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 아프고 기쁜 신앙(묵시 6,9-17)
다섯 번째 봉인이 열리면서 등장하는 ‘살해된 이들의 영혼’은 애절하다. 하느님의 말씀과 그들의 증언 탓에 그들은 죽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순교자로 해석하고 칭송한다. 살해된 이들이 머무는 곳은 예루살렘 성전을 떠올리게 하는 ‘제단 아래’다. 살해된 이들은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과 화해하려 죽이고 불태웠던 성전의 동물을 대체한다. 하여 살해된 이들의 죽음은 묵시 5장에 나타나는 어린양 예수의 죽음과 닮았다.(살해되다, 라는 뜻의 동사 ‘스파조’를 같이 사용한다.) 예수의 뒤를 잇는 수많은 순교자들은 자신들의 피흘림으로 예수와 하나가 된다. 이쯤에서 우리는 ‘살해된 이들의 영혼’에 대한 해석을 마무리한다. 그들의 값진 희생이 예수의 대속과 닮았다고, 그들의 숭고한 희생에 우리는 동참해야 한다고, 그리하여 하느님의 말씀은 순교의 자리에서 더욱 퍼져나가고 신앙은 순교의 피로 더욱 단단해지고 뜨거워지며 순교의 자리가 하느님의 현존과 하나되는 성전의 자리라고.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다섯 번째 봉인 이야기의 ‘시작일 뿐’이다. 살해된 이들의 영혼은 아직 채워지지 않은 갈증이 있다. ‘살해된 이들의 영혼’은 절박하다. 땅의 주민들을 심판하고 복수하는 그 시간에 절박하고 자신들이 흘린 피의 대가에 절박하다. 제단 아래에서 살해된 이들의 영혼은 울부짖는다. 죽었어도 죽지 않아야 할 외침이 있다. 살해된 이들의 영혼이 내뱉는 그 외침을 따라가자면 그 끝에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이 계신다.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이 그들의 순교와 그 순교를 향한 칭송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들은 주님께 아직 목마르다. 주님을 애절하게 찾고 있다.(에녹 47,1.4 참조) 그 애절함이 그들의 정체성이다.
그들에겐 희고 긴 겉옷이 주어진다. 천상의 영광과 기쁨, 혹은 승리를 가리키는 흰 겉옷. 주석서들을 살펴보면 살해된 이들의 외침에 대한 종말론적 보상으로 흰 겉옷을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을 보상받았는가. 그들이 한 것은 주님을 향한 울부짖음 밖에 없었고 그들은 여전히 울부짖고 있다. 영광과 기쁨, 그리고 승리는 기뻐 환호하는 이들의 것이 아니라 지금 울고 있는 이들의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그야말로 ‘좋은 것’, ‘행복한 것’,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고 여기는 우리에겐 살해된 이들의 영혼이 입고 있는 흰 겉옷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다. 더우기 울부짖는 그 간절한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죽어가야 할 형제들을 위하여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묵시 6,11) 하느님의 개입은 아직 멀었다는 것이고 그분의 정의는 아직 이루어질 때가 아니라는 것. 그 결과 아직 죽어가야 할 순교자들이 더 있어야 한다는 것. 하여, 흰 겉옷을 두고 살해된 이들의 영혼이 겪은 희생에 대한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보상으로 해석한 채 더이상 질문하지 않는 주석서들의 가벼움을 우리는 넘어서야 한다. 어쩌면 요한 묵시록의 가치는 우리 신앙이 마침내 다다라야만 하는 ‘관습적’ 목적을 다시 상상하는 데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을 증거하는 일이 고통이고 아픔이라서 그 끝을 알 수 없어 답답할 때, 그 순간 우리 신앙이 추구하는 영광과 기쁨은 도대체 무엇인지, 우리가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영광과 기쁨이 요한 묵시록의 흰 겉옷의 질감과 어떻게 다른지,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여섯 번째 봉인이 열리면서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얼마간 추정할 수 있다. 12절부터 14절까지 창세기에 서술된 창조의 질서가 역순으로 사라진다. 지금껏 당연시 여겼던 질서가 무너지고 떨어지고 사라진다. 더이상 우리 눈에 익숙해서 당연하거나 그래서 자연스러운 것들은 없다. 기존의 인간 계급을 일곱 개의 범주로 요약한 15절은 그야말로 사라짐의 백미다. 권력이 있건 없건, 돈이 있건 없건, 모든 인간 계급은 동굴과 산과 바위 속에, 혼돈 속에 묻히길 원한다.(이사 2,10.19 참조) 이 원의는 하느님의 진노를 피해 달아나는 이들의 외침이다. 하느님을 향해 울부짖던 순교자들의 외침과 전혀 다른 성질의 울부짖음이다. 계급화된 모든 인간들은 하느님을 피하고 싶다.
