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계발(靈性啓發)과 영계체휼(靈界體恤)
<신천성경p775>선생님(先生任)이 나와서 영계(靈界)뿌리를 세밀(細密)히 밝힐 수 있었다는 사실(事實)이 인류(人類)앞에 얼마나 큰 복(福)이고 축복(祝福)인지 모릅니다. 지금 그것을 다 믿지 못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믿는 사람들이 복(福)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줄기가 되고 줄기 앞에 제일(第一) 첫 번 가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심(中心)줄기와 첫 번 가지가 된다면, 그 나무가 천년(千年)가더라도 그 줄기와 가지를 따라서 발전(發展)하는 것입니다.
<신천성경p776>인간(人間)은 영계(靈界)와 육계(肉界)를 조정(調整)해야 됩니다. 영적세계(靈的世界)의 중앙(中央)에 서야 되고, 진리세계(眞理世界)의 중앙(中央)에 서서 조정(調整)할 수 있는 인간(人間)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인간(人間)이 되지 않고는 완전(完全)한 자리가 될 수 없습니다.
대개(大槪) 영적(靈的)으로 느끼는 사람은 영적(靈的)으로는 크지만 진리(眞理)면에서는 크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굵지만 뾰족해지면 시종여일(始終如一)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永遠)히 못 가는 것입니다. 어느 때에는 반드시 굴러 떨어집니다. 또 진리(眞理)는 크지만 영적(靈的)인 면이 작다면 영원(永遠)히 못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조정(調整)해야 되는 생활(生活)을 해야 됩니다. 기도(祈禱)와 진리(眞理), 신령(神靈)과 진리(眞理)로 예배(禮拜)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형(平衡)을 만들어 화(化)하는 자리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정성(精誠)을 들이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오는 것입니다. 기도생활(祈禱生活)을 해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기도생활(祈禱生活)을 하게 되면 크고 위대(偉大)한 힘(力)이 옵니다. 그래서 기도(祈禱)하는 사람의 눈은 그 힘에 의(依)해서 육계(肉界)뿐만 아니라 영계(靈界)까지도 투시(透視)합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超自然的)인 실체(實體)의 이념권(理念權)을 인간(人間)에게 인연(因緣)맺어 주기 위하여 종교적(宗敎的)인 기반(基盤)을 중심삼고 인간(人間)의 본질적(本質的)인 감정(感情)을 자극(刺戟)시켜서 그러한 권내(權內)로 가게끔 하는 욕구(慾求)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人間)을 초현실적(超現實的)인 선(善)에 연결(連結)시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영계(靈界)의 3층천세계(三層泉世界)를 보고 체험(體驗)한 것은 그가 14년동안 꾸준히 선교활동(宣敎活動)을 할 수 있는 원동력(原動力)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체험(體驗)이 있어야 됩니다. 선생님(先生任)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先生任)에게 바라는 기준(基準)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말하지 않았으나 ‘이렇게 할 것이다.’라는 곧은 뿌리가 있습니다. 선생님(先生任)은 이러한 신념(信念)을 갖고 끝까지 밀고 나갈 것입니다.
