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유학자들
북계 진씨(北溪陳氏) : 송(宋)나라의 학자인 진순(陳淳)을 가리킨다. 자가 안경(安卿)이고 북계 선생(北溪先生)이라고 불렸다. 장주(漳州) 용계현(龍溪縣) 사람이다. 주자에게 잠시 배웠으며, 주자의 어록(語錄)을 기록하였다.
구봉 채씨(九峯蔡氏) : 남송(南宋)의 이학가(理學家)이자 상수학가(象數學家)인 채침(蔡沈)을 가리킨다. 채침은 채원정(蔡元定)의 아들로, 자가 중묵(仲默)이며, 구봉(九峯)에 은거하였다. 주희에게서 수업하였으며, 주희가 짓고자 하다가 이루지 못한 《서집전(書集傳)》을 뒤를 이어 완성시켰다.
서산 진씨(西山眞氏) : 남송(南宋)의 이학가(理學家)인 진덕수(眞德秀)를 가리킨다. 진덕수는 자가 경원(景元)이며, 《서산문집(西山文集)》, 《독서기(讀書記)》, 《대학연의(大學衍義)》 등을 저술하였다.
인산 김씨(仁山金氏) : 원(元)나라의 김이상(金履祥)을 가리킨다. 김이상은 송나라가 망한 뒤 벼슬하지 않고 인산(仁山) 아래에 살면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으므로 인산 선생(仁山先生)이라고 불리며, 《상서표주(尙書表注)》, 《통감전편(通鑑前編)》, 《논어주(論語注)》 등을 저술하였다.
백운 허씨(白雲許氏) : 원나라 때의 이학가(理學家)인 허겸(許謙)을 가리킨다. 허겸은 자가 익지(益之)이고 자호가 백운산인(白雲山人)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백운 선생이라고 불렀다. 송나라가 망한 뒤 원나라에서 벼슬하지 않았다. 김이상(金履祥)에게 수업하였으며, 주자의 학문을 추종하여 주자가 지은 《서집전(書集傳)》, 《시집전(詩集傳)》 등에 모두 그의 설(說)이 있다. 동양(東陽)의 팔화산(八華山)에서 40년 동안 강학(講學)하였는데, 사방의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정도로 이름이 높았다. 하기(何基), 왕백(王柏), 김이상 등과 함께 금화주학(金華朱學)의 중요한 전인(傳人)으로, 금화사 선생(金華四先生)이라고 불리웠다. 저서에는 《춘추온고관규(春秋溫故管窺)》, 《치홀기미(治忽幾微)》, 《자성록(自省錄)》, 《허백운선생문집(許白雲先生文集)》
정우 진씨(定宇陳氏) : 원(元)나라 때의 경학가(經學家)인 진력(陳櫟)을 가리킨다. 진력은 자가 수옹(壽翁)이고 말년에는 동부 노인(東阜老人)이라고 칭하였고, 사는 집을 정우당(定宇堂)이라고 하였다. 수십 년 동안을 집안에서 공부하였는데, 그의 학문은 주자를 종(宗)으로 삼아서 주자의 학설에 배치되는 학설을 배격하였다. 《서집전찬소(書集傳纂疏)》, 《예기집의(禮記集義)》 등을 저술하였다.
남헌 장씨(南軒張氏) : 남송의 이학가(理學家)인 장식(張栻)을 가리킨다. 장식은 자가 경부(敬夫)이고 호가 남헌이며, 한주(漢州) 금죽(錦竹) 사람이다. 주희(朱熹)와 여조겸(呂祖謙) 등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명유(名儒)가 되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동남삼현(東南三賢)이라고 불렀다. 저서로는 《논어해(論語解)》, 《맹자설(孟子說)》, 《남헌집(南軒集)》 등이 있다.
잠실 진씨(潛室陳氏) : 남송의 학자인 진식(陳埴)을 가리킨다. 진식은 자가 기지(器之)이며, 영가(永嘉) 사람이다. 어려서 섭적(葉適)에게서 수학하다가 뒤에 주희에게 배웠다. 저서로는 《우공변(禹貢辯)》, 《홍범해(洪範解)》, 《목동집(木童集)》 등이 있다.
방효유(方孝孺) : 당대의 뛰어난 학자로 명 혜제(明惠帝)의 시강학사(侍講學士)였는데, 연왕(燕王 성조(成祖))이 조카인 혜제를 축출하고 제위(帝位)를 찬탈하고서 방효유를 불러 조서(詔書)를 쓰게 하자, 붓을 던지며 “죽으라면 죽겠으나 이 조서는 쓸 수 없다.”라고 하였다. 성조는 마침내 그를 찢어 죽였다. 《明史 卷141 方孝孺傳》
채절재(蔡節齋) : 송나라 학자인 채연(蔡淵)을 가리킨다. 몸소 농사지으면서 벼슬하지 않았으며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다. 《宋元學案 卷62》
신한의연(申韓儀衍) : 중국 고대의 법가(法家)인 신불해(申不害)ㆍ한비(韓非), 언변으로 정치를 농단한 장의(張儀)ㆍ공손연(公孫衍)를 이름.
