 부인은 남편의 생사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만 남으로 내려갈 수는 없다고 하여 월남을 거부하였다.
1963년 3월 1일 신석구 목사에게 대한민국 정부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고, 1968년 7월 9일 국무회의에서 국립묘지 의관장(衣冠葬)이 의결되어 같은 해 9월 18일 동작동(銅雀洞) 국립묘기 애국선열 묘역에서 의관장이 거행되었다. 1989년 3월 1일 일본(日本)에서 『巨星 殷哉 申錫九 牧師 一代記(거성 은재 신석구 목사 일대기)』가 발간되었고, 1996년 3월 1일 국가보훈처, 문화공보부, 광복회 공동으로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어 독립기념관에서 특별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1999년 6월 25일에는 순교자 기념사업부에서 특별히 『순교자 신석구 목사』라는 이름의 책을 발간하였다.
기독교로 개종한 직후 같은 고향(청주) 출신 정춘수(鄭春洙) 전도사의 내방을 맞았다. 신석구와 동갑으로 어려서부터 ‘효자’로 이름이 났던 정춘수는 1903년 원산의 하디(R.A. Hardie) 선교사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후 남감리회 전도사가 되어 개성지방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정춘수의 소개로 개성으로 옮겨 방금 내한한 남감리회 의료선교사 레이드(W.T. Reid)의 어학선생이 되었고 1908년 3월 29일 개성남부교회에서 남감리회 선교사 왓슨(A.W. Wasson)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개성남부교회 주일학교 교장을 거쳐 1909년 2월 개성 북부교회 권사가 되어 평신도 신분으로 설교하며 전도하기 시작했다.
1910년 10월 강원도 홍천읍교회로 옮겼으며 1912년 9월 남감리회 연회에서 전도사로 임명을 받은 후 1914년 가평구역 담임, 1915년 춘천지방 순행 전도사로 사역하다가 1917년 9월 연회에서 킬고(J.C. Kilgo) 감독에게 집사목사 안수를 받고 1918년 10월 연회에서 서울 수표교교회 담임으로 파송을 받았다.
수표교교회에 파송을 받은 지 5개월 만에 3 · 1운동을 맞았다. 그가 속한 남감리회측 만세운동은 1919년 2월 16일, 당시 원산중앙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정춘수 목사가 서울 종교교회 저녁집회에 참석했다가 종교교회 담임자 오화영(吳華英) 목사와 독립운동에 관해 논의한 것에서 출발하였다. 이후 오화영과 정춘수는 기독교청년회(YMCA) 간사였던 미감리회의 박희도 전도사, 정주 오산학교 설립자인 북장로회 이승훈 등과 접촉하면서 기독교계 민족대표 구성작업에 적극 참여하였다.
2월 20일 경 오화영 목사로부터 독립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에 즉각 답하지 않고 “기도해 보고 결정하겠다.” 하였다. 신앙이 보수적이었던 그는 첫째, 목사로서 정치운동에 참가하는 것이 과연 옳은 지 둘째, 기독교 목사로서 교리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천도교와 합작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 문제를 갖고 매일 새벽 수표교교회에서 기도하였는데 2월 27일 새벽에, “4천년 전하여 나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않으면 더욱 죄가 아니냐.” 하는 ‘신의 음성’을 듣고 즉시 뜻을 정하였다.
곧바로 그 뜻을 오화영 목사에게 전했고 2월 27일 오후 1시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 사택에서 모인 기독교측 대표자 회합부터 참석하였다. 즉 이필주와 이승훈, 박희도, 최성모, 김창준, 오화영, 박동완 등 기독교 대표자들과 함께 함태영이 가져 온 『독립선언서』 초안을 검토하고 그것에 서명한 후 정식 문건이 인쇄되어 나오면 날인하도록 도장을 함태영에게 맡겼다.
그리고 이튿날인 2월 28일 저녁 재동 손병희 사택에서 모인 민족대표 회합에도 참석했는데 그 때 거기서 처음으로 천도교 대표와 불교 대표들을 만났다. 그리고 2월 28일 회합에서 결정한 대로 3월 1일 오후 2시, 명월관(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에서 민족대표 29인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경무총감부에 연행되었다.
독립운동에 참가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고 일본이 독립을 허락할 것 같은가? 시기상조다.” 하며 만류하였을 때 그는 “나도 이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독립을 거두려 함이 아니요 독립을 심으러 들어가노라.” 하였다. 그는1949년 민족대표로 참가하게 된 이유에 대해 “그러나 곧 독립이 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밀알 하나가 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을 터이라고 하셨으니 만일 내가 국가 독립을 위하여 죽으면 나의 친구들 수천 혹은 수백의 마음속에 민족정신을 심을 것이다. 설혹 찬구들 마음에 못 심는다 할지라도 내 자식 삼남매 마음속에는 내 아버지가 독립을 위하여 죽었다는 기억을 끼쳐 주리니 이만하여도 만족한다고 생각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그의 독립 의지는 체포 후 이루어진 경찰과 검찰, 판사 심문에서도 확인되었다. 우선 3월 1일 경무총감부에 연행된 직후 경찰 심문에서 “어떠한 일로 독립을 하려고 하였는가?” 질문에 “선언서와 같다. 나는 조선은 조선 민족으로 통치하도록 하려고 생각하였다.
