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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자로 확정될 수 있는 기준
히브리서 6:4-8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가짜 조화와 진짜 꽃의 차이를 아십니까? 가짜 꽃은 모습은 꽃이지만 성장하지 않으면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또한 씨를 내지 않아서 더 이상 같은 종류의 꽃을 내지 못합니다. 죽은 나무와 산 나무도 분명한 차이가 납니다. 죽은 나무는 아무리 물을 주어도 자라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산 나무는 계속 가지를 내고 이파리를 내고 열매를 냅니다. 장난감 아기와 실제 아기의 차이도 뚜렷합니다. 장난감 아기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 아기는 숨도 쉬고 물도 마시고 젖도 먹으면서 성장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 세계를 볼 때 가짜와 진짜를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도 가짜와 진짜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진짜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을 읽어도 변화도 없고, 그리스도의 생명의 향기가 나지 않으며, 무엇보다 거룩하여지는 성숙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본문 6절에서 말하는 “타락”은 원어로는 “파라핖토”인데 이 단어는 성경 이곳에 단 한번 나오는 특이한 단어입니다. 저명한 원어 사전 프라이버그를 보면 “파라핖토”는 “배도하다”, “이전의 관계를 저버리다”, “돌아서다”, “곁 길로 빠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히브리서의 배경에서 볼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저버리고 다시 구약의 모형과 그림자를 붙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파라핖토”는 믿음의 ‘내용’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곧 “스토이케이아”를 거절하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의 (스토이케이아)가 나옵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스토이케이아)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들이 선생이 되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의 (스토이케이아)를 제대로 붙들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라는 말에 의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배우고 접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가르침의 영향 때문에 히브리 기독교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잃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복음의 핵심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토이케이아)는 가장 근본적인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는 복음의 근본 핵심을 뜻합니다. 즉, 십자가의 도를 붙들지 못한 자들은 결코 선생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의 근본 핵심을 놓친 상태로는 절대로 영적 성숙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핵심을 붙들지 못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신앙 생활이 길어질수록 편견과 고집과 판단만 점점 더해질 뿐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놓치면 일반적으로 신비주의 또는 율법주의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의 배경에서 볼 때 배도입니다.
예수님과 바울 당시 기독교의 가장 큰 원수는 두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와 신비주의입니다.
신비주의의 경우는 “성령의 내적 체험”을 강조하지만 그리스도의 역사적이며 객관적인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비 체험이 너무나 중요한 나머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무시합니다.
예수님 또는 바울 당시에 영지주의라는 신비주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아는 어떤 영적 지식을 통해 신비 체험을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심한 금욕주의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영지주의 및 금욕주의 배경 가운데 바울은 골로새서를 썼고,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썼습니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골 2:18-19, 2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요일 4:1-2).
거짓 영을 받은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의 공통점은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 곧 죄사함과 그리고 죄성을 이기게 하는 거룩한 능력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인한 거룩한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오직 복음의 본질을 굳게 붙든 자들만이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죄성을 넉넉히 이긴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복음의 본질을 붙잡지 못하면, 건전한 영적 성숙을 이루지 못하고 신비주의로 흐르게 되는데, 이는 사실 기독교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기독교의 원수로 행하면서 자신들은 매우 영적인 존재라고 착각합니다.
복음을 붙잡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또 다른 이단적 종교 현상은 “율법주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싫어하셨던 종교가 율법주의였습니다. 얼마나 싫어하셨는가 하면 율법주의자들에 대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뱀들아. 마귀의 새끼들아”라고 호칭하셨습니다.
주께서 왜 이렇게 분노하셨습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망각하고 자꾸 스스로 율법을 지켜 거룩하여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은 뱀에게 양처럼 행하라는 거짓과 위선일 뿐, 실제로 거룩한 생명과 능력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요, 영적인 참 자유를 주는 하나님의 능력인데, 율법주의는 오히려 정반대로 생명의 자유를 빼앗고 사람들을 율법의 저주와 공포의 노예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욥기는 율법주의에 속한 인물들을 등장시킵니다. 그들은 다름아닌 엘리바스, 빌닷, 소발입니다. 그들은 소위 율법이라는 것으로 몽둥이로 만들어서 가뜩이나 고통 당하는 비참한 욥의 뒤통수를 때립니다.
