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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마음의 알아차림
깨달음을 제한하는 인류지성에 대한 이야기!!
2021년 3월 11일
오랫동안 마음에 와닿지 않던 호모스피리투스 13장 마음편이
아주 깊숙히 이해가 되고 그것과 하나된 느낌을 !!
영적 스승님 호킨스 박사님께
마음속 깊이 감사와 존경과 깊은 사랑을 보냅니다
9.28
신념체계, 로보트, 자동화된 반응, 노예화된 정도
개념적 이원성, 사회적 이원성, 선악 이원성, 궁극적 실상의 이원성
기본공리의 한계
에고의 해체, 소멸
모든 것을 유보없이 신에 내맡겨라!!!
호모스피리투스 13. 마음
대다수 인류는
여전히 200이하로 측정되며
따라서 무감정, 욕망, 증오, 두려움, 분노, 분개,
복수와 같은 원시적 감정에 지배당하고 있다.
반면에
보다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의식이 진화함에 따라
사람은 온전성의 수준인 200을 넘어서고
사람들은 논리, 이성, 교육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갈수록 '지성에 의존'한다.
현대 문명사회는
300대에서 400대로 측정된다.
(현재 미국은 431로 측정).
그래서 지성은
영적 앎의 발전을 가로막는
일차적으로 심각한 부정성은 아니다.
하지만
이성 그 자체는
깨달음에 장애가 된다.
세계 인구중에서
단 8%만이 400대의 의식수준에서 기능하는 반면
우리는 의식수준이 400대를 넘어서는 일의
통계적 희소성에 주목한다.
인구의 4%만이
500이상으로 측정되고
540이상으로 측정되는 이들은 0.4%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400대는 높은 영적 수준을 향해가는
대로를 나타낸다.
지성의 위대한 천재들과
역사적으로 수세기에 걸쳐있는
한시기에 나타난 과학과 발견의 천재들은
정확히 499로 측정된다.
현재와 과거를 막론하고
가장 위대한 과학자들은
대부분 상당히 종교적이었고,
그중 일부는 유명한 종교 논문을 쓰기도 했다.
유명한 과학적 천재들을 포함한
가장 빛나는 지성의 공통된 특징은
신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천재가 최고도의 발달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갈수록 분명해지고 갈수록 인정된다.
그렇다면
그러한 앎의 수준에 있는 의식이
유독 499라는 측정수준에서
멈춰버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반복되는 현상을
설명해주는 무엇인가가
지성 그 자체 속에 있음이 분명하다.
비록
세계 인구의 8%가 400의 의식수준에 도달했고,
발전된 현대사회에서 교육받은 읽고 쓸줄 아는 지성적인 사람들은
지성과 교육을 표준으로 여기지만,
일상생활의 동기부여에서
이성과 논리가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인류 대다수에게 사정은 명백히 다르다.
측정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영적의지, 영적 결정, 영적 의도와 봉헌'이다.
그것은
행동 및 자신과 타인에 대한
기대를 좌우하는 수준이다.
측정수준은
그것을 기준으로 가치와 동기가 정해지고
분별이 이루어지는 잣대이다.
일정한 수준의 기준들이
그 다음의 의식을 지배하고,
노력, 가치, 인간 에너지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에고의 복합적인 세트를 지배한다.
이성, 논리, 정보가
그리고 그것의 표현인 과학, 기술, 산업이
유력한 제도가 된다.
그래서
이러한 것이
집단적 사회문제를 해결하라는 요청과 압박을 받는 권위자가 되고
심리과학은 감정적, 개인적 갈등에 대한
해결책과 해답을 갖고 있을 거라는
기대를 받는다.
이성에 대한 이러한 신앙은
컴퓨터 시대의 과학과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더욱 깊어지는데,
사람들은
이 시대의 모든 문제가
연구라는 인간사회의 위대한 희망을 통해
결국에는 정복될 거라고 믿고 있다.
현대인은
이렇듯 지성, 이성, 논리를 굳게 믿고 있다.
현대세계에서는
비록 인구의 상당비율이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사회의 일차적 추진력은
지성의 발달을 강조한다.
인간은
지금 여기서의 일상적 생존이라는 도전에 직면에 있는 까닭에
먼 과거로부터 끌려와서
다시 가설적인 먼 미래로 투사된 것으로 보이는 종교는
당분간 유보해 둔다.
