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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살길이 없어요 = 창세기6;9-22(200209)
PW : 믿음 BIW : 만들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서 구원의 방주를 만드는 것이다.
두 친구 이야기
두 친구 A와 B가 있었습니다.
친구 A : 넌, 나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어?
친구 B : 그럼!
A : 그럼 니 여자 친구도 내게 줄 수가 있어?
B : 너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면~
A : 알겠어! 고마워~
그래서 친구 A는 친구 B의 여자친구랑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잘 나가던 친구 B는 그만 사업이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친구 A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습니다.
하지만 친구 A는 비서를 통해 친구 B에게 없다고 전달합니다.
친구 B는 몹시 실망하고 다신 친구 A를 안 만나기로 작정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돈을 빌리기 위해서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길가에 쓰러진 어떤 할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친구 B는 그 할아버지를 병원으로 모셔다드리고 치료를 받게 합니다.
할아버지는 너무너무 고맙다며 자기 재산의 절반을 친구 B에게 줍니다.
친구 B는 그 돈으로 사업을 시작해서 또다시 잘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거지 할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먹을 것을 구걸하는 것입니다.
친구 B는 보기 딱해서 할머니께 가정일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게 됩니다.
가정부이지만 둘은 모자처럼 잘 지냈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가정부 할머니가 좋은 아가씨가 있다며 소개해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친구 B는 차마 거절하기가 미안해서 아가씨를 만나게 됩니다.
서로 한눈에 반했고 곧 결혼을 약속합니다.
결혼식에는 친구 A만 빼고 주변 사람들 다 불렀습니다.
하지만 결국엔 옛정이 마음에 걸려서 친구 A도 초대하게 됩니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친구 B는 마이크를 잡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아주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전, 그 친구를 위해 제 여자친구까지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제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 저를 나 몰라라 했습니다.
정말 괴롭고 배신당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친구의 옛정을 못 잊어 오늘 저의 결혼식에 이렇게 초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저기 뒷좌석 친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자 가만히 앉아 있던 친구 A가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저에게도 아주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그 여인이 창녀 출신인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전 그 친구 명예에 흠집이 생길까 봐서 그 친구의 여자친구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잘 나가던 그 친구가 사업에 실패하여 취직자리라도 부탁하려 했는지 저를 찾아왔습니다.
전, 소중한 제 친구의 자존심에 결코 상처를 줄 수가 없었고, 또 저의 부하로 둘 수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부모님들은 각각 시골에 떨어져 살았기에 우리는 부모님 얼굴을 잘 몰랐으므로 저의 아버님을 길가에 쓰러진 척 연기를 부탁할 수가 있었습니다.
전 그 친구가 구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재산의 절반을 친구에게 주었습니다.
전 또 제 어머님을 거지로 변장시켜 그 친구네 가사 도우미를 하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친 여동생을 그와 결혼하게 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신부는 바로 저의 친 여동생입니다.”
그 순간 우렁찬 박수 소리가 온 결혼식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두 친구는 뜨겁게 뜨겁게 눈물을 흘리며 포옹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노아의 시대에 있었던 결혼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P4.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라는 시인이 쓴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라는 시가 유명하다.
단풍 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몸이 하나니 두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한참을 서서
낮은 수풀로 꺾여 내려가는 한쪽 길을
멀리 끝까지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걸어야 할 길이라 생각했지요.
풀이 무성하고 발길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그 길도 걷다 보면 지나간 자취가
두 길을 거의 같도록 하겠지만요.
그날 아침 두 길은 똑같이 놓여 있었고
낙엽 위로는 아무런 발자국도 없었습니다.
아, 나는 한쪽 길은 훗날을 위해 남겨 놓았습니다!
길이란 이어져 있어 계속 가야만 한다는 걸 알기에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거라 여기면서요.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
사람은 항상 두 갈래의 길 앞에 오직 한 길만을 선택하여 가야만 한다.
두 길을 다 걸어갈 수 없다.
그러면서 자신이 걸어가지 않은 다른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간직하면서 “내가 포기했던 그 다른 길을 선택하여 걸어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막연한 후회, 아쉬움, 안타까움, 연민 속에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러면 그 사람을 직접 만들어주신 하나님은 어떠실까?
하나님께서도 후회하시는 분일까?
하나님께서는 후회하시는 일이 없으실까?
D4.
① 사람 만드심을 한탄하시며 근심하시는 하나님.
