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배수량 : 50,995t (만재 52,700t) 전체길이 : 247.99m 전체 폭 : 36.0m 홀수 : 10.8m 출력 : 150,175hp 최대속력 : 30.1kt 항속거리: 19kt로 8,525해리 승조원: 2,340명 주 엔진 : Brown-Boveri식 기어드 터빈 3기, 3축 추진(연료는 중유 7,400t) 무장 : 52구경 38cm 연장포 8문(주포), 55구경 15cm 연장포 12문(부포), 65구경 10.5cm 연장포탑 8기, 83구경 37mm 연장고사포탑 8기, 수상기 4대 |
원래는 독일이 베르사이유 조약을 파기한뒤
영국과 체결한 해군조약의 제한 아래에서 설계된 조약형 전함이었으나 높아지는 해군의 요구를 충족시키다보니 제한인 3만5천톤을 한참 넘긴 거대한 전함으로 탄생했다. 물론 전쟁전의 발표는 조약 기준함인 3만5천톤으로 공표되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스마르크는 당대 최대의 전함이였다 원래 독일은 1차대전 패망으로 일정톤수를 넘는 대형전함의 건조나 보유가 금지되었으나 어차피 이 조약은 독일의 힘이 세어지고 반대로 승전국 (프랑스, 영국)들의 힘이 약해지면서 유명무실한 조약이 되었다. 원래 비스마르크는 프랑스 해군의 됭케르크(Dunkerque)급 전함에 대항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으며, 처음에는 13인치포 8문 탑재, 속력30노트 이상, 기준 배수량 35,000톤을 목적으로 해서 설계되었다. 그러나 신기술의 개발과 프랑스 해군과 이탈리아 해군의 차기 주력함의 주포 구경이 15인치라는 정보가 입수되어 끝내 15인치포를 장착하게 되었고 기준 배수량은 40,000톤까지 증가하였다. 이는 건조당시에는 세계최대의 전함이었다. (이기록은 일본의 야마토급 전함과 미해군의 미조리급 전함에 의해 깨어진다) 비스마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설계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용되었으며 건조된 함정으로는 비스마르크와 티르피츠(Tirpitz)가 있다. ]
당시 독일군은 1945년에 전쟁을 시작할것이라는 히틀러의 말을 믿고 그 시점에 맞추어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군 역시 45년을 바라보고 H급 전함(20인치포를 장비한다든가 톤수는 10만톤으로 한다는가 하는 초전함 계획)을 목표로 하되 그것을 건조하기전 공백기간에 사용할 전함을 만들 계획이었다. 그 결과물이 비스마르크급이며, 히틀러가 40년이 되기도 전에 전쟁을 시작하는 바람에 독일 해군 최후의 전함이 되어버렸다.
배의 형태는
샤른호르스트급
순양전함을 답습하고 있으나 사이즈가 커지고 11인치 함포 대신 14.96인치 함포를 탑재했다. 또한 부포의 숫자도 증가되어
제1차 세계대전후 물경 20년만에 만들어진 전함치고는 상당한 전력을 자랑했다.
[비스마르크급은 당시 거함거포주의 영향을 받아 4만톤급의 함체에 52구경 38cm 연장포 8문(주포), 55구경 15cm 연장포 12문(부포), 65구경 10.5cm 연장포탑 8기, 83구경 37mm 연장고사포탑 8기, 수상기 4대로 무장한 그야말로 막강한 위력을 자랑했고 첫 출전에서 불침전함이라 불리던 영국해군의 후드를 단한방에 격침시킨것으로 그 위력을 확실하게 보여주였다]
다만 독일이 1차 대전 이후 제대로 된 전함을 설계해본 적이 없다보니 설계가 1차 대전 전함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일단 설계자체는 근거리 난타전을 위주로 한 설계(연사가 빠른 주포, 측면의 떡장갑). 그런데도 정작 전함이라는 비스마르크의 주장갑 두께는
순양전함으로 분류되는 샤른호르스트급의 350mm보다 얇은 320mm였다! 게다가 주포탑과 바벳의 장갑도 다른 전함보다 얇은데다가 주포탑은 경사장갑을 도입했으나, 적용을 특이하게 하는 바람에 주포탑 측면에 명중하는 포탄의 절반이 경사장갑화된 천정장갑을 뚫고 들어올 수 있는 등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비스마르크급은 전체길이 약 247.99m 전체폭은 36.0m 에 달해으며 기준배수량은 50,995t (만재 52,700t) 최대속력 약 30.1kt항속거리는 19kt로 8,525해리 에 달하는 초대형전함이였으며 참고로 승조원은 2,340명이 탑승했다.]
당시 대세는 원거리 포격 갑판 떡장갑(포탄이 포물선으로 낙하하므로). 게다가 집중방어개념도 안들어가서 함수에서 함미까지 어중간한 장갑이 처져있었던 탓에 배수량에 비해 방어력은 허약한 수준. 단 측면장갑은 꽤나 좋았지만 당시에 전함들은 모두 중장거리에서 갑판을 두들기는 것으로 패러다임이 변해있었다.
[비스마르크는 당시 전함설계사상인 거함거포주의 설셰사상을 도입 다수의 중포들을 밀집배치하여 공격력은 뛰어났지만 집중방어개념도 안들어가서 함수에서 함미까지 어중간한 장갑이 처져있었던 탓에 배수량에 비해 방어력은 허약한 수준이였다 단 측면장갑은 꽤나 좋았지만 당시에 전함들은 모두 중장거리에서 갑판을 두들기는 것으로 패러다임이 변해있었다.]
비스마르크는
귄터 뤼첸스 대장을 함대 사령관으로,
에른스트 린데만 대령을 함장으로 하여 첫 실전에 나섰다. 대서양의 영국 호송선단을 격멸할 목적으로 행해진 이 '라인 연습작전'에서 비스마르크는 영국이 자랑하던 불침전함 후드를 격침시키고 역시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전투불능으로 만들었다. 함교가 박살나서 함장과 함교요원 단 한 사람만 살아남았고, 포탑 3개 중 2개가 파손되거나 기능고장을 일으켜 화력이 1/5로 급감한 상태로 도망쳐야만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비스마르크에게 한방 먹여서 비스마르크는 함수로 3천톤의 해수를 마셔야만 했다.
