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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지례마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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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례마을은 조선 숙종임금때 대사성을 지낸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 1623~1695)과 그의 중형(仲兄) 방형(邦衡)의 자손이 340여년간 동족 마을을 이루어 주경야독하며 살아온 전형적 사림(士林)의 마을이었다. 지촌은 의성 김씨 내앞파의 대조(大祖) 청계 김진(金璡)의 현손(玄孫)이며 학봉 김성일의 백씨인 약봉 김극일의 증손자이며 표은(瓢隱) 김시온(金是)의 넷째 아들이었다. 38세에 문과 급제하여 40세에 제원(堤原)찰방(察訪)이었을 무렵 지례(芝澧)로 분가(分家)하여 호를 지촌이라 하였으니 지례의 입향조가 된다. 지촌이 지례마을에 자리 잡게 된 것은 병자호란 때 도연에 은거한 아버지 표은 김시온의 정신적 영향이었다. 김시온은 나라가 망하자 청에 항거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도연명(陶淵明)의 이름을 딴 도연(지명,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에 하나 뿐인 도연폭포가 있는 곳으로 산수가 빼어남)에 은거하여 스스로를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자호(自號)하고 평생 독서하고 제자를 길렀던 것이다. 그러한 아버지의 아들 지촌은 조선 현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지만 은둔(隱遁)생활을 좋아하여 그의 집을 도연에서 10리나 더 상류인 지례에 지었다. 그는 청렴하여 한때 영암군수를 지내고 돌아올 땐 수레에 국화꽃 화분 하나 뿐이었다고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는 전한다. 그가 58세 되던 해 남인세력이 물러나던 경신출척(庚申黜陟)을 당해 벼슬을 그만두고 지례에 돌아와 9년을 지냈는데 그때 지은 유명한 시 ‘무언(無言)’에는 은둔하여 한적(閑寂)을 즐기는 자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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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臥滄江歲月深 |
고향에 돌아온 지 참 오래 되었구나. |
幽居不受點塵侵 |
숨어사니 한점 티끌 묻어오지 않네. |
已知漁釣還多事 |
고기잡이 낙시질도 귀찮은 것 알겠고 |
更覺琴朞亦攪心 |
거문고니 바둑도 심란하구나. |
石榻任他風過掃 |
공들여 쌓은 돌탑 바람이 쓸게 하고 |
梅壇輸與鳥來吟 |
가꾸던 매화단도 새가 와서 울게 두자. |
如今全省經營力 |
이제껏 하던 일 모두 접고서 |
終日無言對碧岑 |
종일토록 말없이 푸른 산 보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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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우암(尤庵) 송시열이 주도하던 노론세력에 의해 왕권이 위협받고 영남인이 핍박 받던 때라 그가 기사년(己巳年)에 올린 우암타도의 상소는 임금으로 하여금 우암을 사사케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고 기사환국(己巳換局)이 되어 다시 조정에 나갔다. 벼슬살이의 무상함을 잘 알고 있던 그는 벼슬을 사양한 것만 열 일곱 번이나 되었지만 당시로선 영남인을 대표하고 있었기에 임금의 부름을 받았을 때는 70노구를 이끌고 왕명을 받들어야만 했다. 임금의 변덕으로 남인들이 다시 실권(失權)하여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전라도 동복(同福)에 유배되어 73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그후 지례마을에서는 아무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정와 김대진, 난곡 김강한, 장암 김시락, 수산 김병종 같은 학자를 비롯 문집을 낸 이가 10여명에 이르고 지촌의 출계손(出系孫) 중에는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라 일컫는 중재(重齋) 김황(金榥)과 독립운동가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같은 이가 있다. 지촌이 지례에 터를 잡음으로서 그 의 후손들은 340여년간 교통불편과 가난을 겪으면서도 선조가 남긴 땅에서 가난하면서도 면학하는 전통을 이어 갔다. 이들은 지촌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서당과 제청을 지어 학문과 숭조정신을 강조했고 근대에 와서도 마을안에 초등학교를 짓고 문맹퇴치를 비롯 후세교육에 힘써서 이 마을 출신으로 세상에 알려진 이가 수십명에 이른다. 1975년에야 처음 전기가 들어오고 버스가 다녔다. 정부의 임하댐 계획이 발표되자 1985년 지촌문중 소유의 종택과 제청, 서당 등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받아 1986~1989동안 마을 뒷산 중턱에 옮겨 지어 한국최초의 예술창작마을 ‘지례예술촌’을 열었다. 다른 집들이 모두 도회지나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이주했지만 지촌가의 사람들은 고향을 내려다보며 현대의 은둔지를 만들어 내외국인들로 하여금 가장 한국적 리조트를 체험하게하고 있다. | |
첫댓글 지례마을의 입형조이신 지촌선생에 대한 자세한 설명자료와 문화재등을 잘 담았구나!
수몰전의 마을 전경은 마을 앞에 정벽바위 산이 반변천 곁에 서있어 마치 자양의 작은 백암산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마을은 적은 집 김서방의 고향이요 우리 남서방의 외가 곳이라 더욱 관신이 가는구나!
수고했다.
2001년10월14일 유림주관 퇴계선생 탄신500주년 숭모제 참석후 수애당,지례예술촌,길안용계은행나무등
구경하고 유니실 마을 지나왔지요,
군위숙부님,능계숙부님,금천할배(돈식)모시고 하루 여행 즐겁게한 기역이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