아담의 후손들, 대표적으로 가인의 후손들과 셋의 후손들을 비롯하여 다른 자녀들의 후손들이 수백 년을 살면서 인류가 온 세상에 퍼져나가게 된다.
온 세상에 인류가 퍼져나가면서 더욱더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게 된다.
1-2절의 말씀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과 혼인하여 네피림(Nephilim)과 용사들(mighty men)을 낳았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5-7절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면서,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천지 만물을 만드심 그 자체를 한탄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혼인하여 네피림, 용사를 낳았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어떤 이들일까?
사람의 딸들은 어떤 이들일까?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셋의 후손들을 가리키고, 사람의 딸들은 타락한 가인의 후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타락한 천사들이고, 사람의 딸들은 지구촌에 생존하는 모든 여인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셋의 후손들인 남자들이라고 한다면 이들은 다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들일까?
신앙이 매우 탁월하게 좋은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모드 자녀들이 탁월한 신앙인이 될 가능성이 아주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자녀들이 탁월한 신앙을 가진 자녀들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답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탁월한 신앙인의 가정에서 그야말로 개망나니 같은 자녀들이 얼마든지 태어날 수 있다. 이런 자녀들 때문에 곤혹을 치르는 가정들이 이외로 많은 것이 사실이다.
만약에 셋의 후손들 중에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았던 남자들이 많았다면 하나님께서 구태여 노아의 식구들 8명 외에 다 홍수로 심판하셔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할 때, 방주에 들어간 노아의 식솔들 외에는 단 한 사람의 생명도 남기지 않고 심판하는 것을 보면 셋의 후손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타락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셋의 후손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의 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과연 가인의 후손들로 된 딸들, 여인들만 포함되는 용어일까?
아니면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일까?
가인의 후손들로 태어난 여인들뿐만 아니라 셋의 후손으로 태어난 여인들과 아담의 다른 후손들의 딸들로 태어난 모든 여인들을 다 포함되는 여인들을 사람의 딸들로 표현하는 것이다.
곧 지구촌에 생존하는 모든 여인들을 사람의 딸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성의 타락한 사람들이 롯에게 와서 오늘 밤에 찾아온 손님들을 끌어내라고 하면서 그들과 상관하겠다고 아우성을 질러댄다.
상관하겠다는 말이 성관계를 맺겠다는 말이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롯에게 찾아온 손님들과 동성애를 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롯에게 찾아온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들이다.
그러니 창세기에 등장하는 몇몇 천사들을 보면 인간들과 똑같이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들임을 알 수 있다.
욥기 1장과 2장에 등장하는 천사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타락한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함이 합당하다.
사람의 딸들은 지구촌에 생존한 모든 인간들의 딸들, 여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인 타락한 천사들과 세상의 여인들이 서로 혼인하여 네피림과 명성이 자자한 용사들을 출산하는 것이다.
이들이 타락한 사람들을 출산하는 것이다. 네피림이 타락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물론 지구촌에 생존하는 모든 여성들이 천사들과 혼인하는 것은 아니다.
몇몇 여성들이 타락한 천사들과 혼인하여 타락한 사람들, 네피림, 용사들을 낳는 것이다.
가인의 후손이 되었건, 셋의 후손이 되었건, 아담의 다른 아들들의 후손이 되었건, 남자들은 아름다운 여인들을 사랑하여 아내로 맞이하여 혼인하고 자녀들을 출산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삶이다.
하지만 타락한 천사들과 사람의 딸들이 혼인하여 타락한 사람들을 출산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용납받을 수 없는 삶이라는 것이다.
결단코 정상적인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이들은 비정상적인 삶을 넘어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저지르는 것이다.
인간들은 타락하면 비정상적인 삶을 비정상적인 삶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비정상적인 삶도 지극히 정상적인 삶인 것처럼 착각하고 인식하면서 산다.
정상적인 삶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삶이 정상적인 삶이다.
하나님 앞에서 정상적인 사람은 타락한 천사와 인간의 여인들이 혼인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정상적인 사람은 동성애하거나 반려동물을 마치 자기 자식이나 되는 것처럼 인격화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이다.
분명히 비정상적인 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죄인들은 비정상적인 삶을 비정상으로 인식하지 않고 정상적인 삶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인식하는 것이다.
타락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
타락하게 되면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서도 하나도 잘못되었거나 비정상적인 삶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지극히 평범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정상적인 삶이다.