[방어력은 그렇다쳐도 비스마르크의 공격력은 가히 당대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15인치 함포를 회전포탑에 8문이나 장비하였으며 그외 55구경 15cm 연장포 12문(부포), 65구경 10.5cm 연장포탑 8기, 83구경 37mm 연장고사포탑 8기등 공격력면에서는 당대의 어떤 전함들보다 강력했다]
후드와의 교전 당시 첫 포격은 후드가 먼저였으나 후드는 호위함이었던 프린츠 오이겐(중순양함으로 203mm주포 8문 탑재. 멀리서 실루엣만 보면 비스마르크와 비슷하다. 2연장 주포탑 4기를 장비하고 대형연돌 하나등...)을 비스마르크로 착각하고있었으며, 첫 명중탄은 도리어 비스마르크의 호위함 프린츠 오이겐이 먼저 날렸고, 후드의 포격은 프린츠 오이겐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만일 맞았으면 프린츠 오이겐은 바로 용궁행.
[비스마르크호는 첫출전에서 영국해군의 불침전함으로 불리던 후드호는 단 한방에 격침시켰는데 이는 운좋게 발사한 15인치 주포가 호드호의 탄약고를 맞추어 탄약이 유폭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열받은 영국해군이 모든 함선을 출동시켜 비스마르크호 격침작전을 펼치게 되어 결국 격침 (혹은 자침) 당하게 되었다. 이는 첫출전에 적 함선을 격침하고 자신도 침몰하는 유래없는 사건중 하나였다 사진은 HMS 후드호의 모습]
후드와의 전투는 정확히 탄약고를 맞춘 럭키샷이었는데 비스마르크를 너무 과대평가한 나머지 중장거리 타격전을 회피한 후드가 거리를 채우기 위해 접근하다가 하필 약점으로 지목되던 현측 장갑대의 가장 얇은 부분을 파고든 일격에 탄약고가 뚫리면서 대폭발을 일으키면서 바로 침몰(…). 생존자는
1430명 중에 고작 3명. 그나마 살아남은 수병 3명도 미리 바다에 뛰어들어서 살아남았다.
충공깽.
[비스마르크호의 일제포격모습 15인치 (380밀리) 주포 8문이 뿜어내는 포격은 어느 함선이라도 맞기면 하면 일격에 나가떨어질 정도로 위력적이였으며 특히 성능이 우수한 독일제 거리측정기 와 조준기의 장착, 그리고 훈련이 잘된 정예병들로 인해 초탄만으로 명중이 가능할 정도로 비스마르크호의 실력은 우수했다 다만 운이 없었을뿐..]
[비스마르크호의 첫 재물이 된 영국해군의 HMS 후드호의 모습 1차대전부터 활약해온 역전의 전함으로 불침전함으로 불리웠으나 결국 비스마르크호와의 대전에서 단 한벙에 탄약고가 명중되어 격침 생존자는 단 3명만 남기고 모두 사망했다]
후드와의 전투는 엄청난 임팩트를 남겼지만 매에는 장사없다고 했던가... 얼마 안가
소드피시에게
어뢰를 맞았다. 참고로 비스마르크의 수병들은
대공포 사용법을 훈련받지 않았다! 심지어는 함교 좌우에 달린 대공사격 통제장치의 조작이 매우 복잡해 만든 회사에서도 제대로 다루는 사람이 없는데다가 출격 전에는 대공포 종류가 2종류 이상이 섞이거나 대공 화력이 부족한 점 등 심각한 문제가 많았다.
[후드호의 격침은 바로 영국해군에 전달되었고 이내 비스마르크호를 격침하기 위한 추격대가 급히 결성되었다 특히 당시 동원가능한 유일한 항공모함인 아크로열호는 구식 복엽기인 소드피쉬만을 운용하고 있었지만 이들 소드피쉬들에 위해 비스마르크호의 키를 고장내 결국 격침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결국 구식 복엽기에 장착한 경어뢰 한방에 조타불능이 되었는데, 이게 아이러니한게 설계당시 키가 파손될 경우를 대비해서 폭약으로 분리하는 방안이 제시되었으나 파손될 확률이 극히 낮다는 이유로 설계에서 제외되었고 원래 맛이 거의 다 간 조타키였는데 수병들이 깜박 잊고 교체를 안하고 갔다. 멀쩡한 조타키는 점령된 노르웨이 항구에서 고이 잠들고 있었다는 것.
[비스마르크호를 끝장내게 한 주인공은 다름아닌 2차대전 개전당시에도 이미 고물비행기라 놀림을 받던 소드피쉬라는 복엽기였다. 이는 속도도 느리고 당시에도 이미 고물취급받던 복엽기타입의 뇌격기였지만 우수한 성능과 뛰어난 조종사덕분에 비스마르크호를 추격 어뢰로 조타장치를 명중시켜 비스마르크호가 더이상 도망치지 못하게 하였고 결국 이들 소드피쉬들의 집요한 공격덕에 비스마르크호는 꼬리를 잡혀 격침되게 된다]
결국 앉은뱅이 오리가 된 상태에서 앞서의 포격전으로 인해 영국함대가 날린 고폭탄이 하필이면 비스마르크의 유류저장고를 관통했고, 이건 임시로 때웠지만 끊임없이 날아드는 영국함대의 자잘한 공격으로 인해 유류저장고가 서서히 파손되서 곧 분당 800~1000리터의 유류가 쏟아져나왔다. 이로 인해 설령 키가 멀쩡하더라도 점령된 프랑스에 있는 항구로 돌아갈 수도 없고. 점령된 프랑스 독일군 비행장에서 나오는 항공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만약 30~50분만 더 전진하면서 버티면
공군지원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호위함이었던 프린츠 오이겐호에서 바라본 비스마르크호의 모습 선체의 화이트블랙의 사선은 원거리에서 거리 짐작 이나 함선형태을 어렵게 할려는 일종의 위장이다. 비스마르크호의 호위함이었던 프린츠 오이겐(중순양함으로 203mm주포 8문 탑재. 멀리서 실루엣만 보면 비스마르크와 비슷하다. 2연장 주포탑 4기를 장비하고 대형연돌 하나등...)은 얼핏보면 비스마르크호화 비슷하여 후드호는 착각하고 있었으며, 첫 명중탄은 도리어 비스마르크의 호위함 프린츠 오이겐이 먼저 날렸고, 후드의 포격은 프린츠 오이겐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
이 상태에 조타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해류에 의해 엄청 빠르게 북서쪽으로 전진했고 결국 영국함대의 사거리에 들고 함포 다구리를 맞기 시작했는데,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비스마르크도 나름대로 반격을 하면서 로드니를 협차하기도 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주포탑의 기묘한 구조와 쓸데없이 거대한 상부구조물 덕분에 주포탑에 적 포탄이 명중될때마다 쉽게 사격통제 장치들이 떨어져나가고, 주포탑이 마치 치즈에 난 구멍처럼 송송 구멍이 뚫리면서 주포들이 파괴되고 함교는 퇴함명령을 내리자마자 폭파되며 파랑에 의해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살아남은 420여명은 바다에 뛰어들어 퇴함에 성공했다. 생존자 탈출후 5분이 지나자 서서히 기울었던 비스마르크는 침몰하면서 주포탑이 떨어지며 프랑스 해저에 고이 잠들었다. 승조원 130여명은 영국함대에 구조되었으나 영국함대가 U보트때문에 구조를 포기하자 나머지 300여명은 서서히 얼어죽어가기 시작했다.