그리하여
종교적 진실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일은
좀더 나아가 들고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이 보다 적절해 보이는
인생의 후반기까지 미뤄지는 일이
많다.
아주 최근에 의식연구가 출현하기 전까지 종교는
역사와 관련되고
수천년 전 이국의 문화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지성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였다.
정말 흥미롭다고 할 수 있을만한 정보는 오직 주기적으로 발견되는 고고학적 유물이나 역사적 문서의 단편, 혹은 일부 고대문헌의 지질학적 확인 등이었다.
교회의 가르침은
먼 과거의 연대기적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래서
현대인에게 역사적 종교는
일련의 자명한 도덕적 교훈을 제외하면
현대생활과는 거의 무관한 것으로 보였다.
그에 대한 불만족으로 인해
최근에는 일상활동에서
영적 진실과 종교적 개념을 경험적으로 활성화시킬 것을 강조하는
무교파 교회가 출현했다.
이른바 3무無를 표방하며 '예수 정신을 따르는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궁극적 질문을 던지는 교회 활동의 시금석을 본격화했다. 교파, 유급 목회자, 그리고 예배당 없는 교회 구현에 대한 고민이 그것이다.
대형 교회의 권력화, 물신주의, 목회자 세습 문제 등이 잇따라 불거지면서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24년 연혁의 ‘새길교회’(saegilchurch.or.kr)가 새삼스럽게 주목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강남청소년수련관 일요일만 임차
새길교회는 흔히 ‘3무(三無) 교회’로 알려졌다. 교회 건물이 없고, 담임목사가 없고, 교파가 없다. 교회 소유 부동산이 없어 서울 청담동 강남청소년수련관을 일요일에만 임차해 예배를 본다.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가 중심이 돼 교회를 운영한다. 장로, 집사, 권사 등의 직책도 없다. 모든 신도가 ‘형제, 자매’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특정 교파(교단)에 속하지 않고 다양한 종파의 교인을 폭넓게 받아들인다.
인간 삶의 난제에 대한 종교의 답이
표면적으로 불충분했던 까닭에
지성과 이성의 발달이 강조되기에 이르렀는데,
우리는 이를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로 대표되는
눈부신 지적 발전의 출현에서 볼 수 있다.
마음자체가
철학 연구의 주제가 되었고,
그 중에서 인식론은 가장 큰 가지가 되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지식탐구 자체로 이어지는 부름이었다.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아는가?
마음은 자신이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마음의 인식능력은 증명되거나 입증될 수 있는가?
과학과 논리의 법칙이
존재론, 형이상학, 우주론 그리고
지성의 작용에 대한 내적 성찰 가운데서
출현했다.
역설적으로
현대 물리학은
비과학적이라고 하는 형이상학 논문의
최종산물이다.
최근 양자역학과 고등이론 물리학의 수수께끼는
과학적 사고의 철학적 기초에 대한 관심을 일깨웠는데
왜냐하면 철학적 기초없이 이해는
맥락에 의해 설정된 한계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흥미롭고 매력적이지만
진짜 의문은 그 다음에 솟아난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철학과 인식론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상당한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이성, 논리, 지성이 신의 실상 및 신성의 본성과 갖는 관련성에 대한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 의문이다". 되풀이해서 표현된 의문은 다음과 같다.
인간에게는
신성의 성질을
실제로 생각하고 알고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그리하여
철학적 논쟁은
의식의 성질에 대한 고찰로 이끄는데,
그러한 고찰없이는
그같은 주제에 대한 어떤 담화나
인식도 있을 수 없다.
결국
모든 과학적/철학적/형이상학적/심리학적/지적/종교적/영적
혹은 의미론적 대화의 결말은,
의식과 주관성이라는 앎의 기층에 대한
앎으로 용해된다.
최종적 각성은
의식자체,
즉 알고 인식하고 느끼고 감각하고
혹은 논쟁조차 하는 능력이
모든 인간경험에 앞서 선험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각성과 함께
되풀이 되는 중대한 의문이
올라온다.
저 의식의 근원은
사적인 자기인가?
혹은
그것은 인간 내면에 있는
현존의 한 성질, 신성의 성질인가?
이에 대한 답이
400대와 500대의 수준차이를 가른다.
의식연구의 과학적 기초를 다루는
지극히 명석한 이름난 연구자와 저술가들은
400대 후반으로 측정된다.