욥의 친구들의 뒤에는 누가 있습니까? 욥기 1장은 배경을 보여주는데 사탄의 목적이 나옵니다. 사탄의 목적은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저주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적을 위해 사탄에게 처음 쓰임 받은 사람은 욥의 아내로서 그녀는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노골적으로 도전합니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하지만 욥이 결코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자 그 다음으로 사탄이 사용하는 자들이 소위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욥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욥에게 하나님을 왜곡하여 말하면서 하나님을 악하고 잔인한 분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하마터면 욥은 하나님을 저주할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께서 폭풍 가운데 욥에게 나타나 범죄를 막아 주십니다(욥 38장).
[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욥 38:1-3)
아무튼 욥기에서 엘리바스, 빌닷, 소발, 이 세 사람은 율법주의를 대표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인 복음을 붙잡지 못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탄의 도구로 전락하고 맙니다.
또 다른 예로, 사도 바울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까지 합니다.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라”(행 22:4).
물론 바울이 직접 그리스도인들을 살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죽임 당할 때 찬성 투표를 던졌으니 죽인 바와 다름 없습니다(행 26:10).
그가 왜 그렇게 하였습니까? 자기 딴에는 종교적인 열심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는 소위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며 서슬이 퍼렇게 되어서 예수님을 대적하였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는 율법에는 얽매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직 인간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 구원 얻으려는 자기 의를 쌓았지만, 정작 도리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인 은혜의 복음을 대적함으로 구원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
2 (내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롬 10:2-3)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인 복음을 붙잡게 되고, 그 이후에야 율법의 의미도 다시 알게 되면서 더욱 깊은 복음의 비밀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구원을 받은 훗날에 자신의 삶에 대해 고백합니다.
[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 3:6-9)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곧 복음의 본질을 떠날 때, 그 어떤 신자도 바르게 자라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로는 오히려 종교적 열심을 낼수록 하나님의 원수로 행할 뿐입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그들은 기초가 잘못 되었으므로,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해도 복음의 진리를 결코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복음의 본질을 붙들지 못한 자는 반드시 처음부터 다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5장 12절을 통해 우리가 결론을 지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복음의 본질을 붙들지 못하면 수십 년이 지나도 영적인 성숙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6절이 말하는 (파라핖토), 곧 “타락”의 죄는 복음의 본질을 부인하고 구약의 모형과 그림자로 돌아가는 것으로서 정확하게 배도이며, 이 죄는 죄 사함의 근거가 되는 십자가의 구속을 거부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도 죄의 용서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즉, 성경이 제시하는 마지막 말씀이며 구약의 모든 모형의 실체인 그리스도 예수님을 최종적으로 거부하니, 어떻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배도의 죄는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6절은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의 도를 믿지 않는 자에게 어떻게 죄 사함이 가능하겠습니까?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 어찌 회개가 가능하겠습니까? 십자가의 도를 붙들지 못한 자에게 어떻게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겠습니까? 그들은 이전에는 복음의 공동체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결국 복음의 공동체에서 떨어져나가 성경이 전하는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는 배도의 죄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종종 그릇된 해석 중에는 6절의 ‘타락’을 중죄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라도 중죄를 짓고 타락하면 이는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누가 이렇게 해석합니까? 바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이렇게 해석합니다. 또는 율법주의 이단에 속한 행위 구원론자들이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 대한 지독한 무식을 드러냄과 더불어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이단적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중죄’는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야 하고, 또한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 받을 수 없는 중죄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어떤 중죄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입니까? 베드로의 경우 저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였는데, 그런 죄가 중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베드로는 회개가 불가능해야 했습니다. 다윗 같은 경우는 살인죄와 간음죄의 중죄를 지었는데 마땅히 회개가 불가능해야 합니다. 또한 살인 방조죄를 지은 바울도 마찬가지이고, 친히 살인죄를 지은 모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의 경우는 아내의 생명을 걸고 거짓말을 여러 차례 하는 중죄를 지었습니다. 이런 죄가 중죄가 아니고 어떤 죄가 중죄라는 말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전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 새롭게 되어 회개하였습니다. 무엇이 중죄이기에 회개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또 어떤 목사들은 6절의 ‘타락’은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죄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반복되는 죄는 회개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이 역시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헛소리입니다. 이런 해석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무한하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 해석입니다. 한편, 우리의 죄악 중에 습관적이지 않는 죄가 어디 있습니까? 평생 호흡이 마치는 그 날까지 우리의 죄성은 살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조금만 방심하면 다시 죄악으로 나타나는 것이 우리의 죄성이 아닙니까? 또한 습관이라 할 때 몇 번 반복하면 습관인지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이러한 해석들은 히브리서가 쓰인 의도를 망각한 그릇된 해석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타락’은 도둑질이나 살인이나 술 취함이나 간음 등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타락’은 복음적인 관점에서의 타락으로서 새언약인 복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히브리서 2장 1절이 경고한 그러한 일이 실제로 나타난 현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 2:1).