[영국해군의 집중포화를 맞고 후부가 완전히 불에타고 있는 비스마르크호의 모습 이때 이미 승무원의 2/3 이상이 사망 혹은 부상으로 전투불능상태였다고 한다]
이 상황에 대해 영국 측은 '격침'을 주장한 반면 독일 측은 '자침'을 주장.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비스마르크의 비밀'이라는 다큐에서도 승조원들의 증언을 통해 은근슬쩍 자폭설을 내비치고 있다.
[침몰한 비스마르크 1941년 5월 27일 서서히 날이 밝기 시작하자 전함 KGV와 로드니, 순양함 노포크와 도르세셔가 비스마르크에 접근하였으며, 오전 8시 47분 로드니를 시작으로 비스마르크에 일제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비스마르크도 곧 응사에 나서서 2차대전에서 굉장히 보기드문 전함 간의 포격전이 시작되었다. 결국 영국해군의 전함들에 위해 일제포격후 격침.. 혹자는 이미 전투력을 상실한 비스마르크호가 승무원을 내리고 스스로 자침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최근 기록에 의하면 이쪽이 더 신빙성이 있어보인다고도 한다]
KGV와 로드니는 16인치와 15인치 대구경 함포를 통해 비스마르크를 공격하였으며, 중간중간 전함이 전함에 어뢰를 쏘는 좀처럼 보기 드문 상황이 벌어지곤 하였다. 어쨌든 비스마르크는 필사적으로 응전하고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앉은뱅이라 고정표적 신세가 된 상태에서 피해를 입은 함포들이 하나둘씩 침묵하고 군함의 마스트는 물론이고 군함의 거의 모든 부분이 파손되어 사실상 무력화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비스마르크는 격침되지 않았으며, 10시 15분이 되자 KGV와 로드니가 연료부족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자폭설을 따르더라도 방어구조가 '최대한 격침당하지 않기' 컨셉이라 격침을 안당했을뿐 최후의 전투에서 영국의 전함 '킹 조지 5세'와 '로드니'에게 얻어맞고 44분의 교전만에 앞서 언급한 상식을 깨는 얇은 장갑을 가진 주포탑과 바벳이 박살나면서 모든 포탑이 파괴되었으므로 사실상 전투불능. 이후로는 그냥 두들겨맞았는데 후드때와 마찬가지로 비스마르크를 너무 과대평가한 영국전함 두척이 근접거리로 너무 접근한 탓에 현측만 죽어라 두들겨댄게 큰 이유였다. 2만미터 이상의 거리에서 갑판을 두들겼으면 비스마르크가 저렇게 전설로 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비스마르크호는 첫 줄전에 영국군의 불침전함인 HMS HOOD 호를 격침시키고 이를 뛰쫓는 영국해군의 추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추격을 뿌리치나 싶었지만 독일군의 무전을 방수한 영국해군에 의해 결국 위치를 들통나 1941년 5월27일 차가운 북대서양에서 격침되었다. 2천여명이 넘는 승무원중 (2200여명이나 탑승했다고 한다)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114명에 불과하고 이들 사망자중에는 훈련을 위해 탑승한 독일해군사관학교 생도 400여명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 애석한 일이로고..) 비스마르크호의 침몰은 안그래도 해군을 마뜩치 않게 보던 히틀러을 대노케 했고 이후 자매함은 티피츠호는 연합군의 추격을 피해 노르웨이만의 안전한 내해로 숨어있게 했고 결국 전쟁내내 이렇다할 활약도 못해보고 버티나 1944년 11월 영국공군의 폭격에 의해 격침되었다 이렇듯 비스마르크호의 침몰은 독일해군에 있어 충격이상이였으며 전쟁초반 이미 해군력을 상실한것과 같았다]
격침기록은 후드 하나뿐이지만 네임밸류만은 엄청나게 높다. 배치시점에서 세계최대의 거함이라는 그 상징성에다 첫 출격에서 영국의 후드(비스마르크 건조전까지는 세계최대의 거함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를 격침시켰고 비스마르크를 잡기위해 영국 해군이 투입한 전력도 엄청나다.
롬멜처럼 영국이 일부러 띄웠던 사정도 있다고... 첫전투에서 영국 해군 최대의 거함인 후드가 별다른 타격도 주지못하고 격침당하고 신예전함이었던 프린스 오브 웨일즈 역시 두드려 맞고 도주해야 했으니... 게다가 2차 대전중 전함 간의 고전적 포격전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대서양에는 사실상 이 전투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샤른호르스트 추격전 당시 샤른호르스트와 듀크 오브 요크는 아무래도 체급이 다르니. 이외에 2차 대전 전기간을 따져봐도 전함이 포격전만으로 격침된 기록은 영국의 후드,
일본의
기리시마, 독일의 샤른호르스트 셋 뿐이고 이 셋은 모두 순양전함이다. 공교롭게도 3척 모두 정규전함에게 격침당했다.
2차 세계대전 직전의 상황에서는 기관공학의 발전으로 두터운 장갑을 두른 정규전함이 순양전함에 버금가는 속도를 낼 수 있었으므로, 순양전함의 쇠퇴는 예견되어있었는데,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전투가 기리시마와 워싱턴의 포격전이었다. 워싱턴의 경우 단 7분간의 일제포격으로 16인치 주포탄 9발을 명중시켜 기리시마를 완전히 캐발살내버렸다. 야간에 대략 5800 야드에서 레이더 조준 일제사격 8회 75발을 사격하여 기록한 것이다. 명중률은 12%로 1930년대 미국 전함들의 사격훈련 성적이 일본측의 3분의 1 수준인 10퍼센트대였다는 점에서 레이더가 미국전함들의 주포사격능력을 대폭적으로 향상시켰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워싱턴이 기리시마를 향해서 발사한 5인치 부포탄은 107발이고 그 중 40발이 명중하였다.
그런데 그 전 11,000야드 떨어진 경순양함을 상대로 16인치 42발을 쐈는데 전부 빗나갔다. 12%의 명중률은 8,400야드라는 초근접거리까지 다가간 덕이라고 봐야 한다. 결국 117발 중 9발이 명중한 셈.