<신천성경p777>그렇기 때문에 기도(祈禱)하면서 하나님이 나와 같이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벌써 눈만 감으면 압니다. 기도(祈禱)를 안해도 안다는 것입니다. 어디가서 말하려면 말이 술술나옵니다. 양심(良心)있는 사람에게 가면 내가 쭉 끌려들어갑니다. 전부(全部)가 상대적(相對的)입니다. 자기(自己)의 주체(主體)나 대상(對象)이 되면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처음 만났다고해서 상대(相對)가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본질(本質)은 영원불변(永遠不變)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런 데에 가게되면 마음이 그저 좋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경지(敬止)에 들어가면 말을 안 하려고 해도 입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신천성경p778> 영적체험(靈的體驗)을 갑자기 하게 되면 부작용(副作用)이 벌어집니다. 자연적(自然的)으로 체험(體驗)해야 됩니다. 봄이 되면 자연적(自然的)으로 나무에서 꽃이 피는데, 나무가 꽃을 피우려면 꽃을 피울만큼 자라야 됩니다. 이제 겨우 싹이 트는데 거기에서 꽃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꽃이 피기를 바라면서 빨리커야 한다고 나무를 잡아 당기면 되겠습니까? 뽑히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꽃은 자연적(自然的)으로 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信仰)길은 조급(躁急)하게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년사(千年史)를 창조(創造)해 내는 길이기에 조급(躁急)하게 가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신비(神祕)로운 기도(祈禱) 가운데로 들어가서 상대기준(相對基準)만 딱 맞으면 초연(超然)한 힘이 생겨납니다. 석가모니도 그 경지(敬止)에 들어가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체휼(體恤)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祈禱)를 해야 됩니다. 정신(精神)을 집중(集中)해야 됩니다. 될 수 있으면 영점(零點)의 자리에 내려가든가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한 제일(第一) 빠른 길이 어디냐? 이 영점(零點)자리에 가기 위해서는 내려오는 것이 제일(第一)빠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도대체 마음이 무엇이냐?’ 라는 문제(問題)를 놓고 고민(苦悶)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간단(簡單)합니다. 하나님이 영원(永遠)한 이상적(理想的)인 선(善)의 주체(主體)이면 그 주체적(主體的) 존재(存在)앞에 상대적(相對的) 바탕으로서 언제나 변함없이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이룰 수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이것을 통일교회(統一敎會)에서는 생심(生心)의 기원(基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천성경p775>사람에게는 마음의 문(門), 심문(心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祈禱)해 보면 아는 것입니다. 시간(時間)에 따라 느낌이 다릅니다. 새벽1시에 기도(祈禱)하는 것과 3시에 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체험(體驗)해 보면 압니다. 신비(神祕)스러운 깊은 경지(敬止)에 들어가서 기도(祈禱)해 보면 기도(祈禱)하는 시간(時間)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느끼는 것과 저녁에 느끼는 것과 밤에 느끼는 것이 모두 다릅니다.
우리의 마음 상태(常態)에서도 느끼는 기준(基準)이 우리가 육체적(肉體的)인 감정(感情)을 가지고 사시사철 계절(季節)의 변화(變化)에 따라 느끼는 감도(感度)가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세계(世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祈禱)하는 데도 어떤 시간(時間)에 잘 되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기도(祈禱)가 잘 되는 시간(時間)은 하나님과 감응(感應)의 도(度)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 잘 되는 시간(時間)에 마음의 문(門)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문(門)과 인간(人間)의 마음의 문(門)이 딱 맞아서 어느 기준(基準)까지만 맞추어 돌아가는 날에는 하나님이 느끼는 것을 체휼(體恤)하는 길이 생깁니다. 여러분이 이 같은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음을 닦아야 됩니다.
<신천성경p779>기도(祈禱)가 잘 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고 정성(精誠)을 들이더라도 기도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방에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 방의 위치(位置)에 따라서도 다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중심(中心)앞에 동서남북(東西南北)이 있기 때문에 그 위치(位置)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산(山)에 가더라도 기도(祈禱)가 잘 되는 곳이 있습니다. 또 사탄이 모여 있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음지(陰地)입니다. 음지(陰地)와 양지(陽地)라는 것이 영적(靈的)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번 체험(體驗)하면 그런 것을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암시(暗示)나 몽시(夢示)나 계시(啓示)나 묵시(默示)가 벌어지는 것은 하늘과 관계(關係)를 맺기 위해서 벌어지는 개척적(開拓的)이고 발전적(發展的)인 불가피(不可避)한 현상(現象)이기 때문에 이것을 소홀(疏忽)히 하지 말고 생활(生活)에 적응(適應)할 수 있도록 노력(努力)해야 됩니다.
