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그릇(시31:9-15)
2025.3.2, 김상수목사(안흥교회)
한국어에서 “깨졌다”, “부서졌다”, “무너졌다”, “찢어졌다”, “떨어졌다” 등과 같은 말들은 표현은 다르지만 유사한 정서감을 느끼게 한다. 특히 이런 말들이 사람의 삶과 관련되어 쓰일 때는 극한 슬픔의 정서를 의미한다. 대게 이런 상황들은 자신의 희망과는 상관없이 찾아온다. 어느 날 갑자기 질병의 쇠막대기가 몸의 그릇을 무자비하게 깰 때, 마음 밭에는 눈물의 파편 속절없이 박힌다. 지금 우리 사회는 첫 출발에서부터 재정의 쇠막대기에 날개가 부러진 젊은이들의 절규가 하늘을 울리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지금의 20-30대들을 일컫는 말 중에 “에코세대”라는 표현이 있다. 에코(메아리)세대란, 한국전쟁 후에 출생한 베이비붐 세대(1954-1974년)의 자녀들을 말한다. 베이비붐 세대들이 성장한 후에, 메아리치듯이 또 다른 출생 붐을 일으켰다는 의미에서 에코세대라고 한다. 그런데 에코세대는 급격한 물가상승과 높은 주거비 부담, 취업불안, 학자금대출 압박 등으로 인해, 부모보다 더 배웠지만, 부모보다 더 가난한 첫 세대로 기록될 전망이라고 한다.
이뿐 아니라 우리 사회도 산산이 깨어져 가고 있다. 이전에도 금이 갔었는데, 최근에는 더 극한 좌우 이념과 정쟁 등으로 완전히 박살나기 직전이다. 이 사회를 박살내는 가장 대표적인 세 부류는, 극한 돈이 목적인 유투버들, 오로지 표가 목적인 정치인들 그리고 이념을 신앙보다 앞세우는 일부 극단 종교인들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어디서 희망의 등불을 찾을 수 있을까? 바닷물 속에서 발버둥치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 누군가 와서 구해주는 것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삶이든 사회적인 깨어짐이든 그 희망의 빛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한다. 개인의 미래나 모든 역사의 흥망성쇠의 열쇠는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래는 앞에서 오는 곳이 아니라, 위에서 온다. 우리의 희망은 이념이 아니라, 복음이다. 교회는 이념을 선포하는 곳이 아니고, 복음을 선포하는 곳이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이고,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우리를 치유해 주시기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확신한다.
오늘 본문말씀인 시편 31편 말씀을 보면, 다윗은 자신의 상태를 깨진 그릇으로 표현했다(시31:12).
“내가 잊어버린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broken pottery)과 같으니이다”(시31:12)
자신을 “깨진 그릇”이라는 표현이 평안한 환경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대수롭지 않는 말처럼 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어떤 형태든지를 막론하고 극한 고통 속에서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눈물 나도록 공감되는 격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이토록 깨지게 만들었을까? 또한 무엇이 오늘 우리를 깨지고 부서지게 만들까?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어가 바로 “때문에”라는 말이다.
“9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10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11 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시31:9-11)
다윗의 생애를 보면, 사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마음 그릇에 금이 간 삶을 살았다. 그는 부모나 형들에게 늘 허드레 질그릇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여덟 번째 막내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빈들에서 양을 쳤고, 선지자 사무엘이 아버지의 집에 왔을 때에는 그의 아버지가 그를 부르지도 않았었다. 그렇게 금이 간 그릇을 완전히 부서뜨리려고 쇠막대기를 휘두른 사람이 바로 사울 왕이었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다윗은 마음에 근심과 몸의 질병들이 왔고, 사람들도 그를 멀리했다. 그래서 “내가 잊어버린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시31:12)라고 부르짖었다.
