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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에 대하여 빛의 심판을 행하심을 경고하시고 백성의 의지작용을 전제하여
O 을 인과율대로 행해짐을 계시한 것에 대하여, 아직 .. 이를 O 견하여 빛의 심판 칠(7) 되심을
계시하심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주) 예스그리스도의 여호아 선을 행 할 수 밖에 없으신 주) 예수그리스도의 심판 하심의
불가피하심을 사랑으로서 그 행할 바를 일러주시고 계십니다.
요한 계시록을 진정성 있게 봉독 하시고 참 되게 영접하시려면
구약성서의 역사적 인과와 도덕률 그리고 계율을 지켜야 하는 도리를 어김에 따라 그 심각성을 살펴보고 이해하는 관점이 있어야만 하는 전제가 따릅니다. 구약과 신약은 기승전결 입니다, 기승이없이 어떻게 전결이
있겠읍니까?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은 미진한 우리같은 백성들 입장에서는 만상의 참됨의 모습을 반 밖에 보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고 이를 참된 진리로 여기기 때문에 계시록을 절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곤란할 정도로 어려운 성명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을 읽어야 O 의 온전함을 영접할 수 있다 , 이것이 참된 도리이다 하는 것과 같읍니다.
인간이 생각하는범주와 이성적 논리를 아무리 견주어 둘러보고 애를 쓰고 합리화 하여 해석으로
도출하려고해도 아니되는 연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빛을 말씀하시는 주) 예수님의 진리의 행간에 목회자 마져 이를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구불 구불 아홉구비 구차하게 넘는 설명이나 목회말씀으로서는 전부 하나님의 말씀 전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백성들에게 이를 설득시켜야만 그 사명을 다 함이지만 그냥 추상적일 수
밖에는 없는 노릇입니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에 대하여 일부 특정한 인연으로 이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자 에게도
이를 힐난하는 태도로 견지하여 합리화 시키면서 고유한 영역이므로 해석하지 말라하며
부정하면서 목회자들이 모르는 것을 감히... 이러한 불문률에 휩싸이어 주) 예수님의
참다운 말씀을 가로막아 접근치 못하고 있는 수준까지 이르게 된 배경도 있읍니다.
성경말씀은 목회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백성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통 하는 주) 예수이며
성경말씀은 어느누구나 다 대면하고 하나님의 참 진리의 말씀를 받아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가 내 마음이 이미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의 잘못된 특권의식은 도리어 종교를 고민하게 하는 부분도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종교의 범주를 운영하고 이행하는데 앞장서는 자 들의 특권의식을 말합니다. 심히 우려됩니다.
구약성서를 읽어보아도 항상 제사장이나 랍비가 문제의식을 일으켜, 참된 말씀을 왜곡화 하고
이율배반적으로 자신의 욕망에 수단화 하는 변질우려를 야기 한 것은 언제나 거기서 문제가 터집니다.
지도자 급들이였읍니다.
정치도 매 한가지 입니다, 지도자 급들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공부해야 하고 스스로 참되게 신자들이 직접 신앙생활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항상 이러한 점을 인과율로 들어 하나님께서 경고하시고 애처로워 하시는 내용 의 전반적 인 것이
구약성서의 내용이 됩니다. 그래야 지도자급들이 참되게 잘 행하시어 백성들과 주) 예수님의
진정한 말씀을 연결해주는지도 이해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 입니다.
목회자도 성경말씀 그 액면 그대로 이해를 못할 수 도 있읍니다, 그것은 잘못이 아닌것입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왜 주) 예수께서 사도요한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이렇게 계시한 까닭이 무엇인가, 이를 참되게 궁리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참 되면 계시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놓여 있을 것입니다. - 아멘-
목회자의 생명은 진정성입니다, 마음이 진솔하고 순수한 것을 더 우위에 두는 것이지
셩령을 보고 다 알고 본다는 것을 주장하거나 보아서 해결되는 능사가 아닌까닭입니다.
O 을 안 보아도 진솔하고 순수한 공덕은 아예 주) 예수께서 달려오시어 이를 받추어주시는
이치가 동시에 서는 것이며 그것으로서 성령의 O 을 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성경책을 보는 순간 이미 성령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말씀의 본질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합니다.
그럼에도 항상 모든 것을 이해하는 양 척 문화로 이를 합리화 하는 방법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해서야 되겠읍니까? 그럴수록 주) 예수님은 절대 오시지 않읍니다.
그러므로서 목회활동의 생명은 진리를 접함에 있어서 이해아니되면 아니되는데로 그렇게
순수하게 전하셔야 합니다. 또한 목회자는 모든 진리를 다 아는 자가 아닙니다.