<신천성경p779>앞으로 여러분이 가정생활(家庭生活)에 있어서 중요시(重要示)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선생님(先生任)이 아내나 아이들의 몽시(夢示)가운데 나타나서 무엇을 가르쳐 주었다면 그것을 믿어야 됩니다. 자기(自己) 딸이 가르침을 받았다면 그 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존중시(尊重示) 하고 그 가르침을 절대시(絶對示) 하고 그 말씀에 하나 되어 가지고 따라 갈 수 있는 가정환경(家庭環境)을 만들어야 됩니다. 남편(男便)이 그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아내를 중심삼고 반드시 가르쳐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정(自己家庭)에 하나님이 가까이 해 주신다는 것을 알고 아내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한국(韓國) 말에 암시(暗示)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내가 길을 무심코 쓱 가는데 어떤 좋은집 담벼락에 앉아 있던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을 때, 새가 날아가는 그 자체(自體)를 통(通)해서 암암리에 무엇인가를 느끼는 것입니다. 실제생활(實際生活)에 있어서 그런 형태(形態)가 전개(展開)되기 시작(始作)하는 것입니다. 그런 암시적(暗示的)인 것들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는 가운데 우연(偶然)히 무엇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事實)들이 점점(漸漸) 많아집니다.
암시(暗示)의 단계(段階)를 지나게 되면 어떠한 형태(形態)가 벌어지느냐? 몽시(夢示)같은 것을 체험(體驗)하게 됩니다. 꿈 가운데 일어나는 일인데 꿈도 깊은 잠 가운데서의 꿈이 아닙니다. 바울도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3층천(三層泉)을 체험(體驗)했습니다.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그런 현상(現象)이라든가 혹은 음성(音聲)이라든가 하는 것이 오관(五官)에 감각(感覺)이 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무심코 흘러보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종합(綜合)해서 어떤 방향(方向)의 인연(因緣)을 나에게 연결(連結)시키기 위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과학적(科學的)인 면(面)에서 통계(統計)를 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결과(結果)가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잊을 수 없는 몽시(夢示)같은 것은 백퍼센트 적중(的中)하게 됩니다.
<신천성경p780>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어떤 사람이면 사람, 물건(物件)이면 물건(物件)이 인연(因緣)되었는데 그것이 현실(現實)가운데서 실체(實體)로 연결(連結)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꿈 가운데서 누구하고 노래하고 있는데, 그 노래가 바로 꿈 가운데서의 노래가 아니고 옆에서 누가 부르는 그 노래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벌어집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영적차원(靈的次元)에 있어서 마음 상태(常態)가 공명(共鳴)할 수 있는 권내(圈內)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것을 지극(至極)히 귀(貴)하게 여겨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이 어디에 나타나느냐? 공중(空中)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통(通)해서 나타납니다. 여러분이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왜 그러느냐? 마음이 아직까지 존재성(存在性)을 아직까지 확립(確立)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몸한테 끌려다니는 사람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존재성(存在性)을 확립(確立)해 또 다른 하나의 주체(主體)라는 인격적(人格的)인 차원(次元)의 자리가 형성(形成)되면 그것은 반드시 다릅니다.
계시(啓示)의 단계(段階)를 지나게 되면 묵시단계(默示段階)입니다. 하루 종일 영계(靈界)에 들어가서 체험(體驗)을 한다든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世界)까지 연결(連結)됩니다. 하나님에 대(對)한 생활적(生活的)인 감정권(鑑定權)까지 도달(到達)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체휼적(體恤的)인 신앙(信仰)을 안 가지고는 위대(偉大)한 하늘 뜻의 결과세계(結果世界)를 우리 생활무대(生活舞臺)에 적용(適用)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험(體驗)을 갖지 않은 신앙자(信仰者)는 믿을 수 없습니다. 체휼적(體恤的)인 신앙(信仰)이 얼마나 고귀(高貴)한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계발(啓發)해 나가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역사(役事)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적(靈的)인 힘이 전기작용(電氣作用)과 마찬가지로 들어옵니다. 고압(高壓)에 접(接)한 것과 같은 힘이 찾아들어오게 되면 우리 의식(意識)보다 강(强)한 힘이 들어오기 때문에 그것은 딴 세계(世界)의 의식(意識)입니다.
