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29. 주일예배설교
여호수아 6장 1~27절
숙성된 영성 길라잡이들을 통한 영적 지시사항
■ 혹시 비 오는 날이든, 눈 오는 날이든,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길을 떠나 본 적이 있으신가요? 감성에 젖어 목적지가 대수냐며 무작정 길을 나선 느낌은 설렘입니다. 그런데 비가 그치고, 눈이 그치면, 감성도 덩달아 그치고 맙니다. 지녔던 설렘은 어디로 갈지를 고민하는 민망함이 되고 맙니다. 경험이? 있으시군요.
제가 이러한 감수성을 민망하게 하자고 화두를 잡은 것은 아닙니다. 인생에서 감성은 필요하지만, 감성으로 무작정 길을 나서는 것에 대한 주의를 당부하고자 함입니다.
우리는 종종 감성이기도 한 느낌에 기대곤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사용합니다. ‘느낌적 느낌’. 이것은 ‘느낌’이라는 말을 중복해서 사용한 것인데, 어떤 상황이나 사물에 대한 직관적인 느낌을 뜻합니다. 여하튼 종종 직관이라는 느낌 혹은 감정에 의해, ‘갈 길’을 정하거나 ‘그 길’을 이해하곤 합니다.
이를 신앙생활에도 동일하게 적용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리고 이것을 주님의 뜻이라고 확신합니다. 물론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직관이라는 느낌에 의해 오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은 영성으로 옵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감동을 따라 글과 말과 묵상 가운데 영혼의 울림으로 옵니다. 이것은 감성과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은 즉흥적이지 않습니다. 직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장 하라고 하시기도 하지만, 즉흥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품에서 오래 묵히시고 진행하신 후, 지시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직관이 아닌 영성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감성이나 지성이 영성보다 하등하다거나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에도 각각의 기능을 부여하셨기에 다 소중합니다. 단지 하나님의 뜻은 영성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 믿음에서 영성을 발달시키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이를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숙성된 영성의 길라잡이를 봅니다. 여호수아가 길라잡이입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백성이 만난 여리고 성이라는 거대한 도전을 다룬 태도 또한 길라잡이입니다. 바로 이 길라잡이들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그리고 비전교회에게 어떤 영적 지시를 하고자 하시는지를 알고자 합니다.
■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던 것처럼, 여호수아에게도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즉각 순종했고, 드디어 여리고 성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마주한 여리고 성은 긴장감으로 팽배했습니다.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긴장감의 이유는, 승승장구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막아내야 하는 여리고 성의 절박함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도 긴장감을 갖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승승장구를 하고 있지만, 실패한 전력도 있고, 더욱이 여리고 성 직전에 할례 행함과 만나의 끊김과 신을 벗기심의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연속적인 이 세 사건은 요단강을 건넜다는 들뜬 마음을 주저앉히는데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여리고 성도, 이스라엘도 긴장감을 갖고 있는 중에 하나님의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2~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하나님의 지시는 분명하셨습니다. 이는 요단강을 건널 때처럼 분명한 규칙을 지시하셨습니다. ‘알아서 해!’가 아니라 ‘이렇게 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는 막연하거나 불투명하지 않으십니다. 분명하십니다. 우리가 막연하게 이해하고, 불투명하게 볼 뿐입니다. 하나님은 늘 분명하십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하나님의 지시를, 분명하게 듣고 보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영성이 필요합니다. 졸고, 딴 데 귀를 기울이고,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긴 상태에서는 결코 깨어있는 영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온전히 둘 때야, 깨어있는 영성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깨어있는 영성을 보여주는 분이 여호수아입니다. 지시하신 것을 분명히 이해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시하신 것을 백성들에게 그대로 지시하지 않습니까? 6~7절입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가라.’ 하고,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그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갈지니라.’ 하니라.” 그리고 8절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10절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6절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에서 보듯, 여호수아는 지시하신 것을 그대로 백성들에게 지시하였습니다.
참으로 여호수아의 깨어있는 영성은 ‘지시하신 것을 명확하게 이해하였고, 그것을 그대로 순종한 영성’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영성은 순종하는 영성만이 참된 영성입니다. 명확하게 이해한 것만으로는 참된 영성이 될 수 없습니다. 참된 영성은 순종하는 영성입니다.
