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 투어 사역과 이용남 선교사
순교의 터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마음
목회와 신학 ..........
이 선교사의 사역은
복음 때문에 고향 땅을 뒤로 하고
이역만리 미지의 땅에 와서
조선인들을 향해 땀과 피를 흘렸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순교적 신앙을 지금 우리에게 복원시키려는 것이리라.
한국 개신교의 성지 양화진이 태어난 배경은 이렇다.
지난 1890년 미국 북장로회에서 조선으로
파송한 의료 선교사이자 고종 황제의 시의(侍醫)였던
존 W.헤론(1858~1890)이 급환으로 별세했다.
따라서 외국인 묘지 선정에 대한 문제가 발생했고,
우여곡절 끝에 조정으로부터
외국인 묘지로 사용 허가(1893.10.24)를 받은 곳이
바로 양화진이다.
조선에서 복음을 전하다 숨진 외국인 선교사들이 묻힌
양화진의 정식 명칭은
'서울 외국인 묘지 공원'이고
지금까지 무덤은 총 555기로 파악되고 있다.
조선의 선교 역사를 좇는 '양화진 투어'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애쓰다 숭고한 삶을 마감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삶과 사랑을 증거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일궈가는 한 선교사가 있어서 양화진을 찾았다.
아직은 한강의 겨울 바람이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휴대용
엠프와 마이크를 들고
한 무리의 사람들을 외국인 묘지로 구석구석 안내하는
'양화진 투어'사역자 이용남(54세)선교사가 그 주인공이다.
이 선교사는 총신대신대원을 졸업하고
미주한인기독학생회(KCCF)에서 간사로 활동하던 중에
영은교회(담임 장은선 목사)의 파송을 받아
아프리카 감비아에서 선교 사역을 했다.
지금은 WMC(World Mission Community)와 미션 투어에서
선교 동원가로 활동하며,
마천중앙교회(담임 박보범 목사)에서 협동 목사로 섬기고 있다.
이용남 선교사는 양화진을 찾는 순례객들에게
한반도의 복음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초기 외국인 선교사들의 생애를
하나씩 소개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무덤 속 주인공들의 삶은
참관인들에게 도전과 감동 그 자체이다.
이 선교사의 사역은 복음 때문에
고향 땅을 뒤로 하고 이역만리 미지의 땅에 와서
조선인들을 향해 땀과 피를 흘렸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순교적 신앙을
지금 우리에게 복원시키려는 것이리라.
그래서 양화진 투어 사역은 단지 선교에 대한 인식 전환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뿌리부터 돌아보게 하는 도전으로 다가온다.
이용남선교사가 양화진 투어
안내를 감당한 지도 벌써 7년이 지났다.
그동안 사역의 소감을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초등학생에서 목회자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양화진을 다녀갔어요. 이곳은 그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깨닫는 기회의 장이었습니다."
양화진 투어의 참관자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선교 지망생들의
훈련 프로그램의 과정으로 톡톡히 한몫을 하고 있지만,
입소문을 듣고 오는 일반 성도들의 발길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심지어 주일 오후 예배나 저녁 예배를 양화진 투어로
대체하는 경우도 많다.
선교 주일을 지키는 어느 교회는 오전에 이 선교사를 초빙해 본당에서 메시지를 들은 후, 이어 오후 예배에 성도들과 함께 양화진으로 이동해 파란 눈동자를 가진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죽음으로 복음을 전파해
지금 우리에게 전송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기회를 갖는다.
실격(?)한 선교사
이용남 선교사는
처음부터 선교에 대한 열정과 비전을 품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 동기는
한 현장 선교사의 도전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미국에서 KCCF간사로 있던
그에게 아프리카 감비아의 선교를 제의한 사람은
이재환(현 COME선교 대표)선교사였다.
당시 그는 선교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이재환 선교사의 도전을 일언지하에
거절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는 안식년에 있던 이재환 선교사를
미국으로 초청해 특별 집회를 가졌고,
그 집회를 통해 그는 선교에 대한 비전과 은혜를 받고
가족을 데리고 검은 대륙 아프리카로 날아갔다.
이 선교사의 아프리카 선교는
학교 건축 사역과 신학교 교수 사역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건강 문제로 3년여 선교 사역을 접어야만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의 마음은 그리 편치 않앗다.
"그때 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저를 위해 기도하고 후원해 주셨던 분들에게
대한 마음의 짐이었습니다"라고 밝혔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은행 계좌를 모두 닫아버렸다.
이 선교사는 자신을 가리켜 '실격한 선교사'라고 소개한다.
건강상의 이유로 선교지에서 돌아와야 했지만,
진짜 이유는 스스로 준비되지 못하고
훈련되지 못한 자신의 미숙함이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실격의 쓰라린 경험은 선교 현장에 어떤 사람이 가야하고 무엇을 훈련해야 하며,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교훈을 얻는 기회였다고 덧붙인다.
따라서 선교현장에서 실격한 아픔과 함께 들려오는 그의 양화진 투어 메시지는 더욱 능력과 감동으로 들려온다.
"저는 정말 감비아에서 너무도 많은 것을 얻고 돌아왔습니다.
3년이 채 안되는 선교현장의 경험이었지만,
선교 일선에 있는 선교사님들의 마음을 알고 깨닫는 데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선교 동원가로서 새 출발
한국으로 돌아온 이 선교사는
'선교 지향적 교회 개척'과
'선교 동원'이라는 두 가지 비전을 놓고 고심했다.
그때 한국에서의 목회와 선교라는
두 가지 요구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도하면서
선교 동원에 대한 비전을 더욱 분명히 했다.