여담으로 샤른호르스트는 나중에 킹 조지 5세급인 듀크 오브 요크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으므로 앙갚음은 한 셈이다. 덧붙여 기리시마는 미군 전함 워싱턴에 의해 격침되었다.
나름 불침함으로 이름 날리던 순양전함 후드(개전 당시 영국해군 최대급의 전함)가 럭키샷에 당한게 꽤나 뼈아팠던 모양인지 영국이 무척 띄워주고있으며, 무엇보다도 당시 영국 수상인 처칠이 비스마르크급 전함에 노이로제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다. 그래서 2번함 티르피츠를 초중량 항공폭격으로 항구에서 앉은채로 뒤집어버리는데 성공했다.
[침몰한 비스마르크호의 상상도.. 최근 영화감독이나 해양침몰연구가이기도 한 제임스카메론 감독에 의해 비스마르크호에 대한 다큐먼터리가 기획중에 있다고 한다 이 양반의 대표적인 타이타닉호가 왜 그리고 정교한지 이제서야 이해가 가는듯..]
사실
야마토가 나오기 전까지 최대급의 전함이었고 독일의 전함건조능력을 너무나 과대평가한건
미국도 마찬가지였기때문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비스마르크가 미국 동부해안까지 와서 포격을 퍼부을까 두려워했다는 얘기도 있다.
관련항목
Contents
-
- 1 개요
- 2 배경
- 3 추격 시작
- 4 덴마크 해협 전투
- 5 다시 시작된 추격전
- 6 비스마르크의 발목을 잡아라
- 7 비스마르크의 최후
- 8 뒷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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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 라인 연습작전(Operation Rheinübung)에 따라
독일 해군의 대형
전함 비스마르크가 출항하자
영국 해군이 추격에 나서면서 1941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대서양에서 벌어진 숨바꼭질이다. 결국 비스마르크가 자침 또는 격침당함으로써 종료되었다.
2 배경
1941년을 기준으로
영국은 추축국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항하고 있는 사실상 유일한 유럽국가였다. 그래도 영국은 전통적으로 섬나라였고 해양국이었기 때문에 고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며, 수많은 상선들을 이용하여 물자와 원료, 군수물자들을 영국본토로 가져오거나 또는 주요 전선에 배치하고 있었다. 독일 역시 이러한 영국의 해상보급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보트와 소수의 수상함들을 이용하여 통상파괴작전을 수행하였으나, 영국을 완전히 말려죽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1941년 3월,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의 통상파괴작전이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1941년 5월에는 중순양함 아드미럴 히퍼까지 가담하여 대서양에서의 통상파괴작전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막 취역한 대형
전함 비스마르크와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 등도 참여를 하게 되었다. 원래 계획으로는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와 대형전함 비스마르크,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으로 구성된 4척이 동시에 출항해서 전대를 구성하기로 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이렇게 출격할 경우 영국 해군이 수송선단을 전함으로 호위하더라도 이를 제압하고 수송선단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 이는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가 출격했을 때 수송선단에 영국 전함이 호위함으로 붙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공격을 포기한 사례도 있었기 때문에 수상함선에 의한 수송선단 공격이 계속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이기도 했다.
[수로를 통과중인 독일해군의 샤른호스트 순양전함으로 불리는 독특한 형상을 가진 전함으로 비스마르크가 완공되기전 독일을 대표하는 전함중 하나였다.]
하지만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는 귀환후에 영국 공군의 폭격을 맞거나 기관수리에 시간이 걸리는 등의 사유로 인해 예정대로 출격하기 곤란하게 되었다. 그래서 독일 해군은 통상파괴작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전력의 저하를 각오하더라도 공격전대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우선 출격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지휘하던 군터 뤼첸스 대장은 "비스마르크의 목표는 영국의 함대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상선을 공격하고 군함과 마주쳤을 때는 가급적 교전을 피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독일해군은 두 군함에 연료와 군수물자, 탄약 등을 보급해줄 수 있도록 래브라도 해협 근처와 카보베르데 섬에 보급선단을 배치하였다.
[1941년 당시 독일해군의 주력함은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호 였으나 이들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는 귀환후에 영국 공군의 폭격을 맞거나 기관수리에 시간이 걸리는 등의 사유로 인해 예정대로 출격하기 곤란하게 되었다. 그래서 독일 해군은 통상파괴작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전력의 저하를 각오하더라도 공격전대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우선 출격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완공되자마자 거대한 위엄을 보이며 시험운항중인 비스마르크호의 모습]
이에 따라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은 호송선단과 함께 발트해를 출항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저항세력에 포착되었고 영국 해군성에 전달되었다. 그 즉시 영국
공군에서 정찰기를 발진시켰으며 5월 21일 베르겐 근처의 피요르트에 정박중인 2척을 확인하였다.
[비스마르크호는 시험운항 겸 독일해군이 진행중인 압박작전의 이행을 위해 완공하자마자 시험운항겸 작전에 투입되게 된다]
이 사실을 파악한 영국 해군 사령부는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선 이 두 군함의 임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당시 영국 본토주둔함대(Home Fleet)는 막 건조된
전함 킹 조지 5세(KGV),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순양전함 후드, 리펄스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항공모함 빅토리어스와 10척의 순양함, 12척의 구축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비스마르크 정도의 대형전함은 보유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후드의 경우는 영국 해군 최대의 함선이지만 함령이 30년을 넘고 제대로 된 대개장도 못받아서 낡고 속도도 떨어진데다가 순양전함이라 장갑이 빈약하므로 비스마르크를 상대로 전면에서 함포를 주고받을 수 있는 후보로는 KGV만이 거론되고 있었으며, 동급인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막 취역한 상황에다가 포탑작업이 마무리 되지 않아서 효과적인 화력을 제공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거기다 POW는 추격동안에도 내부 마무리 공사중이라 민간인도 타고 있었다.) 그리고 기대를 걸 수 있는 항공모함 글로리어스 역시 막 취역하여 함재기를 딱 한 번 발진시켜봤을 정도로 준비가 부족하였다.
[영국해군의 최신전함 전함 킹 조지 5세(KGV), 의 모습 15인치 포를 12문이나 장착한 영국군의 거대전함으로 비스마르크호를 격침하게 위한 작전에 투입되기도 하였다]
3 추격 시작
5월 22일에 이루어진 항공 정찰에서 비스마르크가 어디론가 떠났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대기중이던 Home Fleet가 출항하였다. 여전히 독일해군의 꿍꿍이를 몰랐지만 일단 호송선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노르웨이 북부의 증원병력이나
아이슬란드 상륙을 시도할 것으로 추측한 함대 사령관 존 크로닌 토비 대장은 KGV와 빅토리어스는 아이슬란드 남쪽의 항로를 수색하도록 하였고, 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덴마크 해협을 수색하도록 지시하였다. 그 외에 다른 군함들도 여러 지역에 분산시켜 사라진 독일 군함을 찾도록 하였다.
