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부 경포대기 (江陵府鏡浦臺記) - 안축/동문선68권
천하의 물건이 모든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이치가 있으니, 크게는 산수와 작게는 주먹만한 돌과 한 치만한 나무까지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유람하는 사람이 이 물건을 보고 흥미를 붙이고 이로 인하여 즐거움을 삼나니, 이것이 누대와 정자가 지어진 까닭이다. 대개 형상의 기이한 것은 현저(顯著)한 데에 있어서 눈으로도 구경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치의 오묘한 것은 은미한 데에 있어서 마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눈으로 기이한 형상을 구경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있는 사람이 모두 같아 그 한쪽만을 보고, 마음으로 오묘한 이치를 얻는 것은 군자만이 그러한데 그 전일(專一)한 것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그 기이한 것을 구경하고서 그 편벽된 것을 본다는 것을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오묘한 것을 얻어서 그 전일한 것을 즐거워함을 말한 것이다. 내가 관동(關東)에 유람하기 전에 관동의 경치 좋은 곳을 의논하는 자들은 모두 국도(國島)의 총석정(叢石亭)을 말하고, 경포대(鏡浦臺)는 그다지 아름답다고 일컫지 않았다. 태정(泰定) 병인년(1326)에 지금의 지추부학사(知秋部學士) 박숙(朴淑) 공이 관동에서 부절(符節.신분증표)을 가지고 돌아와서 내게 말하기를. “임영(臨瀛.강릉)의 경포대는 신라 시대의 영랑선인(永郞仙人)이 놀던 곳인데, 내가 이 대에 올라 산수의 아름다움을 보고 마음이 참으로 즐거워서 지금까지도 생각이 간절하여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경포대에 예전부터 정자가 없어서 유람하는 자들이 안타깝게 여기므로, 고을 사람들에게 명하여 그 위에 작은 정자를 지었으니 자네는 나를 위하여 기(記)를 지으라.”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박공이 본 것이 여러 사람들의 의논과 다른 것을 괴이하게 여겨 감히 함부로 품평(品評)하지 못하고, 한번 본 뒤에 기록하려고 생각하였었다. 이제 다행히 명을 받아 이 지방을 진무하게 되어 기이하고 경치 좋은 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니, 저 국도의 총석정은 기이한 바위와 괴이한 돌이 실로 사람들의 눈을 놀라게 하나, 곧 기이한 형상의 한 가지 물건뿐이었다. 이 대에 올라보니 담담하게 조용하고 광활하여 기이한 물건이 사람들의 눈을 놀라게 할 만한 것은 없고, 다만 멀고 가까운 산수뿐이었다. 앉아서 사방을 돌아보니 물의 먼 것은 큰 바다가 끝없이 넓어서 연기 같은 물결이 산처럼 높고, 가깝게는 경포(鏡浦)가 맑고 깨끗하여 물결이 찰랑찰랑거린다. 산의 먼 것은 골짜기가 천 겹이나 되어 구름과 놀이 아득하게 보이고, 가깝게는 봉우리가 10리쯤 되어 수풀과 나무가 울창하다. 항상 갈매기와 물새가 나타났다 잠겼다 하며 오락가락 대 앞에서 한가하게 논다. 그 봄가을의 연기에 어린 달이 아침저녁으로 흐리고 갬이 때에 따라 변화하여 기상이 일정하지 않으니 이것이 대에서 볼 수 있는 대강이다. 내가 오래도록 앉아 컴컴한 속에서 찾아보노라니, 나도 모르게 막연하게 정신이 엉기어 지극한 맛은 한가하며 담담한 가운데에 있고, 고상한 생각은 기이한 형상 밖에 뛰어나서 마음으로는 홀로 알아도 입으로는 형용하여 말하지 못할 것이 있다. 그런 뒤에야 박공이 즐거워하는 것이 기이한 물건에 있지 않고 내가 말하는 이치의 오묘한 것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옛날에 영랑도 이 대를 짓게 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영랑이 이 대에 놀았어도 정자가 있었단 말은 듣지 못하였는데, 지금 천 년이 지난 뒤에 정자는 지어서 무엇 하겠는가.” 하여 드디어 음양가의 꺼리는 말로 고하였다. 박공이 듣지 않고 재촉하여 명하니 역사하는 자가 흙을 파내다가 옛 정자 터를 얻었는데, 주춧돌과 섬돌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고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감히 말을 못하였다. 정자의 터 자취가 옛날에는 하도 멀어서 매몰되어 버렸는데 고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다가 지금 우연히 나타났으니, 이것이 어찌 영랑이 지금에 다시 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전에 박공의 말을 듣고서 그 단서를 알고, 지금 이 대에 올라 자세한 것을 상고하여 정자 위에 쓰노라.
