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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계시록과 요한복음의 저자는 다른 사람이다
AD 1세기부터 3세기에 걸쳐 기독교가 정립 되어 가면서 복음서들과 서신들이 등장하기 시작
했다. 당시 로마안에서 번성하기 시작한 초기 기독교는 종말론적 의식이 지배했고, 영지주의
적인 사상이 크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당시 등장한 복음서들과 서신, 묵시문학들은 위명의
저자들이 이름이 잘 알려져있는 사도의 이름을 빌려 기록했다.
특히, 요한복음과 요한 계시록의 저자는 각각 다른 사람이다. 많은 학자들이 요한복음의 저자
가 요한 계시록을 기록했다는 점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우선, 요한 계시록은 너무나 많은 히
브리적 표현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문법에 있어서도 요한 복음이나 요한 서신과 그 내용이 많
이 다르다.[the new thompson annotated-chain reference bible. 1986.]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예수의 모습을 요한복음서의 저자와는 대조적으로 서술했다.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론이 하향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면 계시록의 그리스도론은 상향적
성격을 띄고 있다.
요한복음 1장은 처음부터 로고스의 선재 사상을 전제하고 그러한 사상의 바탕 위에 복음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이 세상에서 살다 죽고 부활한 자로 그리스도를 강조한다.(계시록 1장5절)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천상적 차원, 신성을 강조하는 반면(요한6,35,48-51;14,9-11),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예수의 인간적인 측면에 비중을 둔다.(계시록1,4; 충실한 증인, 죽음으로부터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 세상 통치자들의 으뜸이신 분) 또, 빛, 진리, 사랑, 평화, 새 계명, 협조자, 아버지의
외아들 등 요한복음의 주요 용어들뿐 아니라 그러한 사상들까지도 요한계시록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요한복음과 요한서신들에는 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요한계시록에는 저자가 요한임을
4번이나 언급하면서 강조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기록자는 유명한 사도 요한의 이름을 빌어
책의 권위를 높이려고 한것일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볼 때 두 책의 저자 또한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이미 초대 교회시절부터 제기되었다.
그러나,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복음서의 저자라고 알려진 것은 전승에 의한 것일뿐
복음서의 저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13장23절,19장26절,20장2절,21장7~20절)와 동일시 되는데,
요한복음에는 그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 요한복음의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제자들중에
핵심적인 세 인물중 하나였으며 베드로와 가까웠다. 공관복음서에는 그 인물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라고
나타난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에 언급된 사랑받는 제자가 아니었고, 야고보는 일찍 순교했기 때문에
이복음서의 저자는 요한만이 남는다. 그러므로 4복음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었다는 해석이 붙여져
요한복음으로 불리게 된것이다.[the new thompson annotated-chain reference bible.]
카톨릭 대사전역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복음서에 필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다만 '예수가 사랑한 제자'라고만 언급되어 있는 요한의
복음서는 고대 전승에 의하면 필자가 그리스도교 발생 1세기 말경에 소아시아의 에페소(Ephe
sus)에 있을 때 쓴 것 같다. 이 복음서는 그리스도교 입교자의 믿음을 확고히 하고 더욱 심화
하기 위하여 씌여졌다. 요한의 복음서는 유태교(Judaism)을 힐난과는 어조로 씌여 있으 며 필
자를 성 요한이라고 믿는 것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국가톨릭대사전위원회 / 가톨
릭 대사전 / 한국교회사연구소 /신약성서 항목]
요한복음의 저자인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전승에 따라 요한으로 알려져 요한복음이라고
이름 붙여 졌으나 많은 논쟁거리를 안고 있다. 유명한 신학자이며 사해 두루마리들에 대한 전
문가들 중의 하나인 윌리엄 브라운리(William Brownlee)교수에 따르면 "제4 복음서에 있는 내
적 증거를 보아....(중략)....사랑하시는 제자는 베다니의 나사로라는 결론이 나온다."라고 주장
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나사로의 부활사건을 묘사한 요한복음 11장 3절에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
다"라는 기록이 있고, 요한복음 11장 35절에서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가 눈물까지 흘리며 사랑했던 나사로, 그가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예수
의 사랑하시는 제자'일 가능성도 매우 크다.
AD 185년경 사도요한의 제자를 사칭(詐稱)한 폴리갑의 제자인 이레니우스는 자신의 저서인
'이단논박'에서 4복음서의 저자가 사도 요한이라고 주장 했었고, 요한이 트라야누스 황제(AD
98~117)까지 살았었다고 기록한 바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안디옥의 테오필루스, 오
리게네스등도 4복음서의 저자가 사도요한 이라고 주장했다.
초대교회시절부터 이런 문제가 야기되었다는 것은 요한복음의 저자가 누구인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3세기중반의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는 요한계시록과 요한복음서는 그
형식면에서뿐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적이 있다.
▶ 요한계시록 분석
AD 96년경 밧모섬으로 귀양 가게 된 요한이 환상 가운데 기록했다는 요한계시록은, 외적인
모습과 형식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일종의 편지양식을 띄고 있다.
저작년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오늘날 대부분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Domitianus, AD 90
~96년)의 통치 시대로 본다. 이 시기는 로마의 황제 숭배가 로마에서 뿐만 아니라 전 지역으
로 확대한 시점 이었다. 로마의 황제 숭배는 네로로부터 시작 했지만, 황제 숭배가 가장 강성
했던 때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시대라고 한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신격화 시킨 황제예
배를 통해 제국내의 정신계를 통솔하려 하였다. 그것은 약화된 로마제국의 질서와 통일을 황
제예배를 통해 강화하기 위해서 였다. 그래서 그는 황제숭배를 전국적으로 강요하고, 황제를
'우리의 주와 신'(Dominus et Deus noster)으로 숭배케 한 것이다.
신약성경 가운데 요한계시록 처럼 해석하기 어려운 책은 없다. 요한계시록에는 환상과 상징과
숫자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특히 4,7,12,24,666등 특별한 수가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구약의 예언서를 모르고 있다면 이런 상징들을 알수가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요한 계시록의
저자는 구약의 상징들을 모방했다.
그 동안 계시록의 예언의 배열 순서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어왔다. 하나는 연대기적으로(c
hronological) 보는 견해와, 반복적으로(recapitulative or topical) 보는 견해이다.
전자는 계시록의 계시 배열이 역사 가운데 일어날 순서대로 배열 되었다는 것이고, 후자는 저
자가 메시지 전달을 위해 한 번 나왔던 주제들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7가지의 인, 나팔, 대접재앙이 차례로 떨어지면서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인을 하나씩 뗄때 마다 다음과 같은 재앙들이 일어난다.