즉, 복음 안에 있다가 서서히 복음에서 멀어져 떠나가더니 이제는 완전히 복음을 왜곡하여 믿거나 복음을 거부하는 자리에 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그는 ‘타락’ 상태가 되면서 그 상태에서는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타락을 “Apostasy”, 곧 배도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말하면, 기독교를 믿다가 유대교로 돌아가면 그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린 사람입니다. 기독교를 믿다가 타종교로 넘어가거나 이단으로 넘어가면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배도자로서 처음부터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동성애를 지지하는 교회들처럼 성경이 죄라 하는 것을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것 역시 배도의 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에서 볼 때, 6절의 “타락”은 신자의 죄가 아니라 거짓 신자의 죄입니다. 이 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의 공로를 철저하게 왜곡하거나 부인하는 죄입니다.
베드로는 무서운 죄를 범한 후에도 참 신자였기 때문에 주 예수께서 그가 타락하기 전에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고 중보 기도를 해주셨고, 그가 범죄한 후에 회개한 후에는 그를 찾아오셔서 사도직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나아가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여 그는 평생 주의 복음을 위해 살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짓 신자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처럼 늘 예수님 곁에 있었지만, 끝까지 그분의 십자가의 은혜를 붙들지 못하고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를 은 30에 팔아 넘기는 배도의 죄를 지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하여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막 14:21)고 언급하셨고, 결국 가룟 유다는 자살하였으며, 그의 몸은 바위 위로 떨어져 그의 창자가 튀어나왔습니다. 이는 그의 영혼이 지옥에 떨어졌음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즉, 그는 원래부터 거짓 신자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저버린 것입니다.
또한 6절의 타락은 개인적인 배도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단체적이며 교단적으로 나타납니다. 즉, 배도는 개인적인 현상보다 공동체의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즉, 한 명이 아니라 두 세 사람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인하는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드러내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부인합니다. 따라서 6절의 타락은 거짓 교회를 만들고 운영하는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를 다니는 죄 역시 배도의 죄에 합류하는 것입니다. 거짓 신자들은 처음에는 참 교회에 속해 있을 수 있으나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이단의 가르침 및 거짓 복음을 따라 그러한 거짓 교회로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향해, 또한 참 복음을 외치는 정상적인 교회를 향해 반대 세력을 구성하여 대항합니다. 그들은 심지어 참 교회 내에서 가라지로 존재하며 내부적으로는 교회를 허무는 세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참 성도인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붙든 가운데 배도의 교회와 세력을 뚜렷하게 구별해야 하고, 또한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가라지들을 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는 바른 교훈을 철저하게 배우고 믿으면서 삶 가운데서 의의 말씀을 경험해야 합니다. 또한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참조, 히 5:13-14).
