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기록된 첫 번째 목적은 사상이 아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함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성경의 교리는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교리는 나의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라.』(요 7:16)고 하셨다. 그래서 잘못된 교리는 진리의 지식이 될 수 없다. 교리가 다른 것은 진리를 가르치러 오신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한 인간이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학자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다. 인간은 절대적인 지식을 규명할 수 없다. 이 신학자의 말도 들어보고 저 신학자의 말도 들어봐야 한다.’는 것은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한 무자격자들의 어설픈 자기 변명이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생각을 배우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리의 보화를 캐내기 위해 성령의 능력으로 경주하는 사람이다. 이에 도움이 못 되는 사상서는 주님께서 그분의 성도들에게 주신 진리의 서적이 될 수 없다.
칼바르트의 교의신학은 무엇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칼 바르트는 이단 사상가였다. 바르트는 자신이 신봉하던 자유주의에 반발하여 (성경은 인간의 저작물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도 들어 있다고 주장하는) 신정통주의의 시조가 되었는데, 그후에도 이전의 자유주의자로서의 오물을 그대로 쏟아내고 있었다.
칼 바르트는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고,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거부했다.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에 회의적이어서 성경의 창조 기사들과 아담의 타락을 전설이나 무용담으로 보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을 신화적 관점에서 파악하려고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의 역사적 발생에 대해서는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으며 또 있어서도 안 된다면서 주님의 실제적인 부활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그가 몸의 부활을 부인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또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기에 인간은 버림을 당하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면서 ‘보편 구원론’을 가르쳤다.
만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이기에 그들을 이와 같은 관점으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볼 때, 칼 바르트는 “거룩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롬 1:4)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분의 보혈로 죄들의 용서함을 받지 못한 죄인이었다(골 1:14).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이라는 말을 남긴 바르트는 성경을 믿지 않고 세상과 타협한 세속적 무신론 신학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관장하여 기록하게 하신 말씀으로,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니라.』(벧후 1:21)면서 스스로 그 영감성(딤후 3:16)을 확증하고 있다.
성경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예언”의 성취로 증명되는데, 육신을 입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48가지 예언이 성경에 자세히 주어졌고, 그 뒤 수백 년이 지나 모두 다 정확히 성취되었다. 성경에는 800여 가지의 예언이 있으며, 그 중 300여 가지는 이미 성취되었고, 500여 개는 머지않아 곧 이루어질 것이다. 예언의 성취는 성경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사 41:21-23).
성경은 “최종권위”이다. 인간은 성경을 판단할 권리가 없지만 성경은 인간의 속마음까지 판단할 수 있으며, 그 판단은 정확하고 예리하고 완벽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히 4:12).
칼 바르트는 “칼”인 말씀을 잘못 다루다가 스스로를 베어 버렸다. 그것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 것이다(벧후 3:16). 성경은 모든 불신과 오류를 바로잡아서, 성경의 역사적 사실들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부활을 부인하는 칼 바르트와 같은 무신론 신학자들의 생각이 틀렸고 그들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다. 또 그런 거짓 학자들에게 동의하여(암 3:3) 학자적 오물들을 출판해 놓고 ‘기념비적 저작물’을 출판했다고 자랑하는 대한기독교서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최종권위로서 선언한다.
교의학 또는 교의신학이라고하며 독일의 신학자 L.라인하르트에 의하여 처음으로 사용된 말이다. 그는 1659년에 신학저술을 펴내면서 《종합적 교의신학 Synopsis Theologiae Dogmaticae》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그 후로 교의신학 또는 교의학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초대 교부이면서 성경변개를 주도했던 오리겐의 저술과 캘빈의 그리스도교 강요에서도 나타난다.
가톨릭에서는, 교의는 교회가 결정을 내린 계시진리를 말하고, 교의학은 이같은 교의들을 수집하고 해석하여 체계화하는 학문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교의를 ‘하느님의 진리에 관한 하나의 본질’로 보고, 이 본질적인 것이 여러 가지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교의들(Dogmen)’ 또는 ‘교의적 표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바르트는 교의를 ‘하느님의 진리에 관한 하나의 본질’로 보고, 이 본질적인 것이 여러 가지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교의들(Dogmen)’ 또는 ‘교의적 표현’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바르트에 의하면, 교의학의 대상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교의 자체이며, 교의학의 목적은 교회의 여러 가지 교의적 표현들을 다룸으로써 교의에 도달함을 목적으로 한다. 하느님의 진리의 근원적인 파악과 이의 지적(知的) 표현 사이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개재하므로, 교의학은 이들 사이에서 매개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자유주의자들은 교의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하여 신앙 또는 종교를 교의학의 대상으로 본다. 그러나 정통신학자들은 “영생은 이것이니, 곧 사람들이 유일하시고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옵니다."(요한 17:3)라는 성경 정신에 입각하여, 하나님 자체를 아는 지식이 교의학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