경포대기(鏡浦臺記) - 장유
우리나라 산수(山水)의 아름다움은 천하에 이미 정평(定評)이 나 있는 바이다. 그런데 팔도 강산 곳곳에 승경(勝景)이 펼쳐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영동(嶺東)이 으뜸이요, 북쪽으로는 흡곡(歙谷)과 통천(通川)으로부터 남쪽으로는 평해(平海)와 울진(蔚珍)에 이르기까지 전개되고 있는 영동의 아홉 개 군(郡) 또한 각자 산해(山海)의 수려한 경치를 자랑하며 신선(神仙)의 굴택(窟宅)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임영(臨瀛.강릉의 옛 이름)이 으뜸이요, 임영의 주위 1백여 리(里)에 걸쳐 형승(形勝)을 각자 차지하고서 기관(奇觀)을 뽐내는 공사(公私) 간의 정사(亭榭)가 또 한둘이 아니지만 그중 경포대(鏡浦臺)가 최고로 꼽힌다.
도지(圖志)를 상고해 보건대, 경포는 바로 영랑선인(永郞仙人)이 옛날에 노닐었던 곳으로서 누대(樓臺)를 세운 것은 실로 고려조(高麗朝)의 안렴사(按廉使) 박숙(朴淑)이 착수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가 바야흐로 공사를 시작하려 하면서 제사를 지내려고 땅을 청소하다가 옛날의 주춧돌을 발견하였는데, 이 돌이 어느 시대의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고 보면 대체로 오래 전부터 이곳에 누대가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 뒤로 또 조석간(趙石磵.조운흘)과 박 혜숙(朴惠肅.박신)같은 풍류객이 멋있게 글로 장식하면서 더욱 사람들의 탄상(歎賞)하는 대상이 되었었고, 그러다가 우리 태조(太祖)와 세조(世祖) 시대에 이르러 동쪽 지방을 순행(巡行)하시다가 재차 이곳에 거둥하셨고 보면 이 경포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구정(九鼎. 우왕때 주조한 솥으로 三代 相傳의 보배임) 정도일 뿐만이 아니라고 하겠다. 그런데 병란을 당한 이후로 점차 퇴락해 가기만 한 채 복원 공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으므로 이야기하는 자들이 이를 한스럽게 여겨 왔다.
금상(今上)께서 중흥을 이룩하신 지 5년째 되는 해에 이명준(李命俊)이 아경(亞卿)의 반열에 몸담고 있다가 이 부(府)의 수령으로 나왔는데, 공은 고을을 다스리는 면에서는 평소부터 그 능수능란한 솜씨를 인정받고 있었던 터라서 집무를 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갖 폐단이 바로잡혀져 모두 정상을 되찾게 되었다. 그가 일찍이 경포대에 올라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누대를 끝내 방치해 둔다면 우리들은 백대(百代)에 걸쳐 꾸지람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 백성들을 번거롭게 해서도 안 될 일이다.”
하고는,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승려들에게 위촉하였다. 그러자 그들이 시주(施主)를 모집하고 재화(財貨)를 모아들여 공사에 착수한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완공을 보게 되었는데, 이에 모양도 번듯해지고 제대로 채색도 가해지는 등 모두가 옛 모습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렇게 일단 마무리를 짓자 천 리 길에 급히 글을 보내 나의 기문(記文)을 부탁해 왔는데 재차 이른 사연을 보면 더더욱 간절하기만 하였다.
내가 나름대로 생각해 보건대, 경포(鏡浦)가 임영(臨瀛.강릉)에 있는 것은 중국 전당(錢塘)에 서호(西湖)가 있고 회계(會稽)에 감수(鑑水)가 있는 것과 같으며, 또 경포에 누대가 있는 것은 동정(洞庭)에 악양루(岳陽樓)가 있고 예장(豫章)에 등왕각(滕王閣)이 있는 것과 같다고 여겨진다. 이런 승경(勝景)에 이런 누각이 없는 것은, 비유컨대 사람의 얼굴에서 미목(眉目)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니, 그럴 경우 서자(西子)와 같은 절세 미인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사람 모습을 이룰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이 누대에는 그야말로 성조(聖祖)께서 임어(臨御)하신 옛날의 자취가 남아 있고 보면, 세상에서 중하게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 신선의 종적을 간직한 승관(勝觀) 정도로 그치지 않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겠다. 그런데 만약 하루아침에 결딴나 버린 채 황량하게 잡초만 우거져 있게 된다면 강산도 삭막해지고 분위기도 축 처지게 마련일 테니, 밝은 조정의 일대 흠사(欠事)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공의 이번 일이야말로 그 뜻이 원대하다고 해야 할 것이니, 어찌 단지 누각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며 노닐 공간을 마련해 준 것으로만 여길 일이겠는가.