[노르웨이 내해의 모습 사진에서 보듯 피요로드라 불리는 해안절벽으로 이루어진 좁은해협으로 비스마르크는 이곳을 작전지역으로 삼아 운항중이였다]
그 중에서 영국 순양함 노포크와 서포크는
아이슬란드 북쪽과 북극해 사이의 해협에 대한 수색을 명받은 상황이었다. 당시 노포크와 서포크에는
레이더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초기형이라 탐지거리가 20km 이하였는데, 날씨만 좋다면 차라리
망원경을 이용하여 관찰하는 것이 더 나은 수준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5월 23일 아침, 서포크의 견시가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발견하였다. 당시 안개가 끼어있었던 까닭에 독일군함은 그들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하였으며, 무선으로 발견보고를 한 이후 레이더에 포착된 두 개의 점을 목표로 미행을 시작하였다.
미행을 하던 중에 노포크가 실수로 안개를 뚫고 비스마르크의 10km 거리까지 접근하는 바람에 포격을 받기도 하였으나 곧 안개속으로 모습을 숨겼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이를 제외하면 양측의 충돌은 없었으며 험난한 북극해를 뚫고 추격이 계속되었다. 어쨌든 이 두 척이 밤새도록 현재 위치와 침로, 속도 등을 보고해준 덕분에 영국해군은 대응 계획을 세울 수 있었으며, 당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 요격 명령이 떨어졌다.
4 덴마크 해협 전투
공격명령을 받은 홀랜드 중장은 즉시
덴마크 해협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5월 24일 새벽 5시 35분에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발견하였으며 5시 49분 양측은 포격전을 벌일 수 있는 위치까지 접근하였다.
후드에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홀랜드 제독은 전방을 바라보면서 비스마르크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로 인해 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전방 함포만으로 공격하게 되었는데 만약 모든 포문을 열었다면 독일 함대에 비해 함포 위력에서 앞설 수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이후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일단 영국 해군 입장에서는 배수량은 비슷하지만 30년 후에 건조되서 최신기술이 집약되고,
대응방어가 갖추어졌다고 판단되는 독일의 비스마르크 전함에 대항해서 낡고 장갑이 빈약하며, 건조중에 유틀란트 해전이 발생해서 해당 해전의 교훈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었던
순양전함인 후드가 원거리에서 정상적인 함포 교전을 시작하면 독일 전함은 별 타격을 안입었는데 혼자 가라앉을 수 있으므로 낡고 약한 전함이 선택하는 방법인
근거리까지 돌격해서 치명타 먹이기를 시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사실 비스마르크가 격침될 때까지 영국에서 해당 함선의 정확한 제원을 알지 못했으므로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은 당연하다.
[비스마르크를 첫 발견한 영국전함 HMS HOOD 의 모습 1차세게대전부터 여러 전투에 참여한 역전의 노장으로 불침전함으로 불리는 영국해군을 대표하는 전참이였다]
[아직 2차대전이 일어나기전 영국해군과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며 항해중인 후드의 모습 사진의 맨뒤이다. 앞에는 각각 샤론호스트호와 어드미랄 가라프쉬페 (맨앞) 의 모습 실제로 독일해군 장교들은 영국해군 장교들과 친분이 있었으며 개인적으로 친구처럼 지내는 경우도 많았다]
어쨌든 23km까지 접근한 후드에서 제일 먼저 사격을 시작하였고, 이어서 나머지 군함들도 일제히 포문을 열고 함포사격에 나섰다. 당시 후드는 후방에 위치한 독일군함에 함포를 집중시켰는데 그 위치에 있었던 것은 프린츠 오이겐이었다. 원래 비스마르크가 후방에 위치하는 것이 정상적인 배치였으며, 이런 배치에 따라 후드가 후방을 공격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적함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착각했을리 없다는 반론도 있어서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일단 2차대전 당시의 독일의 중순양함은 크기가 2만톤 가까이 될 정도로 크고 전함과 비슷한 2연장 포탑 배치 및 상부구조물을 가지기 때문에 원거리에서 보면 식별이 곤란한 문제점이 있어서 후드가 목표물을 착각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프린츠 오이겐 역시 반격에 나서서 후드에 명중탄을 먹였으며, 중순양함의 8인치 포탄이라 별 피해는 없었지만 이로 인해 후드에는 작게나마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는 비스마르크에게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한 결정적인 목표물로 작용하였다.
[프린츠 오이겐에서 바라본 후드함의 모습 이사진촬영후 몇십분도 안되어 후드는 격침되어 바닷속에 수장되었다]
6분간의 포격전이 끝난후 홀랜드 제독은 모든 함포문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좌현으로 변침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변침을 마치기도 전에 비스마르크의 일제사격이 후드의 마스트를 직격하였다. 게다가 포탄 몇발이
머피의 법칙처럼 이미 약점으로 지목된 지 오래인 후드의 측면장갑 상부에 있는 얇은 경사장갑을 관통한 후 후드의 탄약고를 관통, 폭발시켰다. 그 결과 후드에는 엄청난 폭발과 함께 화염이 치솟았고 겨우 2분만에 두동강이 나서 격침되었다. 워낙 빠르게 침몰한 까닭에 1,400여명의 승무원 가운데 딱 2명만 살아남았다.
[비스마르크호의 함포를 맞고 침몰하는 후드호의 모습 애석하게도 공격은 후드호가 먼저 했으나 프린츠 오이겐을 비스마르크호로 착각하고 사격했으며 그나저 빗맞았다 바로 응수를 한 비스마르크호의 380밀리 주포가 후드의 탄약고에 명중 탄약이 유폭되며 바로 수장되었다. 이 피해로 후드호에서는 단 3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망!]
후드가 격침당하자 독일 군함들은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 함포를 집중시켰는데, 아직까지 함포탑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정상운용이 불가능했던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특히 새로 도입된 4연장 포탑이 함체에 명중한 포탄의 충격등으로 인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10문의 주포중 제대로 사용이 가능한 것은 2연장 포탑의 2문 뿐이었다. 결국 비스마르크의 주포가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함교를 명중시켰으며 함장과 일부 요원을 제외하면 전원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이로 인해 프린스 오브 웨일즈도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하고 전선에서 이탈하였다.
