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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행 52- 전라남도 진도
2020년5월9일 전남 완도로 떠나기전에 군포시에 있는 둥근상시골집에 들러 칼치구이백반을
먹었습니다. 1973년에 개업한곳으로 군포맛집으로 유명합니다.
당진항입니다. 평택 · 당진항은 아산만을 사이로 항내 수면적 110.965㎢, 수심 11∼18m로
관리되고 있는 평택 · 당진항은 크게 동부두와 서부두, 송악부두, 그리고 고대부두로 나누
어져 있으며 이외에 여객부두와 모래부두, 돌핀부두가 있습니다.
중국과 최단거리에 위치한 지리적 입지를 갖춘 평택 · 당진항은 3대 국책항만 및 5대 국책
개발사업으로 선정되어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어왔고 2016년 기준 총 58개의 선석을 운영하고
있으며 2020년까지 79개로 확충할 예정입니다.
이곳은 조영남의 고향인 삽교가 있습니다.
"삽교읍지"에서는 별다른 근거가 없이 "삽교"의 "삽"이 백제어로 붉은색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고대한국어는 받침을 거의 쓰지 않는, 특히 'ㅂ'처럼 입을 꼭 다물게 해
소리를 입속에 가둬놓는 받침은 쓰지 않는 계음절어 체계였습니다. 따라서 본래는 '삽'이
아닌 '사'나 그와 비슷한 어떠한 발음이었습니다. 마한어와 이를 이은 백제어 계통의 땅
이름 駟盧(사로), 斯羅(사라), 沙羅(사라), 徐羅(서라) 등에서 駟(사), 斯(사), 沙(사),
徐(서)처럼 사와 같거나 비슷한 발음을 가진 글자들은 '붉은색'이 아니라 '새롭다(新)'
또는 '동쪽'과 같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옛 덕산읍지(德山邑誌)에는 '사읍천(沙邑川)'이 있고, 이후 발간된 예산군지(禮山郡誌)에는
'삽천교(揷川橋)'가 있습니다. 삽교의 '삽'은 '사읍'입니다. '사'라는 마을입니다. 삽교읍
성리와 하포리 부근의 삽교천을 '서내'라고 부릅니다. 옛 지명(古地名)에서 '사(沙)'는
'새', '신(新)'과 동일하게 쓰였습니다.
삽교 군내에는 온도가 낮은 흠이 있기는 하지만 덕산온천이 있는데, 이는 수질이 지구유라
하여 대한민국에서 제일 우수하다고 합니다. 금오산 속의 고색이 창연한 향천사와 국제
도총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이로 인해 천주교 탄압을 강화하게 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소가 있고, 윤봉길 기념탑이 그의 옛집 정원에 우뚝서 있습니다.
5월10일 진도의 뻘에 가서 소라를 뻘에서 잡았습니다.
고동을 잡았습니다.
송어도 한마리를 잡았습니다.
고동을 어렸을때 삶아서 옷핀으로 꺼내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진도(珍島)는 전라남도 진도군의 주도(主島)로 한반도 남서쪽 끝에 자리한 섬입니다.
이 섬은 한국 서해와 남해의 경계도가 되며 제주도 거제도이어 3번째로 큰 섬입니다.
면적은 375 km²[1], 해안선의 길이는 662.3 km입니다.
바로 위가 전복양식장입니다. 양식장에서 흘러나오는 전복새끼들이 바위 곳곳이 붙어있습니다.
점점 석양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원포 분회어민회관 앞에서 낙시를 합니다.
같이 간 일행중의 동네 친구가 갑오징어를 잡고 김양식도 하는데 도미를 잡아왔습니다.
이곳에는 9월 10월사이에 붕장어가 많이 잡히므로 많은 낙시꾼들이 이곳으로 몰려든다고
합니다. 낙시바늘은 20호 봉돌무게 30호를 쓰며 미끼는 절은 고등어를 포떠서 쓴다고 합니다.
붕장어(아나고)의 굵기가 박카스병 굵기정도라고 하는데 이것은 큰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텐트를 치고 같이 간 일행은 이곳 출신인데 친구들이 며러명이 와서 회와 찌게를 끓어
먹었습니다.
게를 삶아 먹으니 맛이 기가 막힙니다. 갑오징어를 회로 먹으니 김문국 친구는 처음
먹어본다고 합니다.
큰 도미는 회 뜨고 작은 도미는 기름에 튀겨억었습니다.
진도대교(珍島大橋)는 해남과 진도를 잇고 있습니다.총 길이는 484m에 교량이 11.7m입니다.