<신천성경p780> 체휼(體恤)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祈禱)를 해야 되고 정성(精誠)을 들여야 됩니다. 거기에서 나타나는 계시(啓示)나 몽시(夢示)를 절대(絶對) 무시(無視)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조정(調整)해서 현실적(現實的) 생활권내(生活權內)에, 실천무대(實踐舞臺)에 어떻게 적용(適用)시키느냐 하는 것이 신앙생활(信仰生活)에 있어서 가장 중요(重要)합니다.
<말선283-291> 영인(靈人)들도 지상(地上)에 오는 데는 언제나 올 수 없어요. 전부(全部)다 사시사철 한 절기(節氣)를 따라서 자기(自己)의 뭐라고 할까 마음 문(門)이 맞는다구요. 마음 문(門)···어떤 때는 여러분 친구(親舊)들도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다구요. 심문(心門) 심문(心門)이 맞게 되면 이 땅위에 영인(靈人)들이 와 가지고 협조(協助)할 수 있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것이 아니에요. 영계(靈界)와 더불어 앞으로 후손(後孫)과 더불어서 3시대(三時代)를 대표(代表)해서 살아 가지고 사랑의 전통(傳統)을 남겨야할 책임(責任)이 있기 때문에 부모(父母)앞에 효도(孝道)해야 되는 거예요.
<신천성경p774> 천국(天國)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먼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영원(永遠)한 목적(目的)을 중심삼고 영원(永遠)한 이상(理想)을 그려나가는 분이시라면 영원(永遠)을 두고 마음이 맞아야 됩니다. 한 10년쯤 맞다가 안 맞으면 안 됩니다. 영원(永遠)하신 하나님과 영원(永遠)히 마음을 맞추어야 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영원(永遠)히 좋아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아들딸이 되려면 슬픔의 대상(對象)으로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몸에 맞아야 됩니다. 여기에서 몸이라 하면 방향성(方向性)을 말합니다. 생각(生角)은 사방(四方)의 중심점(中心點)을 대신(代身)하지만 몸은 방향성(方向性)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천성경p772>영계(靈界)는 하나님을 위(爲)하고 온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위(爲)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 곳이 바로 천국(天國)입니다. 그 세계(世界)의 이단자(異端者)는 자기(自己)를 생각(生角)하는 사람입니다. 자기(自己)를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미래(未來)가 없습니다.
영계(靈界)는 참사랑을 중심삼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곳입니다. 자기(自己)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전체(全體)를 위해 사는 곳입니다. 그러나 자기(自己) 이익(利益)만을 취(取)하게 될 때는 전부(全部) 원수(怨讐)가 되는 것입니다. 영계(靈界)에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다 큰 것을 위해 살겠다고 할 때는 자연적(自然的)으로 통과(通過)됩니다. 보다 큰 것을 위하게 되면 자연(自然)히 통(通)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계(世界)를 위해 사는 사람은 미국(美國)을 위해 살지 않아도 됩니다 세계(世界) 가운데에 미국(美國)이 포함(包含)됩니다. 한국(韓國)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나라가 다 포함(包含)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는데 있어서 가정(家庭)도 그냥 지나가고 모두가 환영(歡迎)할 수 있는 방향(方向)의 내용(內容)이 뭐냐? 그것은 위(爲)하여 가는 사랑의 길 밖에 없습니다. 이 두 가지는 지상(地上) 사탄세계(世界)에서도 막지 못합니다. 이 두 가지는 사탄세계(世界)도 절대(絶對) 순응(順應)해야 됩니다.