하나님 앞에서 직분자면 직분자답게 사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삶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삶, 타락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사람 만드심 그 자체를 한탄하시면서 후회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제자로 뽑아서 재정관리까지 맡기셨는데, 가룟 유다는 결국 은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지옥으로 달려간다.
예수님은 그런 가룟 유다를 보시면서 ”인자는 정해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지만, 가룟 유다는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후회하신다.
지금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만들어주시면서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시면서 생령이 되게 하심 그 자체, 사람 만드심 그 자체를 후회하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탄하시고 계신다.
너무나 한탄하시면서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하나님은 지구촌에 생존하는 사람을 쓸어버리겠다고 결단하고 계신다.
지구촌에서 깨끗하게 청소하겠다고 선포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를 한꺼번에 깨끗하게 청소하시는 방법이 바로 홍수를 통해서 심판하시는 방법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② 은혜를 베풀어 구별시켜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지구촌에 생존하는 모든 창조 세계를 지면에서 쓸어버리겠노라고 선포하면서 한 사람을 남겨두신다.
하나님께서 남겨두시기로 작정한 사람이 노아이다.
그렇다면 노아는 그 당시 생존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지는 않았을까?
노아도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삶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을까?
8절에서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고 말씀하신다.
노아는 아담의 10대 손이다.
아담의 10대 손인 노아의 삶에 대하여 9절에서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소개하고 있다.
곧 노아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그 당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살아가던 삶을 살지 않았다고 소개하는 것이다.
노아가 사는 삶은 그 당시 사람들의 시선에는 비정상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의 시선에서 정상적인 삶은 모든 사람들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들과 일부의 사람의 딸들이 서로 좋아서 혼인하면서 네피림과 용사들과 같은 타락한 인간들을 출산하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게 하는 삶이 지극히 정상적인 삶이라고 인식하던 시기이다.
그러던 시절에 노아만큼은 그 당시 사람들의 시각에서 정상적인 삶이 아닌, 비정상적인 삶을 살았다고 소개하고 있다.
노아의 삶은 그 당시 생존하던 사람들의 견해에는 바보 천치처럼 사는 것으로 인식이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의인의 삶, 하나님의 은혜받으면서 사는 삶은 바보들이나 그렇게 살지 정상적인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나? 그렇게 사는 것은 비정상적인 삶.’이라고 인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의 삶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의인의 삶,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서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이 정상적인 삶이지만, 노아 당시에 생존하던 사람들의 시선에는 비정상적이고, 바보천치처럼 어리석은 삶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신앙인의 삶은 세상을 따라서 사는 삶이 아니라 세상을 반대로, 거꾸로 사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신앙인의 삶이 세상을 따라서 세상과 구별되지 않고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살아간다면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신앙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 어쩌면 세상 사람들이 살지 않으려고 하는 삶을 골라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길이 하나님께 은혜받은 사람이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이다.
③ 구원의 새로운 세계를 준비시켜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노아에게 가족들을 거느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면서 방주를 만들라고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13-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3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5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16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20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21 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하나님은 노아에게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 상태이기 때문에 홍수로 심판하려고 하니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22절에서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라고 기록하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방주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부패하고 타락한 천지 만물을 홍수로 깨끗하게 청소하고 쓸어버리면서 심판하실 때, 그래도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새로운 비전과 꿈과 뜻과 의지를 실현해 나가시기 위하여 새로운 구원의 세계를 준비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타락하고 부패한 창조세계를 완전히 멸망시킴으로 끝내려고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사람들 때문에 사람 만드심 그 자체를 한탄하면서 후회하셨기 때문에, 아예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심판하여 모든 것들을 끝장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완전히 끝장내버리지 않고 방주를 만들면서 노아의 8식구들뿐만 아니라 각종 동물들과 새들의 암수를 방주에 들여보내면서 구원하여 새로운 세계를 펼쳐 나가시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창조세계를 완전하게 버리지 않으시고 새로운 세상을 새롭게 열어가려고 하는 의지와 꿈과 비전을 가진 것은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살지 않고 어쩌면 바보천치처럼 비정상적인 삶을 살려고 했던 노아의 가족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비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의인의 삶을 살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믿음으로 사는 삶,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사는 노아의 가족들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야겠구나 하는 의지를 가지고 추진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 구원의 일, 새롭게 펼쳐 나가시려는 계획과 의지와 뜻은 타락한 세상을 통해서, 부패한 세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고 미력하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이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려고 하는 이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이들을 통해서 이루어가신다.