수행자입니다, 수행은 부족한 면을 좀더 진지하게 접근하고 주) 예수님의 봉행자로서 백성들을
잘 이끌고 솔선 수범하며 성경말씀을 늘 공부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성령은
두루 온 몸에 가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르는것, 궁금한 것을 다 이해하는 것처럼 내 세울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혹세무민으로 이어지고 주) 예수님의 말씀을왜곡화 하지는 않는지에 대하여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합리화 할 수록 그 과정속에서 백성들은 이를 잘 이해하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믿음을 지니지 못하게 하는 큰 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교회를 운영하는 책임자들에게 요한을 통하여 일곱 교회에 계시를 하는 것입니다.
구약 에스겔은 예언의 장이고 사도요한의 계시록은 현실과 미래의 장입니다.
하나로 연결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그렇게 되어있읍니다.
사실 불교에서는 아무리 선지식인이고 깨친자 에게도 과연 깨친것이 무엇이냐고 묻게되면
무엇을 깨친다 하는 것인지 그런 것은 잘 모릅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방편으로 전 할 뿐이지요.
손가락으로 달을 가르키는 형식이지요,
손을 보지 말고 달을 보는 시선을 갖추면 달을 보게되는데 오로지 손 끝만 보면 달은 안보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읍니다. 하지만이에 반하여 큰 모순을 찾아본다면 이 역시 자만입니다.
무엇을 보앗다고 하여 모든 진리를 행하는 자리도 아닌 것인데 다 완성하였다라는 큰 모순적 자만이
찾아와서 도인 행세를 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또한 현명한 깨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깨어나 있으면 항상 전부 깨어나 있으니 이미 다 깨어나 있는데 뭘 또 말로 깨어나고 안께어나고
덧 붙이는가 하는 수준을 말합니다.
우리는원래 스스로 다 깨어난 자 들입니다, 자는사람 깨우기만 하면되는데 성경말씀이
기상나팔이 되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개인각자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 아멘-
주) 예수님과 부처님을 대하시는 가장 큰 의미를 진작하는 자세는 겸손과 예배 봉독 이 세가지를 전제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본다고 해서 우주전체를 다 볼 수 있읍니까? 그냥 일부분을 보고 그 언저리 를 연결한
직관적 내홍을 겪는 것에 불과 합니다. 조금 보았다고 하여 전체를 다 볼 수 있을 때까지 더욱더 궁구하고
성인의 말씀의 주 목적하심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하는 것이며 이를 행함에 진정한 참된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바라볼수 있을 때 까지 .... 성인들께서는 이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함께 다 깨어나면 우주전체가 다 보이는 소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주전체가 다 내마음속에 거주하시는 주) 예수님이 있어 이미 우주전체가 내 마음에
내재 되어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끄집어 내기만 하면 되고 자다가 깨어나면 됩니다.
지나가는 땅 강아지가 있는데 그냥 막 갑니다, 이를 사람이 위에서 이를 바라보고 있읍니다.
땅 강아지는 시선도 확보하지 못하고 사람이 보는지도 모르고 가는 길만 갑니다.
이를 깨어나지 않고 잠을 자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깨어나지 못함이라는 것은 주) 예수님의
말씀을 보지 못하는것과 같은 뜻이 잠을 잔다 하는 것이고 깨어나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절대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나지 않는 입장이지요, 이게 우리들 백성의 현 주소입니다.
깨어날 수 있는 능력이 다 주어졌는데 무신 습관에 얼어붙어 깨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이 말입니다.-아멘-
깨침이라 하는 것, 깨어남이라는 것은 언어로 글로 전할 영역도 아닌 것이며, 내가 깨쳤다, O 을 보았다고 말 하면 전부 진리가 아니기때문이며 진리가 아닌까닭에 말이나 글은 이미 사라지는 경지가 되어져야 하는 것이
가장 기초적인 단계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원래 깨어있는데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다들 가지고 있고 오로지 잠만 좀 자고 있을뿐인데 , 도리어 잠자는데 방해질 한다 하지 않겠읍니까?
진리는 이처럼 은밀하게 오십니다. 그리고 살자기 깨워주시지 나팔을 불지 않읍니다.
이해시키려고 기상나팔론을 이야기한 것 뿐입니다. 하지만 수행자한테는 혹독하게 다룹니다.
불교수행자 성철스님은 제자들이 깨어나려고 선을 행하고 있는데 갑자기 미친사람처럼 방맹이를 들고
확 때리고 꽥 꽥 소리를 지릅니다, 깨어나라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읍니다. 뭘 재노? 그냥 확 일어나면 되지..
이겁니다... 잠 자는 사람은 황당한 것입니다. 수행은 이처럼 골고루 안 미치는 데가 없는 것입니다.
말로서 야야 일어나게래이? 이거 안된다 이것이지요 , 항상 몽롱한데 빠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술먹고 헤롱 헤롱하면 정신차리라고 뺨도 때리고 하지 않읍니까? 우선 깨어나야 합니다. 성경말씀의 목적이 이것입니다.
지금 남한테 돈 100 만 원 떼여서 성질 낼 때가 아닌 것입니다.
