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스크바의 어느 미술관
요한은 교회에서 점심식사도 하지 않은 채 퇴장했다. 귀가하려고 버스 정류장에서 162번을 기다리며 서 있는데 습기를 머금은 차가운 바람이 코트 목덜미 안으로 파고들었다. 추위가 더 느껴지면서 오늘 예배의 아쉬움도 새삼 춥게 다가왔다. 그래도 지난주에는 예배 중에 눈물을 흘렸는데 이번 주는 못내 서운한 시간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요한이 매주 교회를 찾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히브리서 3장 13절에서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를 실천하려고 한 공간안에 결이 맞는 교우들 틈새에서 가슴을 뜨겁게 할 기대를 안고 왔건만 이렇게 된 것이 너무 섭섭한 요한에게 회색빛 하늘 아래, 한기가 서린 도시의 거리는 더 낯설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162번이 오질 않았다. 그제서야 정류장 전광판에 "저상 우회"라는 알림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집회로 인해 노선이 변경되었음을 알아치란 요한은 다른 귀가 동선을 찾기 위해 그 자리를 떳다. 이번엔 허기가 몰려왔다.
‘엄마 계란빵 !’이라는 여자이이의 목소리가 그를 스쳤다. 그 말을 듣는 동시에 요한의 눈길은 제일은행 대각선 계란빵 리어카에 꽂혔다. 목사님 설교보다 깊게 파고드는 한 마디 ‘계란빵’이었다.
요한은 종이 봉투에 계란빵을 담아 주는 아주머니의 표정을 보면서 히브리서 4장 12절이 이런 순간에 떠오른다는 것이 우습고도 서글펐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원래는 교회에서 전율을 느낄 때 떠올려야 하는 구절이건만. .. 때로 교회는 그저 말이 무성하고 감정의 온도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공간으로 다가왔다.
요한은 성경이 말하는 따뜻함과 진정한 말씀의 능력이 구현되는 곳을 간절히 찾고 있었지만, 교회는 그런 그의 갈망에 응답하지 못해 그 서운함을 요한은 계란빵으로 채우는 것인지도 몰랐다. 다른 버스 정류장을 찾아 헤메다가 요한은 어느새 명동 쪽으로 걷고 있었다. 거리의 풍경은 한층 더 화려해졌다. 호텔과 백화점들의 크리스마스 트리는 거대한 장식들로 빛나고 있었고, 네온사인 같은 조명이 도시의 밤을 채우고 있었다. 그 화려한 불빛은 요한의 눈에 오히려 차갑고 멀게 느껴졌다.
성탄 캐럴과 집회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소음이 허공에서 뒤섞이며 흩어졌다.
요한은 문득, 그 서로 다른 소리들에서 똑같은 공허감을 느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70년대의 아련한 추억만큼 따뜻하지 않았고, 집회의 구호는 외침으로만 가득 차 진정성은 점점 옅게 느껴졌다.
"너희가 오늘 그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 (히브리서 3:15)
요한은 이 말씀이 머릿속을 스쳤다. 지금 그의 마음은 강퍅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이 공허함은 단지 외부 환경 탓인가? 깐깐하고 완악한 자신의 성품 때문일까? 호주머니에 남은 계란빵을 꺼내 먹는 동안 입안 부드러운 그 온기를 느끼며 요한은 식은 용광로 같은 자신의 감동을 뎁힐 그 무엇이 없을까 두리번 거렸다.
지나가는143번 버스 옆구리에 에곤 쉴러 미술전 이라고 국립중앙박물과 전시 안내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반쯤 먹고 있는 계란빵의 베어진 노른자를 쳐다 보니 동토의 땅 모스크바에서 계란 그림전람회가 떠올랐다.
러시아 배낭여행을 하던 요한이 그 계란 미술관을 만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수북한 눈에 발걸음 푹푹 빠지며 찾아간 모스크바 이즈미리 시장은 중앙아시아 출신 상인들이 모자 등을 팔고 있었는데 우리 여행팀을 보는 시선도 싸늘했다. 안 살거면 눈팅도 하지 말라는 분위기로 느껴질 정도였다. 늑대 가죽의 눈빛도 추위에 얼어붙는 듯 했다. 오후 3시도 안 됐는데 파장 하는 가게들의 지붕에는 두터운 하얀 눈에 태양만 유난히 찬란했다.
시장골목을 더 서성이기도 뭐한데다가 살을 에는 추위에 실내 온기가 그리워 찻집이라도 없으려나 헤메는데 시장 옆 건물에 미술관이 마침 있었다. 혹시나 해서 들어갔더니 온통 계란 그림이다. 그날 갤러리의 주인공 테마는 계란이었다.
소녀의 계란이 부화하고 있었다.
1952년도 3월 28일생 이바노브 그레고리라는 화가의 소개문을 한참 해독하는 동안에도 미술관 큐레이터는 나타나질 않았다.
밍크 코트를 걸쳐 놓고 자리를 비운 그녀는 어디서 뭘하고 있길래?. 고개를 갸우뚱 하며 전시관내를 나 홀로 뚜벅뚜벅했다. 계란과 어린이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 걸려 있어 동화의 나라 같았다. 부화의 교훈과 이치를 말해 주는 그림들 같았다.
한참을 관람하는데도 관람객은 나 말고 다섯명도 되질 않았고 동토의 노을은 며칠 동안 눈더미를 황금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런 적막함이 차라리 귀한 평화 같다. 서울에서의 일과에 치이는 삶에는 이런 가뭄날 칠성 사이다 같다.
이렇게 찍어뒀던 사진 덕분에 이바노브 그레고리라는 화가의 그림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조명하게 된다. 저 부화하는 계란 옆 동심이 의미심장하다. 계란은 니체의 여행론을 떠올리게 한다.
니체는 여행자를 다섯 단계로 나눴단다. ‘여행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한 자’가 가장 낮다. ‘세상에 나가서도 자신만 보는 자’가 2단계, ‘세상을 관찰해 무언가를 체험하는 자’가 3단계다. 여행이라기 보다는 마실 구경에 그치는 단계들이다. 4단계는 ‘체험한 것을 자기 삶 속에 데리고 부화시키듯 깨달음을 구하고 5단계는 ‘관찰한 것을 체험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행동으로 되살리는 자’란다.
살아서 죽음을 경험할 만큼 긴 여행처럼 산고를 견디듯 운명을 헤쳐간다면 ? 기적까지는 아니더라도 벅찬 여운으로 잘 살아날 것 같다는 각오를 계란처럼 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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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없는 승리는 오만이 되고 맙니다.
겸손 이라는 비움이 있어야 새로운 것을 담을수 있는데
자만,무모,아집,무시,오만으로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아무것도 더 담을수가 없습니다.
건안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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