이는
연구자의 의식이
자신을 마음으로 본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해는 우주마음으로부터 선물,
즉 모든 앎이나 이해를 가능케하는 기층인
로고스로서의 신이 아닌,
자신의 생각의 산물로 맥락화된다.
(로고스로서의 신에 대한 각성은 850수준).
400대의 수준은
자기를
생각, 사고, 마음, 이성, 논리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그것은
직관과 비선형적 영역을 불신하는데,
설령 그러한 영역이
마음 자체의 근원이나
기층이라고 해도 그렇다.
지성이 걸려든 함정은
그 자체를 생존의 근원으로 보는 것인데,
그러나
지성은
참나가 그것으로
인간형상속에서 존재를 지탱하는
메커니즘이나 도구에 불과하다.
멋 모르는 지성은
자신이 생각하고
잘 알줄 아는 물질적 뇌 덕분이라고 추측하지만,
뇌 역시 그것을 통해
선형과 비선형이 상호작용하는
수단, 메커니즘, 도구일 뿐이다.
생명의 근원이
물질적인 것이라고 믿느냐 혹은
그것이 영적인 것임을 각성하느냐에
따라 400대와 500대가 나뉜다.
이미 설명한 의식연구기법을 이용하여 정신화와 뇌의 관계를 탐구한다면 우리는 생각이 뇌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뇌는
생각을 통해
활성화되며
형상의 물질적 영역내에서
뇌는 생각의 상관물인데,
이는 육체가
에테르체의 상관물인 것과 같다.
그 둘은
이성질체이다.
라디오가
보이지 않는 에너지파를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로 전환시키는 것처럼
뇌는
사고형태의 에너지를
수신하는 기구이다.
그리하여
의식의 비선형적 영역에 있는
끌개장들은 수많은 마음과
수많은 뇌에 동시에 영향을 미친다.
보이지 않는 무선 송신기처럼
끌개장은 그것과 일치하는 수신기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장을 방사한다.
그 메커니즘이 일치이지
인과관계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라
측정가능한 의식수준은
그 다음에 끌개장의 주파수와 동조된
일치하는 사고형태를 포함하는
독립된 장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장은 비슷한 사고형태를 유지하고 지지하며
그러한 것에 고향이 되어준다.
어느 개인의 마음이
그러한 의식수준과 동조된다면
장은 관련된 사고의 출현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관련된 감정들이
장에 대한 정렬과 몰두의 에너지를 높이고
나로서의 장의 개인화를 고조시킴에 따라
이것은 동승현상으로 귀착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일제히 격앙되고 행동하는 것을 본다.
가장 극적인 사례는
히틀러의 선동에 반응하여 터져나오는
주기적 대중시위다.
대중 히스테리의 전염성은 유명한데
그것은 선전가들이 애용하는
도구였다.
군중행동으로 드러나는
암시에 걸리기 쉬운 이 성질은
다른 형태의 정보와 의사소통에 대한
대중적 반응에서는 덜 명백하게 나타난다.
이데올로기는
대중적으로 되고
저절로 확산되는 경향이 있다.
뉴스매체는
대중적 반응과 히스테리를 촉발하는데,
광고와 영화, 스포츠 및 유명한 세계적 사건들과 같은 것에 대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역시
마찬가지다.
대중의 집단적 심령은
마치 거대한 잠재적 반응 장과도 같이
이쪽 혹은 저쪽으로 행진해가라는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대중은
조종하기가 대단히 쉬워서
조종게임의 달인들은
대중을 마치 거대한 악기처럼 다룬다.
공식은 표준화되었다.
예를들면 구역질나는 무차별적 살육장면이 나오는 진부한 공포영화, 감상적이고 슬픈 어린 소녀이야기, 집에 있는 수영장에서 익사한 어린 것들, 조국을 모독하는 분통터지는 이야기, 부도덕한 고위성직자, 젊은 층의 타락, 명사 살인사건, 불안을 자극하는 최근의 의학적 발견이 있다.