그런데 이 깨어있는 영성은 여호수아에게만 있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시하신 그대로 여리고 성을 돌았을 뿐 아니라, 성을 정복하고 난 이후에도 지시하신 그대로 행했습니다. 17~18절입니다.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물론 후에 밝혀진 것이긴 하지만, 아간만 이 지시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백성은 다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여리고 성이라는 장벽은 사라졌습니다. 이스라엘의 난제 하나가 해결된 것입니다. 드디어 땅 한 평 없던 그들이 땅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노예에서 주인이 된 것입니다. 순종이 만든 결과입니다.
■ 그런데 우리는 이 함락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하나님의 지시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침묵입니다. 6일 동안의 침묵 돌기, 7일째 되는 날 6번 돌기까지 침묵하기입니다. 10절입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의 소리만 들리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에 대한 이 규정은 이미 신을 벗는 사건에서 규정되었습니다. 신을 벗으라 하신 이유는 이곳이 ‘거룩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의미인가요? 이곳은 이미 하나님의 소유지이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규정에 따라,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라는 것이 이곳에 들어선 모든 이들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침묵을 통해, 하나님의 소리만 들리게 하라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침묵이 필요합니다. 더 이상 내 말을 내지 않는 침묵이 필요합니다. 침묵은 묵상이고, 순종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침묵만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와~~”하고 고함을 질러야 할 때가 있습니다. 20~21절입니다.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질문입니다. 왜 “와~~”하고 고함을 지르라고 하셨을까요? 계속 침묵하며 마지막 바퀴를 돌면 성이 안 무너졌을까요? 아닙니다. 침묵으로 돌아도 성은 무너집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와~~”하고 고함을 지르라고 하신 것은, 침묵이라는 ‘수동적 순종’에서 고함이라는 ‘능동적 순종’으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신앙은 가만히 있어야 할 때와 적극적으로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침묵과 묵상’과 같은 것은 가만히 있어야 할 때의 태도입니다. 이와는 달리, ‘고함과 정복’과 같은 것은 적극적으로 일을 해야 할 때의 태도입니다. 물론 두 태도 모두 순종입니다. 가만히 있어야 하는 순종도 있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순종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현시점에서, 비전교회에 어떤 순종의 태도를 요구하실까요? 침묵과 묵상이라는 가만히 있어야 하는 수동적 순종일까요, 아니면 고함과 정복이라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능동적 순종일까요? 하나님은 비전교회의 현재가 여리고 성 정복의 어느 단계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여섯째 날? 일곱째 날 두 바퀴째? 일곱째 날 여섯 바퀴째? 아니면 일곱째 날 일곱 바퀴째?
저는 비전교회의 현재를 일곱째 날 일곱 바퀴째에 접어든 상태라고 믿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우리는 일곱째 날 일곱 바퀴에 다다르기까지 너무 천천히 돌았습니다. 물론 충분히 침묵하고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재촉하심을 외면했던 것을 부인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힘이 없다는 이유로 천천히 돌았습니다. 숫자도 부족하고, 돈도 부족하다는 이유를 앞세워 천천히 돌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템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템포는 숫자와 돈에 매이지 말라는 템포였습니다. 힘에 의존하지 말라는 템포였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는 단 한 번도 숫자 때문에 비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웅크렸던 것은 사실입니다. 돈 때문에 비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위축됐던 것은 사실입니다. 힘 때문에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힘을 갈망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고백했다시피, 그동안 하나님이 원하시는 템포에 맞추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불가피하게 일곱째 날 일곱 바퀴에 들어섰습니다. 아니 다시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외쳐야 합니다. “와~~” 그리고 성 안으로 달려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 안의 우상과 우상에 찌든 생명들을 내쳐야 합니다. 그리고 라합과 그녀의 가족들을 구해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십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성 안에서의 행위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다시 전도, 다시 선교>입니다. 국내와 국외에서 영혼들을 살려내고, 우상의 문화들을 하나님 나라의 문화로 개혁하는 일에 힘쓰는 일입니다. 이것이 일곱째 날 일곱 바퀴에 들어선 비전교회가 이제부터 다시 해야 할 사역입니다. 다시 전심전력해야 할 사명입니다.
■ 우리는 그동안 충분히 침묵했고 묵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와~~”하고 소리를 질러야 할 때입니다. 바라기는 제가 깨달은 이 메시지를 여러분도 동일하게 깨닫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메시지가 비전교회의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는 거룩한 두려움이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