반에서 1 등 놓쳤다 분해 할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그거 1 등해서 뭐 합니까? 반만 보는데..
반 장님의 긍극적인 목적은 1 등인지 몰라도 1 등에 파묻혀 한평생 고생합니다.
그냥 깨어나면 1 등에서 60 등 중에아무거나 하나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O 을 보게되면 이미 O 에 함축되어 함께 O이므로 주체와 객체가 사라지는 경계이므로 , 내가 깨쳤다 이런것은 없는 것이기라고 여겨야 합니다. O 이 어떻게 O 을 볼 수 있읍니까?
그냥 볼 뿐입니다. 그냥 본다 함은 이를 주) 예수께서 깨어나 있어라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잠을 자도 잠을 안자는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 이를 생잠을 잔다 함이며 피로도만
상계해주는 잠으로 활용할 뿐 입니다.
어떤 목회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깨어나라 해서 잠을 자지말라고 하는것이 아니다 하시는 말씀인데
아닙니다, 잠을 자도 잠이 안되는 수준으로 와서 늘 깨어나 있어야 하는 것이
주) 예수님께서 항상 깨어있으라 하신말과 같은 말씀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시 못하시고 오해하시면 깨어나지 못한 분 입니다.
깨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이해하면 깨어날 기회는 언제든지 찾아오게 되어있는데
그것이 아니다라고 속단하면 영원하게 못 깨어납니다.
잠을 안자면 깨어난것입니다, 잠을 자고 싶어도 잠이 안되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본인은 이를 다 보고 깨어남을 전격적으로 다 실행하는 자 인가?
천만에 말씀입니다.
지 머리는 자기가 못 깎듯이 당사자 끼리 장기를 뜰때 그들보다 실력이 더 안좋은
사람이 옆에서 두 사람의 장기판을 보고 제 3 자로 훈수뜨는 것과 똑 같읍니다.
이는 어느누구도 매 한가지 입니다.
머리깎는 이발사가 머리를 깎는데 옆에서 보고 머리를 잘 깎나 못 깎나 하는
것이 더 잘 보이듯이 그런 것이므로 제가 목회자 님들보다 더 실력이 없는 것입니다.
단지 미비한 사실을 인정하는 선 상에서 멀리 바라보는 산이라 산의 전체를 다 보는
입장에서 윤곽만 이렇다 하더라도 하는 것이지, 실제로 목회를 담당하시는 분들의
참된 행위나 신앙인들을 인도하는 그 마음자리는 절대 쫓아갈 수 는 없는 것입니다.
식구를 위하여 밥을 짓고 청소를 하시고 모든 식구를 애지중지 하시면 주방일을
하시는 주부의 마음 앞에서. 식구들이 밥 먹으면서 밥을 잘 지었느니 반찬이 짜니
이렇게 해서야 주부님의 참 마음을 넘어서는 비판이 되겠읍니까?
그냥 투정이지요, 저도 그러한 수준에 머물러 있으므로 목회자의 참된 마음을
절대 쫓을 수 는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심정으로 공부를 위하여 기초적 개념이나마
서로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종교의 본질을 같다라는 것에 맞추어 소개하는
것으로 비판을 받아볼 작정입니다.
제 밥은 질을 수로, 꼬들밥일 수 도 있는 수준을 벗어나 아예 시커멓게 타 있으므로 줏어먹지도 못합ㄴ다.
교회의 목사님 말씀에 따라 성경공부를 충실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 아멘-
깨어난자는 잠을 자도 항상 잠을 자는 중에도항상 깨어나 있음과 매한가지입니다, 이는 사실입니다.
사실인데 어떻합니까? 제가 겪는 것이기 때문이므로 체험적 증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깨어나 있게되면 죽음도 이미 없읍니다. 죽는것은 혼절 해야 죽지요, 안그렇습니까.
죽을때 자는것처럼 정신을 잃으면 죽읍니다, 깨어나서 아프고 고통만 있고 숨이 넘어가네
안 넘어가네 생생하게 인식하면 죽을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잠을 자는 중에 죽는것도 자면서 이미 정신이 혼절하게 되면 죽음이 찾아오는 것과 같읍니다,
안 그렇습니까, 깔딱 하고 숨이 넘어가는
지경에서 정신 잃지 않고 깨어있으면 안 죽는다 이 말입니다, 항상 깨어나 있는데?
죽는데 고통을 느끼면 의사들이 말합니다, 일단 살았다 하고 진단을 하는것입니다.
고통을 느끼는데 우에 죽을 수 있읍니까. 잠을 자듯이 혼절해야 죽음은 오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그러므로 고통이 라는 것을 겪는게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걸 알면 이미 살아가면서 고통 은 고통이 아닌것입니다,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지요
고통이 얼매나 고마운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고생이 얼매나 고마운데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고통을 인식하므로 인간은 위대한 마음의 O 이 들어가 있다 하여 만물의 영장인 것입니다.