[비스마르크 (Bismarck)는 2차대전 개전전 가장큰 대형전함이였다.이 전함은 프랑스 해군의 됭케르크(Dunkerque)급 전함에 대항하기위해서 만들어졌으며, 처음에는 13인치포 8문 탑재, 속력30노트 이상, 기준 배수량 35,000톤을 목적으로 해서 설계되었다. 그러나 신기술의 개발과 프랑스 해군과 이탈리아 해군의 차기 주력함의 주포 구경이 15인치라는 정보가 입수되어 끝내 15인치포를 장착하게 되었고 기준 배수량은 40,000톤까지 증가하였다. 건조당시에는 세계최대의 전함이었다. 특히 8문의 15인치 (380밀리) 주포의 위력은 당대 최고의 화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하지만 프린스 오브 웨일즈도 비스마르크에게 명중탄을 날렸으며, 해당 포탄이 연료탱크에 금이 가게 만들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도 연료누출이 시작되었다. 이는 비스마르크가 더 이상 통상파괴작전을 하지 못하고 본국으로 귀환해야 하는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였다.
미행을 했던 노포크와 서포크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불과 8분만에 후드와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관광당했고 홀랜드 제독까지 전사하는 바람에 노포크와 서포크를 지휘하던 제독이 현장에서 가장 계급이 높은 지휘관이 되어버렸다. 상황을 파악한 지휘관은 사령부에
"후드 격침됨"이라는 아주 짤막한 보고를 올리고 현장 정리에 나섬으로써 전투는 마무리 되었다.
5 다시 시작된 추격전
낡았지만 배수량만 따져봐도 영국 해군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후드가 격침당했다는 소식이 번지자 영국 해군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 곧 그 충격은 분노로 돌변하였으며, 곧 대서양에 있던
모든 영국 군함들이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상황을 마무리하면서 서포크와 아이슬란드에서 파견한 정찰기에서 연료가 유출된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가 독일로 돌아갈 수도 있었고, 프랑스나 스페인 또는 독일에 우호적인 중립항구 어딘가로 갈 확률이 있다는 사실만을 파악할 수 있었다.
[후드 격침이후 동료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도 반격, 발사한 포탄이 비스마르크호의 선수부분에 명중 비스마르크 역시 상처를 입고 서로 퇴각하였으며 후드이 격침을 보고받은 영국은 즉각 추격팀을 소집 비스마르크호를 추격하기에 이른다. 덴마크해엽전투에서 후드를 격침하고 자신도 상처를 입은 비스마르크호는 선수를 아군지역인 프랑스로 향했고 이어 영국해군은 포위망을 좁혀오면서 추격했으나 이를 놓치게 된다. 하지만 비스마르크호에서 보낸 무전을 방수한 영국해군은 비스마르크호의 위치를 파악했으며 이어 구식항공모함 로열아크호에서 출격한 소드피쉬들에 의해 비스마르크호를 발견 방향타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판단에 따라 지브롤터에서
순양전함 레나운과 항공모함 아크 로열, 순양함 셔필드와
구축함 6척이 출격하였으며,
캐나다 북동부 지역인 노바 스코티아 핼리팩스에서 전함 리벤지가 출격하였다. 여기에 개장을 위해
미국 보스턴으로 가고 있던
넬슨급 전함
로드니도 방향을 돌려 비스마르크 추격을 나섰으며, 전함 라밀리즈와 중순양함 런던, 경순양함 에든버러가 호송선단을 내팽개치고 비스마르크 추격에 나섰다. 그 이외에 많은 군함들이 사령부로부터 명령을 받지 않았음에도 원래 수행중이던 임무따위 내팽개치고 비스마르크 추격에 나섰다. 몇몇 소수의 군함만이 비스마르크가 독일로 돌아올 때를 대비하여 북해 주변을 순찰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이었다. 더불어 함교를 피격당한 프린스 오브 웨일즈도 정리를 마치는 대로 서포크와 노포크에 합류하여 비스마르크 추격을 재개하였다. 즉,
대서양에 있는 거의 모든 영국해군이 비스마르크를 잡기위해 들고 일어난 상황.
한편 토비 경은 비스마르크가 영국 함대의 추격권에서 벗어나기 전에 무언가를 해야 된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항공모함 빅토리어스에게 함재뇌격기
소드피시를 이용하여 비스마르크를 수색하여 손상을 줄 것을 주문하였다. 그 결과 비스마르크에 어뢰 한 발이 명중시켰으나 해당 어뢰는 가장 두꺼운 현측장갑부분에 명중해서 별로 피해를 입히지 못했기 때문에 그 날 밤 추적중이던 선단이 여전히 고속을 유지하는 비스마르크를 놓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후드호의 격침은 바로 영국해군에 전달되었고 이내 비스마르크호를 격침하기 위한 추격대가 급히 결성되었다 특히 당시 동원가능한 유일한 항공모함인 아크로열호는 구식 복엽기인 소드피쉬만을 운용하고 있었지만 이들 소드피쉬들에 위해 비스마르크호의 키를 고장내 결국 격침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다행히 비스마르크가 무선신호를 발신해준 덕분에 방위각 산출을 통해서 대략적인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다. 이 때 해군본부에서 자신들이 실컷 위치를 계산해놓고도 현장의 군함들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비스마르크의 위치를 계산하도록 시켰다. 그 결과 토비 경은 비스마르크가 아이슬란드를 경유하여 독일로 돌아간다는 결론을 내렸고 Home Fleet에게 북동쪽으로 변침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문제는 이것이 잘못된 계산이었고 해군본부에서도 Home Fleet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결과 토비 경은 비스마르크의 두 번째 무선신호가 수신된 후에야 자신들이 잘못 계산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는 이미 비스마르크와는 약 160km 가량 떨어져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Home Fleet의
삽질로 구축함과 순양함들은 재급유를 위해 아이슬란드로 복귀하고, 전함과 항공모함이 대잠방어망 없이 대서양으로 나가는 것은
유보트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이나 다름없어 그 즉시 480km나 떨어져있는 장소에 있던 구축함 5척의 합류를 지시하였다.
6 비스마르크의 발목을 잡아라
5월 26일 10시 30분, 북아일랜드에서 날아온 카탈리나 비행정이 전함 발견 사실을 통보하였다. 보고된 위치를 분석한 결과 KGV 중심의 Home Fleet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약 216km, 전함 로드니를 기준으로 남서쪽으로 약 200km, 지브롤터에서 출항하여 북진하고 있는 H 부대를 기준으로 북북서로 176km 떨어진 지점이었다. 문제는 이대로 계속 상황이 전개되다가는 비스마르크가 영국 해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독일 전투기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점이었다.