왕통(王通) : 수(隋)나라 용문(龍門) 사람으로, 자는 중엄(仲淹)인데 흔히 문중자(文中子)라고 불린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독실하게 공부하였고, 사방을 유람하였다. 조정에 태평십이책(太平十二策)을 올렸으나 쓰여지지 않자, 물러나 하수(河水)와 분수(汾水) 사이에서 살았다. 왕통은 이곳에서 제자들에게 강론하였는데, 문하에서 수업을 받는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위징(魏徵), 이정(李靖) 등 쟁쟁한 학자가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하분문하(河汾門下)라고 칭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는 문인들이 문중자라고 사시(私諡)를 올렸다. 《舊唐書 卷190 文苑列傳 王勃》
하순(賀循) : 진(晉)나라 사람으로, 자가 언선(彦先)이며, 산음(山陰) 사람이다. 아주 박학하였는데, 특히 예학(禮學)에 정통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후장(厚葬)을 치르기를 좋아하여 심지어는 음양(陰陽)의 구기(拘忌)로 인해 상을 치르지 않고 오래도록 방치해 두기까지 하였는데, 하순이 무강 영(武康令)으로 있으면서 이를 모두 금지시키니, 정교(政敎)가 크게 행해졌다. 그 뒤에 태자태부(太子太傅)와 태상(太常)을 지냈는데, 조정에 의문스러운 예가 있을 경우에는 모두 하순에게 물어서 조처하였다. 시호는 목공(穆公)이다. 《晉書 卷68 賀循傳》
장자(張子) : 장재(張載, 1020~1077)로, 자는 자후(子厚), 호는 횡거(橫渠)이다.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하였다. 저서에 《정몽(正蒙)》, 《횡거역설(橫渠易說)》, 《경학이굴(經學理窟)》 등이 있다.
여공 희철(呂公希哲)의 부인 선원(仙源) : 여희철(呂希哲, 1039~1116)은 송나라 수주(壽州) 사람으로 자는 원명(原明)이며, 봉호(封號)는 형공(滎公)으로, 여공저(呂公著)의 아들이다. 어려서 초천지(焦千之), 석개(石介), 호원(胡瑗)에게 수학하고, 후에 다시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에게 수학하였다. 저서에 《여씨잡기(呂氏雜記)》가 있다. 그의 부인은 대제(待制)를 지낸 장온지(張昷之)의 딸로, 자가 선원이다. 부인에 대한 일화는 《소학(小學)》 〈선행(善行)〉에 실려 있다.
상채(上蔡) : 북송의 성리학자인 사양좌(謝良佐, 1050~1103)로, 자는 현도(顯道),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상채(上蔡) 사람이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에게 수학하여 정문사선생(程門四先生)의 하나가 되었다. 상채학파(上蔡學派)의 비조이며 상채(上蔡) 선생으로 불렸다. 그의 사상은 다분히 선불교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주희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에 《논어해(論語解)》가 있다.
면재(勉齋) : 송나라 학자 황간(黃榦, 1152~1221)으로, 자는 직경(直卿), 호는 면재,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민현(閩縣) 사람이다. 주희와 유청지(劉淸之)에게 수학하였는데, 주희가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학문을 전수하고 사위로 삼았다.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서 강학하였으며, 저서에 《육경강의(六經講義)》, 《예기집주(禮記集注)》 등이 있다.
호자(胡子) : 송대의 성리학자 호굉(胡宏, 1106~1162)으로, 자는 인중(仁仲), 호는 오봉(五峯)이고, 숭안(崇安) 사람이다. 호안국(胡安國)의 막내아들로, 일찍이 구산(龜山) 양시(楊時)에게 수학하였으며, 뒤에 형문(荊門)에서 후중량(侯仲良)에게 배웠다. 형산(衡山) 지역에서 20여 년간 학문에 침잠할 때 장식(張栻)이 그를 찾아와서 배웠다. 저서에 《지언(知言)》, 《오봉집(五峰集)》 등이 있다
곽태(郭泰) : 후한 때의 고사(高士)로, 자가 임종(林宗)이다. 박학(博學)으로 명성이 높아서 제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고, 일찍이 낙양(洛陽)에 들어가서는 당시 제일가는 고사 이응(李膺)과 깊이 사귐으로써 명성이 마침내 경사(京師)를 진동시켰다. 《후한서(後漢書)》 권68 〈곽태열전(郭泰列傳)〉에 “임종은 비록 인륜(人倫)을 잘하였지만 지나친 언론을 하지 않았기에 환관(宦官)들이 정권을 전횡하면서도 그를 해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구산(龜山) : 이름은 양시(楊時, 1053~1135)이고, 자는 중립(中立)이며, 구산은 그의 호이다. 송나라 남검주(南劍州) 장락(將樂) 사람으로,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의 제자로, 유초(游酢), 여대림(呂大臨), 사양좌(謝良佐)와 함께 정문 사선생(程門四先生)이라고 불린다. 저서에 《이정수언(二程粹言)》, 《구산선생어록(龜山先生語錄)》, 《구산집(龜山集)》이 있다.
채절재(蔡節齋): 채절재는 주희의 문인인 채연(蔡淵, 1156~1236)을 가리킨다. 절재는 그의 호이다. 그는 “태극을 위주로 말을 하면 태극은 음양의 앞에 있고, 음양을 위주로 말을 하면 태극은 음양의 안에 있다. 때가 이미 다르고 위주로 하는 것이 모두 다르니 하나만을 고집하여 다른 하나를 버려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性理大全 卷26 理氣1 太極》
경여(敬輿) : 당나라 육지(陸贄, 754~805)의 자이다. 덕종(德宗) 때 한림학사로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내상(內相)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주자(朱泚)의 반란 때 하루에 몇백 통의 조서를 맡아서 조금도 막힘이 없이 처리한 것으로 유명하다. 후인들이 이를 모아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를 만들어 소차의 전범으로 삼았다. 《新唐書 卷157 陸贄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