찬찬히 인간들의 외침을 추론해 보자. 사실, 다섯 번째 봉인이 열리면서 사라진 창조의 질서는 사라져서는 안되는 하느님의 작품이었다. 하느님께서 창조한 이 우주는 각자가 ‘제 종류대로’ 서로의 자리와 서로의 다름에 대해 존중하고 배려하는 ‘시스템’이었다.(‘시스템’이란 말마디는 그리스말 전치사 ‘쉰.(함께)’과 동사 ‘히스테미.(서 있다)'가 합성된 말마디다. '함께 존재하는 것’이 시스템이다.) 그것을 보고 하느님은 ‘좋으셨다.’(창세 1,25 참조) 그러나 본디 인간은 기어이 하느님‘처럼’ 지혜롭고 훌륭하고 거룩하게 되고 싶은 피조물이다.(창세 3,8 참조) 인간은 경쟁했고 ‘일등’을 원하고 그 ‘일등’으로 모두가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창세 11 참조)
문제는 그 ‘하나’에 모든 인간이 하나일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인간은 다투고 인간은 서로를 죽인다는 것. 살아남은 인간들만이 누리는 ‘성공’과 ‘행복’과 ‘기쁨’은 누군가의 희생과 눈물이 뒤섞인 절반의 슬픔이다. 인간들은 제 계급과 제 권력과 제 재산의 사라짐을 아파하고 힘들어 한다. 어떻게 해서 얻은 것들인데, 그냥 없는 것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으로 만들 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대면하지 못하고 피한다. 구원의 하느님을 분노의 대상으로만 여긴다. 인간들은 기어이 제 욕망을 이렇게 토해내고 만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얼굴과 어린양의 진노를 피할 수 있도록 우리를 숨겨 다오!”(묵시 6,16) 이를테면, 나는 너와 달라야 하고, 내 능력으로 일군 것에 다른 이가 함께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그래서 나는 함께 서 있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그 ‘시스템’은 경쟁과 차별에 익숙한 인간들에겐 순진한 루저(loser)들의 변명으로 들릴 뿐이리라.
하느님이 ‘분노’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을 두고 주석학자들은 구약의 몇몇 구절들을 언급하며 하느님의 종말론적 개입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예컨대 요엘 2,11. “주님께서 당신 군대 앞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신다. 정녕 그분의 군대는 많기도 하고 그분의 명령을 수행하는 이는 막강하기도 하구나! 정녕 주님의 날은 큰 날 너무도 무서운 날 누가 그날을 견디어 내랴?” 하느님은 역사의 주인공이시고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힘을 가지신 분이시라 세상의 어떤 것도 맞서지 못하는 절대 군주로서 마지막 시간에 개입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하느님의 절대적 주도권을 강조한 나머지 왜 하느님이 그렇게 등장하셔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소홀히 다루는 경향이 있다. 초월적이고 절대적 권능을 지닌 하느님의 개입은 인간의 이기심과 절대 권력을 향한 욕망과 경쟁을 통한 성공의 갈증이 없었더라면 굳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태초에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인간의 권리, 곧 피조물을 일구고 돌보는 권리(창세 2,15)를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더라면, 그래서 에덴동산을 나와 바벨탑 같은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종말에 맞이할 절대 군주의 하느님은 등장할 이유가 없었다.
순교자들의 울부짖음은 하느님을 찾았고 인간들의 외침은 하느님을 거부했다. 순교자들의 울부짖음은 하느님의 정의를 갈망했고 인간들의 외침은 제 욕망을 방해하는 하느님을 분노와 저주의 주인공으로 해석한다. 갈라진 두 외침의 갈등을 아우를 수 있고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흰 겉옷’을 입는 자격이 아닐까. 인간들은 묻는다.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묵시 6,17)고. 흰 겉옷을 입을 사람들은 이 질문을 다르게 상상해야 한다. “누가 하느님을 만나고 싶은 거냐?”고. 하느님을 만나는 건 기쁘거나 행복하거나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그분을 만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영웅적 증언이나 희생이 아니라 제 삶에서 내려놓을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그 내려놓음이 슬프고 아픈 것인지 먼저 묻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일상에서 추구하는 것들이 기쁨이 될 때, 다시 한번 우리는 그 기쁨의 실체를 흰 겉옷을 입고 다시 물어야 한다. 왜 기쁜지, 정말 기쁜 일인지…, 그 기쁨을 나 자신이 누리는 게 과연 정당한지, 그래서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는 데 과연 간절히 필요한 것인지. 이 질문의 답에 머뭇거릴 때, 우리의 기쁨은 슬픈 것이고 아픈 것이다. 그러나 그 머뭇거림으로부터 우리 신앙의 영광과 기쁨은 시작하리라. 여전히 하느님을 목말라하고 그분의 정의에 간절한 흰 겉옷의 주인공이 슬프고 아프면서도 기쁘고 영광스러울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의 기쁨을 전부로 여기는 인식의 덫에서 벗어날 때, 신앙은 바로 우리가 진정으로 기뻐할 것을 찾아나서는 끝없는 항해와 같다. 늘 목마른 것이 신앙이다. 진정한 기쁨과 영광은 딱 한걸음 앞서 우리를 채근한다. 신앙은 그래서 늘 설레지만 애절한 것이다.
[월간 빛, 2024년 9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