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1대왕 : 중종(1488 -1544년.재위 :1506 - 1544년11월. 집권 38년2개월.57세일기.)
● 연산군의 폐출과 진성대군의 등극.
중종반정:1506년 성희안, 박원종 등이 주축이 돼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 거사에 돌입한 반란군은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사실을 통보하고 신수근,신수영 형제와 임사홍을 제거 하는데 성공했다.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는 이들의 청을 처음에는 거절 하다가 결국 연산군을 왕자
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 교동에 안치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튿날 진성대군이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거사는 완결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중종은 등극한 뒤 가장 먼저 나라 기강을 바로잡고 정치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역점을 두었다. 홍문관 기능을 강화하고 경연을 중시하여 정책 논쟁의 강도를 높였으며 문신의 월과, 춘추시과, 사가독서,전경 등을 엄중히 시행하여 문벌세가들을 견제하려 했다. 중종 즉위 4년 후인 1510년 영의정직에 있던 박원종이 죽어 공신세력의 위세가 많이 위축되었고, 개혁적인 분위기가 사회에 확산되면서 정치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 가고있었다.
중종은 공신 세력을 견제할 방도를 모색하던 끝에 1515년 조광조를 정치 일선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조광조 일파의 개혁정책은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 해서 훈구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군다나 조광조 일파가 도학적 이념을 내세워 임금에게까지 압박을 가하자 중종 역시 조광조의 급진적 경향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종의 이런 심중을 헤아린 훈구파의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은 1519년 반정공신 위훈 삭제사건을 계기로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히니, 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계를 올렸다. 중종은 이들 훈신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조광조, 김정, 김식 등 신진사림세력을 숙청 하였는데,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이들은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이용해 중종에게 '온나라의 민심이 조광조에게로 돌아갔다고 하고 궁중에 있는 나뭇잎에 走肖爲王이라 쓰고 벌레가 그것을 갉아먹게 한 다음 궁녀를 시켜 왕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주초는 조 趙를 분리한 글자 이므로 조씨가 왕이 되려 한다는 뜻이었다. 비록 미신에 불과했지만 조광조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몹시 불쾌 해했다. 치죄 결과 조광조는 능주에 유배되었다. 그러다 훈구파가 영의정, 좌이정, 우이정 등에 임명되자 곧 사사 되었다. 이 사건은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훈구세력이 지나친 도학적 요구에 염증을 느낀 중종과 모의하고 벌인 일종의 친위 쿠테타적 성격이 짙다. 중종의 정치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는데, 그것은 인재 활용의 미숙함과 뚜렸한 정치철학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 단경왕후 신씨(1487 -1557년) : 익창부원군 신수근의 딸이다. 진성대군이 왕으로 추대되자 왕비에 올랐으나 고모가 연산군의 비(妃)이고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라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신씨의 폐위와 관련 해서는 치마바위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식은 無 71세 일기.
● 장경왕후 윤씨(1491-1515년) :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1515년 세자「인종」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6일만에 25세를 일기로 경복궁 별전에서 죽었다..
● 문정왕후 윤씨(1501-1565년) : 1517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며,1545년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 에 오르자, 8년 동안 수렴청정 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도 했는데,폐지되었던 승과, 도첩제 등을 다시 실시했고, 승려 보우를 총애하여 병조 판서직에 제수하는 바람에 대신 들의 불만을사기도 했다. 명종은 그녀의 지나친 정권 욕에 불만을 품고, 신진사림 세력들을 등용시켜 외 척 세력을 견제하려 했으나, 번번히 그녀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듯 조선조정을 패권다툼의 장 으로 몰아갔던 그녀는 희대의 악후였다. 그녀는 1남4녀 를 낳았으며 35세에 명종을 낳았다.
● 조광조 : 그는 29세가 되던 1510년 사미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 해 성균관에 입학 했다. 1515년 성균관 유생 200명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의 추천으로 조지서사지라는 관직에 임용되고, 그 해 가을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전적,감찰, 예조좌량을 역임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된다. 중종은 그를 정언에 앉혀 언론을 통해 훈구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1517년 그는 그 동안 형성한 세력을 기반으로 중종과 함께 본격적인 개혁을 단행 하기에 이르렀다.
첫째 : 향약의실시.향약은 성리학적 이상사회. 즉 모든 백성을 성리학적 규범으로 교화 시켜 왕도정치의 기반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 현량과의 도입.(인제 천거제도)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는 제도를 통해 인재를 등용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훈구파의 엄청난 반대가 있었지만 중종의 지원에 힘입어 1519년 전격 실시되었다. 이 곳을 통하여 등장한 인물은 신진사림파가 많았는데, 그들은 조광조 의 추종학자들로 학맥 또는 인맥으로 연결되어 강한 연대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림은 중종을 압박하며 자신들의 의지대로 밀어붙였고, 결국 중종이 밀리고 말았다. 훈구 대신들의 막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전 공신의 4분의3에 해당하는 76명의 훈작을 삭탈했던것이다. 이에 훈구 세력 은 더 이상 사림파의 급진적인 성향을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중종에게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조직해 조정을 문란케 하고 있다고 탄핵을 한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중종은 훈신들의 탄핵을 받아 들여 대대적인 사림파 숙청을 감행하였다. - 이것이「기묘사화」이다 -1519년
이로써 4년 동안의 조광조의 정치개혁은 막을 내리지만, 그의 도학적 왕도 정치는 후대에 막대한 영향 을 끼쳤다.
● 서경덕(1489-1546년) : 호는 화담. 그는 조광조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에 응시하도록 수석으로 추천 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에 서재를 세우고 학문연구와 교육에만 매달렸다.
1531년 어머니의 간청으로 43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 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며, 1544년 김안국 등이 후릉참봉에 추천하였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렀다.
그는 성리학자들 중에 스승이 없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이 시대에 황진이는 화담을 유혹하는데 실패하고 오히려 그의 학문과 고고한 인품에 매료되어 사제관계를 맺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