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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대영제국大英帝國 국왕
에드워드8세에서
윈저공公으로...
글,편집:묵은지
'가을바람 소슬하니 낙엽이 우수수 지고요...' 문득 '신고산(新高山) 타령'의 한 소절(小節)이 떠올라 그냥 흥얼거려 보았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제법 스산한 갈바람이 불어 목 부위(部位)가 움추려드는데 어쨌던 가을은 남자의 계절(季節)이라 했던가요? 누구라도 이맘때면 남자로서 그럴수 있겠지만 묵은지의 마음도 어김없이 싱숭생숭 해지는 것 같습니다. 무언가 보일듯이 보이지 않고 잡힐듯이 잡히지 않는 이런 남자의 얄궂은 심정(心情)을 행여 엿보기라도 할세라 드높고 맑은 이 가을의 하늘에 그 옛날 대영제국(大英帝國)이란 이른바 해가 지지않는 나라로도 잘 알려져온 막강(莫强)한 나라인 영국의 왕실(王室)에서 있었던 사랑의 이야기 한 편을 쫘악~ 들추어 펼쳐 볼까 합니다. 묵은지의 기억(記憶)으로도 어릴적 신문지상(新聞紙上)에 한창 떠들썩 했던 '세기의 사랑' 운운(云云)하며 윈저공의 사망(死亡) 소식과 그동안의 그가 살면서 만들어냈던 많은 사랑의 이야기와 행적(行跡)을 앞다퉈 보도(報道)하여 사춘기(思春期)에 접어든 묵은지의 예민(銳敏)한 감성(感性)을 자극했던 인상깊은 사건으로 어렴풋이 생각납니다.
그 당시에는 묵은지도 첫사랑의 가슴앓이를 앓고있던 때여서인지 그들의 사랑이야기가 그렇게 멋져 보일수 가 없었습니다. 하기야 우리나라에서도 낭만적(浪漫的)인 분위기 꽤나 찾는 척 했던 뭇 청춘(靑春)들이 서로를 유혹(誘惑)하며 유행(流行)시켰던 '사랑이더냐 권세(權勢)이더냐'라는 말의 실제 주인공(主人公)이며 이른바 '세기(世紀)의 사랑'으로 떠들썩했던 '에드워드8세' 왕과 '심프슨 부인'과의 사랑 이야기는 그 시절(時節)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세인(世人)들의 가슴을 놀라고 설레이게한 매우 파격적(破格的)인 사건(事件)이었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세기의 러브스토리'였습니다. 나중에 그 속 사정과 자세한 내용이 밝혀지면서 많은 실망(失望)을 안겨 주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1937년 6월 3일, 윈저공과 심프슨 부인은 프랑스 외곽 교회에서 영국 왕실의 어떤 누구도 참석(參席)하지 않은 채, 조촐한 결혼식을 올립니다. 신랑과 신부의 그때 나이는 42세와 40세 였습니다. 사람들은 후에 이것을 '세기(世紀)의 결혼식'이라 부르며 아름답게 꾸미고 치장(治粧)하려 했습니다. 과연 그랬을까요? 왜 그들은 자신의 왕실에서 조차 인정
(認定)을 받지 못하고 외면과 버림을 받으면서 결혼식을 치러야 했을까요? 묵은지는 그들의 사랑이 무슨 문제를 안고 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그 당시 대영제국은 세계의 열강(列强) 국가 가운데서도 가장 앞선 대국(大國)이었으며 그 나라의 왕은 당연히 세계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굉장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 위치에 있는 왕이 국가적(國家的)인 대사(大事)도 아닌일로 사랑과 결혼 때문에 양위(讓位)를 하고 그래서 겨우 결혼을 할 수 있었다니 의아해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많은 궁금증을 풀기위해 묵은지는 그 시대(時代)로 돌아가서 이들이 선택(選擇)한 사랑에 어떤 영향(影向)과 역사적(歷史的)인 당시의 배경(背景), 정치적(政治的)인 이유, 그리고 그 밖의 어떤 내막(內幕)이 있었는지를 알아 보겠습니다.
에드워드 대영제국 황태자(皇太子)는 1894년 부왕(父王)인 조지 5세와 메리 여왕 사이에서 영국 국민들의 큰 기대(期待)와 축복(祝福) 속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미 17세에 황태자의 지위(地位)에 올랐으며 차기(次期)의 왕으로써 착실하고도 순조롭게 단계적(段階的) 과정과 수학(修學)을 쌓았습니다. 또한 그의 수려(秀麗)하고 뛰어난 외모(外貌)는 차기 국왕으로써 영국 국민들의 자부심(自負心)이었으며 온 국민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고 멋장이 황태자로서 패션 감각(感覺)도 뛰어나 그가 선택(選擇)하거나 입고 다니는 옷은 세계의 유행(流行) 패션을 선도(先導)하여 내노라하는 뭇 남성들의 패션을 이끄는 남다른 감각(感覺)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에드워드의 패션은 그 시대부터 줄곧 지금까지 세계의 유수(有數)한 디자이너들 조차도 선망(先望)의 대상이 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잘난 것은 잘난 값을 한다고 했던가요? 에드워드는 자신의 우월(優越)한 환경(環境)과 외모의 조건으로 바람둥이의 기질(氣質)을 유감없이 발휘(發揮)하며 젊은 시절을 자유롭게 구가(謳歌)하면서 지냈습니다. 오죽하면 아버지인 조지 5세가 때이른 황태자의 지위부여(地位附與)를 후회하며 적당한 다른 적자(嫡子)를 물색(物色)하기도 했었다는데 그 반면 격식(格式)을 따지지 않는 그의 자유분방(自由奔放)한 행동(行動)은 영국의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기도 했습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말입니다.
