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19 대림특강 2)
주님 강생과 재림의 현대적 의미
전례독서를 보면 대림 제1주일~12/16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간이고, 12/17-12/24은 구세주의 강생을 기다리는 기간이다. 그리고 전례색은 보라색으로 회개와 속죄의 시간을 의미한다.
주님 강생은 매년 반복해서 기념하고 있지만 이벤트로 끝날 때가 많고, 주님 재림은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 관심도 없고 자기 살아 있을 때 절대 종말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성탄은 동화 속의 아련한 추억이 되어 버렸고 재림은 죄인들 겁주려고 왠지 꾸며낸 이야기 같다. 강생이든 재림이든 그것은 이야기로 전해질 뿐 실제로 나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별로 없다.
사실 우리는 보이는 믿음을 원한다. 초대 교회 시절에는 믿음이 뜨거웠다. 실제 예수님을 직접 뵙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으며, 기적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들이 죽고 난 다음에는 오로지 성경과 성령을 통해서 그 체험이 전해질 뿐이다. 또 재림은 곧 온다고 믿었지만 그 보류의 시간이 벌써 2천년이나 되어 버려 현실성이 없는 교리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러나 교회는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참 믿음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인간이 오감이 가지고 있는 이상 이성적인 묵상만으로는 믿음에 한계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이는 믿음을 추구하다가 이상한 길로 빠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사이비 종교, 시한부 종말론, 왜곡된 성령 운동과 마리아 신심. 그럴 만도 하다. 당장 어떤 해답을 제시해주며 눈에 보이는 뭔가를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는 과거 유다인들처럼 눈에 보이는 기적과 표징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리고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른다. 오히려 사심판이 더 빠를 것이다. 다만 우리는 성경과 성령 안에서 그분을 체험할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나 추상적이다. 성경공부와 성령 묵상회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만 그것이 나를 완전히 바꿔 놓지 않는다. 그보다 눈에 보이는 문명의 이기와 세속의 유혹이 더 현실적이며 자극적이다. 교회가 세상을 성화시키는 속도보다 세상이 교회를 속화시키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모든 것을 사도들, 즉 교회에 맡기셨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예수님의 위업을 그대로 모방할 때 그 곳에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우리는 교회와 그 구성원들의 언행을 통해서 만난다. 아래의 말씀을 보자.
-너희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제자들의 발을 씻고 난 다음)
-너희가 나누어 주어라.(오병이어 기적 전에 제자들이 빵이 없다 하자)
-너희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최후의 심판)
-너희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있다.(제자들이 하느님 나라가 어디에 있냐고 물으니)
종합하면 이미 이 세상이 오셨고 종말 때 다시 오실 그분은 우리가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적 의미의 강생과 재림은 바로 나로 인하여 구현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 내가 이 세상 속에서 이웃들 가운데 아기 예수로 육화하는 것이고 영광스런 그리스도로 재림하는 것이다.
얼마 전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팀이 동남아의 월드컵이라고 불리는 스즈키 컵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그런데 그 결과보다도 박항서 감독의 축구 철학과 그의 인성이 더 큰 눈길을 끌고 있으며 국민 영웅으로 칭송받을 만큼 그의 인기 또한 대단하다.