L4 & B4
하나님은 노아에게 구원의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신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의 120년 가깝도록 한결같이 방주를 만든다.
노아는 500세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는다.
그리고 600세에 홍수가 일어난다.
하나님은 500세에 세 아들을 낳기 전에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라는 마음을 가지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를 선택하여 은혜를 베풀어주시면서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시고 세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노아는 홀로 방주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세 아들을 낳았고, 세 아들이 성장하면서 아버지를 도와서 방주 만드는 일에 동참하고 혼인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방주를 다 만들고 나서 노아와 세 아들과 아내와 세 며느리들 곧 8명이 방주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들이 방주에 들어갈 때는 노아의 손자들은 태어나지 않았던 때이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셨고,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음으로 지키면서 120년 가까운 세월동안 한결같은 믿음으로 방주를 만들어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실까?
구원의 방주는 주님의 몸된 교회뿐만 아니라 아주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다.
신앙인 각자에게 합당한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실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우리들은 어떤 방주를 만들어야 구원의 길로 걸어갈 수 있는 것일까?
우리 가정은 어떤 방주를 만들어야 온 가족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로 걸어갈 수 있는 것일까?
모든 신앙인에게 있어서 공통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방주는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단언할 수 있다.
주님의 몸된 교회가 우리들에게 구원의 방주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께서 후회하시는 일이 없도록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입혀 주시는 은혜의 옷을 입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홍수로 세상을 심판할 계획을 세우면서 노아의 가정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계획과 뜻과 의지를 가지고 추진해 나가시는 것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새롭게 열어가시려고 하는 비전의 세계, 구원의 세계, 신령한 세계를 새롭게 열어가시기 위해서 노아의 가족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임재하심 가운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① 하나님의 것들로 채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과 심장과 의지와 뜻과 계획과 꿈과 비전을 잘 이해하고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로 파고 들어가야만 가능해진다.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과 전혀 다른 판이한 길로 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후회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과 계획과 의지와 뜻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가능해진다.
하나님 말씀의 세계가 아니면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직통계시를 받아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가짜이거나 허상이거나 망상이거나 헛소리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지구촌이 존재한 이래로 하나님으로부터 직통계시를 받았노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자기 자신도, 그를 따르는 이들도 패망의 길로 끌고 갔을 뿐이다.
그러기에 세상의 어떤 사상이나 윤리나 철학이나 종교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믿을 수 없다.
100-1=0, 1000-1=0, 10000-1=0이 된다.
세상적으로 100가지, 1000가지, 10000가지가 있더라도 단 하나가 없다면 그것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니다.
그 단 한 가지는 하나님이시다.
삼위 하나님이 안 계시는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0일 뿐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의 신령한 것들로 가득 가득 채워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세계, 구원의 세계, 새로운 천국의 세계가 활짝 열리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신령한 것들로 가득 가득 가득 가득 채워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열어가시는 새로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 복음의 세계, 십자가 보혈의 세계를 열어가는 것이다.
② 전폭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야 한다.
지구촌에 생존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로 부패한 삶, 타락한 삶을 즐기면서 살던 시대에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로 노아의 가족들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펼쳐 나가셨듯이,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가 풍성하고도 넘치도록 부어주셔서 새로운 구원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를 펼쳐 나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아의 가족들에게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셨듯이,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셔야만 가능해진다.
우리 신앙인이 사람답게, 신앙인답게, 직분자답게, 사명자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야만 된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 신앙의 장사라고 떠벌린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재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국 성령 하나님의 감동 감격하심에 의해서,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해서, 성령 하나님의 전폭적인 지지와 위로와 격려하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만 후회하지 않는 삶, 한탄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만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고 고마워하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하늘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그리스도를 흠모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대전와우리교회 http://cafe.daum.net/GRACEOFJESUS
♥프레임 설교를 하시려는 분들에게 책을 소개합니다.♥
이 책은 출판되어진 책이 아니라 제본된 책입니다.
① 프레임설교의 이론과 실제(1권, 2권)
② 청중마음열기 2권(유머편, 예화편)
③ 감(感)으로 읽는 성경 이야기
④ 은혜로운 물붓기
⑤ 성경의 여인들 이야기 3권(구약1권, 2권, 신약1권)
⑥ 사무엘 & 왕들의 이야기
모두 10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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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