백마 - 적마 - 흑마 - 청황마(1/4 죽음, 온역) - 순교자(핍박) - 천체의 변화 - 그리고 7번째
인을 떼면서 나팔재앙으로 전환된다.
나팔재앙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피섞인 우박 (땅1/4) - 불붙는 큰산(바다1/3) - 떨어진 별(물1/3) - 해 달 별 어두워 짐(1/3) -
황충 - 유브라데 전쟁(1/3사망) - 그리고 7번째 나팔 재앙에서 대접재앙으로 전환된다.
대접재앙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독한 종기(땅전체) - 바다 생물 사망 (바다 전체) - 물이 피가 됨(물전체) - 해가 사람을 태움
(전체) - 고통스러운 종기와 어두움(짐승의 보좌) - 아마겟돈 전쟁(유브라데 강) - 바빌론 멸망(공기)
여기서 계시록의 재앙들이 반복점임을 알수가 있다.
그외에도 7인의 일부내용은 7나팔과 7대접을 통해 반복 되고 있으며, 신자들의 인내의 주제는
2장 10절, 3장 10절~11절, 12장 11절, 13장 10절, 14장 12절에서 계속 나타나며, 낙원에서
의 회복 주제는 7장 15~17절, 14장 1~5절, 21장 3~4절에 계속 보이고 1장 7절에서 자세하
게 설명된다. 7장 9~14절에서 제시된 교회의 승리는 12장 11~12절에서 다시 보여지고 12장
5절, 14장1절, 15장 22절, 21장 2절에 계속 나타난다.
그러나 계시록의 배열은 반복적이면서 연대기 적인 면이있다.
인 재앙의 경우 그 피해 면적은1/4인데 비해(6:8), 나팔 재앙의 경우는 1/3이며(8:7-12), 대접
재앙의 경우엔(16:1~11) 그런 표시가 없다. 이것은 인 재앙 보다는 나팔 재앙이 종말에 더 가
까우며, 나팔 재앙보다는 대접 재앙이 더 가까운 것임을 보여준다.
첫째 인에서 다섯째 인까지는 지상에서의 자연계 인간계의 재앙을 보여주나(6:1~11), 여섯째
인에서는 전체의 이상과 지구의 파멸이 나타나고 있다(6:12~17).
나팔 재앙에서는 수목과 하수와 바다와 인간이 재앙을 당하지만(8~9장), 대접 재앙에서는 그
런것들을 포함해서 재림하는 어린 양의 군대가 지상의 왕들과 싸우는 아마겟돈 전쟁이 언급
되고 있으며, 바벨론의 멸망이 나타나고 있다.(16장)
재림에 가까울수록 재림에 가까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고(19장), 재림에 멀수록 재림에 먼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4장). 구약에서도 나팔은 경고를 의미하고, 대접은 심판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의 재앙은 점진적 평행주의(progressive parallelism)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즉, 계
시록의 계시 배열은 반복적이면서도 연대기적인 하나의 나선형의 구조를 따르고 있는 것이며,
다시말해 종말을 향한 점진적이고도 반복적인 주기성(나선형 주기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기 위해서 삽경(揷景, interlude)군을 파악 해야만 한다.
삽경이란 본계시(本啓示)와 본계시의 막간에 나오는 중간계시(中間啓示)를 가르키는 것으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내용을 본계시라고 할 때 이들 범주에 들지 않으면서 이들과
전후 관계를 가진 독자적인 계시들이 여러 번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삽경에서는 앞에
나온 본계시 혹은 뒤에 나올 본계시의 어떤 사건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전체적 구조에서는 이렇게 본계시와 중간계시가 서로 번갈아 나오는 가
운데 진행 되어 간다. 예를들어, 6장에서 여섯째 인을 떼었으므로 7장에서는 이어 일곱째 인을
떼어야 하겠지만 일곱째 인은 8장에 가서 떼어지고, 6장과 8장의 중간 장인 7장에서는 일곱
인의 순서와는 관계가 없는 장면인 중간계시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7장의 삽경 즉 중간계시는 본계시와 연속되는 순서에 있어서는 관계가 없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깊은 관련성이 있다. 즉 7장은 6장 17절의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
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에 대한 해답을 주기 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동시
에 앞으로 8장에서 있을 일곱 나팔 재앙을 면할 자는 신(神)의 인맞은 자들임을 미리 알려 준
다. 이런점을 볼 때 삽경은 보충계시(補充啓示)라고도 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는 적어도 3개의 큰 삽경군이 나온다. 여섯째 인과 일곱째 인 사이(7:1-17), 여
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10:1-11:14), 일곱째 나팔과 일곱 대접의 계시 사이(12:1-14:
20)에 위치하고 있다.
그럼,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살펴보자.
5장에서 인봉된 책을 가르켜 천사가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5장 2절)고
말했으나, 아무도 그럴 자격이 없었다. 그때, 유대 지파의 사자이며 다윗의 뿌리이고 이기신
자인 어린양이 등장하여 인을 뗀다. 물론, 어린양은 예수를 말한다. 인봉한 책은 생명책을 가
르키는 것은 아니다. 인을 하나씩 떼자 재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시된 책에 대한 소개는 이미 유대 묵시문학, 특히 에스겔 2:9-3:3에서 여호와가 에
스겔에게 두루마리를 펼치라고 명령한것에서 유사성을 찾을수가 있다.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
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
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
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에스겔 2장 9절~3장3절]
특히, 에스겔에게 책을 먹게 하는 부분은 뒷부분의 장에서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모방을 했으
니 주목해서 보아야 할것이다. 6장에서 인을 떼자 재앙을 일으키는 말들이 등장하는데, 이것
은 스가랴서의 홍마, 자마, 백마, 흑마를 모방한것이다.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
마와 백마가 있기로." [스가랴 1장8절]
"첫째 병거는 홍마들이, 둘째 병거는 흑마들이,세째 병거는 백마들이, 네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
니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흑마는 북편 땅으로 나가매 백마가 그 뒤를 따르고 어룽진 말은 남편 땅으로 나
가고, 건장한 말은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고자 하니 그가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라 하매 곧 땅에 두루 다니더라.그가 외쳐 내게 일러 가로되 북방으로 나간 자들이
북방에서 내 마음을 시원케 하였느니라 하더라." [스가랴 6장 1~8절]
첫 번째 흰 말을 탄자가 등장한다. 역사적으로 특히 흰말 군대는 당시 로마제국이 제일 무서워
했 팔디아 군대를 암시하는것 같다. 그들은 활쏘기의 명수로 AD 62년에 로마에 대해 전무한
승리를 거둔바가 있었다.