이러한 다윗의 고백 속에서 오늘 우리(나)를 깨지게 만드는 대표적인 세 가지를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건강의 문제(9절)와 영적인 죄악의 문제(10절) 그리고 관계의 문제이다(11절). 사람의 영혼육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에 근심이 깊어지면 몸에도 영향이 온다. 이것은 영적인 죄악의 문제나 관계의 어려움의 문제에도 동일하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깊이 묵상해 보면, 하나님은 다윗의 고백 속에 우리들이 깨지고 부서진 마음과 삶을 회복될 수 있는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때문에”를 넣어 놓으셨다(시31:14-15).
“14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15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14 But I trust in you, Lord; I say, “You are my God.” 15 My times are in your hands; deliver me from the hands of my enemies, from those who pursue me.(NIV)”(시 31:14-15)
이 말씀을 보면, 다윗은“ 그러하여도 나는 주를 의지”한다고 고백했다(14절). 여기에 또 하나의 “때문에”가 숨어있다. 그것은 ‘하나님 때문에’이다. 다윗의 이 고백을 이 말씀을 쉽게 직역하면 이런 말씀이다.
“(세상의 고통들이 있다할지라도) 그러나 저는 주님을 신뢰합니다.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모든 시간들(인생)은 당신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대적자들과 나를 뒤쫓아 오는 자들로부터 나를 구해 주소서”
이러한 다윗의 고백에서 우리는 이 시간 우리(나)를 향한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깨진 그릇 같은 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찢어지고 부서진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시고, “우리 앞날의 주인 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셨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we are healed)”(사 53:5)
이 말씀을 보라. 예수님의 고난으로 인해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어떤 평화인가? 죄악으로 인해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평화이고, 사람과 사람의 부서진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평화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맞으신 채찍으로 인해서 우리는 “나음”(치유, 신유, 회복)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신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감격적인 고백을 했다(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live through Him, 그를 통하여)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그로 말미암아(=예수님을 통하여) 깨어진 우리(나)를 다시 살게 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렇기에 처참하게 깨진 우리(나) 자신과 쪼개진 한국교회와 이 사회의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표어 : 백문일답,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치유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본 설교자는 며칠 전 새벽예배를 마치고, 잠시 자리에 누워서도 오늘 설교본문인 “깨진 그릇”이라는 말씀을 골똘히 묵상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묵상하는 중에, 어느 교회에서 길거리 전도를 하는 장면을 보여주셨다. 한쪽에는 몇 사람이 전도를 하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다른 학생들이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찬송곡은 “나의 갈 길다가도록”(찬384장)이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그런데 찬송 가사도 가사지만, 그들이 부르는 찬송 소리가 얼마나 청아하고 맑은지 이 땅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천사의 목소리 같았다. 그 청아한 찬송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펑펑 흘렸다. 그때 그 학생들을 지도하는 목사님이 울고 있는 나를 위해 시(詩) 한 편을 읽어주었다. 그 내용 중간에 ”부서졌던 나를 살리신 하나님“이라는 대목이 있었다. ”부서졌던 나를 살리신“이라는 표현을 듣는 순간에, 지난 온 눈물의 시간들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가면서, ”주님, 제가 바로 부서진 사람였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또다시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후에도 한참 동안 울었다. 그러면서 ”아~ 하나님은 꿈속에서까지라도 나를 치유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구나! 이것이 내가 믿는 하나님의 성품이구나“라는 것이 다시금 깨달아졌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도(교회 밖에 있는 분들이라도) 동일하다고 확신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지금 우리는 처참하게 깨어진 그릇과 같은 상황 속에 있다. 우리들 개인의 상태도 그렇고, 자녀들 세대도 그렇고, 처참하게 찢어지고 깨진 한국교회와 우리 사회 상황도 그렇다. 그러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다시 살리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신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하나님 때문에” 다시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다시 한 번 깊이 만나고, 체험하자. 다 같이 시편31편 14-15절 말씀을 믿음으로 고백 기도하자.
“14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15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시 31: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