이 선교사는 선교에 대한 마음을 다잡는 데 선교 현장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필리핀의 민다나오 부족을 찾아 마을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선교 동원가로서 사역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선교지에서 훈련을 받을 때는
온 세상이라도 뒤엎을 것 같은 헌신된 열정을 보이지만,
선교 현장을 떠나오면 일주일도 못 돼
그 열정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래서 그는 국내 사역을 통해 다시 한번 선교의 열정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을 바꿨다. 이 선교사는 "가만히 앉아서 관심과 변화를 기다릴 수 없습니다. 어떤 특별한 충격과 도전이 있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말로 소위 '클릭 포인트'(click point)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라며
그 자극의 포인트로 하나님께서 양화진 투어를 허락하신 것이다.
이 선교사는 양화진 투어 사역을 통해
단순히 초기 외국인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을 소개하고 설명하려는 게 아니다.
그의 전체 메시지는 선교 동원을 위한 열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복음의 빚진 자로서 이 땅에 찾아온 초기 외국인 선교사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선교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다. 선교는 피상적인 학습이나 짜여진 프로그램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심장으로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임을 거듭 강조한다.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이 주는 메시지
이용남 선교사가 선교 동원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은 학습이다. 선교에 학습되지 않으면 열정도 생기지 않는다.
선교 학습의 현장으로 양화진이나
각 선교사들의 묘지는 굉장한 가치를 지닌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특히 이 선교사는 선교 120년의 한국 교회에 양화진이 던져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한다.
곧 우리가 미전도 종족으로 있을 때,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파란 눈을 가지고 있는 외국인 선교사들은
크리스토인들은 무관심으로 일관하지 않고 즉각 반응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땅을 찾았고, 닫혀 있던 선교의 문을
기도로써 열어젖혔으며,
성경을 번역하고 사역 중에 목숨을 잃기까지
헌신했다.
그리고 그들을 파송했던 외국의 교회는
눈물 기도로 지원하고
헌금으로 후원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이룬 것이다.
이 선교사는 양화진 투어를 통해
배운 선교의 소중한 교훈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한 민족이 복음화 되기 위해서
세 가지 반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기도의 반응이고,
둘째는 선교 헌금의 반응이며,
셋재는 영광스러운 선교사의 삶의 반응이다.
이 세 가지 반응이 서로 엮어지면서
우리 민족에게 선교의 열매가 구체화된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선교사가 도전하는 것은
수많은 미전도 종족에 대한 소식을 듣고
과연 한국 교회는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점이다.
신앙에서 액세서리와 같은 선교가 아니라
뜨거운 심장으로 반응하는 선교가 일어나야 한다.
한국 교회는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하고
다른 민족에게도 한국 교회와 같은 반응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
양화진의 '서울 외국인인 묘지공원'이 주는 메시지다.
자기 매너리즘의 극복
이 선교사가 지적하는 양화진 사역의 가장 어려운 점은
자기 매너리즘과의 싸움이다.
동일한 장소, 동일한 내용으로 투어를 반복한다는 것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양화진 투어사역을 하다보면
하루에도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면 그의 마음속에 '내가 녹음기식으로 아무런 감동없이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 이 선교사는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린다.
그리고 이에 대해 다른 사람과 기도 제목을 나눈다.
그래서 그는 고인이 된 외국인 선교사들의
삶과 열정을 전할 때마다 새로운 도전이 된다고 고백한다.
이 선교사를 열정적으로 살아있게 하는 것은 참관자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감정과의 교감에 있다. 즉 그들의 눈물에 함께 울고,
그들의 감동에 함께 벅차 오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선교사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다.
또한 이 선교사는 잠든 선교사들에 관한 자료들을
계속 발굴해 읽고 그 감동을 자신의 가슴속에 그대로 간직한다.
선교 훈련을 위한 제언과 바람
이 선교사는 선교 훈련에 대한 따뜻한 제언을 잊지 않는다.
한국 교회의 선교 여행이 조금 더 향상 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단순히 정해진 스케줄대로 안내하고 지역을 소개하며 설명하는 데만 머무는 차원이 아니라,
한 종족을 정해 생활의 현장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실제 문화를 터득해 가는 과정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이 선교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 종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심는 일이다.
즉 선교 훈련을 통해 한 미전도 종족을 구체적으로 품고
기도하며 준비할 수 있는 '한 종족 마인드'를 일으키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선교사는 선교에 문외한이었다가 스스로 선교에 눈을 떴기 때문에 월드 크리스천들과 일반 크리스천들과의 사이에 차이점은
한미전도 종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느냐 믿지 않게 하느냐를 결정하리만큼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 선교사는 강력한 사명감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가 선교사로 나가지 안더라도
선교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의 기도는 열방을 품어야 하고
우리의 물질은 영역을 넘어 세계 모든 선교지로 나가야한다.
그리고 우리는 영광스러운 선교사의 삶으로 반응해야 한다.
이것이 이 선교사가 양화진 투어 사역을 하면서 놓치지 않고 있는 중심이다.
또 이 선교사는 양화진 투어 사역을 통해 복음에 빚진 자의
메시지가 스태프와 선교 동원가들에게
계속해 이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양화진 사역을 함께 할 일꾼들을 훈련하고 있으며,
그들이 선교 동원가로서 역할을 충분히 감당해 줄 것을 기대한다. 이 선교사는 앞으로 사역을 위한 후진 양성을 계속 할 것이며 양화진 사역이 다음 사역자들에게 이어질 것을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