사는것도 고통이 고맙게 여겨질때 돈도 벌고 철도나고 세상사 살아볼만한 세상을 맞이하고
느끼고 절감하는 것입니다..
또한 깨어나지 못해서 죽음이라는 과정을 지닌다 하여도 이미 본질적으로 죽지 않는 본성을 지니기 때문에
영원히 죽을 수 도 없는 것입니다, 죽음의 인과는 삶으로 다시 O 질을 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또 어떠한 인과로서 적정한 수준치로 재 정비해서 세상에 출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돌아갔다 다시 와야 합니다, 물론 안 올 수 도 있읍니다, 깨어남의 차이일 뿐인데
차 타고 목적지 가면 지가 갑니까, 차가 가지... 은하철도 999 입니다.
은하철고 999는 다시 출발하던 곳에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차량도 운행을 하고
먹고 살지요. 똑 같읍니다.
깨어나 있으면 오고가고 왔다 갔다 를 다 봅니다, 이를 깨어남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이기도 합니다, 부할하는 생명성품이 원래 없다면 어떻게 부활 하겠읍니까?
부할을 못하는 것은 영원히 자는 것입니다.
영원히 자는 것은 깨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항상 깨어나 있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다 깼나요? 하루만 잠안자도 정신이 왔다 갔다 하고 코에 단내나고
이렇게 되면 살아도 사는게 아니지요,, 그러므로 지풀에 지가 죽는 것입니다.
결론은 깨어나 있으면 죽을라 하더라도 죽지못하는광경을 보는 것이므로
깨어나야 합니다. 이를 빛의 운동이라 하는 것입니다.
빛은 생명이요 진리이니라... 성경말씀이십니다, - 아멘-
예수님께서도 생명성품이기는 매 한가지 이며 인과를 지니는 이치를 행하는 분이지
당신은 스스로 생명성품이 아니다라는 것이 아닌것과 같읍니다.
당신이 스스로 생명성품이 아닌데 왜 생명성품 동네에 와서 콩나라 팥나라 하시겠읍니까?
같으니까 ,오시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들의 생명을 행함에 뚝 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다.
이것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깨어나기 위해서는...
위대함이란 인과에 예속되지 않는 생명성품의 본성을 이미 다 갖추었다는 것을 말하지
인과율은 특정적으로 벗어난 위치로서 지위를 지닌자를 말 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나도 육을 지니고 세상에 나올 수 있는 것은 백성과 같다 라는 것을 증하시면서 오시지 않았나요
그러므로 주) 예수는 항상 깨어나라 한 것입니다.
정신 깨어남을 유지하면 절대 죽음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영묘한 것입니다.
멀쩡하게 깨어있는데 죽음이 올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읍니다.
멀쩡하게 이미 깨어있는데 다시 무신 자궁으로 태어나고 울고 다시 어린입장으로 출발하는
것 이런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미 깨어나 있는데 자궁에 입태 할 필요도 없다 이 말과 같읍니다.
걸 왜 들어갑니까?
방편으로 비유하면 깨어남이라는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나 있음면 태어남과 죽음은
이미 초월한 가운데 주어진 생명운동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현재 문명어로 최고의 설명방법은 이와 같다고 여기시면 되겠읍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나라 하는 것이지 이러한 것도 없다면 뭐 할라고 깨어나는데
진력을 다하고 고행도하고 노력해야 하는가 이말입니다. 골 빘어요?
그냥 살다가 가면 되지... 이거 안됩니다, 일단 깨고 가 보시라니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안 죽으려고 종교를 믿고 철학을 하고 명상을 하고 야단인 것입니다.
이 자리에 깨어나 있으면 행복이 무엇인지 구차한 이러한 생각을 달아나고 이미 없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자체가 행복하기 때문에 덧붙여 맥기질 하는 것 같은것을 행복개념이라고 여기는 그런것은 이미
신경도 안 쓰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는데 안죽는다고 하니까 이게 헷갈리는 명제이기는 해요, 하지만 극복해야 합니다.
지금 심정으로서는 이 양반이 괴상망측한 말을 하는구나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가 그러합니다, 그러할 수 밖에없는 이치가 O 을 직관하는 기미를 보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수행하면 신앙생활하면서 직관으로 O 을 이해라도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하여
이토록 어려운 요한 계시록을 주) 예수께서 요한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공부는 요한계시록을 몰록 이해하시는 분은 O 을 직관하시는 것과 같읍니다.
다시 말하자면 여호아 선을 행하는 경계에 들어서 있다 하는 것이지요.
이로서 목회자 분들이 요한계시록을 소개하고 해의하는 강설의 장면을 보기만 하면
O 을 직관하는 자 는 아 저분은 영 엉터리 말씀을 전하는구나 하고 바로 알 수가 있고
볼 수 가 있는 것입니다.
