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오늘이 있기에
 
 
 
카페 게시글
여행 스크랩 에베레스트 최초등정자 힐러리 별세
한국의산천 추천 0 조회 59 08.01.12 14: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에드먼드 힐러리 별세 

 

1953년 세계 최초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산 정상을 밟은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어제(2008.1.11)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뉴질랜드에서 양봉(養蜂)을 하던 33세 청년 힐러리는  네팔의 셰르파족(族) 가이드인 텐징 노르게이(Norgay·당시 38세)와 함께 나중에 '힐러리 스텝'으로 이름 붙여진 험난한 수직 빙벽(높이 12m)을 지나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Everest·8848m)산 꼭대기에 올랐다. 지금으로부터 55년전인 1953년 5월 29일의 일이다.

 

▲ 1953년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오른쪽)와 네팔의 셰르파족 가이드인 텐징 노르게이가 당시 등정 과정에서 캠프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AP연합뉴스]

 

알피니즘의 태동과 그 역사를 배울 때에 주요 알피니스트 이름중의 하나가 힐러리라는 이름이다. 등산학교 교육시 그리고 각종 등산대회에 출전하기위해서는 공부해야 하는 알피니즘에 대한 역사와 인물공부, 히말리야 최고봉 14좌에 대한 알피니즘의 역사공부는 필수과목이었다. -한국의산천-   

 

참고 히말라야 14좌

1. 에베레스트 (8,848m)

2. K2 (8,611m)

3. 캉첸중가 (8,603m)

4. 로체 (8,516m)

5. 마칼루 (8,463m)

6. 초오유 (8,201m)

7. 다울라기리 (8,167m)

8. 마나슬루(8,163m)

9. 낭가파르낫(8,125m)

10. 안나푸르나(8,091m)

11. 가셔브룸1봉(8,068m)

12. 브로드피크(8,047m)

13. 가셔브룸2봉(8,035m)

14. 시샤팡마(8,012m)

 

영국은 1849년부터 식민지였던 인도 북부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히말라야산맥에 대한 광범위한 측량사업을 벌이면서 P15란 기호로 표시되어 있던 유난히 높은 봉우리에 관심을 갖고서 측량을 하게되었다.
P15봉우리가 정확하게 측량이 된 것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852년에 정확한 높이가 8.848m로 측량이 되었지만 그 후로도 계속 P15봉우리로 불리다가 1865년에 가서야 당시의 측량국 장관이었던 조지 에베레스트경의 이름을 따서 에베레스트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다. (k2봉우리는 카라코럼에 있는 두번째 높은 봉우리라는 측량 표시기호이었으나 현재까지 K2봉으로 불린다.)

 

에베레스트(Everest 8.848m 북위 27도 59분 동경 86도 55분)

티베트 말로는 초모롱마(Chomoungma), 사가르마타 불린다.

1907년 영국산악회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으로 그들이 명명한 최고봉 도전 제안이 나왔다. 그리하여 1919년 에베레스트위원회를 조직하여 원정을 주관하였다.
 세계1차 대전이 끝난 뒤 1921년 5월 장도에 오르는데, 영국이 역사적인 거보를 내딛게 된 것은 당시 국력이 멀리 해외로 뻗으며 인도를 지배하고 있으면서 군인들이 중앙 아시아를 탐사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에베레스트에 대한 최초의 도전은 1921년 하워드 버리가 이끈 4명의 대원과 3명의 과학자가 참가한 정찰 원정이었으며 최초의 원정대는 1922년 인도 고르카 연대의 준장이었던 부르스대장을 포함한 12명의 대원이 7.600m에 제 5캠프를 설치하면서 세 차례의 정상공격을 감행하여 북동릉 8.326m까지 전진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후에도 일곱 번의 원정이 있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3차 원정대에서는 말로리와 어빈이 이 실종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1924년 3차 원정대원으로 참가하여 6월 27일 마지막 일기를 써놓고 조지 말로리와 앤드류 어빈은 정상을 향했고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1999년에 발견된 시신은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다.

조지 말로리는 살아서 산에 오르는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른다" 라는 말을 남겨서 유명했고 죽어서는 그는 과연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는가 아니면 오르지 못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을 남겼다.