그러나, 흰말을 탄자에 대해서는 해석이 극단적으로 달린다. 흰말을 탄자가 적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흰말을 탄자가 직접적으로 재앙을 불러오지는 않고
승리 한다고만 했기 때문이다. 또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에 흰말을 탄자가 다시 등장해서 악을 물리치고
1000년 왕국을 세운다. 어쨋든 흰말을 탄자에 대해서는 확실히 판단하기 힘들다.
이어서 등장하는 검은 말의 검은색은 기근(렘14:2)의 상징이다. 저울은 든 것은 흉년때의 표식
으로 배급을 주기 위해 무게를 다는 광경이다.(에스겔 4장 10~11절, 레위기 26장 26절 참조)
당시 1데나리온으로 평상시엔 밀 1말을 그리고 보리는 3말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기
근으로 평균 물가가 엄청나게 인플레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말라"(6절)는 말에서 보듯이 기근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호화사치를 하는 자가 있음을 나타내준다. 아마도 극심한 빈부의 격차를 말해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네 번째 청황색 말의 청황색은 시체의 색깔로서 질병과 죽음을 상징한다.
이 재앙으로 인류의 4분의 1을 죽을 것을 가르킨다. 특히 사망은 온역이란 뜻도 된다.(계2:23,
눅21:10-11).
크래프트(H. Kraft)의 국제성서주석(1983 p.191)에서는 첫째 말 탄자는 사자궁, 둘째 말탄 자
는 처녀궁을 상징하며, 저울궁이 저울과 일치하며 전갈궁이 죽음과 역병을 지배한다는 해석을
내리기도 했다.
다섯째 인을떼자 순교자들의 호소가 현세의 심판과 복수를 재촉한다.
여섯째 인을떼자 천지의 변동과 지진이 나타난다.
7장에는 구원받을 신자의 수가 144000명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12×12,000이다.
계시록에서는 각 지파에서 12000명씩 신의 인을 친다고 했는데, 12는 점성학의 12궁도(하늘
의 완전수), 뒤의 12,000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수인 12에 1000(땅의 완전수인 10의 세 제
곱)을 곱한 수이다. 유대인은 무한하고 끝이 없는 수를 표현할 때 10을 곱하는 것으로 나타 내
곤했다. 마태복음 18장 21절 이하에서 70×7, 10,000 달란트, 100등의 비유적인 숫자가 나타
난다. 따라서 이 숫자는 수비학에 기초한 상징일뿐이지 직접적인 숫자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이 사건이 지나간 후에 7번째 인을 떼자 재앙은 나팔재앙으로 바뀐다.
나팔을 분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경고의 의미이다. 스바냐 1장 15~16절에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나팔로써 경고를 내
린다. 나팔의 또 하나의 의미는 여호와가 올것이라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출애굽기 19장 16~
19절에서 시내산에 여호와가 임재할때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또, 구약 성경에 보면 백성들
이 모이고, 행진하고, 전쟁을 알리고, 절기를 표시하기 위하여 은(銀)나팔 또는 양각(羊角)나
팔을 사용했다. [민10:3~10, 수6:1~20]
필자는 나팔의 세가지 의미중 스바냐의 경고의 나팔이 가장 합당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계시
록의 저자는 구약의 묵시문학에서 상징들을 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나팔을 불자, 하늘에서 별이 떨어져 무저갱의 열고 메뚜기떼(황충)가 나오게 된다.
하늘에서 떨어진 별은 무엇인가? 정통적인 성경주석으로는 이 별은 '계명성'을 언급하는 것이
라고 해석하고 있으나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의 다른 구절에서
는 계명성을 긍정적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장 28절, 요한계시록 22장 16
절) 따라서 이 별이 계명성이라면 요한 계시록의 저자가 여러명이라는 결론을 내릴수도 있다.
다섯번째 나팔을 불자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은 확실히 규정짓기 어렵다.
어쨋든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무저갱의 문을 열자 황충이 쏟아져 나온다.
황충은 메뚜기떼를 말한다. '개역한글'에서는 황충이지만,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판'은 메뚜
기로 번역 되어있다. 닥치는대로 곡식을 먹어 치우는 메뚜기떼는 구약에서 재앙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특히 요엘1장과 2장에는 메뚜기떼가 여호와의 재앙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사이비
종말론자중에는 메뚜기떼가 헬리콥터나 현대적인 병기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해석이다. 메뚜기떼는 이마에 신의 인맞지 않은 사람들만 해를 입히도록 명령 받았
는데, 그것도 죽이는 것이 아니라 5달 동안 괴롭히기만 하는 능력만을 가졌다고 한다. 한마디
로 현대적인 병기와는 거리가 멀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유프라테스강에 매여 있는 4천사를 풀어 놓으라는 명령이 떨어지
며, 2억명의 기마병(마병대)들이 불과 연기를 뿜는 말을 타고 전쟁을 치른다. 이들 네 천사는
7장에 등장하는 바람을 붙잡고 있었던 4천사임이 분명하다. 특히 이 부분의 2억명이라는 숫자
에 대해서 말이 많았다. 세계 1, 2차 대전때에 참가한 모든 병력도 수천만명 정도인데, 2억명
가량의 군대라는 숫자는 실로 엄청난 숫자이다.
계시록의 대부분의 숫자들은 구약을 통해서 그 상징을 알수가 있는데, 여기 등장하는 2억이라는 숫자만큼은
이렇다할 해석이 없다. 따라서, 이 구절에 등장하는 2억명이라는 숫자에 집착한 나머지, 사이비 종말론자들은
중국의 군사력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2억명의 기마병에 대해서 70년대에 조용기 목사, 할 린드세이
(Hal Lindsey)등은 중공(중국공산당)의 군대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2억명 가량의 군사를 가지고 있는 국가는 중국을 제외하고는 생각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알아 두어야 할것이 있다. 오늘날 현대전에 있어서 보병, 탱크, 포등은 그 가치
가 거의 상실되었다.(군대 다녀온 사람이라면 알고있을 것이다) 현대전에서 가장 큰 효력을 갖
는 것은 미사일과 비행기이다. 현대전은 1, 2차 대전과는 달리 그 다지 큰 인력이 들어가지 않
는다. 전투기 1대가 1개의 보병사단을 능가하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을을 숙지하라. 앞으로 세
계3차 대전이 일어 난다면, 엄청난 숫자의 군인들이 떼거리로 모여 전투를 치르는 것이 아니
라, 첨단병기들이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할 것임을 알아 두어야 한다. 따라서 계시록에 등장하는
숫자들에 집착한 나머지, 숫자놀음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10장에서는 천사가 요한에게 작은책을 주면서 먹으라고 했고, 그을 먹자 입에서는 꿀과 같이
달았지만 배에서는 썻다고 한다. 이것과 똑같은 내용이 에스겔서 2장8절 ~3장3절에도 있다.
