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사제들>은 실로 오랜만에 깊이 몰입했던 영화였다. 결혼식장을 다녀온다고 충주에서 부산으로 내려오는 길에 작은 버스에서 핸드폰으로 본 영화였는데도 재미있게 감상했다. 악귀와의 사투 이야기라 판타지가 섞인 내용이긴 했지만 현실 세계에 접목할 만한 대목들이 더러 있었다. 예를 들면 악귀들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라든지, 교묘하게 사람들을 농락한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그 영화가 와 닿았던 이유는 악귀라는, 사탄이라는 존재가 실제로 현실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보이지 않기에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꾀임에 넘어가면서도 넘어가는지 모를 때가 많다. 영화를 보고서야 아차! 하면서 익사 직전의, 몰살 직전의 영적 감수성이 눈을 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하고, 악귀가 존재하고, 그것들을 파악하여 간계에 놀아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래서였을까.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이 이따금 생각났다. 생각만하다가 다시 읽기 위해 책을 주문했고, 오늘 완독하였다. 스캇 펙은 악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악을 치료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희망의 싹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악에 대한 교과서를 읽은 듯 했다. 다 읽고 나니 그의 유명한 책 <아직도 가야할 길> 보다 이 책이 더 유명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바비의 부모, 로저의 부모, 그리고 사라와 칠린 등 상담일을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을 통해 저자는 멀쩡한 얼굴 뒤에 가려진 음흉한 냄새를 추적하여 악의 정체를 보여준다. 자녀의 크리스마스 선물로 권총자살한 형의 총을 주면서도, 그게 왜 잘못인지 알지 못했던 바비 부부의 이야기 등은 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악의 특성은 죽음, 살인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리고 거짓과 혼돈으로 감싸여 있기 때문에 겉으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기도 하다.
하지만 언뜻 언뜻 악의 기운을 느낄 기회는 허다하다. 누군가의 얼굴 위를 잠시 스쳐간 표정, 어떤 미묘한 늬앙스를 담은 제스쳐, 툭 던지는 한 마디 말을 통해서 악은 냄새를 풍긴다. 나는 악을 미워했다. 누군가의 악한 행동은 상처를 주었고 그때마다 누군가를 미워하다보면 사랑할 사람이 세상에 손꼽을 정도로 적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일반적인 수준보다는 악을 캐치하는 민감성이 높았다.
추악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은 본능적인 반응이기도 하다. 스캇 펙 역시 악에 대한 미움, 거부감으로 인해 찰린이라는 내담자를 따뜻하게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은 내린다. 장시간의 노력과 고민, 실패의 과정을 거쳐 그가 깨달은 것은 악을 미워하고 파괴하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악에 대하여 파괴라는 작전을 펴 나간다면 우리는 자신까지도, 신체적으로가 아니라면 영적으로도, 파괴하는 것으로 끝을 내고 말 것이다. 우리는 또한 자신뿐 아니라 다른 죄 없는 사람들까지도 해치게 될 것이다.’ p355
그러면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스캇 펙은 악을 공격하는 방법론으로 사랑을 꼽았다. 죄없는 예수가 죄인을 대신해 죽었을 때, 죄인은 죄의 값인 사망을 탕감받는다. 기독교의 진리로 나는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간의 관계에서도 비슷한 원리가 흐른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을 긍휼히 여겨 희생을 감수하고 그의 삶에 개입할 때, 사랑이라는 방법으로 악을 흡수할 때 영적 세계의 지축이 바뀐다. ‘악에게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12:21 라는 권면은 그렇게 이룰 수가 있다.
스캇 펙에 따르면 악은 게으름과 나르시시즘이라는 두 뿌리를 통해 자라난다. 개인 마음 속에서 사소한 이기심, 분노 등으로뿐 아니라 전쟁, 학살 등의 심각한 사회 문제로도 형성된다. 하지만 그 기초는 개인의 마음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전쟁이리라. 스캇 펙은 교육을 통해(학교 교육을 포함한다) 개인을 각성시키기를 희망한다. 악의 본질을 알고 예방 원리를 깨닫게 하는 것, 자기 내부의 악을 성찰하고 책임을 깨닫도록 하는 것...
악에 대해서 점차 사유하지 않게 되고, 자기 성찰이라는 것이 구시대적 산물이 되어가는 바쁘고 새로운 사회 속에서 과연 그런 교육이 가능할까 의구심이 든다. 그러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악을 파악하고 사유하고 치유하기를 게을리하고 싶지가 않다.어두운 세상 속이지만 희망이라는 작은 호롱불을 켜서 주위를 밝히며 걸어가야 할 것이라는 데엔 이견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