현대문명에서는 목회자 이던 수행자이던간에 의문이 들면 일반 신앙자들은 항상 질문을 하고, 비판을 해야
진리를 향하는 수행자의 덕목이 발전되고 건전한 양태로서 믿음을 서는 분이 많아 지게 됩니다.
저의 소개부분도
다만 방편입니다, 방편은 무명이라는 어리석음으로 모든 모습을 반만 보고 반만 생각질을
내기 때문에 그 키 높이로 하여 방편설로 분별이 가능한 언어로 이렇게 인간의 사고방식의 한계점이나마
윤리력으로 직관하고 이러한 방법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똥질나게 고생하고 그래도 인내하고자 하면 머리로 망치한대 맞는 상태로서 눈이 버쩍 뜨이고
정신 차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본인의 경험은 바로 그러한 것이므로 별난것도 아닙니다.
자꾸 고생하는 것은 자꾸 죄를 갚은 과정일 뿐입니다, 다 같으면 빛을 갚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억울한게 없는 이치를 말합니다, 이를 회개라 하고 참회라 하는 것입니다.
성인들께서는 절대 틀리는 말씀을 한 터럭도 하지 않는 참 말씀입니다, 믿으셔야 합니다,.
다는 전문가 심지어 대통령, 아니면 집안 부모님들은 거짓말을 좀 하지 않읍니까?
하지만 성인들께서는 참된 생명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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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성경말씀을 전하는 본인으로서는 자신하고 확신하는 것은 진정으로 주) 예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믿고 있으며 신원지 상태로 놓여져 있다는 사실은 말 할 수 있읍니다 그것뿐입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 아멘-
사람이라는 생명성품은 빛이요 진리입니다.
깨어나나 안 깨어나나 똑 같음을 행하고 같은 생명이며 빛이며 진리인 것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아는 만큼 보는 만큼 같아지려고 하는 본성을 지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심정으로 행하고 싶어 양떼가 되는 것이고 불교에서는 선남자 선여인이 되는 것이
지상목표의 첫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이나 부처님은 이것을 이루려고 지상에 출현한 것입니다.
일단 양떼가 되고 선남자 선여인이 되어야 O 을 직관하고 성령의 은총을 입는자가 된다
이 말씀입니다. 일단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여호아 선을 작용하며 생애를 걸어가는 것이나 심판을 받고 다시 시간적 추이과정을 함축하며 진화하여 진정성으로 향하는 과정이 있는 자 나 모두 매한가지로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 똑 같은 것입니다. 진리의 측면으로 대소가 옳고 그름이 결코 없는 것과 같읍니다.
단지 의지작용의 인과율이 윤리적인 덕목으로 정확하게 규정되어 삶의 질과 양을
정한다. 이것인데 이를 전반적으로 율을 지키는가 안지는가의 정도로서 좌우가 된다는 사실을
성인께서 분명하게 제시 해 놓으셨읍니다, 이것만 이해하고 실천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성이 발전되고 풍부하여서 조금만 이치를 밝게 보면 전부 훌륭한 생명성품으로
거듭 태어난다는 확신성이 있어 주) 예수가 지상에 출현한 것입니다.
잘 이해해보기로 서로 노력 해 보지 않겠읍니까?
에스겔 16장 35절 부터
35절
"그러므로 너 창녀야 , 나 여호아의 말을 들어라.
참고) 창녀라 함은 계율을 어긴자 이며 특히 음녀는 땅을 상징합니다, 계율을 어기면 하반신 아래의 욕망과
쾌락을 위해 간음 음행을 하게 된다면 행위의 소산점에서 빛이 심판하는 곳은 하반신 오금으로 심판을
인과율의 소이로 빛이 내립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의 형상의 하반신은 주석으로 하나님게서 해 놓으신 것입니다. 깨지기 쉽고 무너지기 쉽습니다,인간은 하반신이 문제입니다.
남편을 두고 아내를 두고 다른 외간 사람과 간음과 간통을 하게
된다거나 혼자 살아도 상대방이 유부남 유부녀와 음행을 저지르면 빛이 하반신 주석으로 된 오금부분을
때려서 다리가 깨지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생명활동은 다리가 없는 상태에서 움직여야 합니다.
기어다니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유혹한 뱀의 이야기를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잘 이해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그냥 이야기라고 심심해서 하나님께서 그냥 뱀을 말씀 하시는 것이 아닌까닭을 이해해야 합니다.이러함을 궁리하면서 창녀 에 대하여 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음행을 한 자는 반드시 회개 해야 합니다, 겉 잡을 수 없는 가장 흉한 지옥으로 가서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지옥이냐?