1980년12월 착공되어 1984년 10월18일 개통하였습니다. 근처에는 진도연륙교가 있으며,
진도 주민의 육지와의 교통이 원활해졌습니다. 얼마전만해도 이곳에서 코로나 19를 차단하기
위해 열검사를 했다고 합니다.
이곳은 2001년 공공근로사업으로 여귀산 남쪽 기슭에 탑공원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과거에는
탑리(塔里)에 속했으나 탑리에 사는 장수가 상만리(上萬里)에 사는 장수와 벌인 씨름에
져서 탑을 빼앗겼다는 전설이 얽혀 있습니다.
탑공원에는 자연석으로 네 종류의 탑을 쌓아놓았는데, 기념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져져
있습니다.
여귀산을 중심으로 죽림(竹林) 쪽에 남신(男神), 탑립(塔立) 쪽에 여신(女神)이 사이좋게
지냈는데 지배(支配)하기를 즐기는 남신이 여신을 지배하고자 일 년에 한 번씩 힘과 지혜를
겨루어 지는 신이 이긴 신의 뜻에 따르기로 했으나 여신이 계속 이기자 남신은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로 하여금 여신의 탑을 파괴시켜버렸는데, 그 후 힘과 지혜를 쓰지 못한
여신은 남신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탑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이 자리에 정성으로 돌을 쌓아 돌탑을 세우는 것은 두 신의 화해로 고을 사람들의 안녕과
번영을 위함입니다.
여기 돌탑 언덕에 서면 먼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경치가 장관을 이루고 접도와 구자도
사이에서 떠오르는 해돋이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탑립리는 1600년경 해남군에 살던 김해 김씨가 이곳을 지나다가 산의 형세가 좋아 정착
하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탑립리가 속한 죽림리는 본래 진도군
임일면의 지역으로서 대숲이 많으므로 죽림리라 하였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임이면의 탑립리를 병합한 후 임회면에 편입되었습니다.
남쪽 해안을 조망하며 입지한 마을로 여귀산을 배후산지로 입지하고 있으며, 주변의
기반암 노출 산지는 빼어난 경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죽림제에서 흘러온 물로 농업
용수를 하여 농사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임회면의 남동부에 있으며, 동쪽과 남쪽은 바다, 서쪽은 상만리, 북쪽은 여귀산을 넘어
용호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통로는 국도 18호선의 도로가 마을 뒤를 동서로 지나
의신면을 거쳐 진도읍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진도개는 개 품종 중 하나로, 한국의 대표적인 사냥개이다. 용맹하고 충성심이 강해 주인을
잘 따릅니다. 털은 주로 노란 것(황구, 黄狗)과 흰 것(백구, 白狗)이 있으며, 그 외 재구,
네눈박이, 호구, 흑구(黑狗) 등 10여 종류의 다양한 것이 있습니다. 귀가 쫑긋 서 있고 꼬리는
위로 말려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1962년 진도 특산인 진도개를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습니다. 1967년에는 〈한국진도개보존육성법〉이 제정되어 혈통이
보존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역사/소개
진도개는 다른 개와 달리 여러 가지 우수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일제하인 1938년 조선명승고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다가 1962년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다시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진도개는 옛날 석기시대의 사람이 기르던 개의 후예가 전해 내려온 한반도의 토종견으로
진도라는 섬의 특수한 지리적, 문화적 환경에 수세기 동안 적응하면서 고유의 품종으로 유지,
정착되어 온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견입니다. 진도개는 중형견으로 주인에게 충직하고
영민하며 주변을 청결히 하고 귀소성이 뛰어나며 수렵본능과 용맹성이 탁월합니다.
이곳이 허정무 선수의 고향입니다. 선수 시절 PSV 에인트호번 등에서 활약했으며 1980대
대한민국 축구의 중심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해 한국인 감독으로서
는 최초로 외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했으며, 2011년까지 계약되어 있었으나,
휴식 기간을 갖기 위해 2010년 7월 2일 연임을 포기하였습니다. 이후 한 달 반 정도의 휴식을
취한 후 인천 유나이티드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습니다.
보이는 산의 봉우리가 축구공같이 생겨 산의 정기 받고 1955년1월13일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보이는곳에서 오른쪽으로 조금들어가면 그곳이 허정무선수가 태어난 곳입니다.
7남매중 네째였던 허정무는 경제적 사정으로 고등학교를 진학할 방법이 체육특기생 밖에
없었고, 먼 친척뻘인 허윤정의 권유로 중동중학교 2년을 꿇고 다시 중동중학교에 편입해서
축구를 배웠습니다. 강훈련으로 유명한 유판순 감독이 나중에 질려서 만류할 정도로 독하게
훈련을 거듭한 끝에, 축구를 시작한 지 4년만에 U-20 대표팀에 뽑혔고, 다시 2년 뒤 국가대표
에 뽑힙니다.