에드워드와 '월리스 심프슨 부인'이 처음으로 운명적인 만남을 이루게 된 것은 1931년 6월의 일로, 두번째 결혼한 사업가(事業家)인 남편 '어니스트 앨드리치 심프슨'의 재력(財力)을 바탕으로 사교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심프슨 부인이 궁(宮)에서의 파티에 초대(招待)를 받으면서 부터입니다. 패션에 남다른 관심이 많았던 에드워드는 당시 파란색 옷을 즐겨입던 심프슨 부인의 인상적인 취향(趣向)에 호감(好感)을 느끼기 시작하였으며 에드워드는 곧바로 심프슨 부인에게 관심을 보이며 말을 건네고 요즘 말로 한마디로 적극적인 작업(作業)을 걸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심프슨 부인은 엄연히 남편이 옆에있는 유부녀(有夫女)였으며 아무리 호감이 간다하여 내놓고 그렇게 쉽게 유혹(誘惑)을 받는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한 방에 '뿅~'간 이 철없는 남녀는 이후부터는 아예 노골적으로 대놓고 연애(戀愛)질을 해대느라 정신줄을 놓아버렸습니다. 공식적(公式的)으로는 손님 초대 였지만 이들은 거의 매일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며 사랑을 즐겼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 심프슨 이라는 여자도 여간 배짱이 두둑하고 대담한 여자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남편을 멀쩡하게 옆에두고 연애질이라니...나중에는 아예 대놓고 에드워드의 애완견(愛玩犬)을 돌본다는 핑계로 안주인 행세(行勢)까지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에드워드 황태자의 연애(戀愛)는 주로 자신이 머무는 거처(居處)에서 이뤄졌고 둘의 관계는 더욱 깊어져 갔습니다. 비록 남편의 재력에 의해 단숨에 런던 사교계의 떠오르는 별이 되었지만 너무나 멋진 대국의 황태자와의 로맨스로 심프슨 부인의 입장에서는 과거 접근조차 어려웠던 황실(皇室)을 제집 드나들듯이 하며 자신의 향상(向上)된 사회적 지위를 만끽(滿喫)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에드워드 역시 권위로 채워진 버킹검궁의 답답하고 딱딱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명랑(明朗)하고 쾌활(快活)한 성격(性格)의 심프슨 부인과 함께 격의(隔意)없이 자유분방(自由奔放)하고 활기(活氣)찬 미국식 생활을 매우 재미있어하며 즐겼다고 합니다.
미국 평민 출신으로 이혼 경력이 있는 유부녀(有夫女)이며 외모 역시 그리 아름답지 않은 심프슨 부인이건만 그녀는 그녀의 타고난 세련미(洗煉味)와 우아(優雅)한 스타일로 영국의 사교계(社交界)와 황태자를 매혹(魅惑)시켰고 에드워드는 그녀를 못잊어 영국 국왕이 되었을때 뻔뻔하게도 자신의 끗발로 심프슨 부인의 남편에게 이혼(離婚)해 줄 것을 요구(要求)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영국에서 사업을 해야하는 입장인 처지로 어쩔수 없이 굴복(屈伏)당한 남편 '어니스트 심프슨'은 결국 이혼을 결정(決定)하여 심프슨 부인은 두번째 남편과도 이혼을 하게 되지만 심프슨 부인의 이런 모습이 결코 영국 국민들 눈에는 곱게 보일리가 만무(萬無)합니다.