이를 불교에서 비유하게 되면 간음한 여성이 죽어 염라대왕한테 가면 동강 지옥에
보내게 되는데 구리같은 동 의 봉이 아주 벌겋게 불에 달구어져 있는데 그것이 자궁에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지옥에 간다고 하는 거인데, 불을 안고 사는 고통이 크다 보니 하체 엉치뼈가 녹아 달아나는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뜨거움을 좋아했으니 인과응보로 더 뜨거운 맛을 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과를 받아 나중에 하체의 엉치 이하가 다 빠져나가 못 쓰게 되는 생명으로 나오게 됩니다.
엉치가 없어 하반신의 걷는 수단체를 잃어버렸으니 하체를 끌고 다녀야 합니다., 뱀입니다.
뱀으로 기어다는 뱀종류가 되어 독을 지니고 살아가야 한다 하는 인과율로 빛을 받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네도 매 한가지이고 땅에 기어다니면서 독한 뜨거움은 독을 지니고 거기에ㅡ의존하고 살아내야 한다는
업과를 받는 지옥을 말합니다. 안 겪어봐서 모를 뿐이지요.여자가 아 하나 놔 보세요 하체 전체가
빠져나가는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이브의 뱀의 유혹에 의한 인과를 적용시킨 것입니다.
36절
나 주 여호아가 말하노라. 너는 네 재산을 다 쏟아부었고. 네 연인들과 잠자리를 같이하며
네 알몸을 드러냈다. 너의 모든 혐오스런 우상들과도 그 짓을 했다.
심지어 너는 네 자녀의 피를 네 우상들에 바쳤다.
참고) 네 재산을 다 쏟아부었다는것은 모든 만물의 음식되는 것은 전부 여호아의 것이지 개인 것이 아닌까닭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연인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며 네 알몸을 드러냈다는 것은
연인의 戀(연) 은 실타래처럼 변모된 마음으로 흠모하는 마음을 戀(연)이라 하는데 사람은 흠모하고 사랑하는
대상은 오로지 단 하나입니다, 생각은 하나밖에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빛은 언제나 하나를행한다) 이를 어김으로서 두 마음을 지닌다
라는 죄악스러운 행위를 말 하는 것입니다. "너의 혐오스런 우상들" 이라 하면 주인집에 살짜기 도둑처럼 들어와서 주인노릇 하므로서 재단을 더럽히는 자 를 우상들이라 이름합니다, O 을 믿지 않고 계율을 어겨도 되는
것을 마치 행해도 아무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자 들을 우상이라 이름합니다.
심지어 네 자녀의 피를 네 우상들은 바쳤다는 것은 자녀의 피 는 여호아의 빛이요. 그럼에도 계속하여 자녀들까지
우상을 믿게 하고 따르게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37절
그러므로 함께 즐기던 너의 모든 연인들을 불러 모으겠다. 네 연인들뿐만 아니라
네가 미워하던 자들까지 사방에서 불러 모아 너를 치게 하겠다.
(사방에 너를 아는 자 들로서 흠모하고 간음하던 자 들과 그로서 그들을 미워하는자와
네가 미워하는자 들 모두 세종류을 다 불러 모아 개방하고 스스로 응징하도록 하겠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네 몸을 벌거벗겨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겠다.
(예전에는 아낙이 간통하면 리어카에 홀딱 벗겨 시내를 다니게 했읍니다, 그와 같음으로
응징하기 위하여 스스로 죄학을 만 천차에 공개되게 하겠다는 인과율을 행하는 것이지
강제적인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와같음의 비난을 온 주변에 받는다 함과 같읍니다)
38절
간음하고 살인한 여자들을 심문하듯이 내가 너를 심문하고 형벌을 내릴 것이다.
나의 진노와 질투로 너에게 피의 복수를 할 것이다.(피는 빛, 주) 예수님의 피와 살중에 피)
참고) 내가 너를 심문하고 형벌을 내릴 것이다 나의 진노와 질투로 너에게 피의 복수를 할 것이다 라고
하시는 말씀은, 사람은 반만 보고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나머지 반은 자연하게 인과로서 여오하 선으로 같음의 행에 반연하여 돌이켜 다시 비추어 O 을 행해야 함으로 그와 같음의 반을 도로 돌려 주는 것이니 은유하면 여호아 께서 대위하여 나머지 반을 응징하여 음행의 그와같음으로 거슬러 되 돌려 주어 O 으로 상계해서
죄를 갚게 하겠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항상 다른이에게 간섭질 하지만
주) 예수님은 항상 O 질 하십니다.
39절
내가 너를 네 연인들의 손에 넘겨주겠다(정혼한 배우자들에게) 그러면 그들이 네가 세운 재단들을 헐고, 헛된 신을 섬기던 신당들을 무너뜨릴 것이며, 너를 벌거벗겨 버리고, (네 죄상을 다 공개하고) 네 보물을 빼앗아 갈 것이다.
40절
그들이 무리를 데려와 너를 향해 돌을 던지고 칼로 찌를 것이다.