조선은 일본이 약탈하기 때문에 일본은 조선의 원수라고 하지마는 우리들은 신에게 몸을 바치고 있으니까 그 원수를 갚겠다고는 하지 않고 신의 마음으로 조선을 독립할 것이다. 그러니까 조선은 결코 일본을 위하여 이권을 제공하는 나라가 될 수 없으므로 독립하려고 한다.”고 답하였다.
그리고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3월 18일 기소된 직후 검찰 신문에서 “피고는 조선이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하는가?”는 질문에 “그렇다. 될 줄로 생각한다.”고 답하였고 재차 “장래에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는 질문에 “그렇다. 나는 한일합방도 반대하였으니 독립이 될 때까지 할 생각이다.”고 답했다.
그리고 5월 5일 서대문형무소 안에서 이루어진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 신문에서 “피고는 독립국이 꼭 되려고 선언하였는가? 그렇지 않으면 선언을 하는 데만 그치려고 한 것인가?”는 질문에 “형식상 조선 독립은 성립되고 있지 않으나 씨를 심을 때에는 추수가 있을 것을 판단하는 것과 같이 청원한다고 하는 것은 실은 청원이 아니고 독립한다는 것을 통지한 것이다. 우리가 대표자로서 명의를 낸 것은 조선인 전체가 이 의견이라고 생각한 것이며 세계 각국이 민족 자결을 제창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독립이 되리라고 믿고 또 그 일을 통지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일본의 쇠사슬을 벗어나려 생각하고 있다.”고 답하였다.
사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에 제일 늦게 참여하였기 때문에 그의 표현대로, “한 일은 별로 없으나” 독립운동 의지는 누구보다 강했다. “신의 뜻으로 알고 참여했다.”는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한 참여였기에 그 의지가 더욱 분명했다. 그래서 1920년 10월 12일 경성복심법원 공판에서 검사는 신석구를 손병희와 최린, 이승훈, 한용운, 오화영, 최남선 등과 같은 ‘주모자급’으로 분류하여 최고형인 3년형을 구형하였고 그해 10월 30일 결심공판에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선고받았다.
옥중에서 한용운과 김중삼, 김성업, 정태용 등 독립운동가들과 교유(交遊)하였고 만세시위에 가담했다가 투옥된 청년화가 이당(以堂) 김은호가 그에게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천도교측 민족대표였던 이종일은 훗날 비망록에서 신석구에 대하여 “손병희 선생과 같이 꿋꿋한 모습을 보여주어 더욱 마음 든든한 바 있었다.”고 진술할 정도로 옥중에서 흔들리지 않는 독립의지를 보여주었다.
미결수로 지낸 8개월을 포함, 2년 8개월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1월 4일, 박희도 · 신홍식 · 이필주 · 이명룡 · 양전백 등 다른 민족대표 16인과 함께 마포 경성형무소에서 만기 출소하였다.
이후 목회에 복귀하여 원산중앙교회를 담임하였고 1922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4년 연회에서 장로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25년 고성구역, 1927년 가평구역, 1929년 철원읍교회, 1931년 강원도 이천교회, 1935년 천안읍교회를 담임하면서 이안지방 감리사, 천안지방 감리사를 역임했다.
이렇게 석방된 후에는 교회 목회를 주로 하였지만 1925년 흥업구락부에 가입,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1938년 7월 서울에서 흥업구락부사건이 터지자 그도 천안경찰서에 2개월 구금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후 1939년 진남포지방 신유리교회, 1944년 유사리교회로 파송되었는데, 그 무렵 정춘수 감독이 혁신교단을 창설하고 노골적으로 ‘친일노선’을 취하자 이에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하였고 1945년 5월 교회에 전승기원 일장기 게양을 거부한 이유로 용강경찰서에 구금되었다.
해방과 함께 풀려난 그는 “월남하라.”는 주변의 권고에도 “남은 양(교인)들을 돌봐야 한다.”면서 유사리교회 목회에 복귀하였고 1948년 문애리교회로 옮겼다.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 노선에 투철했던 그는 공산주의 정권의 견제와 탄압을 받았다.
1946년 3 · 1절 기념방송사건을 필두로 서부연회 재건과 기독교민주당 및 기독교자유당 사건 등에 연루되어 정치보위부에 수차례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고 결국 1949년 4월 19일, 소위 ‘진남포4 · 19사건’으로 불리는 진남포지역 반공비밀결사 조직운동의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된 후 평남재판소(재판장: 허정숙)에서 사형, 인민위원회 최고재판소(소장: 김두봉)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평양 인민교화소에 수감되었다가 1950년 10월, 평양 탈환 직전 퇴각하는 공산군에 의해 희생되었다.
그의 시신은 찾지 못했지만 1968년 7월 9일 국무회의 결의에 따라 9월 18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선열 묘역에서 묘소를 마련하고 의관장을 거행하였다.
저술로는 번역서인 『빌립보서 주석』(동양서원, 1912)과 1949년 기록한 『자필 자서전』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