즉,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과 그분의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르게 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가 정확하게 누구신지, 그리고 그 분의 십자가의 사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경대로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는 교인은 타락한 자로서 배도의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배도의 죄를 짓게 되는 거짓 신자라도 4절부터 5절의 체험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가짜 신자와 진짜 신자를 구별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이에 우리는 히브리서의 계시에 따라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는 지혜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먼저 4절을 보면 “한 번 빛을 받고”라고 말합니다. 한때 빛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깨달아졌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이 지적으로 깨달아졌습니다. 그러나 믿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분과 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것은 거듭남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깨달음만 있는 자들은 처음에는 참 신자처럼 보이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에게는 거듭난 생명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마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를 보면 돌밭이 나옵니다. 그 돌밭은 복음의 씨앗을 받아 “즉시 기쁨으로 받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마 13:20-21)라고 합니다. 기쁨으로 깨닫지만 성품과 삶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단 중에는 “깨달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이단이 있습니다. 그러한 이단은 겉모양은 기독교 같지만 거짓 기독교이며, 복음을 아는 것 같지만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있지 않기 때문에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물론, 거듭난 생명을 지닌 참된 그리스도인은 ‘빛을 받는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복음이 지적으로 깨달아지는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 받은 최종 증표는 아닙니다.
둘째는, 하늘의 은사를 맛보는 것입니다. 이 또한 가짜 신자에게도 가능한 체험입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본다는 것은 이 말씀을 받은 히브리인들을 대상으로 할 때 구약의 사건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에서 살과 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물인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었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어야 영생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인 복음을 믿음으로 성령 안에서 영생을 누리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참조, 요 6:50-57).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체험하였어도 그것이 참 신자를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 번째는, 성령에 참여한 바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여한 바’라는 원어는 ‘메토코스’인데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초대 교회 때 나타난, 기적을 동반한 성령의 특이한 역사를 체험한 것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참 신자를 보증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8장 8-18절을 보면 성령에 참여한 바 되지만 나중에 참 교회에 큰 해를 끼친 장본인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마술사 시몬입니다. 그는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성령의 크신 능력과 표적을 나타내자 그 역사를 체험하면서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습니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행 8:13).
그런데 사도들이 안수할 때 사람들이 성령을 받고 방언과 예언 등을 나타내자 시몬이 사도들에게 말하기를, 돈을 줄 테니 그 권능을 자기에게 팔라고 말합니다.
[
19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
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행 8:19-21, 23).
즉, 마술사 시몬은 복음과 관계도 없고 하나님 나라의 분깃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구원 받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성령이 역사하는 현장에서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짜 신자였습니다.
구약의 사울 왕 같은 경우 그는 여러 차례 성령에 의해 사로잡혀 예언을 하곤 하였습니다(삼상 10:6; 삼상 19:23). 하지만 사울 왕은 거짓 신자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맛보다’라는 원어의 뜻은 어떤 사건을 실제로 체험하여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선한 말씀”이라고 할 때 ‘말씀’은 “흐레이마”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흐레이마’를 체험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달콤함을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신자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헤롯 왕은 세례 요한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번민하면서도 그 말씀을 즐겼습니다.
“헤롯이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막 6:20).
하지만 헤롯 왕은 회개하지 않았으며 나아가 세례 요한의 목을 칼로 베는 큰 죄악을 더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벨릭스 총독이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수 차례 맛봅니다.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는 듣거늘…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행 24:24, 26).
벨릭스는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수 차례 맛보고도 결국 회개하지도 않았고 또한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고도 구원 받은 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내세의 능력을 맛보는 것입니다. 구약 예언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인하여 다 성취되었고 이제 새언약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내세’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속을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성령 안에서 이 땅에 임하였으며, 앞으로 주의 재림과 함께 물리적인 내세, 곧 영원한 새하늘과 새땅이 임할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 시대 가운데 성령을 통해 내세의 능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내세의 능력을 체험하더라도 가짜일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 발람 같은 경우는 이러한 내세의 능력을 구약 시대에 맛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짓 선지자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민수기 24장 16절 이하를 보면 발람 선지자는 내세를 맛보며 예언합니다.