 

 

▲ 실종된 조지말로리와 앤드류 어빙

 

1953년 영국은 영국산악회 회원이며 프랑스 산악부대에 관계하고 있는 존 헌트가 원정대의 대장으로 꾸민 영국대가 에베레스트 봉에 오를 수 있었다. 물론 한번에 성공된것은 아니었다  대장으로 제 9차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파견하여 5월29일 오전 11시 30분 드디어 에드먼드 힐라리와 셀파인 텐징 노르게이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섰다.


에베레스트가 세계 최고봉으로 밝혀진 지 100년만의 일이다. 그리고 나흘 뒤 6월2일 엘리자베스(Elizabeth) 2세 영국 여왕의 대관식에서 정식 공표됐으며 전세계는 기쁨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여왕은 힐러리에게 작위를 수여했다. 그후 힐러기 경(卿)으로 불리운다.  

이후에도 그는 1957년 썰매와 도보로 남극을 탐험해 그곳에 뉴질랜드의 '스콧 기지'를 지었고, 이듬해는 개조한 트랙터를 이용해 최초로 남극을 차량 탐사하는 데 성공했다. 또 1956~1965년에 걸쳐 히말라야 봉우리 10개를 더 오르는 열정도 보였다.
 

또한 1962년엔 '히말라얀 트러스트'란 단체를 설립, 노르게이의 나라 네팔을 돕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의 노력으로 네팔에 학교와 병원, 비행장들이 속속 들어섰다. 1975년 네팔로 향하던 비행기가 사고를 당해 함께 있던 처와 딸을 잃는 슬픔도 겪었지만, 그는 2007년까지 120번이 넘게 네팔을 오가며 '정신적 고향'을 위해 헌신했다.

생존 인물로서는 유일하게 뉴질랜드 지폐(5달러)에 얼굴이 그려진 그는 1982년에는 자신이 사인한 5달러 지폐 1000장을 판매해 모은 53만 달러(약 5억 원)를 네팔에 기부하기도 했다.
 

 

에드먼드 힐러리 (Edmund Percival Hillary, 1919.7.20~2008.1.11)

뉴질랜드의 등산가이자 탐험가. 뉴질랜드의 히말라야 원정대 대장을 하였고 뉴질랜드의 남극횡단 원정대에서도 활약하였다. 
국적. 출생지  뉴질랜드 오클랜드
주요저서 :대모험 High Adventure(1955), 실수는 허용되지 않는다 No Lautitude for Error(1961) 
 
에드먼드 힐러리
오클랜드 출생. 뉴질랜드 알프스에서 등산을 시작하여 1951년 뉴질랜드의 가르왈 원정대에 참가, 처음으로 히말라야산맥을 접한 이래로 1952년에 초오유산 원정에 참가하였다.

1953년에는 영국의 에베레스트산 원정대원으로 선발되어 5월 29일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에베레스트산을 첫 등정하였다. 그 공로로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1954년에는 뉴질랜드의 히말라야 원정대 대장이 되었고, 1957∼1958년 뉴질랜드의 남극횡단 원정대에서도 활약하였다.

1960∼1966년 뉴질랜드 ·미국 ·영국의 합동 히말라야 원정대 및 1967년 남극 히셀봉 원정대를 지휘하였다.

주요저서에 《대모험 High Adventure》(1955) 《실수는 허용되지 않는다 No Lautitude for Error》(1961) 《High in the Thin Cold Air》(1962, D.도익과 공동저술) 등이 있다.  

 

“영광 안겨준 산엔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아” [중앙일보]
겸손한 영웅 … 에베레스트보다 더 높은 곳에 잠들다 

 

 

1953년 뉴질랜드 등반가 에드먼드 힐러리에게 처음으로 등정을 허락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왼쪽 봉우리)의 위용. 오른쪽 봉우리가 로체(8516m)다. 점보 여객기 비행 고도 높이의 에베레스트 정상 부근은 강력한 상층기류의 영향을 받아 수평으로 눈보라를 날려보내는 장면이 상징처럼 각인돼 있다.