그리고 어디서나 빠지지 않는 정당한 정치이야기, 최근의 전쟁참사 이야기, 항의 시위가 따르는 최근의 권리침해 사건들이 있다. 정치적으로 편향된 뉴스매체는 그 다음에 사건의 어느 한편을 단순히 수초 혹은 수분 더 비춰준다. (요즘 선호하는 방식은 갈등의 어느 한편에 있는 무고한 민간인 피해자들에게 텔레비전 뉴스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갈등하는 세력의 어느 쪽을 피해자로 정하고 어느 쪽을 가해자로 정할 것인지는 뉴스 편집자의 정치적 편향에 따른다).
그래서
대중매체는
인류를 자극과 반응을 예측할 수있는 집단으로 보는데,
인간 집단의 각 부분은
적절한 상징, 구호, 위치성을 이용하여
조종하고 조직화할 수 있다.
토론
집단망상과 군중의 광기는 수백년동안 유명했는데, 깨달음을 구하여 보통의 의식수준을 초월하고자 노력하는 개인에게는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군중심리의 연구는
순진하게도 개인적이고 독특한 것으로 여겨졌던
신념체계의 환상적 본성을 드러내줍니다.
의식의 매 수준은
그 기본적 위치성들로 인해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위치성들의 공개적 전시를 살펴본다면
그러한 것이 자신의 개인적 속성이라기 보다는
일반적 장의 비개인적 측면임을 밝혀내고
아는 것이 훨씬 쉬워집니다.
의식의 매 수준의 장을 떠받치는 것은
다른 곳에서 열거한 적이 있는
기본공리와 신념체계들이지요.
그 다음에는 순진하게도
개인적 의견으로 여기는 것이
단순히 장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많은 기본 공리가
대단히 폭넓게 수용되어
그에 대한 동의가
자동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지요.
우리는
이것을 '공리에 영향받는 현상'으로 부를 수 있는데,
멋모르는 사람에게서
이 현상은 일차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납니다.
영적 제자에게는
이 앎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공리는
하나의 맥락을 형성하는데,
이는 그 결과로 생겨나는
지각과 신념의 이원성과
더불어 속박이자 한계이기 때문이지요.
제한적 공리들의 원리를 보여주는 일반적인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모든 갈등에는 옳은 쪽과 그른 쪽이 있다.
2.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
3. 모든 것은 누군가에게 책임이 있다.
4. 불운한 사건과 사고는 누군가의 탓이다.
5. 모든 질문에는 답이 있다.
6. 모든 것에는 대립물이 있다.
7.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다.
8. 모든 사람이 이성적일 수 있다.
9. 모든 사람의 실상은 사실상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10.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보다 더 낫다
11. 시간은 진행한다.
12.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보다 더 가치가 있다.
13. 이성은 믿을만한 도구다
14. 논리는 증거다
15. 저밖에는 자립하고 발견가능하며 객관적인 실상이 있다.
16. 인간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동물보다 우월하다.
17. 모든 사람이 옳고 그름을 안다
18. 죄인은 벌을 받아 마땅하고 착한 사람은 보상을 받아 마땅하다.
이 공리들은
형상의 영역과
에고구조 자체를 초월하는데 있어
제한적 구조와 한계를 창조했다는 점에서
서로 달라보일지 몰라도
실제로 모두가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우리는 500수준이
힘의 큰 상승을 표시할 뿐 아니라,
섭씨 0도에서 얼음이 물로 변하듯
성질 또한 나타낸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자비, 용서, 관용, 인내, 참을성, 양육,
아름다움, 따뜻함, 친근함, 개방성, 유연성,
유쾌함, 일치, 유머, 내맡김, 놓음, 눈감아줌,
애정, 사랑, 초월, 열린마음, 연민, 평화,
부드러움, 충실함, 품위, 자선과 같은 성질이
중요성을 얻기 시작하지요.
그 다음에는
시비분별을 보류하고
위치성을 포기하는 능력 그리고
논리적으로 납득하기보다는
직관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내맡김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애매함을 견디는 능력이 커지고
더 이상 올바르거나 승리하거나
타인에게 우월감을 느낄 필요가 없지요.
사업의 영성이 현저히 중요해지며,
영적 식별능력이 커지며
의도에 대한 감수성이 고양됩니다.
맥락에 대한 앎이
점진적으로 내용보다 더 중요해지게 됩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하고
온전성이 편의성보다
더욱 큰 실용적 가치를 갖는다는 사실이
자명해집니다.
행복의 근원은
얻어내야 할 어떤 것이라기 보다는
타고난 내적 성질임이 밝혀집니다.