12장에는 12개의 별이 달린 면류관을 쓴 여자가 모든 국가를 다스릴 자를 낳는다. 그녀는 광
야에서 1260일동안 지냈고(1260의 의미는 위의 다니엘서 분석에서 언급했다) 7개의 머리와
열 개의 뿔이달린 용이 그 여자가 낳을 아이를 죽이려고 했으나 천사 미카엘의 도움으로 용(사
탄)은 추방되었다. 그녀는 광야에서 독수리의 도움으로 한때와 두때, 반때를 숨어지낸다.(한때
,두때,반때의 의미도 위의 다니엘서에서 언급했음)
그녀가 낳는 아이는 예수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과거의 사건이었다. 그녀가 쓰고 있는 12별의 면류관은 다분히 점성학적인 냄새가 풍
긴다.(예수의 12제자나 구약의 12지파도 점성학적에 기인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13장에는
짐승이 나온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요한계시록 13장 1~2절]
여기 등장하는 짐승은 다니엘서를 언급한 글을 먼저 읽으신 분이라면 짚이시는 것이 있을것이
다. 즉, 앞서 언급한 다니엘서 7장의 꿈 속에서 다니엘은 사자, 곰, 표범 그리고 열 뿔을 가진
짐승을 보았는데, 이 각각의 네 짐승이 요한 계시록에서는 첫 번째 짐승 하나로 합쳐져서 묘사
가 되고 있는것이다.
묵시문학에 등장하는 이러한 짐승들은 당시 통치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자는 바빌론을, 곰
은 메데파사를, 표범은 그리스를, 열 개의 뿔을 가진 동물은 시리아(수리아)를 상징한다. 그런
데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열 개의 뿔을 가진 짐승은 다니엘서의 모든 짐승이 하나로 합쳐진
모습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이 짐승은 이 모든 지역을 전부 통합한 로마 제국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일곱 머리는 제국들을 상징한다. 일곱 머리는 바벨론 제국, 메데 파사 제국, 헬라 제국,
그리고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데, 헬라 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한 이후 네 개의 왕국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들은 마게돈, 소아시아, 셀루키드 제국, 그리고 이집트이다. 따라서 이들
모두를 합한 머리가 일곱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짐승을 오늘날의 강대국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사이비 종말론자들이나 할짓이다. 요
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상징들은 전부 구약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구약을 무시하고, 요한계시록
의 상징들을 오늘날의 강대국에 대입시키는 자가 있다면, 그가 구약이나 제대로 읽었는지 의
심해 보라.
로마로 해석되는 짐승이 나타난 후에 두 번째 짐승이 나타난다. 두 번째 짐승은 기적과 이변을
행하며 첫 번째 짐승을 우상숭배하게 만든다. 짐승의 우상에 경배하지 않는자는 죽여버리고
사람들에게 이마나 오른손에 짐승의 인을 받게 한다. 짐승의 인을 받지않은 자는 매매(賣買)를
금지시켰는데 인을받은 사람의 숫자는 666명이라고 한다. 이 부분이 수많은 문제를 야기시켰
던 문제의 구절이다.
짐승의표 666을 오른손이나 이마에 받지 못하면 매매를 금지시킨다는 계시록의 내용을 토대
로 '세계정부와 666', '컴퓨터와 짐승의 표 666'같은 책들이 나와 세간의 화제가 된적이 있다.
그런 책의 내용을 받아들인 극단적 사이비 종말론자들은 666표가 신용카드를 대신해 인간의
몸에 바코드를 새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웃지못할 비화도 있다.
우선, 첫째로 두 번째 짐승이 사람들을 미혹하여 첫 번째 짐승을 우상숭배하게 만든다는 것은
당시 전국적으로 강제된 황제 숭배를 암시한다. 쥴리어스 시져,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
베스파시아누스, 그리고 디도가 사후 로마 상원에 의해서 신으로 선포되었으며,요한계시록이
등장할 당시에 황제숭배가 가장 극심했다.
그리스의 주화(Coin) 드라쿠마(Drachma)에는 그리스 신화의 신, 성조 올빼미, 지배자 모습,
곡식의 이삭 등을 새겨 넣었으나, 로마의 주화에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이래 황제마다 '신
성한'(DIVUS)이라는 찬양 문구와 함께 자신의 초상을 주화에 새겨 넣었다. 또한 로마에서는
매매계약 때 요즈음의 인지 같은 인장(황제의 인)을 찍었다. 짐승의 표(황제숭배)를 받지 못한
자가 매매를 못하게 된다는 것은 이것을 가르키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666이라는 숫자는 무엇을 암시하는가?
가장 많이 알려진 해석법은 게마트리아(gematria)라는 수비학(numerology)적 계산법이다.
당시에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등의 알파벳은 각각 고유한 수(數)로 표시 되었는데, 여기에
서 단어의 알파벳을 수치로 환산하는 궤변론이 유행했다.
게마트리아방식에 의해 많이 지적되는 것은 로마의 폭군 네로의 이름이 666과 관련있다는 주
장이다. 네로 황제(Neron Caesar)를 히브리어로 쓰면 네론 카사르(NRON KRS)가 되는데, 숫
자를 계산해보면 N(50)+R(200)+0(6)+N(50)+K(100)+R(200)+S(60)=666이 된다. 그러나 헬
라어로 기록된 성경을 왜 하필이면 이 대목에서만 히브리어로 해석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또 다른 주장은 로마를 가르키는 라테이노스(lateinos)의 헬라어 숫자라는 것으로 즉 L(30)+A
(1)+T(300)+E(5)+I(10)+N(20)+O(70)+S(200)=666이 된다. 그러나 신약의 아무 곳에서도 로
마를 라틴이라고 부른 곳이 없다. 이외에도 수많은 숫자 풀이들이 있으나 그 어느 것도 만족한
해답이 못된다.
또 한가지 해석은 6이라는 숫자의 불완전성, 부족성이다.
성경전반에서 7이라는 숫자는 가장크게 자리잡고 있다. 창세기의 천지창조도 7일에 행해졌으
며, 예수도 7의 70번이나 용서하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계시록 6장 15절에서는 일곱가지 계층
의 인간들을 나열하고 있는데(임금, 왕족, 장군, 부자, 강한 자, 종, 자주자) 일곱은 만수로서,
이는 인간 사회의 모든 조직을 뜻한다.
또, 구약에서 6에 관련된 다음과 같은 예가 있다. 즉, 골리앗은 6척 장신이며(삼상 17:4), 느브
갓네살이 세운 동상은 고가 60규빗이고(단 3:1), 어떤 거인은 6손가락에 6발가락이 있었다(삼
하 21:20) 등이다. 따라서 완전수7에서 무엇인가가 부족한 6으로 짐승의 세력을 표현하려고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는 해석도 있다.