현재 비스마르크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것은 Home Fleet의 명령을 받고 이동중인 구축함 5척과 H 부대에 소속된 소드피시 뇌격기였다. 이에 따라 H 부대를 지휘하던 제임스 섬머빌 경은 아크 로열에게 소드피시를 발진시켜 비스마르크의 발목을 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순양함 셔필드는 앞서 나가서 비스마르크의 위치를 파악하라고 주문하였다. 문제는 아크 로열에서 셔필드에게 내려진 명령이 자신들에게 내려진 명령이 아니라고
무시하였고, 아크 로열에서 발진한 뇌격기들은 이 사실을 모른채 셔필드에 뇌격을 가하였다. 다행히 신뢰성이 극악으로 떨어지는 주옥같은 자기기폭뇌관 항공어뢰와 셔필드의 교묘한 회피기동으로 피격은 모면하였다.
[비스마르크호를 끝장내게 한 주인공은 다름아닌 2차대전 개전당시에도 이미 고물비행기라 놀림을 받던 소드피쉬라는 복엽기였다. 이는 속도도 느리고 당시에도 이미 고물취급받던 복엽기타입의 뇌격기였지만 우수한 성능과 뛰어난 조종사덕분에 비스마르크호를 추격 어뢰로 조타장치를 명중시켜 비스마르크호가 더이상 도망치지 못하게 하였고 결국 이들 소드피쉬들의 집요한 공격덕에 비스마르크호는 꼬리를 잡혀 격침되게 된다]
저녁 7시경, 아까와는 달리 신뢰성이 높은 접촉식 뇌관의 항공어뢰를 장착한 소드피시들이 발진하였다. 이번에는 셔필드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엉뚱한 배를 공격하지 않았으며, 셔필드의 인도에 따라 전방 약 19km 가량에 위치한 비스마르크를 조지기 위해 날아갔다. 하지만 당시 상공에 불고있던 엄청난 바람으로 속도가 느렸던 소드피시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밀려나버려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다시 순양함 셔필드 상공에 집결한 소드피시 뇌격기들은 비스마르크를 찾아서 떠났으며, 이번에는 제대로 날아가서 비스마르크에 뇌격을 가하였다. 한편 상황을 지켜보던 셔필드는 너무 가까이 접근하여 함포에 얻어맞을 우려가 있자 즉시 반전하였는데, 어렴풋이 비스마르크가 북북서 방향으로 변침하는 것을 확인하고 즉시 보고하였다.
[로얄아크호에서 발진한 소드피쉬들은 모기떼처럼 달려들어 비스마르크호를 공격하는데 구식 복엽기인 소드피쉬들을 비스마르크는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이는 처녀출전으로 아직 대공망이 완성되지 않은탓에다가 비스마르크 승무원 역시 모기때 처럼 달려드는 소드피쉬들에 효과적은 반격을 하지못한탓도 크다 결국 소드피쉬가 발사한 어뢰가 비스마르크의 방향타에 명중 발목을 잡게되었다]
당시 토비 경은 소드피시 뇌격기 편대장으로부터 공격실패 보고를 받은 직후여서 셔필드가 뭔가를 착각했고 판단을 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남서쪽으로 그대로 가면 안전지대에 갈 수 있는데 굳이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게 될 북쪽으로 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크 로열에서 어뢰 한 발이 명중됐다고 보고를 번복하였으며, 복귀하던 정찰기에서도 비스마르크가 함미에 어뢰를 맞고 멈춰섰다는 보고가 올라와 셔필드가 제대로 봤음이 증명되었다.
[비록 속도가 늦은 구형복엽기였지만 소드피쉬의 성능은 매우 뛰어났으며 여기에 영국 조종사들의 실력도 매우 뛰어났다. 반대로 이를 대응하는 비스마르크호의 승무원들은 아직 대공전투에 대한 훈련을 제대로 받아본적이 없었기에 극심한 피해를 입게된다]
드디어 비스마르크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에 만족한 토비 경은 날이 밝거든 전함들을 앞세워 비스마르크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당시 공격위치에 있던 구축함 5척에게 비스마르크를 계속 감시할 것을 주문하였다.
당시 영국해군은 결코 여유있는 상황은 아니었는데 계속되는 추격전으로 연료가 바닥난 구축함이나 순양함들이 족족 급유를 위해 떠나면서 대잠방어가 취약한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독일군 역시 잘못된 정보분석을 바탕으로
유보트를 엉뚱한 곳으로 출동시켰던 까닭에 영국해군의 대형군함들이 어뢰에 농락당하는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덕분에 나중에 사실을 깨닫고 비스마르크 근처로 집결시킨 유보트들은 5척에 불과한데다가 어뢰가 1발도 없어서 말 그대로 관전자로 전락해버렸다.
7 비스마르크의 최후
비스마르크가 함미에 맞은 어뢰는 원래 약한 항공어뢰라서 일반적인 경우에는 그렇게까지 큰 피해를 주지 않지만, 하필이면 교체하기 직전 상태라 항구에 새 키가 대기할 정도로 낡은 키가 어뢰를 회피할 목적으로 크게 꺾인 상황에서 명중했기 때문에
키가 꺾인 채 고정되버렸다. 게다가 꺾인 키를 현장에서 다시 수리하거나 폭파시킬 장비와 기술도 없었다. 덕분에 조금만 더 항진하면 독일군 항공기의 제공권 내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키가 꺾이는 바람이 스크류를 돌리기만 하면 북동쪽의 영국 방향으로 움직이는 막장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이 이후로 사실상 비스마르크는 앉은뱅이가 되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비스마르크에 뭔가 이상이 생긴것을 알아차린 영국 해군이 구축함들을 보내서 밤새도록 비스마르크를 괴롭혔다.
5월 27일 서서히 날이 밝기 시작하자 전함 KGV와 로드니, 순양함 노포크와 도르세셔가 비스마르크에 접근하였으며, 오전 8시 47분 로드니를 시작으로 비스마르크에 일제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비스마르크도 곧 응사에 나서서 2차대전에서 굉장히 보기드문 전함 간의 포격전이 시작되었다.