존재하는 전부의 타고난 아름다움이
점차 명백하게 되지요.
만물은
동등한 가치를 갖게 되어
전 생명과 전 존재는
그 현존으로 그리고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존중받습니다.
존재하는 전부의 완벽함이
전면에 드러나고
완벽하지 않음의 환상은
해소되지요.
모든 것 하나하나가
단순히 그것인 것으로 있음을 통해서
그 타고난 존재로서 나타나는
자신의 존재의 완벽한 표현입니다.
일체가
존재의 기적을 드러내며
그러므로 일체가 예외없이
자신의 존재로 말미암아
다른 일체와 동등합니다.
존재의 기적은
그 밖의 모든 것을
대체하는 성질이지요.
창조의 전부임의 성스러움이
자명한 것으로 부상하고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의 나타남은
자신의 타고난 신성을 입증합니다.
관찰대상에
더이상 추정이 투사되지 않을 때
신성의 광위가 참나는 물론
세계로부터 빛납니다.
참나로서의
신의 광휘는
무한한 나로서
빛을 발하지요.
내용에서 독립한
"있고,
인식하고
존재하고
알 수 있는 능력"은
의식으로서의 생명의 표현으로
생명에 대한 선험적 기층입니다.
존재하며
존재를 의식하는 것이
모든 논리, 이성, 혹은 증거를 대신하지요.
앎은
자신이 안다는 것을
압니다.
신을 알기 위해서는
사람이 존재하는 의미를 알고,
완전히 이해할 필요가 있을 뿐입니다.
동물조차도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을 각성하지요.
그 다음에
가슴의 길은
지성을 우회하여
지성과 이성의 추구보다는
사랑의 완성을 믿습니다.
사람에게
지성과 논리는 도구일뿐,
그것이 나라는 사람은 아닙니다.
마음은
마음을 추구함을 통해
마음을 초월할 수 없으며,
오직 마음이 구세주라는 환상을 내맡길때만
그렇게 할 수 있지요.
사람은
사랑인 가슴을 통해서만
사랑 자체에 의해
마음의 한계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제한된 신념을 극복할 힘을 가지고 있지요.
이 지점에서 구도자는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충고를 받습니다.
"모든 책을 던져 버리고
그냥 존재하라.
모든 것을 유보없이
신에게 내맡겨라.
분투를 멈추고
내가 이미 그것이라는 각성을 허용하라"
자기와 생각과의 동일시를 놓는 일은
집단 신념의 내용과 더불어
집단신념의 저 유명하고
예측가능한 일정과 반응에서 벗어날 때
용이해집니다.
사람은
생각을 나로서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나로서 추정되었던 것과의 동일시를 내맡길 때
진짜 내가 나의 장애가 없는
실상의 근원인
신성의 내재적 성질로서
빛을 발할 수 있게 되지요.
선생님께서는 강연의 서두를 항상 동일한 진술 즉 "모든 것은 저절로 일어나며, 다른 어떤 것의 원인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로 시작하십니다.
선형적 인과관계에 대한 신념은
에고/마음의 이원적 신념체계
전 구조의 기본공리입니다.
그 환상을 꿰뚫어 보는 것이
가장 크고 중요한 도약이며,
이를 통해 실상에 대한 이해에
한층 가까워질 수 있지요.
관찰된 생명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서의
선형적 인과관계라는 환상이,
생각이 갖는
크고 깊은
한계임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특징적으로
499로 측정되는
지적 천재들조차 뛰어넘지 못하는
커다란 걸림돌이지요.
문명의 진보에 기여한 지성은
심령속에 자리잡게 되는데
이는 '영적각성에 큰 장애'가 됩니다.
인과관계(측정수준 426)는
커다란 환상이지만,
일단 해체되고 나면
사실 해결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정신작용, 이성, 논리, 언어는
모두가 이원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또한 주체와 객체가 있고,
저것을 하거나 일으키는 이것이 있다는
공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성은
목격된 현상과
선행요소간의 관련을 찾아내려고 애쓰는데,
선행요소는
거의 틀림없이
지난 시간속에 자리잡고 있지요.
그 다음에
논리는
어떤 사건에 선행하는 것이
그것의 원인 혹은
이유임에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논리는
'일시적 연쇄를 원인작용으로 혼동'하지요.
원인이라는 용어는
추상적 가설이고
동어반복이며
실상에
그와 일치하는 토대가 없는
주지화입니다.