또 한가지의 해석으로는 수비학의 창시자라고 볼수 있는 피타고라스(Pythagoras)의 해석법이
다. 피타고라스의 주장에 따르면 3과 7은 첫번째 소수이며 1과 자신의 수를 제외하고는 어떤
인수도 포함하지 않는 수라고 하면서 3과 7을 신비적 숫자로 해석했다. 3과 7이 합혀진 숫자
로는 37과 73이 있는데 이 두 숫자는 각각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한다.
37을 3의 배수로 곱했을 때 얻어지는 숫자들은 다음과 같다.
37×3=111 , 37×6=222 ,37×9=333 , 37×12=444 , 37×15=555 , 37×18=666 , 37×21
=777 , 37×24=888
73을 역시 3의 배수로 곱했을 경우의 값들은 다음과 같다.
73×3=219 , 73×6=438 , 73×9=657 , 73×12=876 , 73×15=1,095 , 73×18=1,314 , 7
3×21=1,533 , 73×24=1,752
위의 나타난 값들을 보면, 1자릿수의 숫자가 9, 8, 7, 6 ...2로 줄어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예수의 이름이 888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헬라어 예수(Iesous)를 게마트리아로 환산하면 I(10)+E(8)+S(200)+O(70)+U(400)+S(200)=8
88이 된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예수의 이름이 8을 세 번 십진법으로 증폭하고 있다. 이와 같은
증폭을 '세 번 위대한'이라는 뜻의 트리스메기스토스(trismegistos)라 칭한다고 한다. [조철수
/ 유대교와 예수/ 도서출판 길, 2002 / P.345~346]
초기교회 교부들은 주일(안식일)을 '제8일째 날'이라고 불렀던 것도 무시할수 없을 것이다.
[Justin / Dialogue with Trypho, 41:4.]
예수의 이름이 888이라면 요한계시록의 666도 이것과 관련 있으리라고 보여진다. 예수보다
뭔가 부족한 짐승의 숫자로 666을 선택했던것이 아닐까? (7은 성스러운 숫자이기 때문에 짐
승의 숫자로 777을 사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참고삼아 666이라는 게마트리아 때문에 얽힌 여러가지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미가엘 스티펠(Michael Stifel)이라는 대수학과 정수론에 달통한 독일인 수사가 교황 레오 10
세의 이름에 게마트리아를 적용해 보았다고 한다. 레오 10세의 라틴어는 LEO DECIMVS인데,
여기에 포함된 로마 숫자는 L, D, C, I, M, V 이다.
이 로마 숫자들의 합을 계산해 보면 L(50) + D(500) + C(100) + I(1) + M(1000) + V(5) + X(1
0) = 1666 이었다. 그는 1000을 나타내는 M은 신비(mystery, 라틴어 mysterium)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M을 제거하였더니 정확히 666이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된 교황옹호자들은 스티펠(Stifel)을 죽이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1522
년에 루터에게 피신한뒤 그후로 16세기 독일의 유명한 대수학자가 되었다.
같은 시기에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에게도 666의 낙인을 찍은 사람이 있었다. 700쪽이나 되는
수의 신비(Numerorum Mysterium)라는 책으로 유명한 피터 버거스(Peter Bungus)는 루터의
라틴어 이름인 MARTIN LUTERA를 666으로 해석했다고 한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A부터 I(또
는 J)까지는 1부터 9, K부터 S까지는 10부터 90, T부터 Z까지는 100부터 700의 값을 주고 난
후에 루터 이름의 숫자값을 구하면, M(30) + A(1) + R(80) + T(100) + I(9) + N(40) + L(20)
+ U(200) + T(100)+ E(5) + R(80) + A(1) = 666이 되었다고 한다. 졸지에 마틴 루터가 666이
되버린 어처구니 없는 이런 일화들에 대해 '666 적그리스도'라는 기독교 서적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적 그리스도는 다니엘이 예언한 '작은 뿔'의 여
덟 가지 특성들이 다 발견되어야 하는데, 루터에게는 그와 같은 특징들이 전혀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이름의 수치가 666이 산출된다고 해서 누구든지 적그리스도로 간주될 수는 없
는 것이다." [유석근 / 666 적그리스도 / (주)임마누엘, 1992 / P.139]
666에 얽힌 더 황당한 일이 있다. 성경을 뜻하는 영어 HOLY BIBLE을 컴퓨터 ASCII Code 로
번역하면 H(72)+O(79)+L(76)+Y(89)+B(66)+I(73)+B(66)+L(76)+E(69)=666라고 번역된다고
한다. 성경이 666이 된다니 이 글을 읽는 기독교인들은 얼마나 황당해 할까?
예수의 이름이 888이고 요한 계시록에 666이 나온다는 점을 봐서 우리는 기독교를 창시했던
사람들과 초대교인들이 이런 궤변론(詭辯論)에 빠져있던 사람이었음을 부인할수 없다. 수비학은
궤변론일수 밖에 없다. 기독교인들은 성경(HOLY BIBLE)이나 마틴 루터가 666이라는것을
인정할수 있겠는가?
필자가 666에 관해 찾아보니 MS-DOS 6.21이나 컴퓨터의 대부 빌게이츠도 666이 된다는 황당한 내용들도
찾을수 있었다. 더 황당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쓰이는 500원,100원,50원,10원,5원,1원짜리 동전도 666이
된다고 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태생 부터가 이런 황당한 궤변에서 발생 되었음을 되짚어 보지 않을수
없다.
짐승에 대한 이야기가 지나가고, 7번째 나팔재앙은 다시 대접재앙으로 전환된다.
1번째 대접을 쏟자, 짐승에게 경배한자들에게 종기가 생긴다.
2번째 대접을 쏟자, 바닷물이 핏물로 바뀌고 바다 생물이 죽는다. 이 부분을 오늘날의 적조현
상(赤潮 :red tide)으로 해석하는 기독교인들도 있는데, 이것은 계시록의 내용을 어떻게든 오
늘날에 대입시키려고 하는 미련한 자들의 해석법이다.
이어지는 3번째 대접재앙에서는 강과 냇물이 핏물이 되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적조현상은 주로 바다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4번째 대접을 쏟자, 태양에서 불이나와 사람을 태워죽인다.
5번째 대접이 짐승의 왕좌에 떨어지자 짐승의 국가는 어두워졌다.
6번째 대접을 유브라데강에 쏟아붓자 아마겟돈 전쟁이 발발한다.