영등포공고 졸업시절 그를 스카웃하기 위해 연세대와 고려대의 스카웃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미 허정무는 연세대 진학이 내정되어 있었지만 고려대 역시 그를 스카웃하기 위해 은사인
유판순 감독을 통해 허정무를 스카웃하려 했고 아예 연세대 팀이 얼씬도 못하게 고려대의
설립자인 김성수의 고향인 고창군의 삼양사 쪽으로 데려놨고 그러다가 어찌저찌해서
허정무의 소재가 파악되어 연대의 김지성 감독과 이미 약속을 했던 허정무의 아버지가 직접
설득해 허정무를 데려갔고, 이번엔 연세대 쪽 사람들이 운동부 숙소인 무학사에 데려가 대학
시험 보는 날까지 사람을 붙였다고 합니다. 1986년 박창선, 차범근, 최순호등과 함께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국가대표로 뛰었고 왼쪽 풀백으로 출전하여 아르헨티나전에서
마라도나를 걷어찬 일화가 있습니다.
진도의 신비의 바닷길
현대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이곳 신비의바닷길은 1975년 주한 프랑스대사 “피에르
랑디”씨가 진도로 관광을 왔다가 이 현상을 목격하고 프랑스 신문에 소개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뽕할머니의 제사로 시작된 이 축제는 원형 그대로의 민속민요, 남도
들노래, 다시래기, 씻김굿 등 국가지정 무형문화재와 만가, 북놀이 등 주옥같은 공연이
펼쳐집니다.
뽕할머니는 진도군에서 열리는 "진도 신비의 바닷가 축제"의 주신입니다. 설화의 줄거리는
헤어진 가족을 만나게 해달라고 뽕할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듣고 용왕이 바다의 길을 열었
다는 이야기입니다.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 사이 바닷물이 갈라지는 거리는 2.8Km
정도입니다. 폭은 30m내외로 회동리와 모도리가 물밖에서 회동하는 신비로운 해우를 하는
곳입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오른쪽의 섬까지 열려지는데 일년에 몇차례 일어나며 음력2월말쯤 펼쳐
집니다. 국가기상대는 지형적 요인과 달, 태양의 위치가 일년중 가장 인력을 미치는 곳에
모여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조선초기 손동지(孫洞知)라는 사람이 제주도로 유배중 풍파로 파선되었습니다. 호동
(지금의 회동마을)앞 바다에 표류하여 이마을에서 촌락을 이루고 살게 되었는데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마을 건너편 모도(茅島)로 황급히 피신하면서 뽕할머니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뽕할머니는 헤어진 가족을 만나고 싶어 매일 용왕님께 기원하였는데 어느날 용왕님이 꿈속에
나타나 "내일 무지게를 바다 위에 내릴것이니 바다를 건너가라" 선몽이 있어 바닷가에 나가
기도하니 회동의 뿔치와 모도의 뿔치 사이에 무지개처럼 바닷길이 나타났습니다.
바닷길이 열리자 모도에 있는 마을사람들이 뽕할머니를 찾고자 징과 꽹과리를 치며 호동에
도착하니 뽕할머니는 "나의 기도로 바닷길이 열려 너희들을 만났으니 이젠 한이 없다"는
말을 남긴채 기진하여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를 사람들은 뽕할머니의 소망이 바닷길을
드러나게 하였고 모도에서 다시 돌아왔다 하여 호동(虎洞)마을에서 회동(回洞)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진도 군민들은 뽕할머니가 신령이 되어 올라갔다고 해서 영등(靈登)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이해부터 해마다 바닷길이 열리는 이곳에서 풍어와
원성취를 비는 기원제를 지내고 회동과 모도사람들이 바닷길 현장에서 서로 만나 바지락,
낙지등을 잡으며 하루를 즐겁게 보내오던 풍습이 축제로 승화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군청에 가서 왜 뽕할머니인가를 물어보니 직원이 상관에게 물어보니 나를 안내하며 자리에
앉게 하며 말을 합니다.
3가지 설이 있다고 합니다. 1. 봉씨 할머니가 뽕으로 변했다고 하고 2. 봉할머니 집에
뽕나무가 있었다고 하며 3. 바닷물이 열리고 길을 걸으면 지면에 구멍에서 뽕뽕 소리가
나서 뽕이라는 말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진도군 고군면 회동리, 신비의 바닷길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피에르랑디 공원을
찾아보면 좋습니다. 피에르랑디는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주한프랑스 대사를 역임했던
것으로 알려진 인물. 그는 우리나라의 어떤 곳보다도 진도를 사랑한 인물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우리나라 대표견 진도개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진도개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진도개의 원산지인 진도를 찾았다가 바닷길이 열리는 현상을 목격하고는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프랑스 신문에 이를 소개하기도 했다 합니다.
