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초 東晉(317-419)이 망한 후 長壽王의 남하정책이 고구려의 중심부를 산서,하북이 아닌 河南으로도 확대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다.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평양천도 그리고 당 태종과 고려 연개소문의 몽롱탑의 전설이 강소성 비주(丕州)에서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음이다.
1. 추모왕 원년 BC 37년 졸본 40년간
2. 유리왕 22년 3년 국내성 207년간
3. 산상왕 13년 210년 환도성 38년간
4. 동천왕 21년 248년 평양성 94년간
5. 고국원왕 12년 342년 환도성 1년간
6. 고국원왕 13년 343년 동황성 28년간
7. 고국원왕 41년 371년 국내성 56년간
8. 장수왕 15년 427년 평양성 150년간
9. 평원왕 28년 587년 장안성 81년간 (평양성=장안성)
하남 魯山縣에서 강소성 宿遷까지거리는 533Km로 군사용 車馬로 이동하면 7일내의 거리이다.
아래 역사도 즉 東晉이 망한후 북방민족이 南征한 역사도를 보여준다.
강소성에서 고-당간 전쟁의 전설이 사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흉노라 표현하고 있다. 서기 2-5세기경 匈奴가 누구인가?
선비,고려,백제,신라 等이다.
중국역사집에 기록된 사실.(중. 한림서원 刊 )
동사강목을 인용해본다.
《당서》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고구려는 본래 부여(扶餘)의 별종(別種)이다. 지역은 동으로 바다를 넘어 신라에 이르고, 남으로 또한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서북으로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와 접하며, 북쪽은 말갈(靺鞨)이다. 그 임금은 평양성(平壤城)에 거하는데 이 성을 또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하며,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이었다. 경사(京師)로부터 5천 리 떨어져 있고, 산의 굴곡을 따라 성곽을 쌓았으며 남은 패수(浿水)에 연해 있는데, 왕이 그 좌측에 궁궐을 수축하였다.
또한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이 있는데 별도(別都)라 한다. 강은 대료(大遼)ㆍ소료(小遼)가 있는데 대료는 말갈 서남산에서 내려와 남으로 안시성(安市城)을 지나고, 소료는 요산(遼山) 서쪽에서 내려와 또한 남으로 흐른다.양수(梁水)가 변방 밖에서 내려와 서쪽으로 흐르다가 대료ㆍ소료와 합쳐진다. 마자수(馬眥水)는 말갈 백산(白山)에서 내려오는데 물빛이 오리의 목같이 녹색이라 압록수(鴨綠水)라 부르며, 국내성을 지나 서쪽으로 염난수(鹽難水)와 합치며, 또 서남으로 내려와 바다로 들어간다. 그런데 평양은 압록수 동남방에 있으며 큰 배로 사람을 건네야 하므로 그것을 믿고 천연의 참호(塹壕)로 삼았다.
관직은 12등급으로 본서(本書) 신대왕(新大王) 2년에 자세하게 보인다. 주현(州縣)은 60성(城)이며, 큰 성에는 욕살(傉薩) 1인을 두었는데 도독(都督)에 비견되며, 나머지 성은 처려근지(處閭近支)를 두었는데 도사(道使)라 부르기도 하며 자사(刺史)에 비견된다. 참좌분간(參佐分幹)과 대모달(大摸達)이 있는데 위장군(衛將軍)에 해당하며, 말객(末客)은 중랑장(中郞將)에 비견된다. 5부(五部)로 나누었다. 내부(內部)는 한계루부(漢桂婁部)로 황부(黃部)라고도 하며, 북부(北部)는 곧 절노부(絶奴部)인데 혹은 후부(後部)라고도 하며, 동부(東部)는 곧 순노부(順奴部)인데 좌부(左部)라고도 하며, 남부(南部)는 관노부(灌奴部)인데 또한 전부(前部)라고도 부르며, 서부(西部)는 곧 소노부(消奴部)이다. (중략)
통전(通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동진(東晉) 이후부터 그 왕은 평양성(平壤城)에 거하였으니 즉 한(漢) 낙랑군(樂浪郡) 왕검성(王儉城)이다. 모용 황(慕容皝)이 와서 친 뒤 국내성(國內城)에서 이 성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또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하는데 요동(遼東) 남쪽 1천여 리에 있다. 그 땅은 후한(後漢) 때는 사방 2천 리였으며, 위(魏)ㆍ남북조에 이르러 점점 좁아져 겨우 1천여 리였다가 수(隋)에 이르러 점점 커져서 동서 6천 리나 되었다.