마침내 이 커플은 영국 정부와 의회에 1935년 결혼을 결정, 통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의회에서 이 혼인(婚姻)을 당연히 반대(反對)를 하였습니다. 영국 왕실법(王室法)에는 의회가 승인(承認)하지 않으면 혼인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영국의회는 심프슨 부인의 신분(身分)도 신분이지만 두번이나 이혼한 이혼녀(離婚女)로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총각 황태자의 배우자(配偶者)로서는 너무도 불합리(不合理)하다는 결론(決論)을 내린 것입니다. 또한 이들의 관계가 국민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상대적으로 모든게 취약(脆弱)했던 심프슨 부인에 대한 좋지않은 여론(與論)이 미움이 더해져 국민들의 지지(支持)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와중(渦中)에 1936년 2월 20일 조지 5세가 패혈증(敗血症)으로 서거(逝去)를 하고 뒤를이어 에드워드 황태자가 에드워드 8세로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런 상황(狀況)이다보니 심프슨 부인과의 두사람 문제는 곧 국가 전체의 중요한 관심사(關心事)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젊고 유능(有能)한 국왕이 두번이나 이혼한 이혼녀와 결혼하는 그런 일은 있을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수적(保守的)인 국민들에게 미천(微賤)해 보인 심프슨 부인이 국모(國母)로서 마땅할리가 없었겠지요. 점점 골머리 아픈 국왕의 결혼문제는 내각(內閣)으로까지 번져 심지어는 왕과 내각이 대립(對立)하는 양상(樣相)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왕실에서도 에드워드 8세에게 심프슨 부인과 결혼을 굳이 고집한다면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통첩(通牒)을 하였습니다. 권력의 자리와 사랑을 모두 차지하려 했던 에드워드 8세는 왕실과 의회를 향하여 항변(抗辯)을 거듭하였지만 국민과 정부는 끝내 그의 항변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10개월 여를 그렇게 버티었던 에드워드 8세는 결국 즉위(卽位) 325일 만인 1936년 12월 11일 밤 10시에 BBC 라디오 방송을 통해 그 유명한 하야(下野)의 성명(聲明)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없이는 왕으로서의 의무(義務)를 다 할 수 없고 그 무거운 책임(責任)을 짊어질 수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라는 요지(要旨)의 연설(演說)이었습니다.
이렇게 에드워드 8세는 동생인 조지 6세에게 양위를 하고 대국의 왕에서 '윈저공'으로 신분이 바뀌어 홀연히 쫒기듯이 오스트리아로 떠납니다. 그 후 윈저공은 그의 원대로 심프슨 부인과 1937년 6월 3일, 프랑스 외곽의 '투소' 교회에서 왕실가족 어떤 누구도 참석하지 않은 채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립니다. 하지만 퇴위(退位) 후 에도 이들 부부의 천방지축 독특한 행보(行步)는 영국 정부를 가끔씩 당혹(當惑)하게 만드는데 2차 세계대전이 발발(勃發)하던 때 느닷없이 독일과 친하게 지내자며 갑작스럽게 나치 독일을 방문(訪問)하여 영국 정부를 곤경(困境)에 처하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이후에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유스러운 민간(民間) 외교 활동(外交活動)을 하였는데 그 공과(功過)는
확인 할 바가 없습니다. 만약의 일이지만 윈저공이 왕위에 계속 있었다면 영국과 독일과의 관계도 알 수 없었을 것이고 2차 세계대전의 결과도 어떻게 달라질수 있었을지도 모를일 입니다. 하지만 윈저공은 왕으로서의 능력은 부족했을지 모르겠으나 멋진 외모의 모습만은 시대를 앞선 감각의 소유자(所有者)로서 실제로 윈저공은 남성복(男性服)계에서는 지금까지도 굉장히 중요한 인물로 연구되고 있습니다. '윈저노트' 라는 넥타이 매는 법을 창시(創始)하였으며 '윈저공 스타일'이라는 격식(格式)있는 정장(正裝) 스타일의 선구자(先驅者)이기도 합니다. 정장 스타일에서도 칼라가 넓게 벌어져 있는 스타일의 셔츠를 '윈저 칼라 셔츠'라고 부르며 현재에도 품격(品格)높은 정장(正裝)차림의 한 부분으로서 변함없이 선호(選好)하며 유지(維持)되고 있습니다.
워낙 외모가 뛰어난데다 패션감각도 남달라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그는 여성들에게 환대(歡待)를 받았으며 특히 그의 사랑의 이야기가 영국 국가적인 체면상(體面上) 포장(包裝)이 잘되어 알려졌음으로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로맨티스트들에게는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대국의 왕관(王冠)을 포기했다고? 이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멋진 이야기입니까? 이들 부부가 가는 나라마다 항상 수많은 취재진(取材陳)들의 취재 경쟁(競爭)이 굉장했습니다. 취재진들 앞에서 이들 부부는 거리낌없는 애정(愛情)을 과시(誇示)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너무 늦은 나이에 맺은 부부여서인지 30여년이 넘는 결혼 생활에서도 자녀(子女)는 없었습니다.
이들 부부가 유난히도 애완견을 좋아했던 이유도 자식(子息)이 없는 부부에게 어떤 이해(理解)가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자식이 없는 무료(無聊)함을 반려견(伴侶犬)을 통해 달래었던 말년의 부부. 어찌되었건 간에 윈저공은 세계 어느 역사를 보더라도 나라가 크거나 적던 간에 왕이 되기 위해서 친지나 가족, 부모 자식까지도 죽음으로 내몰은 경우는 허다하게 있었어도 사랑하는 여인으로 인하여 왕위(王位)까지 넘겨주는 왕은 없었던 점으로 볼때 유일한 기록을 세운 왕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윈저공은 1972년 5월 28일, 지병(持病)으로 자택(自宅)에서 숨을 거두었고 심프슨 부인 역시 그로부터 14년을 살다 남편 곁으로 가버렸습니다. 영국 왕실은 두 사람을 평소에 그들이 지내며 사랑을 나누었던 '윈저궁' 뜰앞에 나란히 잠들게 하였습니다.
스캔들의 '윈저궁'이 그 옛날 사랑의 이야기를 품고 웅장하게 버티어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