피에르랑디의 이러한 행보는 진도의 신비의 바닷길이 세계적인 관광지로 부각되는 계기를
제공하였고, 이에 피에르랑디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진도군에서는 그가 신비의 바닷길을
직접 목격했던 곳인 고군면 회동리의 언덕 위에 그의 흉상을 세우고 그 일대에
'피에르랑디'의 이름을 붙인 공원을 조성하였다. 그러니 신비의 바닷길과 연관된 인물들을
꼽고자 할 때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당연하디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도 앞바다는 물살이 거칠기로 유명하다. 명량대첩의 격전지로 잘 알려져 있는 울돌목이
진도에 위치해 있다는 것만 생각해 보아도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진도의 이 거친
물살 가운데서 무너지지 않고 육지와 섬을 잇고 있는 바닷속 둑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특별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 명승 제9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한 이 풍경,
직접 찾아보지 않고서는 그 신비로운 모습을 실감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닷물이 갈라졌을때 풍광입니다.
신비의 바닷길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사전 조사를 착실히 해 가야 합니다. 진도의 신비로운
바닷길은 아무 때에나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2016년도는 신비의 바닷길
이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는 시기는 다음의 세 가지 때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만물이 회동하기
시작하는 봄의 시작, 3월 9일부터 12일까지. 두 번째는 바닷길이 열리는 세 개의 때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진도 신비의 바닷길 축제' 기간이기도 한 4월 7일부터 10일까지,
그리고 2016년 신비의 바닷길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세 번째 때는 나른한 늦봄,
5월 6일부터 9일까지였습니다.
봄이라 하면 해산물의 진미를 맛볼 수 있는 고장인 진도가 바지락, 낙지, 굴, 전복 등 남해
바다의 싱싱한 해산물을 거침없이 쏟아나는 계절이기도 하니, 바다의 신비를 두 눈에 담고자
진도를 찾아 보면 통통하게 살이 오른 바지락과 푸른 바다 건강함을 한껏 머금은 참전복도
잡아보고, 진도의 신선한 해산물로 배를 그득히 채운 뒤 그 유명한 '신비의 바닷길' 앞에
서게 되면 그때야말로 진도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명량해협(鳴梁海峽) 또는 울돌목은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의 화원반도와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사이의 있는 해협입니다.
길이는 약 1.5km이고 폭이 가장 짧은 곳은 300m정도가 됩니다. 밀물때는 넓은 남해
바닷물이 한꺼번에 명량해협을 통과하여 서해로 빠져 나가 조류가 5m/s 이상으로 매우
빠릅니다. 이를 이용하여 정유재란 당시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승리하였습니다. 물길이 암초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소리가 매우 커 바다가 우는 것 같다고
하여 울돌목이라고도 불립니다. 유속은 약 10노트(10knot, 시속 20km 정도)라고 합니다.
이순신장군의 남해바다를 평정한 판옥선이 이곳에 있습니다.
울돌목은 서해의 길목으로 폭은 294m로, 물살이 셉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임하도(林下島)에서 당시 항해로였던 좁은목을 막고 임하도의
지형과 물살을 이용해 배 13척으로 10배 이상의 적함 130여 척을 크게 격파하였습니다.
이곳이 전남 해남의 울돌목에서는 뜰채로 숭어를 잡는 진풍경이 전해지는곳입니다. 이색
볼거리에 찰진 보리숭어 맛을 보러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거센 물살을
지켜보던 어민이 커다란 뜰채를 물속으로 힘차게 휘두릅니다. 순식간에 어른 팔뚝만 한 숭어
들이 서너 마리씩 잡혀 올라오고 보는 이들의 탄성이 절로 터집니다.
[박양호/뜰채 숭어잡이 어민]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굉장히 고기가 많이 올라오는 편입니다. 오늘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고기 반, 물 반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 숭어는 보리가 필 무렵 잡힌다 해서 보리숭어라 불리는데 찰지고 쫄깃한 맛을 현장에서
즐길 수 있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뜰채 숭어잡이는 7월까지 이어지는데 이색 고기잡이가
유명세를 타면서 울돌목의 대표 볼거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런데 숭어잡는 곳에 가보니
물살이 세에서 바위에 서있기가 무섭습니다. 만약에 빠진다면 물살이 세어서 헤엄도 못 칩니다.
이곳의 음식점이 이순신어록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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