그의 리더십은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훈련 시스템 구축 이상의 것이었다. 사기가 떨어진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고, 축구가 강한 체력과 기술도 중요하지만 상호신뢰와 인화단결에서 시너지 효과가 더 있음을 증명했다. 승리 비법을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선수들에 대한 목자적 마음과 배려이다. 훈련을 게을리하고 체력이 약한 것이 조상 탓이라고 비관하던 선수들에게 “너희들은 충분히 강하며, 대대로 체력이 약하다는 말은 고정관념이다. 훈련이 힘들 때면 유니폼에 박혀 있는 국기를 보라고. 그리고 조국과 가족을 생각하라고,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뛰라고.” 또 박 감독은 말이 안 통하기 때문에 스킨십으로 대화했다고 한다. 머리를 쓰 담아 주고, 볼에 얼굴을 갖다 대고, 어깨동무하고, 포옹하고. 엄지 척 하고 이것이 아들 같은 선수들에게 큰 신뢰와 격려가 되었다. 또 발 마사지도 감독이 직접하고 경기 중에 부상한 선수를 위해 자신의 비즈니스 자리와 바꾸어 주고. 가족주의가 강한 베트남 문화를 적극 받아들여 선수를 고용인이기 전에 친자식처럼 사랑해주었다. 이것이 선수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이런 아버지라면 충성을 다 해도 되겠다는. 그리고 함박눈이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경기를 치르다가 한 점 차이로 석패하고 돌아 왔을 때, 고개 숙이고 우는 선수들에게 “절대 고개 숙이지 마라. 너희들은 충분히 잘 해 내었다. 최선을 다 했다. 비굴하게 고개 숙이고 다니지 마라.” 하고 격려했다. 이 때문에 선수들은 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한편 베트남 국민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승리라는 결과도 있지만, 이로 인해 국민이 대동단결하고 애국심을 더 가지게 된 점. 그리고 한국인이 베트남인에게 보여준 그 배려와 존중, 그리고 사랑에 감동한 것이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룰 때, 대한민국 전체가 태국기를 흔들며 필승 코리아를 외치고 환호하는 그 광장에, 히딩크 감독의 고향인 네들란드의 국기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보은을 미덕을 삼는 베트남인들은 여기저기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다녔다.
박항서 감독의 리더십을 보면서 과거 예수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의 선수 선발은 엘리트가 아니라 지방 각지에서 각각의 특징이 있는 12명을 뽑았다. 하나 같이 결함이 있는 자들이었다. 같이 먹고 마시면서 살을 부대끼며 살았고, 대부분이 비주류였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사도로 임명하셨다. 그리고 민초들에게 자주 하신 말씀이 “두려워하지 마라.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죄인들에게 보여주신 그분은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도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 죄 짓지 마라.(간음녀)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먼저 빵을 건네시며 물고기를 구워주신 자상함. 또 스킨십은 말할 것도 없다. 어린 아이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병자들의 눈과 귀를 직접 만지시고 낫게 해주셨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에서 예루살렘 부인들을 오히려 걱정해주시는 그분의 아버지 같은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베드로가 세 번 배반하고 닭이 울었을 때 돌아보시며 눈빛으로 그에게 말씀하셨다. “베드로, 고개 숙이지 마라. 아직 실패한 게 아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내가 임명한 사도이니라.”
이런 스승을 두었으니 사도들이 목숨 바쳐 교회를 세우며 순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도들은 예수의 인격에 감동했고 그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다. 왜 앞서 박항서 감독 이야기를 했냐면 예수 이야기는 과거 전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 이야기는 지금의 나를 통해 다시 재현되어야 한다. 박항서 감독은 개신교 신자이다. 종파를 떠나 예수 정신을 잘 이해하는 자이다. 왜 우리가 이태석 신부님 다큐를 보면서, 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파격적인 행보를 보면서 감동하는가? 바로 인간성 때문이다. 영성이 따로 있나? 참된 인간성에 도달한 자가 바로 영성가이다.
가끔 이런 회의감이 들 때가 있다. 매일 강론하고 훈화를 쓰지만 신자들이 회개하지 않는데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 무의미한 일을 또 반복해서 해야 하나. 본래 성당 이라는 것은 더 착하게 살고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라고 생긴 것인데, 오히려 성당에 와서 더 싸우고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니 더 죄를 짓게 만드는 성당이라면 차라리 없는 편이 낫지 않을까?
우리는 너무나 아는 것이 많다. 그러나 실천은 부족하다. 오늘 강론의 핵심은 성탄과 재림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례 때 듣는 말씀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라고 믿습니다.” 사도 바오로 말씀처럼 내 안에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니 우리는 이미 그분의 생명을 나누어 받았고, 그분은 이제 나를 통해 다시 부활하시고 재림하신다. 끝으로 대림 성경 필사의 한 대목을 전한다.
“그러므로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야고 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