천국(天國)은 어떻게 가느냐? 하나님의 사랑에 미쳐서 살아야 합니다. 아담과 해와 이상(以上)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상(以上)으로 예수님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참사랑의 상대권(相對權)을 복귀(復歸)할 수 없습니다. 이것만 복귀(復歸)하면 만사(萬事)가 형통(亨通)입니다. 돈이 없다고 걱정하지 말고, 아들딸이 없다고 염려하지 말고, 10년 20년 그 길을 계속(繼續) 가라는 것입니다. 가다보면 태산준령(泰山峻嶺)도 오르게 됩니다 나는 점점(漸漸) 내려가면서 고생(苦生)만 하는 것 같지만 점점(漸漸) 높아지는 것입니다. 통일교회(統一敎會)는 맞으면서 큽니다.
<신천성경p465>몸과 마음이 영원(永遠)히 하나되는 경지(境地)에 들어가면 온 천하(天下)가 다 보입니다. 여기에 천지(天地)가 다 공명(共鳴)합니다. 완전(完全)한 마음을 중심삼고 완전(完全)한 몸이 공명적(共鳴的)으로 일체화(一體化)하는 입장(立場)에 들어가면 모두 통(通)합나다. 우주(宇宙)가 움직이는 소리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 소리와 비례(比例)해서 웃음이 터져 나오고 기쁨이 터져 나옵니다. 초연(超然)한 힘이 무한(無限)이 연결(連結)될 수 있는 하나의 경지(境地)가 있는데, 그 경지(境地)는 창조적(創造的) 이상(以上)의 힘이 도달(到達)하는 경지(境地)입니다.
플러스인 마음과 마이너스인 몸이 완전히 하나 되면, 플러스인 마음에 하나되는 그 힘은 본연(本然)의 창조주(創造主)의 힘의 권한(權限)에 동참(同參)할 수 있습니다. 전능(全能)한 창조력(創造力)이 있고 생명력(生命力)이 있으면 하나님의 창조력(創造力)과 생명력(生命力)에 접선(接線)할 수 있는 가능성(可能性)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선242-14,> 몸 마음을 통일(統一)못하면서 세상(世上)을 통일(統一)하겠다는 것은 미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각자(覺者)가 운명적(運命的)으로나 숙명적(宿命的)으로 해결(解決)해야 할 문제(問題)라는 것입니다.
<신천성경p776>우리는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정(心情)이 어디에 있느냐 할 때, 기도(祈禱) 가운데서 음성(音聲)을 들어보면 ‘선생님(先生任)의 말을 잘 들어라 선생님(先生任)을 슬프게 해서는 안 된다. 선생님(先生任)을 기쁘게 해 드려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선생님(先生任)이 보고 싶어서 잠을 안 자고 그러다 보니 영계(靈界)가 열리드라는 것입니다. 영계(靈界)가 열립니다. 선생님(先生任)이 미국(美國)에서 뭘하는지 앉아서 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이것은 막연(漠然)하던 신앙(信仰)의 주체적(主體的) 대상(對象)을 현실적(現實的)인 실체적(實體的) 주체(主體)로서 횡적(橫的) 무대(舞臺)에서 체휼(體恤)할 수 있는 권(權)을 형성(形成)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事實)은 종교세계(宗敎世界)에 위대(偉大)한 혁명(革命)을 제시(提示)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휼(體恤)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참부모경p1572,> 용서(容恕)와 사랑은 위대(偉大)한 힘(力)이 있다는 것입니다. 용서(容恕)는 사람의 마음을 열고 사랑은 사람을 움직입니다. 참부모님(眞父母任)의 기적(奇蹟)같은 생(生)의 업적(業績)은 용서(容恕)와 사랑의 삶으로 일구셨다. 용서(容恕)하고 사랑하게 되면 싸움이 있는 곳에 화해(和解)가 있고, 분쟁(分爭)이 있는 곳에 화합(和合)이 벌어지고 전쟁(戰爭)이 있는 곳에 평화(平和)가 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