원인이란
기껏해야 설명을 구하는
마음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작용하는 추측에 불과하지요.
쓸모없는 치명적 질문
"왜"를 묻는 마음의 성향에서
오류가 생겨납니다.
우리는
실상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왜란 없다는 것을 이미 말했습니다.
사실 왜는 아무런 답을 얻을 수 없으며
질문은 여전히 실상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은
본질적으로 거짓인데,
왜냐하면
답하기 위해서는
검증할 수 있는 관찰가능한 것들에서
오직 정신작용일 뿐
가설적 추측으로 비약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건과 조건에는
원인이 아닌
근원이나 기원이 있습니다.
원인이라는 개념은
이해를 내용에만 국한시키는데
반면에 실상에서는
모든 내용이
맥락에 의존합니다.
499에서 500대로
의식을 도약하게해주는
이해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지요.
신도 진실도
내용만의 한계내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간단히 관찰해보아도
내용은
정의나 묘사에 불과한 반면
맥락은
의미와 의의를 비롯해
존재의 실상자체와의 일치를
제공하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영적 작업뿐 아니라
일상의 사회정치적 정책들을 이해하는데서도
중요합니다.
내용을 올바르게 맥락화하지 못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인간의 전 역사에서
매세기마다 수백만명이 살육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맥락의 무시는
인간의 모든 세대에 있어서
재앙의 근원인데
그것은 동일한 파국적 귀결을 낳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요.
인간고를 덜고
무지를 종식시키기 위해
배워야할 교훈 중에서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원인이라는 개념이 그렇게 오도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현상을 달리 설명할 수 있을까요?
검토해야 할
중요하고 결정적인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관찰되는 모든 현상은
그것이 지각에 대해
점진적 관찰결과로서 펼쳐지는 동안,
창조인 진화전체에서 솟아납니다.
독자적으로 홀로 일어나는 일은 없고,
그저 맥락의 장안에서
솟아날뿐이지요.
변화처럼 보이는 것은
잠재성이 본질에서 나와
나타남속으로 출현하는 것입니다.
(측정수준 750).
맥락이란
항시 변화하며 펼쳐지는
우세한 조건들을 의미합니다.
200년 전에 합법적이고 분별있고 정상적이고 수용가능하고 윤리적이고 적절했던 것이 오늘날에도 똑같이 그런 것은 아니지요. 오늘날 우리가 정상으로 여기는 것이 지금으로부터 한두세기 뒤에는 다시 신뢰할 수 없고, 우스꽝스럽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맥락은
전생명과 문명, 세상의 상태,
심지어 우주조차 포괄합니다.
그것은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됩니까?
그 무엇이든
원인은 항상 동일합니다.
원인은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 혹은
전 역사에 걸쳐 항상 존재해온
모든 것의 총체이지요.
맥락은
전 우주입니다.
우리는
어떤 근원이나 이유를 찾아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원인으로 명명된 것의 힘이나
기능을 가졌다고 믿을만한
특정하고 감별 가능한 가설적 항목은 아니지요.
어떤 것의 원인은
감별 가능한 단일 요소가 아니라
항시 복합체이며,
이는 관찰된 현상을 설명해주는
현실적 근원을 구성합니다.
사건들은
경향, 촉진, 타이밍, 가능성, 잠재력, 가망,
정렬, 추진력, 보급, 선별, 임의성, 조건, 통제,
선호, 대중의 정서, 날씨, 경제적 조건, 의욕,
정치적 분위기, 가용성, 공급, 필요, 입수가능성,
감정적 분위기, 사회적 도덕성 등의 산물입니다.
맥락이라는 복합체를 무시하는 것은
역사가 반복해서 입증한 바와같이
재앙을 부를 것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개인적 행동에 어떻게 적용됩니까?
선형적 인과관계에 대한 신념은
행동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것에 대한
순진한 추정을 낳습니다.
예를들면 대중적 심리학에서는 설명이 도움이 되는 원인을 찾아 개인의 아동기를 들여다보지요. 일정한 행동의 활성화는 한 사람이 과거에 어떠했다라던가 혹은 어떠했을지 모른다의 결과가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심리구조의 결과입니다.
예를들면
아동기에 학대경험이
현재의 범죄행위에 대한 원인은 아닙니다.