41절
네 집을 불로 태우고 (불은 불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인과율대로) 다른 여자들이 보는
앞에서 너를 벌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내가 네 음란한 행동을 끝내겠다, 네가 다시는
네 연인들에게 돈을 주고몸을 팔지 못할 것이다.
참고) 빛은 모든 것을 다 보고 다 알게 합니다, 모두가 하나이므로 정보가 훤하게 밝아지는 것을 빛의 운동이라 하고 빛은 생명이요 진리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기때문입니다.자연하게 나팔 부는 것이지요.
42절
그때에야 비로서 너를 향한 내 분노가 풀리겠고. 더 이상 네 일 때문에 질투 하지
않을 것이며 내 마음이 평온을 되찾아 다시는 노여워하지 않을 것이다.
참고) 이를 빛의 반연운동이라 합니다, 반만 보고 어리석게 행한 것이고 계율을 어겼고 우상을
섬겼으므로 이에 반하여 돌이겨 인과율을 거슬러 나머지 반을 행하여 온전한 O 으로 청정함을
세상에 유지하게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성령의 은총이라 이름하는 것이지 질투라는 것은
빛을 청산하는 규정의 성격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뿐입니다. 반을 되 돌려주었으니 더 이상
노여훠 해도 아니됩니다. 그렇지 않읍니까?
그런데 요즈음 여성들보면 남편이 뭔가를 한번 잘못한게 있으면 이것은 무슨 뼈다귀 해장국 우려먹듯이
잘못한것을 또 말하고 또 끄집어내고 심심하면 또 우라먹고 삶아먹습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한번 딱 벌을 줬으면 그것으로 땡 처리 해야 합니다. , 42 절 내용은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중략
44절
사람마다 너를 두고 그 어머니에 그딸이라는 속담을 말할 것이다.
참고) 빛 운동은 윤회합니다. 그 어머니 죄악을 그 딸이 받기 때문입니다.
인과의 인연은 삼대를 계속 내려갑니다, 또 의지작용에 따라 그 죄목에 따라
윤회는 계속 연좌제의 곱절을 행하는 것이니 엄정한 것입니다.
당시 죄를 지은 역사적 심판의 인과응보는 대대손손 그 연좌제로서 인과를 받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죄라 하는 것은 생각의 집착으로 당기는 염력이 생각점인데
이 생각을 당기고 늘 감아쥐는 것을 빛의 운동이라 하는 것입니다.
염라대왕은 빛을 당기는 자를 염라대왕이라 합니다, 상대의 생각을 다기는 능력을
지니고 잇는데 이를 반대로 말하자면 스스로 염라대왕인 것입니다.
예전 잘못한 죄악의 집착된 생각은 항상 자기만 당한다 는 식으로 억울함과 한을
더 짙게 만드는 것이 빛 운동입니다, 원한과 한은 억울함이 강해서 생기는 것이므로
죄를 지은자는 억울함과 한이 많은 것과 같읍니다, 그러므로 회개 하지 않으면
항상 세세생생 또 그 집착된 억울함을 당겨 또 나오고 또 사라지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분명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45절
너는 자기 남편과 자녀들을 싫어하던 네 어머니와 닮았다. 그리고 자기 남편과 자식들을
미워하던 네 언니들과도 닮았다,. 네 어머니는 헷 여자이고 네 아버지는 아모리 남자이다.
참고) 인생 유전인자와 육친간은 항상 바퀴를 굴려 돌아가고 지위가 반대로 섞이고 자리를번갈아 가면서 같음으
로 태어납니다. 생명의 변화를 같음으로 빛 을 행하심이 여호아 이십니다, 육친간의 인과율을 계속 같음이
왔다 갔다 지위만 바꾸면서 같음을 행합니다, 이를 인과율의 작용이라 하고 여호하 선을 행한다 하는
것입니다, 선이라함은 삼매를 말하는데 애매모호하게 사람은 모르게 은밀하게 그렇게 매 한 가운데
스스로 그렇게 이루어진다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46절
네 언니는 딸들과 함께 북쪽에 사는 사마리아이고 네 아우는 딸들과 함께 남쪽에 사는
소돔이다, <소돔과 사마리아>
47절
너는 그들보다 더 타락하여 그들이 가는길보다 한 걸음 더 나갔고. 그들이 저지른 악한 행동보다 더 심하게 행동했다.
참고) 당사자가 그와 같음을 당할때에는 더 자극적이며 적극적으로 더 느끼게하는 것이 응보 의 빛 현상입니다.
빛은 때리면 되지만 주석으로 된 하반신이 마비되는고통은 크다 할 것입니다.
48절
나 주 여호아가 말하노라. 내 삶을 두고 맹세하지만 네 아우 소돔과 그 딸들도
너와 내 딸들처럼 그렇게 악하지는 않았다.
49절
네 아우 소돔의 죄는 다음과 같다.소돔과 그의 딸들은 거만하였다.
많이 먹어서 살찌고 평안했지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무관심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지 않았다.