 

 

에드먼드 힐러리<左>와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

1953년 6월 26일 네팔 카트만두 주재 영국 대사관에서

에베레스트 세계 첫 등반을 기념하기 위해 등정 당시

입었던 옷차림으로 촬영했다. [AP=연합뉴스]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곳에 맨 처음 오르고도 가장 낮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나이. 1953년 에베레스트산(해발 8848m)을 최초로 정복한 에드먼드 힐러리 경(卿)이 11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88세.

 힐러리의 사망은 헬렌 클라크 뉴질랜드 총리가 이날 직접 발표했다. 클라크 총리는 “스스로는 늘 평범한 한 사람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전설과도 같은 탐험가였고 진정한 관용과 결단력을 가진 영웅이었다”고 추모했다.

 총리가 직접 나서서 힐러리의 타계를 전 세계에 알리고 애도하는 것은 그가 유명한 뉴질랜드인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비행기 사고로 아내와 딸을 잃는 역경을 겪고도 “모험은 나처럼 평범한 모든 이에게 가능하다”고 모두에게 용기를 줬으며, 조용히 자신을 빛내준 셰르파(등반 안내인)들을 돕기 위해 뛴 박애주의자였다.

 1919년 오클랜드 인근 타우카우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뉴질랜드 공군으로 참전했다. 그 뒤 등반 교육을 받고 전문 산악인의 길을 걸었으며, 53년 에베레스트 등반에 나선 영국 원정대의 일원이 됐다.

 그해 5월 29일 오전 6시30분. 힐러리와 네팔인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닿았다. 그들의 등정 소식은 나흘 뒤 전 세계에 알려졌다. 마침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대관식 날이었다. 여왕은 그에게 기사 작위를 내렸다. 

 

 

▲ 뉴질랜드 5달러 지폐에 새겨진 에드먼드 힐러리경 초상.

 

하지만 힐러리와 노르게이 가운데 누가 먼저 정상에 발을 디뎠는지를 놓고 많은 이가 의혹을 제기했다. 정상에서 찍은 사진에는 노르게이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일한 증인인 노르게이도 침묵으로 일관하다 86년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고 힐러리가 굳이 ‘내가 세계 최초’라고 주장한 것도 아니다. 힐러리는 “노르게이와 나는 한 팀으로 정상에 올랐다”고 강조해 왔다. 영광을 노르게이와 함께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네팔의 셰르파들을 돕기 위한 ‘에드먼드 힐러리 히말라얀 트러스트 재단’을 설립하고 수백만 달러를 모금해 병원과 학교를 지었다. 평생 120차례나 네팔을 찾았다.

평소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것은 탐험가로서의 명예가 아니라 네팔을 돕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에도 그의 탐험은 계속됐다. 65년까지 히말라야의 열 봉우리 등정을 마쳤고, 58년엔 개조한 트랙터를 타고 남극 원정에 나서 남극점을 밟았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 - 1957년 남극의 임시 활주로.

 

85년에는 달에 첫발을 디딘 미국인 닐 암스트롱과 소형 비행기로 북극해를 가로질러 북극점에 닿기도 했다. 지난해 1월에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손자와 함께 남극을 다시 방문하기도 했다.

 “뛰어난 사람만 인생을 잘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동기다. 진정 무언가를 원한다면 온 맘을 다해라.” 늘 이야기하던 자신의 철학을 삶의 끝자락에서도 몸소 보여준 것이었다. 그가 75년 펴낸 자서전의 제목인 『모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Nothing Venture, Nothing Win)』는 이러한 그의 삶을 잘 요약하고 있다.

 그가 세상을 뜨며 남긴 바람은 “내가 좋아하는, 내 삶의 출발점인 고향 바다에 닿고 싶다”였다. 그래서 자신의 유골을 오클랜드 앞바다에 뿌려 달라고 부탁했다. 영광을 안겨준 산에는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인생 탐험을 마친 그가 남긴 가장 큰 흔적은 ‘에베레스트에 오른 첫 인간’이라는 기록이 아니라 ‘겸손과 관용’이라는 교훈이었다.   

 

 

▲ 읽을수록 빠져드는 산관련 서적 ⓒ 2008 한국의산천

 

 山行은 渴望되고 이어 준비된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