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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21일 목요일 [(녹)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 사제 학자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이스라엘은 생수의 원천인 주님을 버리고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고 외치라고 하신다(제1독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묻자,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신다(복음).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나의 마음이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하면 삶은 참으로 절벽 앞에 선 듯한 느낌입니다.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느 한편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양편 모두의 노력과 마음으로 가능한 것인데,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으면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깨달음에로의 초대장
주님께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우리를 향해 어서 빨리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라고 계속해서 초대장을 보내주십니다. 존경하는 이현주 목사님께서 쓰신 기도 모음집 가운데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생활성서) 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만 봐도 기도가 시작되는 참 좋은 책입니다. 힘들다 해도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습니다. 돌아보니 나 홀로 걸어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늘 나와 함께 동행하셨다는 것, 돌아보니 언제나 주님께서 내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건네주신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비록 지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더 영원한 것, 더 가치 있는 것, 더 의미 있는 것이 존재하고 있음을 가르치십니다. 언젠가 육의 눈이 닫히고 영의 눈이 열리면 지금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보다 아름다운 것, 보다 진실한 것, 보다 영원한 것, 죽음을 넘어서는 것, 영원한 생명, 불멸의 하느님 나라가 존재함을 가르치십니다. 고맙게도 주님께서는 세상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보지 못하는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우리를 초대하시고 다는 아니할지라도 ‘살짝’ 천국의 맛을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네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다르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을 건네주신 것입니다. 억만금을 준다 해도 못 바꿀 신앙의 진리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신 새로운 삶의 지평을 우리도 이웃들에게 열어주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을 놓치고 불행하게 살아가지 않도록 도와주어야겠습니다. 그들이 육적인 삶, 자기중심적 삶을 깨트리고 하느님 중심적 삶을 살아가도록 안내해줘야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전에 체험하지 못했던 행복한 새 세상을 만나게 해줘야겠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지, 영적인 삶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하느님과 함께 걸어가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를 알려줘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부터 먼저 확실한 하느님 체험을 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과의 감미로운 만남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분의 인간을 향한 한없는 자비, 애틋한 마음을 우리도 지녀야겠습니다. 헬렌 켈러 여사가 남긴 한 마디 말을 접하고 저는 정말이지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나에게는 너무 많은 것이 주어졌습니다. 나에게 어떤 것들이 없는지 생각하며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녀는 그 큰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초긍정 마인드를 지니려고 노력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긍정화 작업을 해나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반성을 많이 해야겠습니다.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하느님 은총의 선물들이 들어있는데, 그것을 찾아낼 생각은 않고 늘 내게 없는 것에 대해 폭포수처럼 불평불만을 쏟아냈습니다. 늘 남과 나를 비교하며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목숨 다하는 날까지 깨달음의 향한 노력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묻지 않는 백성이 눈을 감은 백성 >
예전에 보좌신부 할 때 주임신부님이 신자들 대상으로 성경강의를 해 보라고 하셔서 준비한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본당 신자 대상이니 무료로 하고 지하 강당에서 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돈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주임 신부님은 가뜩이나 특강을 해도 인원이 적은데 돈을 내면 더 안 올 것이라고 했지만 제가 강력히 주장하여 삼만 원씩 받기로 했습니다. 저는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만한 의지가 있는 분들만 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원하고 원하지 않는 분들을 가르는 방법이 바로 그 삼만 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백 명가량이 신청을 하여 저도 놀랐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열다섯 번을 하는 동안 끝까지 함께 하여 처음과 끝의 인원 차이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구 영성관에 와서 강의에 대한 걱정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때보다 오히려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거리가 멀어서 신자들이 오지 않을까 걱정이고, 가격이 너무 비싸 인원이 차지 않을까 걱정이라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과 독서를 묵상하면서 다시 자신감을 찾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왜 비유로만 말씀하시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아리송한 대답을 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눈을 감아버렸고 귀를 막아버렸기 때문에 그들이 말씀을 깨닫고 돌아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시라면 한 사람이라도 더 말씀을 깨닫고 돌아오게 하셔야 정상이실 텐데 참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야곱이 자신의 양떼를 챙기기 위해 장인 라반의 가축이 교미를 할 때 껍질을 벗긴 나뭇가지를 세워놓고 줄무늬와 점박이가 태어나게 할 때에도, 약한 양이나 염소가 오면 그 나뭇가지를 치워버렸습니다. 야곱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나뭇가지는 그분의 모범을 상징하며 그 모범대로 보고 깨달아서 살아가는 이들은 구원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약한 것들은 구원의 기회조차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처음부터 약한 이들은 구원의 기회를 주지 않는 모습입니다. 처음부터 비유말씀의 깊은 의미까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은 제외시키기 위해 비유말씀으로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의 섭리를 오늘 독서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느님에게는 관심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나무람이 나옵니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주님에게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들도 “주님께서 어디 계신가?”하고 묻지 않습니다. “묻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구원이 있는데도 그분에 대해 알려고 하는 시간보다 쓸모없는 저수 동굴을 파는 데 시간을 허비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비유말씀을 설명해 달라고 묻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이 이해가 안 되면 물어야하는데 그냥 넘어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원하지 않으면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원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알려주십니다. 눈을 감아버린 이들에게는 비유말씀을 들려주셔도 더 이상 깨달으려고 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비유말씀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주님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이들입니다. 다른 이들은 주님께서 만나의 비유가 당신의 살과 피임을 말씀하실 때 모두 떠나갔습니다. 비유의 의미를 알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구원받는 교회를 대표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결국 진리를 알기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할 수 있는 사람만을 위해 예수님께서도 모든 노력을 기울이셨지 원하지도 않고 의지도 없는 이들에겐 에너지를 아끼셨습니다. 제가 그때 삼만 원을 걷자고 한 것이 바로 합당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는 비유말씀과 같은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금의 저도 그 원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걱정하기 보다는 원하는 이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보려고도 하지 않고 물으려고도 하지 않는 백성이 아니라, 그분에 관한 것이라면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를 지닌 주님께로부터 친히 배우는 구원받는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the purpose of the parab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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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 다 니 엘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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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왕 요아킴과 함께 바빌론에 끌려 갔을 때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내고 하루에 세 번씩 하느님께 엎디어 기도드렸으니 굶주린 사자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고 오히려 적들이 사자의 밥이 되는 신비의 은혜를 겪었던 성조 다니엘 님이시여 저희가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영원하신 아버지께 매달릴 수 있도록 천상 기도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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