아마겟돈(Armageddon)이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하르마게돈(Harmagedon)이다. 하르마게돈
은 히브리어의 므깃도산(Har megiddo)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으로 하르(Har)는 히브리어로
산(山)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므깃도는 갈멜산 북편 에스드렐리온(보통 이스르엘이라 함) 평야에 위치한 고대의 도시로, 이
곳은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대륙과 동쪽으로는 아시아 대륙 그리고 북쪽으로는 유럽으로 연결
되는 지리적 요건(사실 가나안 지역 전체가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 므깃도는 당시 이 세 지역
을 연결짓는 다메섹의 길목을 지키고 있는 요새였다)을 충족시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러기에 역사적으로 이 곳에서는 수많은 유명한 전쟁이 치루어 졌는데, 바락과 드보라가 시
스라를 격멸한 곳이었고(삿5:19-21), 예후가 아하시야를 죽이고 혁명에 성공한 장소가 이곳
이다.(왕하9:27) 그리고 요시아 왕이 이집트의 바로느고와 대결하다가 전사한 곳도 이곳이며
,(왕하23:29,30) 에스겔은 종말에 곡과 마곡이 여호와의 백성과 싸울 곳도 이곳 이스라엘의
산이라 고 했다.(겔38:8, 39:2,4,17)
특히,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구약의 묵시문학의 상징들을 사용했다는 것으로 볼 때 에스겔서의
모티브를 따온것이라 할수 있다. 기독교인들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진짜로 아마겟돈이라는 곳에서
세계 대전쟁이 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처참한 격전지를 상징하는것이라고 해석한다.
6번째 대접재앙은 6번째 나팔에서의 경우에서 처럼 유브라데강(Euphrates)이 등장한다.
6번째 나팔재앙에서는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자 2억명의 마병대가 사람의
삼분의 일을 죽였다고 언급했다.
유브라데 강은 로마제국의 동쪽 국경지대의 강으로서 그 강 건너편엔 유브라데에서 인더스 강
까지의 전지역을 정복한 활쏘기로 유명한 팔디아인들이 있었다. 따라서, 유브라데 강물이 마
른다는 것은 로마제국의 방위선이 무너짐을 상징하는 것이고, 동방에서 오는 왕들이란 그 당
시 로마인들이 두려워하고 있던 팔디아 왕들을 연상 시킨다.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기독교를
박해한 로마제국의 멸망을 언급한 것이다.(그러나 로마는 멸망하지 않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다)
아마겟돈에 왕들이 모인후, 7곱번째 대접이 쏟아지면서 지진, 우박, 천둥같은 재앙이 닥친다.
17장에는 짐승을 타고 있는 큰음녀가 등장한다.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
라 하였더라." [요한계시록 17장 5절]
이마에 이름이 써있다는 구절은 로마의 창녀들이 이마의 머리띠 위에 자기 이름을 기록하는
풍속에서 가져온 표현이다.
이 음녀는 큰 바빌론이라고 하는데, 다시말해서 이 여자는 어떤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다.
"또 네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7장 18절]
마지막 구절에서도 음녀가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성이라고 했다. 어디를 가르키는 것일
까? 바로 사치와 향락으로 타락한 로마이다. 그리고 그녀를 어미라고 함은 당시 로마가 세계
의 모도(母都, metropolis)였음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이비 종말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이 여자를 현대적인 강대국으로 대입시키는 것은 미련한 해
석법이다. 음녀는 금으로 된 술잔에 기독교인의 피와, 예수를 증거한 자들의 피를 마시고 취해
있다(6절)고 한다. 이는 기독교인의 박해와 순교를 말하는 것인데 역시 음녀는 로마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강대국중에 기독교를 핍박하는 국가가 어디있단 말인가?
아니, 그럴만한 나라가 얼마전까지 있었다. 종교를 마약으로 규정지은 공산주의 강국, 다시말해 구소련이다.
강대국이면서, 종교를 탄압했던 소련이 계시록의 큰 바빌론이라고 주장했던 자들이 냉전시대에 있었다.
그러나 계시록의 큰 바빌론은 사치와 향락,음행을 저지르는 국가다. 계시록 18장 11~15절까
지는 그녀가 망하자, 그녀 덕분에 부자가 되었던 자들이 금, 은, 보석, 감람유, 향료, 몰약, 포
도주, 계피, 비단, 노예 등등등의 호화사치품을 사줄 사람이 없어지게 되자 애통해하며 슬피우
는 장면이 나온다.
구소련을 비롯한 대부분의 공산국가에서는 극소수의 사람만을 제외하고 궁핍한 물자난을 겪
었다. 공산주의가 붕괴하자 호화사치품을 소비할 국가가 사라졌다고 슬퍼한 사람이 과연 있었
는가? 오히려 중국이 대외개방을 하자 그곳에 시장을 새로 개척하겠다는 사람들만 늘지 않았는가?
큰 음녀를 비롯한 계시록속의 상징들이 공산주의라고 주장했던 자들은 지금 공산주의가 붕괴되자 침묵을
지키고 있다.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다"(2절)는 것은, 로마의 영향으로 인해 로마의 광범위한
통치 지역 전체가 황제숭배 및 우상숭배에 빠졌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전 지역적으로 황제숭배가 확대된
것은 도미시안 때에서 였다. 요한계시록의 저작년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오늘날 대부분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AD 81~96)의 통치 시대 로 본다.
그리고 큰 바빌론은 멸망하고 19장에서 흰 말을 탄자(예수로 추정)가 다시 등장한다.
계시록 20장에서 사탄은 천년동안 무저갱에 투옥되고 첫번째로 부활한 순교자들이 왕으로써
1000년동안 세상을 다스린다. 그리고 1000년후에 사탄이 무저갱에서 나와 최후의 전쟁이 벌
어져 사탄은 패한다. 이어서 죽은자들이 부활해서 최후의 심판이 벌어진다. 그리고 선택된 자
들은 새하늘과 새땅에서 살게된다. 문제는 예수가 재림한 후에 묘사되는 1000년왕국이다.
여기 등장하는 1000년 왕국을 두고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등이 제시되었다.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은 1000년왕국 후에 예수의 재림이 있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내용 대로라면 후천년설은 비성경적이다. 19장에서 흰 말을 탄자가 천국
의 군대를 지휘해서 짐승과 우상숭배자들을 격파한다. 문맥상 이 자가 예수일수 밖에 없다.
이후 1000년왕국의 건설, 최후의 심판, 새하늘과 새땅이 건설되어 부활한 자들이 낙원에 이르기까지
예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후, 요한계시록이 끝나는 마지막 부분에 천국에서 예수가 한마디 하는 것이
고작이다. 따라서 1000년 왕국전에 예수가 부활하는것이 요한계시록의 내용에 맞다.