참고) 거만하다는 근거를 자기들은 평안하면서도 가난하고 불리한 주변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한
것을 거만하다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은 말입니다, 어떻게 취직 잘하고 운이 좋아서
돈좀 벌어보세요, 기고만장하지요, 이게 죄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아니됩니다, 그럴수록 겸손하고 주변과 조금이라도 나누워 먹으며 서로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라도 지니고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대부분 돈을 좀 가진
자들은 자기것만 지키면되고 남한테 피해안주면 되지 하는 방법으로 살아갑니다.
다음생에는 인과율의 O질에 의하여 무시당하는 그 입장을 다시 돌려받아 그 생활을
해서 갚아야 합니다, 이를 경계하시는 주) 여호아의 말씀이십니다.
50절
소돔과 그의 딸들은 교만했고, (소돔 애비가 그러면 딸들이 교만 할 수 밖에없읍니다.
인과이고 육친법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집안 가장이 잘 해야 하는것입니다)
내 팡에서 혐오스러운 짓들을 저질렀다, (자기가 잘나면 벨 짓을 다하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아는 것처럼 내가 그들을 쫓아냈다.
51절
사마리아는 네가 저지른 죄의 절반도 죄를 짓지 않았다. 너는 그들보다 혐오스런 짓을 더 많이 저질렀다. (죄를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더 저지르지 않았다고 지적질을 많이 하고
거만하게 안하무인으로 결백된 사람처럼 심판하고 저질스럽게 굴었다)
네가 저지른 혐오스런 짓 때문에 네 언니와 아우는 오히려 착한 사람으로 보일 정도였다.
(죄를 아주 헷갈리게 기준을 잡게 만들었다)
52절
너에 비하면 네 언니와 아우가 저지른 죄는 가변운 심판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네가 저지른 죄가 너무 혐오스럽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착한
사람처럼 보였다. 네가 부끄러운 줄 알고 수치를 당함이 마땅함이니라.
참고) 주변을 이렇게 보게되면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앞서고 자신한테 당사자가 서운하게 했다고
마음먹으면 은근히 자기 지위를 이용하거나 다른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험을 부추켜 더 부풀리어
그 당사자를 없는 가운데 흉을 주며 아주 나쁜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수작을 부리는 것이 태반입니다.
이를 주) 여호아 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반연하여 거슬러 그와 같음은 마땅한 수치심과 부끄로운
것을 되 같아 돌려 주겠다라는 빛을 비추심을 말씀하십니다.
53절
그러나 내가 소돕과 그 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겟다. 사마리아의 그 딸들으 운명도
회복시켜주겠다. 글고 그들과 함게 너도 회복시켜주겠다.
참고) 죽이지 않고 멸하지 않으면 가벼운 죄의 댓가를 치르게 하여 O 으로 회복되었기 때문이
다시 살아가는 정도로서 운명을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54절
그때에 너는 수치를 당하고 네가 저지를 모든 짓 때문에 부끄러워질 것이다.
네가 젖른 죄가 너무 커서 네 언니와 아우가 오히려 위로를 받을 것이다.
참고) 살아가면서 보게되면 괜히 억울한 일도 당하고 부끄러운일도 겪게 됩니다, 이는 전부 인과율을
전자에 저지른 어떠한 잘못된 가벼운 죄악을 갚는 과정이 됩니다. 세상사의 우연은 없읍니다.
우리들이 인식하지 못한 잠재성의 (프로이드는 이를 리비도 현상이라 하였음) 은민한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그만큼 반연하여 거슬로 갚아 행하므로서 언제난 청정한 마음 O 으로 되돌려 주시는 분이
주) 여호하 선 으로서 하나를 행하심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55절
네 아우 소돕과 그 딸들이 옛 지위를 다시 찾을 것이며 (죄를 다 갚았으니까)
ㄴ 언니 사마리와와 그 딸들도 옛날에 누렸던 지위를회복 할 것이다, (O으로 회복했을것이다) 그리고 너와 네 딸들도 옛지위를 다시 누리게 될 것이다.
56절
네가 교만하던 때에 너는 네 아우 소돔을 무시했었다.
57절
즉 네 죄가 드러나기 전에는 네 아우소돔을 무시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람 여자들과
그 이웃들이 너를 조롱하고 불레셋 여자들까지너를욕한다, 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너를 경멸한다.(56절의 행위에대하여 인과율로 반연하여 돌이켜 돌려 받는다는 의미로서
O 을 행합니다)
58절
너는 네가 저지른 음란한 죄아 혐오스언 일들에 대하여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나 여호아의 말이다.
참고) 부끄러움을 알고 회개하고 마땅한 인과를 책임지는 자세를 지녔으므로 다행하게 뱀으로 전락하는
지옥은 면한것입니다.
다음에는 16장 59절 부터 영원한 언약편으로 계속해서 소개하겠읍니다.-성령의 은총이 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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