아동기의 학대를 조장한
바로 그 에너지 장이
지금은 범죄행위의 선택을 조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행동을 이해하는데서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우세한 의식수준이
사람에 대해 그리고
사회에서의 자리에 대해
미치는 영향력입니다.
우세한 의식수준이라는 요소는
선택과 결과에 미치는 영향력의 정도와 범위에 있어
그밖의 모든 것을 능가하지요.
개인은
오직 내적인 영적 성장과
선택을 통해서만
사회적 의식수준은 물론
우세한 개인적 의식수준의 영향력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카르마나 과거의 행위의 집합적 결과가 일차적으로 선택, 행위, 사건들을 결정합니까?
그것이 정확한 답입니다.
내용(즉 개별적 선택)과
맥락(사회적 조건)은
그러한 것들의 측정가능한
의식수준과 조화를 이룹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관찰하는 사회현상은
선택이나 행동에 부합하는
자유를 현저하게 제한하는 것은 물론
조장하는 특성을 갖는
지배적 에너지 장들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며
또한 우세한 조건에 의존합니다.
이 지배적 에너지 장들은
우주역사를 반영하는
여러요인의 산물이며
유력한 에너지들의 진행중인 근원입니다.
동일한 끌개장이 계속 지배하고 있다면 행동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한 아이가 태어날 때의 의식수준이 겨우 90으로 측정되었다고 합시다. 그 결과 아기는 의식수준이 90이고 가난과 범죄에 찌든 지역에서 사는 폭력적이고 태만한 부모에서 태어납니다. 아기는 청소년이 되자, 마약은 물론 거리의 범죄에 연루되어 반사회적, 반교육적이고 무책임한 태도를 받아들이는데 이 또한 측정수준이 90입니다. 체포된 뒤 그 사람은 90으로 측정되는 비슷한 부류의 반사회적인 사람들과 함께 아주 낮은 에너지 장속에 감금됩니다. 석방된 뒤에는 낮은 에너지 장에 대한 개인적 결연과 집단 충성이 지속되지요. 그러므로 상습적 범죄는 예외라기 보다는 규칙입니다.
사이코패스적 성격은
경험에서 배우지 못하고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며
대뇌 전두엽 피질의 유전적 결함으로
처벌 위협이 역제효과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징역기간은
그저 범죄자가 범죄활동을 멈추기보다는 발각되지 않는데
더 큰 노력을 쏟게 만드는 결과로 나타나지요.
범죄 행위의 본성은
캘리포니아의 삼진아웃 정책으로
왜 그렇게 많은 범죄가 감소했는지
설명해줍니다.
그로 인해 직업적인 범죄자는 거리에서 사라졌지요. 삼진아웃 정책에 대한 항의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범죄자들은 그들이 실제로 저지른 범죄중에서 지극히 사소한 것 때문에 체포되고 유죄선고를 받는다는 점입니다. 겨우 자전거를 훔친 죄로 종신형을 산 유명한 사례는 불공정한 법의 피해자로 보이는 이가 사실은 10대 초반부터 수백건의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유형의 범죄자가 법준수에 극심하게 저항하는 것은 경찰이 왜 부적절한 후미등 때문에 차를 세우는지를 설명해주지요. 경찰은 범죄행위가 고질적 생활방식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최근 남서부의 어느 중소도시에서 시행된 연구에서는 놀랍게도 히치하이커의 85%가 전과기록을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성 맹수들은 대개 이번에 체포되기 전에 수십명에서 수백명이나 되는 어린이를 성추행했습니다. 마침내 체포된 음주 운전자나 강간범들한테서도 동일한 패턴을 볼 수 있지요.
그리하여
맥락의 무시는
추정되는 그러나 헛된 해결책으로 인도하는데
왜냐하면
문제는
의식의 지배적 에너지 장의 영향력을 반영하는
장기적 패턴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사례들은 내용과 맥락의 관계를 이해하는 일의 중요성을 명확히 해줍니다. 겉보기에 다른 사건들이 별개의 원인들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모두 현재 진행중인 동일한 근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건들의 표현은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는 우세한 조건으로 인해
조장되거나 억제됩니다.
선택과 결정은
과거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조건전체에 따른 것이지요.
연대기적으로
과거에 속하는 경험들이 갖는 커다란 중요성은
그것이 지금 여전히 작용하는 정도입니다.