무천년설(amillennialism)은 문자적인 1000년기를 부정하는 것으로 1000년 왕국을 상징적인
의미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 역시 문제가 있다. 1000년왕국에는 사탄이 무저갱속에
갇혔다고 하는데 그것을 현재의 시대에서 어떻게 인정할 수 있느냐는 점이 문제가 된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서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라
고 말하며 사탄이 무저갱에 갇혀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전천년설(premillennialism)은 예수가 재림한 후에 1000년왕국이 이루어 진다는 견해로, 계시
록의 1000년을 문자적인 1000년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전천년설은 예수가 어떻게 재림하
느냐에 따라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역사적 전천년설로 나뉘어진다.
초대교회는 이 전천년설을 정통 교리로 받아들였으며, 특히 초대교회의 교부인 저스틴과 이레
니우스등이 지지했다.
그렇다면 어떤 천년설이 맞을가?
교회사의 흐름을 살펴보면 AD 3세기까지 전천년설이 우세했다. 그러다가 기독교가 로마의 국
교가 되면서 후천년설로 바뀌게 된다. 다시 세계대전이 발발할 즈음 전천년설이 제기 되었다
가, 무천년설이 등장하게 되었다. 즉, 교회가 핍박받던 시대에는 주로 전천년설이 우세하고,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는 듯한 상황(Post-Constantine Era)에서는 후천년설이 우세해 졌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후천년설은 요한계시록의 내용과 다르다. 그런데 어째서 비성경적인 후천년설
이 대두 되었을까? 답은 아주 간단하다. 중세시대 기독교(카톨릭)가 유럽을 오랫동안 지배하
게 되었으나 그 기간을 전후로 해서 예수는 재림하지 않았다.
요한계시록에 따른다면 짐승이 신자들을 핍박한다고 예언 되어 있는데 현실은 그것과는 딴판으로 흘러가고
있었다는 말이다. 신자들의 핍박은 커녕 기독교가 유럽을 지배하는 아이러니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계시록에
따른다면 교회가 세상을 지배한 중세시대가 분명히 1000년 왕국 일텐데 예수는 오지 않았다!
따라서 계시록의 내용을 완전 무시하고 후천년설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다시 전천년설이 우세해졌다가 이제는 무천년설이 우세해
지게 된다. 무천년설은 1000년왕국을 문자적인 의미가 아닌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이제 기독교인들도 무의식 적으로 계시록의 내용을 거부하고 있음
을 알수 있다. 교회가 세상(유럽)을 지배했던 시기도 지나가고 예수가 온지 2000년이나 지났
는데도 아무런 조짐도 없자 기독교인 스스로가 무의식적으로 계시록을 무시하고 있는셈이다.
여기까지 필자가 요한계시록을 대략적으로 해석해 보았다.
"요한 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일을 예언한 것인데 왜 로마를 들먹이는가?"라고 강하게 항의하
실지 모르겠지만, 모순적인 기독교계의 입장보다 필자의 해석이 더 합리적이다. 학계에서는
요한계시록을 황제숭배가 극심했던 로마시대의 문서이며,그 시대를 반영한다고 정의 내리고
있다. 신학자들은 요한 계시록 속의 상징적인 표현들이 구약의 것을 사용한것이고, 모든 상징
들이 로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 모든걸 인정하면서도, 즉 요한계시록은 로마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면서, 동시에 훨씬 미래에
일어날 것을 예언한것이라는 모순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계시록의 예언처럼 로마가 멸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계시록의 예언이 로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정설화 시키면, 그 이후의 세계에
살고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은 부활한 신자들과 예수가 세계를 통치하는 1000년왕국에 살고 있
는것이라는 모순이 드러나 버린다. 교계의 그런 애매모호한 입장표명 때문에, 고삐풀린 망아지 같은
사이비 종말론자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이다.
계시록의 예언을 오늘날의 시점에 맞춰버리면 사이비 종말론이 된다.(666 바코드,공산주의 등
등) 그렇다고 해서 요한 계시록의 상징을 현실에 적용 못하도록 결론을 내리면, 요한 계시록은
그 존재 의미가 없어지게 되며, 성경의 권위를 실추 시켜버리게 된다. 요한계시록은 그 자체가
기독교의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묵시문학은 아무것도 예언하지 못했다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유대사회에 희미하게 영향을 끼쳤던 시기에 제작된 구약에서의 여호
와의 심판은 인류의 종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구약의 스바냐, 나훔, 하박국, 예레미야, 에스겔
의 예언자들이 말한 다가올 심판은 불충한 유대 백성들에 대한 경고일 뿐이다.
그들은 다가올 '심판'을 예고했다.(습 1:14-16, 3:9-20) 이전에는 항상 구원과 축복의 날로 기대되었던
'여호와의 날'이 아모스 이후로 불충실한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의 날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심판은 이방인들의 침입이나 유형의 형태였다. 심판 후에는 회개하여 충성을 끝까지 지킨 '이스
라엘의 남은 자'를 위한 새로운 구원이 주어진다고 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받게 한 자를
모아.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
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 하셨나니." [미가 4장 6~7절]
위의 '개역한글판'의 뜻이 애매모호해서 '공동번역판'의 동구절을 올린다.
"그 날이 오면, 나는 절름발이들을 모아 오리라. 야훼의 말씀이다. 흩어졌던 것들을 모아 들이
리라. 적지않이 고생을 시켰지만, 그 절름발이들, 비틀거리는 것들을 씨앗으로 남겨 강대국을
만들리라. 이제부터 영원토록 이 야훼가 시온산에서 다스리리라." [미가 4장 6~7절 / 공동번역판]
유대민족을 여호와가 강대국(강한나라)으로 만들겠다는 이 말은 요한 계시록에서 말하는 세계
종말과 거리가 멀다. 스가랴 14장의 종말 역시 보편적인 종말관과는 달랐다.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이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 살이 썩으
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속에서 썩을 것이요.....(중략)......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
이라. 천하 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 오지 아니하는 자에게
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 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
게 내리실 것이라.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
을 벌이 이러하니라." [스가랴 14장 12~19절]
역시 여기에서도 유대민족을 핍박하는 자들을 여호와가 직접 심판하고 이스라엘 이라는 국가
가 존귀해 진다는 내용이다. 이집트를 비롯해서 외국인 들에게 유대율법을 지키게 만든다는
것은 그만큼 유대국가를 강성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신자를 영원한 지옥에 떨어뜨려 고통을 준다는 요한계시록의 예언과는 차이가 난다.