KGV와 로드니는 16인치와 15인치 대구경 함포를 통해 비스마르크를 공격하였으며, 중간중간 전함이 전함에 어뢰를 쏘는 좀처럼 보기 드문 상황이 벌어지곤 하였다. 어쨌든 비스마르크는 필사적으로 응전하고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앉은뱅이라 고정표적 신세가 된 상태에서 피해를 입은 함포들이 하나둘씩 침묵하고 군함의 마스트는 물론이고 군함의 거의 모든 부분이 파손되어 사실상 무력화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비스마르크는 격침되지 않았으며, 10시 15분이 되자 KGV와 로드니가
연료부족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토비 경은 영국이 자랑하는 전함의 포격에도 비스마르크를 격침시킬 수 없다는 점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다른 군함들에게 어뢰로 비스마르크를 공격하라고 지시하였다. 당시 도르세셔만이 어뢰를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가까이 접근하여 어뢰를 발사하였으며, 비스마르크는 좌현으로 전복되어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영국은 도르세셔가 발사한 어뢰가 결정적인 타격이 되어 격침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독일군은 다른 주장을 하고 있었는데 KGV와 로드니가 연료부족으로 인해 비스마르크에서 멀어질 때 비스마르크에 살아남은 최고선임 장교 게르하르트 유낙 중령의 지시에 따라 배의 포기가 결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해수밸브를 열어 자침시켰다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호에 탑승한 2,200여명의 승무원중 살아남은이는 불과 114명에 불과했다. 특히 첫줄전이라 독일해군사관학교의생도 400여명을 태웠는데 이들은 단한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들 생도의 손실로 인해 독일해군의 몰락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8 뒷 이야기
- 비스마르크의 최후가 자침인가 격침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자신들의 유리한 자료를 들이대면서 싸우고 있는 관계로 여전히 불명이다. 제임스 카메론이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실시한 선체 조사 결과 비스마르크의 선체 하단은 멀쩡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이 발표 직후 영국 BBC가 같은 조사를 실시, 영국 순양함이 실시한 뇌격지점에 큰 파공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서 확실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고, 일단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수선하 방어구조로 볼 때 양자 모두 가능성은 있다는 게 문제다. 심지어 독일측의 자침 발표에서 가장 중요한 근거 중 하나인 게르하르트 유낙 중령의 회고조차도 영국측의 심문 결과와 전후의 회고 내용이 다르다. 영국 심문 결과는 자침 명령보다 배가 이미 침몰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문서 파기와 최종 퇴함만을 명령했다는 것이며, 영미권 전쟁사 개괄서는 대다수가 이 견해를 따르고 있다. 사실 비스마르크의 방어구조는 견고하긴 하나 고전적인 구조여서 실질적인 방어력이 높지 않고 배 자체가 과도한 침수에 대응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수상함용 어뢰를 맞았을 경우 자침이 필요할 정도로 버티기 어렵다는 것이 전함의 기술적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 대다수의 견해이다.
- 비스마르크는 기본적으로 1차대전식 방어체계의 발전형으로, 현측장갑이 강력하고 갑판장갑이 상당히 약했다. 특히 갑판장갑의 경우 사실상 대낙각 포탄 및 폭탄에 방어력을 가질 수 없는 얇은 장갑갑판 2-3개로 방호하고 있어서 사실상 스펙만큼의 방어력도 없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정체를 잘 모르던 영국 해군은 비스마르크의 화력이 일찌감치 무력화되자 포탄 관통력과 명중률을 높일 심산으로 지나치게 근접해서 난타하는 바람에 비스마르크의 방어력이 100% 발휘되는 어이없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래서 수백발이 맞아도 가라앉지 않았던 것이다. 당장 로드니의 경우 전함끼리의 교전이라면 그냥 명중률 문제가 아니라 함정간 충돌까지 각오해야 하는 거리인 2km까지 접근해서 발포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포격의 또다른 부작용은, 관통을 해 봤자 침수를 유발할 수 있는 타격은 도저히 입힐 수 없으므로, 관통해봤자 그저 바람구멍만 뚫고 만다는 것이다.
- 비스마르크가 일찍 샌드백 신세가 된 이유는 주포탑 장갑과 바벳이 타 전함에 비해 상당히 얇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포탑에 경사장갑을 잘못 적용해서 포탑 측면의 윗부분 절반이 얇은 상부장갑으로 구성되는 바람에 측면에서 날아오는 포탄의 절반이 얇은 상부경사장갑을 뚫고 포탑 내부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치명적인 실수까지 저질렀다. 덕분에 비스마르크에게 포탄을 퍼부은 영국 해군은 비스마르크의 주포탑을 치즈 덩어리처럼 송송 구멍이 뚫린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비스마르크는 16인치 단 1발 피탄으로 전방 1, 2번 포탑이 동시에 무력화되는 등, 주요 무장부위가 쉽게 가동불능이 되는 약점을 노출했다. 그래서 초전에서 영국 전함을 협차하여 명중탄을 줄 수도 있었는데 바로 주포탑이 파괴되면서 샌드백으로 전락해버렸다.
이 부분들이 이렇게 된 것은 배의 고전적 장갑구조로 인해 함정 배수량에서 장갑이 차지하는 중량이 지나치게 커져 흘수가 너무 깊어지고, 덤으로 높은 함상구조물 때문에 무게중심이 잘못 배분되면 배의 안정적인 항해능력에도 영향을 줄 정도였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장갑을 줄인 것이었다.
- 2차대전 당시 독일의 수상함대는 육군이나 공군에 비하여 안습한 상황이었는데, 독일이 자랑하던 최대의 군함 비스마르크를 말아먹으면서 더더욱 안습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사실상 이 시기를 기준으로 해서 독일 수상함대의 대서양 출격은 종지부를 찍었으며, 이후에는 대서양에서는 유보트와 소형 선박을 제외하면 소수의 상선을 개조한 가장순양함이나 비밀수송함의 출격만 이루어졌다.
- 비스마르크의 발목을 잡은 것은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소드피시였다. 이를 계기로 바다에서 더이상 커다란 배와 대구경 함포가 절대적인 우위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보여준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영국군은 이런 훌륭한 전훈을 엿바꿔먹었는지 수리가 끝난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순양전함 리펄스를 인도차이나에 항공호위없이 파견 보냈다가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그렇게 영국군을 물먹인 일본군 역시 함대결전사상 때문에 항모도 제대로 안 굴리고 함재기 성능에도 신경을 안 쓰다가 미드웨이 해전 이후 비행기와 조종사를 죄다 말아먹어서 항공기를 대거 동원한 미국에 털렸으니 이놈이나 저놈이나 병신도 아니고…. 그래도 미국은 이 악순환을 밟지 않았다.
- 비스마르크가 마지막 교전을 할 당시 유보트 5척정도가 근처에 있었고, 그 중 2척은 현장에 있었으므로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싸울 수 있었다면 아크 로열이 함재기를 출격시키기도 전에 수장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독일군 입장에서)불행이도 한척은 어뢰가 오링난 상태였고 나머지 한척은 폭뢰 공격을 두들겨 맞고 심하게 손상된 유보트라 어뢰 발사를 할 수 없어 지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출처 엔하키미러 (http://mirror.enha.kr/wiki/%EB%B9%84%EC%8A%A4%EB%A7%88%EB%A5%B4%ED%81%AC)
PT2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