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군(淸平君) 곽연성(郭連城)이 졸(卒)하였다. 곽연성(郭連城)의 자(字)는 보지(保之)이고 청주(淸州)사람이었다.
처음에 내금위(內禁衛)에 속(屬)하였다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임신년에 임금을 따라 명(明)나라에 갔었다. 정축년에 무과(武科)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가 한참만에 가선 대부(嘉善大夫) 함길도 병마 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에 승진하고 청평군(淸平君)에 봉(封)해졌다.
들어와 인순부 윤(仁順府蜳)ㆍ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고, 나가서 경상도 도절제사(慶尙道都節制使)가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졸(卒)하니, 임금이 명하여 26일의 나례(儺禮)를 구경하는 일과 27일의 풍정(豐呈)을 정지하게 하였다.
곽연성이 무재(武才)가 조금 있었는데, 임금이 명(明)나라에 갈 적에 군관(軍官)으로 따라갔다가 정난(靖難)할 때에 상복(喪服)을 입고 집에 있으니, 임금이 사람을 시켜 불러서 공(功)이 있었으므로, 드디어 공신(功臣)이 되고 갑자기 대관(大官)이 되었으며, 임금이 매우 믿고 중하게 여기었다.
그 성질이 거칠고 난폭하고 탐오(貪汚)하고 혹독하여, 그가 경상도(慶尙道)의 절제사(節制使)가 되었을 때 이인(吏人) 승로(承老)란 자가 집이 매우 부자인데 늙어서 아들이 없고 오직 첩(妾)의 딸이 나이 겨우 6, 7세인 것을 보고, 강제로 군영(軍營) 중에 두고 갑자기 광한(獷狠)한 무리들을 징발하여 승로(承老)의 묵은 빚으로 갚지 못한 것을 징수하게 하고, 문권(文券)을 엉터리로 만들어 온갖 방도로 마구 침학(侵虐)하여 얼마 아니되어 승로(承老)와 그 딸이 모두 죽으니 빚을 징수하기를 옛날과 같이 하였으나, 관리들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였다.
군사들이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혹독한 형벌을 더하니, 심지어 피패(皮牌)로 뺨을 때리고 나무 몽둥이로 머리통을 때리니, 군사들이 그를 시호(豺虎)처럼 무서워하였다. 집에 있을 때 노복(奴僕)으로서 뜻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몽둥이로써 크고 작은 자를 가리지 않고 때려서 심지어 죽은 자까지 있었고, 재산을 모으기에 매우 부지런하여 빚을 낸 자는 감히 갚지 아니할 수가 없었고, 집이 가난하여 갚지 못하는 자는 비록 현순 백결(懸鶉百結)의 옷이라도 반드시 빼앗아다가 팔아서 이를 채워서, 집이 매우 부자였다. 두 첩(妾)이 있었는데, 죽으려 할 때 앞에 불러다가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그 작은 첩(妾)은 곧 관기(官妓)였는데, 그녀의 손을 붙잡고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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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은 뒤에 너는 반드시 남에게 시집갈 것이다.”
하고, 벼개 곁에 칼을 두었다가 이를 잡고, 그 눈을 찌르고자 하니, 작은 첩이 얼른 피(避)하여 칼이 그 이마를 닿아 상(傷)하였다. 그의 강려(剛戾)한 마음은 죽을 때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남아 있었던 것이다.
시호(諡號)를 ‘안양(安襄)’이라고 하였으니, 관대하고 너그럽고 화평(和平)한 것을 안(安)이라 하고, 일로 인하여 공로가 있는 것을 양(襄)이라 한다.
첫댓글 청주 곽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