과거는
현재의 원인이 되지 않습니다.
대신
지금 현존하는 동일한 조건들(의식수준)이
재발 가능성을 높여주지요.
그래서
"경험에서 배우라"는 흔한 훈계는
더 큰 만족과 행복을 위해
자발적으로 진화하고 변화하라는 의미입니다.
내용과 맥락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진지한 영적 노력에 어떻게 적용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까?
자기(에고)는
선형적 내용과 세부에 초점을 맞추고
형상 및 한계와 동일시합니다.
영적 작업이란
내용에 대한 집착이나
동일시에서 벗어나는 것과
그 다음에 자신의 실상이
맥락임을 점차로 각성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가장 간단한 설명은
자기는 내용이고
참나는 맥락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분리된 자기(에고)에 대한 신념이
생각의 기본적인 이원적 구조 자체를 통해
어떻게 솟아나는지를 볼 수 있는데,
이 신념은 그 다음에 부모와 사회에 의해 강화됩니다.
주어와 술어는
원인을 진술하거나
암시하는 동사로 연결되지요.
그러므로
모든 행위는
중심의 원인적 행위자-내용인
사적인 나를 암시하는데,
이것은
이름을 가지며
보상과 처벌의 수여자 노릇을 함으로써
강화된 사적자기입니다.
바로
이 정체가 점점 커져서
생각 뒤의 생각하는 자,
함 뒤의 하는 자,
행위 뒤의 행위자로
상상되기에 이르고
급기야는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자기관련을 갖게 됩니다.
그 다음에
이것은 감정적 태도와
다양한 정도의 시비분별에 물들게 되지요.
개인화는
모든 주의를
온통 내적 자기에 집중시키는데,
내적자기는 독립적이고
유일한 실체로 추정되어
점차로 에너지를 띠게 됩니다.
정신작용의 과정은
의식진화의 부합하는 수준을
반영합니다.
낮은 마음의 수준에서는
감정이 보는 시각을 물들이고
생각을 지배하거나
생각에 영향을 미치지요.
높은 마음의 수준에서는
감정은 초월되며,
지성은
항상 추상적이고 세련된
정확성, 정밀함, 신뢰성을 띠게 됩니다.
결국은
마음이
뭐든지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척하는 것은
맥락의 점진적 포함을 통해 초월되고
그래서
고의적인 내용은 그노시스(영지)로 대체되는데,
이것은 참나로서의 현존의 자연발생적 광채입니다.
신비가의 실상에서는
아는 자와
아는 대상이 하나이고
같기 때문에
에고가 편집하거나
왜곡할 공간이나 여지가 없습니다.
철저한 주관성은
그래서 참나와 신성의 융합으로 말미암은
진실의 근원이자
실상의 전부임이지요.
산스크리트어로 푸루샤가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푸루샤란
깨달은 현인이나 스승의 인식의 근원이지요.
참나 정체의 하나임은
드러남 혹은 각성으로 알려진
현상의 기층입니다.
깨달음은
뒤따라 일어나는 최종적 상태이지요.
그것은 무조건적이며 전체적이고 완전합니다.
그 설명은 만족스럽고 완성된 느낌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는 그 말씀이 999.9로 측정되는데 주목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타나지 않은 것이
의식속의 형상으로서
나타난 것이 되는 과정에서
0.1%의 유실이 있습니다.
하지만
형상없는 것은 본유적이며
그것이 바로 형상의 근원을 이룹니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빛에 노출된 사진필름은
그것을 현상액에 담갔을때만
나타나는 형상의 잠재성을 담고 있는 것과 같지요.
발생기에 있는 형상은
의도성이라는
유리한 조건의 귀결로서 나타나게 되는데,
의도성은
의지와 선택의 기능입니다.
이것은 차례로
카르마적 잠재성과 같은
그러한 맥락을 반영할 것입니다.
첫댓글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아는가?
마음안 자신이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마음의 인식능력은 증명되거나 입증될 수 있는가?
높은 마음의 수준에서는 감정은 초월되며, 지성은 항상 추상적이고 세련된 정확성, 정밀함, 신뢰성을 띠게 됩니다. 결국은 마음이 뭐든지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척하는 것은 맥락의 점진적 포함을 통해 초월되고 그래서 고의적인 내용은 그노시스(영지)로 대체되는데, 이것은 참나로서의 현존의 자연발생적 광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