[
16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말하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아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17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19 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남은 자들을 그 성읍에서 멸절하리로다
](민 24:16-17, 19).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와 성령, 그리고 복음으로 말미암은 귀한 결과들을 체험하고 알면서도 마침내 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도한 그 사람은 거짓 선지자 발람처럼 처음부터 거짓 신자로서 하나님의 택한 자녀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참 신자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참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영적인 성장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이에 7절은 그 사실을 말합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7절)
참 성도는 끝까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한 가운데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자들입니다. 나아가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열매를 내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사탄과 죄의 합작품인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땅은 가짜입니다.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8절).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는 것은 영적인 성장은커녕 잡초와 독초와 못된 열매를 내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새 언약에 대해 배도함을 뜻합니다. 가짜들은 반드시 그 정체를 드러낼 것인데 다름 아닌 농부가 원하는 열매가 아닌 저주스런 가시와 엉겅퀴를 맺음으로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이는 참 교회와 복음을 찌르고 방해하고 가로막는 열매로서, 마귀가 불신자들의 마음과 함께 역사하여 만든 열매인 것입니다. 따라서 농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하신다고 거절하시고, 그들은 마침내 저주 가운데 영원한 불못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그러므로 히브리서 6장 7-8절은 참 신자인 좋은 땅은 말씀과 성령의 생수를 상징하는 단 비를 흡수하여 주인에게 합당한 좋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을 말하며, 반면 거짓 신자인 나쁜 땅은 나쁜 열매는 맺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얼마든지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는데 실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다 전하신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7:16-20)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열매가 아름다운 열매인지 나쁜 열매인지를 평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인본주의 관점에서 볼 때 좋은 열매는 하나님께 나쁜 열매일 수 있고,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열매는 인본주의 관점에서 볼 때 나쁜 열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및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좋은 열매는 하나님께서 뿌리신 복음의 열매로서, 복음의 진리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한 가운데 성령의 생수를 흡수하여 하나님께 유익한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무와 가지 비유는 오늘 본문과도 절대적으로 연결되는 교훈입니다.
[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 (요 15:1-6)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허무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가장 큰 음녀로는 카톨릭 교회가 있습니다. 카톨릭은 진짜 교회와 오해될 정도로 대단히 정교하고 어마어마한 조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체는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허무는 집단입니다.
또한 종교 다원화가 있고 신비주의가 있고 율법주의가 있고 반율법주의가 있고, 오늘 본문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유대주의가 있습니다. 이들의 한결 같은 특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왜곡시키거나 약소 시키거나 거부한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거나, 십자가의 구속 외에 다른 길도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배도입니다.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배도 중에 배도이며 마귀의 강력한 역사입니다. 동성애는 삶의 스타일이지 죄가 아니라는 주장 역시 마귀의 노골적인 거짓을 믿는 배도의 죄입니다. 이러한 배도의 죄는 인간이 볼 때는 큰 해를 끼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입장에서는 실은 엄청나게 위험하고 가장 사악한 위선 및 거짓 흉계인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의 공로를 저버리면 회개를 통한 죄 사함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간들은 가짜 신자와 진짜 신자를 정확하게 구별해내지 못합니다. 또한 자기 자신도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가짜와 진짜를 그 기원에 의해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열매로는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열매를 맺어오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왔습니까? 아니면 방해가 되는 삶을 살아왔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있습니까? 아니면 허물고 있습니까? 만일 지금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난다면 어떤 열매로 우리의 믿음이 참 믿음임을 입증하겠습니까? 주께 보여드릴 참 열매가 있습니까?
우리는 참 신자로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쉬지 않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와 교제하면서 성령의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거룩하여져서 선한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려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으로부터 흘러 넘치는 성령을 끊임없이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풍성한 열매를 맺어드려 우리가 참 열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큰 기쁨이 되는 열매로 확증될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한 삶에 대해 회개하고,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기 바랍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할 때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참 신자라는 확신 가운데 평강과 감사와 희락이 늘 넘쳐날 것입니다. 이러한 복되고 참된 주의 자녀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