서적은 오경(五經) 삼사(三史 《사기(史記)》ㆍ《한서(漢書)》ㆍ《후한서(後漢書)》ㆍ《삼국지(三國誌)》ㆍ《자통(字統)》ㆍ《자림(字林)》이 있다. 그 나라는 벼슬을 9등급으로 나누었는데 본서 신대왕(新大王) 2년에 자세하다. 갈석산(碣石山)은 한(漢) 낙랑군(樂浪郡)ㆍ수성현(遂城縣)에 있으며 장성(長城)은 이 산에서 시작되었다.
하남성 정주, 낙양의 남쪽이다.(청-하남도)
이제 장성을 살펴보면 동으로 요수를 끊어 고구려로 들어왔으며 유지(遺址)가 아직도 남아 있다. 우공(禹貢 《서경(書經)》의 편명)의 갈석(碣石)은 우갈석(右碣石)이요, 이것은 좌갈석(左碣石)이다. 평양성 동북에 노양산(魯陽山)이 있으며 노성(魯城)이 그 위에 있다. 서남 20리에 위산(葦山)이 있으며 남으로 패수(浿水)에 임하였다. 대료수(大遼水)는 근원이 말갈국(靺鞨國) 서남산(西南山)에서 나와 남으로 흘러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며, 소료수(小遼水)는 요산(遼山)의 서남쪽에서 나와 흘러 대량수(大梁水)와 합류한다. 대료수는 나라 서쪽에 있어 변방 밖으로 나가 서남으로 흘러서 소료수와 합한다. 마자수(馬眥水)는 일명 압록수(鴨綠水)라 하니 근원이 동북 말갈 백산(白山)에서 나오는데, 물빛이 오리의 머리 빛깔 같아서 그렇게 부른다. 요동(遼東)에서 5백 리 떨어져 국내성(國內城) 남쪽을 경유해서 또 서쪽으로 흘러 한 물과 합하니, 이것이 염난수(鹽難水)이다. 두 강이 합류하여 서남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구려 안에서 이 강이 가장 크며 물이 맑고 깨끗하다. 나루 건널목에는 다 큰 배를 저장하여 그 나라는 이것을 믿어 천연의 참호로 삼는다. 강 너비가 3백 보이며 평양성 서북 4백 50리와, 요수 동남 4백 80리에 있다.
한(漢)의 낙랑(樂浪)ㆍ현도군(玄菟郡) 땅으로, 후한(後漢) 및 위(魏)로부터 공손씨(公孫氏)가 웅거한 바, 연(淵)에 이르러 망했다. 서진(西晉) 영가(永嘉) 이후 다시 함락되어 고구려에 들어갔다. 그 불내(不耐)ㆍ둔유(屯有)ㆍ대방(帶方)ㆍ안시(安市)ㆍ평곽(平郭)ㆍ안평(安平)ㆍ거취(居就)ㆍ문성(文城)은 다 한(漢) 2군(郡)의 현(縣)으로 조선(朝鮮)ㆍ예맥(濊貊)ㆍ옥저(沃沮)의 땅이다.”
주) 노(양)산
周初属鲁国,西汉置鲁阳县,北周改鲁山县至今.
주나라초 노국에 속하고 서한때 노양현,북주시대에 노산현으로 지금까지이다.
鲁山县古称鲁阳,是中华人民共和国河南省平顶山市下属的一个县。鲁山县位于河南省中部,伏牛山东麓,北依洛阳、南临南阳、东接平顶山,
하남성 낙양 남부 평정산시이다.
결국 공자의 출신지인 魯나라도 산동이 아닌 하남성의 소국이었다는 것이다.
심제.
첫댓글 귀중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강도에 대한 글을보면서 연개소문의 출신지가 강화도 라고 해서 의아했는데 이글을 보니 맞을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