또한 이런 구약의 예언에는 메시아 적인 존재는 등장하지 않는다. 여호와가 직접 심판을 내리
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사야서에 이르러서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인 매우 강해지기 시작했
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유대인 대 이방인'이란 도식(圖式)도 조로아스터교의 보편적
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차츰 '의인과 죄인'의 구조로 약간 바뀌어지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메시아적 존재는 나타나지 않는다. 여호와가 직접 심판을 내린다.
그러던 것이 신구약의 중간기에 들어서는 인류종말, 구세주 도래, 부활등의 영향이 뚜렷하게
등장한다. 문제는 오늘날의 기독교가 신구약의 중간기에 해당되는 문서를 외경으로 버렸기 때
문에 종교가 진화해 가는 모습을 느낄수 없는것이다.
지금, 현재에도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혹세무민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경의 무오성과,
종말론에 심취하게 되는 광신자가 찾게 되는 책이 묵시문학이다. 난해한 상징들로 가득찬 묵
시문학을 함부로 해석해서, 오늘날의 현실에 적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필자는 묵시문학에 대해, 영적인 능력이 없는 평범한 자들이 사람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위조
한 해로운 문서라고 생각한다. 구약이 예언서들이 그렇다. 유명한 옛 선지자의 이름을 가장하
여 지나간 사건을 미래의 예언인 것 처럼 써내려 갔다. 그런 예언서들이 유대교의 경전으로 인
정받기 시작하자, 그 이후의 사건들에 대해선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전혀 예언하지 못했다.
신약의 요한계시록은 조금 특별하다.
지나간 사건을 예언인것 처럼 위조했던 구약의 예언서들과 달리, 요한계시록은 앞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글로써 남겨 놓았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은 정말로 미래를 예언했는가?
만일 필자에게 미래에 대한 환상이 보여진다면 어떻게 기록을 했을까? 아마도 미래의 사람들
은 금속으로 된 말을 타고 다니고(오토바이), 금속으로 된 새를 타고 날아 다니고(비행기), 말
이 끌지 않아도 자동으로 굴러다니는 수레를 타고 다니고(자동차), 달에 가서 깃발을 꼽고, 멀
리 떨어져서도 작은 상자를 통해 이야기를 할수 있다(전화기)고 예언 했을 것이다. 노스트라다
무스의 예언을 보면 그런 예언들이 등장한다. 물론,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조작시비가 있
기는 하지만 말이다.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아무리 상징적이라고는 하지만 오늘날 과학문명의 발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미래의 역사 전개에 대한 예언도 없다. 붉은말을 탄 사람이 전쟁을 일으키고, 검은
말을 탄 사람이 기근을 불러온다는 둥의 뜬구름잡는 예언일 뿐이다. 전쟁과 기근은 어느 시기에나 있었다.
이런 예언은 어느 시기의 누구든지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속의 상징 역시 해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구약의 예언서들을 알고 있
는 사람이라면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알수가 있다. 요한계시록 속의 상징은 구약의 예언서 속
의 상징들의 총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상징의 정체를 파헤치고 보면 별다른 내용도 없다.
지금도 묵시문학의 내용을 멋대로 해석하여 혹세무민하는 자들이 쉬지않고 등장한다. 다미 선
교회의 1992년 종말론 파동은 우리에게 악몽과도 같다. 그러나 그런자 들을 키워낸 것은 기독
교이다. 헛되기 그지없는 묵시문학을 정경에 포함시키고, 성경의 무오성을 신자들에게 쇄뇌
시켰으며, 요한 계시록에 대해 이중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 이다.
전쟁과 기근, 자연재해, 경제공황등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때문에 중세시대부터 종말을 주
장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존재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000년 왕국 때문에, 예수가 이땅에
온지 1000경이 된, AD 999년에는 유럽각지에서 군중들이 떼지어 몰려다니며 탐관오리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AD 1000년이 되도록 종말이 오지않자,
다시 예수부활후 1000년으로 종말이 수정되었고 예루살렘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1033년이
되어도 종말이 오지않자 종말은 1186년으로 수정 되었으며 켄터베리 대주교는 종말에 대비해
영국전역에 3일금식령을 내리기도 했다.
1254년에는 프레드릭 황제가 인노선트 4세 교황의 라틴 이름의 합이 666임을 들어 그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적 그리스도 임을 주장 하기도 했다. 신교와 구교가 분리 되서 싸우고 있을
때에는 같은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666이라며 비방했다.
기독교가 자리잡았던 유럽의 역사속에서 종말을 주장했던 자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수도
없이 많았다. 주로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을 그 당시의 현실에 적응 시키거나, 전쟁이나 전염병,
자연재해등이 닥쳐 살기가 힘들어지면 종말론이 고개들 들고 일어섰다.
종말론자들은 항상 묵시문학을 그 시대에 반영 하려고 한다. 예를들어 조용기 목사는 그의 저
서 요한계시록강해(1976) P.152~154에서 계시록 6장의 붉은말이 공산주의라고 주장한적이
있었다. 책이 출판된 시기는 70년대 냉전의 시기, 그러나 공산주의는 현재 몰락했다.
요한계시록의 하늘에서 떨어진 별은 상징적 해석으로 사탄의 재림으로 해석한다.(이것이 정통
적인 분석이다) 그런데, 전염병이 돌때는 전염병이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라고 주장한다. 혜성이
지구 근처를 지나갈때는 혜성이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라고 주장한다.(중세에는 혜성이 지
나가면 흉년이 온다는 속설이 있었다.) 과학문명이 발전한 오늘날에는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핵폭탄을 의미 한다고 주장한다. 그야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아닌가?
요한계시록을 현재에 대입시키는 종말론자들은 계시록의 나오는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재앙을
로마를 멸망시킨 야만족이나 이슬람교의 세력증강으로 해석한 적도 있었으며, 천사가 요한에
게 준 작은 책을 루터나 칼빈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건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개신교 광신
자들은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세력을 로마 카톨릭으로 보고, 짐승의 멸망을 로마 카톨릭의
멸망으로 해석 하기도 한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종말론자 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늘날의 시대는 도덕적으로 타락했읍니다.
종말이 다가 왔읍니다.회개해야합니다"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이 정말로 많다. 무슨 배짱으
로 그런말을 함부로 하는것인가? 예수는 종말의 시기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
시느니라." [마태복음 24장 36절, 마가복음 13장 32절]
예수도 모른다는 종말의 때를 자신이 알기라도 한단 말인가? 자기 자신이 예수에 버금가는 존
재라고 착각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한가지만 말해두고 싶다.
종말을 말하는 사람의 인생엔 종말이, 희망을 말하는 사람의 인생엔 희망이......
종말을 주장하는 종교의 미래에는 종말이, 희망을 주장하는 종교의 미래에는 희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