나는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한 채 평소부터 늘 금상(禽向)의 지취(旨趣)(노닐고 싶은 생각)를 품어 왔다. 그리하여 노년(老年)에 접어들기 전에 관동(關東)의 여러 승경지(勝景地)를 한 번 돌아보고 싶었으나 세상의 그물에 걸린 몸이라서 스스로 떨쳐 나올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또 남쪽 지방으로 좌천되어 내려와 업무에 골몰하다 보니 속세 속의 하나의 속물(俗物)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선구(仙區)의 경물(景物)을 회상해 보노라면 그 까마득하게 동떨어진 처지가 약수(弱水.신선 세계의 강 이름)와 총령(葱嶺)만큼이나 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만 고루한 문사를 가지고 누각에 이름을 의탁할 수 있게 되었으니 돌이켜 보면 크나큰 행운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하늘이 나에게 복을 내려 주어 뒷날 나를 속박에서 풀려나게 하면서 평소의 뜻을 성취할 수 있게끔 해 준다면, 누대에 오르는 날 그다지 생소한 길손은 되지 않을 듯하기에 마침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기문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가령 그 내외(內外)에 걸친 호산(湖山)의 무궁한 경치에 대해서는 눈으로 보지 않는 한 곡진하게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기에 지금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하였다.
경포대(鏡浦臺) - 이유원/임하필기
충숙왕(忠肅王) 병인년(1326)에 존무사(存撫使) 박숙정(朴淑正)이 말하기를, “내가 이 경포대에 올라 보니 원근의 산과 물이 사방에 삼렬(森列)하게 벌여 있다. 물 중에서 먼 것으로 말하면 동해 바다가 넓고 아득한데 물안개 자욱한 파도가 까마득히 하늘로 치솟고 있으며, 가까운 것으로 말하면 경포대의 맑고 깨끗한 물낯에 이는 바람결의 잔물결이 물놀이를 치고 있다. 또 산중에서 먼 것으로 말하면 천 리나 뻗은 깊은 골짜기에 이내와 구름이 아득하고, 가까운 것으로 말하면 십 리에 이어진 산봉우리에 풀과 나무가 사뭇 짙푸르다. 그런데 언제나 갈매기와 물새는 물 위에 떠올랐다가 물속에 잠기면서 경포대 앞을 오락가락 서성이며 날아다니는 것이다. 그리하여 봄가을로 바뀌는 연월(煙月)과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청음(晴陰)의 때를 따라서 달라지는 이들 기상(氣象)의 다양한 변화의 모습들이 참으로 무상(無常)하다 하겠다. 이것이 경포대의 대체적인 모습이다.” 하였다.
경포대는 강릉부(江陵府)에서 15리 떨어진 지점에 있는데 일명 경호(鏡湖)라고도 한다. 너비는 30리가량 되는데 물빛이 환하게 맑아서 거울 면과 같다. 그러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호수는 비록 넓고 장원(長遠)하나, 깊어도 어깨가 잠기지 않고 얕아도 정강이 아래를 밑돌지 않는다. 그러니 정말 쟁반 속의 물과 같았다.
옛날에는 정자가 없었는데, 고려 충숙왕 병인년(1326)에 이르러서 존무사(存撫使) 박공(朴公)이 그 위에 정자를 짓고 안축(安軸)이 찬기(撰記)를 지었다. 물 서쪽 언덕에 대(臺)가 있고 대 곁에는 석구(石臼)가 있는데 영랑이 연약(煉藥)한 곳이라고 세상에서 전한다. 동쪽에는 강문교(江門橋)가 있고 강문교 밖에는 죽도(竹島)가 있으며, 죽도 북쪽에는 모래 언덕이 띠처럼 연해져서 호수와 바다의 한계를 이루고 있다. 언덕 안에는 낙락장송이 숲을 이루고 인가(人家)가 어리비쳤다. 또 매학정(梅鶴亭)과 호해정(湖海亭)이 있는데, 모두 뛰어난 승경이다. (끝)
첫댓글 경포대를 읊은 詩들은 다수있으나 수량이 많아 생략하고 記文만 싣음. 사진: 강릉시청 홈페이지,Daum지도.
이유원의 임하필기에서, "(경포대의)동쪽에는 江門橋가 있고 강문교 밖에는 竹島가 있으며, 죽도 북쪽에는 모래 언덕이 띠처럼 연해져서 호수와 바다의 한계를 이루고 있다. 언덕 안에는 낙락장송이 숲을 이루고 人家가 어리비쳤다"라고 했는데 위 위성지도에서 보듯이 약 150년후의 모습은 바뀐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