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정 기 (兪 鼎 基) 공의 비문을 종산에 재건한내용
공의 비문이 실전 되였으메 이비통함을 어찌할고 안타까워 다시 찾아발굴하자는 서면 종친회에서 병찬형과 나 병은 그리고 나이든 순재조카가 주동이되여 노심하뎐차 비문이잇다는 반가운 소식을 일게되 여기 재건하던날를 상기하며 나병은은 적는다 비문을 찾아 재건 하던날 2004년3월 대종회 유동준 대부 시인이시며 회장님 과 고문이신 유병오 형님 을비롯 간부들를 초빙 수원서면 50여명이 참석 비문을 다시 세울때우리는 참으로 안타끼웁고 기쁨에 넘처 펑펑 눈물 쏟으며 조상님들게 감사 예를 올렷다 그럼여기서 그날를 회상하며 공의 모든 것 양력을 상기하며 재건의 날를 상기한다 공은 병자에서 9대조이며 공의 휘는 정기(整基)요 자는 하진(夏鎭)또는 장문(長文)이시며 생하신 해는 인조 15년 정축해(1637-1672)이고 수하 신해는 현종 13년 임자 해를 끗으로 한많은 수를 다하시었다 공의 부인은 번남 박씨(藩南朴氏) 군수(郡守) 세봉(世封)어른의 따님이시며 세봉어른의 조부님은 조선 역사에 청청함을 자랑하는 청백리에 드신 가풍의 가문이시다 공은 정축년 선친이 당신을 유복자로 남겨두신체 서생 시절 조졸하시니 수안공 종손가의 앞날이 한때 암울하였으며 참군공 역시 태여 나시여 초기에는 공부를 게을리 하여 모친 수원 최씨의 자상하고 따듯한 교육과 당시 유명하신 숙조부 시남공의 지엄한 훈도에 힘입어 늦게 학문에 매진하였다고 공에 비문은 작고 있다 그로 인하여 수안공 종손가의 가문은 다시 활기를 띄우게 되였다 공역시 손이 귀하여 외독자 언보(彦輔)와 따님두분을 두신다 큰따님은 강능김씨(江陵金氏) 판서(判書) 시환(始煥)에게 출가하였으며 작은따님은 능성구씨(陵城丘氏) 군수(郡守) 성문(聖文)에 출가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강릉 김씨 댁으로 출가한 큰따님의 이야기를 집고 넘어가 본다 강릉 김씨 댁으로 출가하신 큰따님은 과연 유씨 가문의 뛰어난 재질과 모친 번남 박씨의 아름다운 교육적 자상함이전수된 이조역사속에 표본적인 인물 이였다 그 당시 강릉 김씨 댁은 종로에 살고 있었으며 유문의 딸이 시집오고부터 집안의 형세가 급격히 달라지고 남편 시환(始煥)을 비롯 시동생 아들 형재들 8을 문과 급제에 합격시켜 모두 판서 반열에 오르게 하여 지금도 종로 팔판동이라고 부르는 지명이 생겼으니 여인으로서 한가정의 주부와 어머니로서 일약을 담당하여 강능김씨댁의 영화가 있음이 유문의 따님 덕이다 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으며 수세 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씨 할머니를 곤경 하는 교육이 강능김씨댁 가문은 전수 되여 내려오고 잇다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며 자랑스러웁고 위대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 유씨 가문에 전수된 한 토막의 이야기는 당시 팔판동에 사는 큰따님이 어찌나 시집살이가 맵고 무서운지 모친 반남박씨가 딸을 만나러 한양에 같다 돌아오셔서 [그치근함을 어찌할 고..] 하면서 구슲이 울었다고 전하여진다 한가정이 이룩되는 대는 그만큼 피와 눈물이 있었음을 말한다. 참군공이 학문에 매진하여 처음에는 참봉(參奉)이 되더니 참군(參軍)에 이르러서 수안공 종손 가가 괴도를 수정하더니 당시 개성유수로 계시던 재종숙조 유수 철(撤) 어른이 집안에서 100년간 숙민공에 대한 시호를 간청하였으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유수 철어른이 재차 간청한 숙민공의 시호 허락이 떨어져 우리 참군공이 개성유수 진영으로 달려가 그 기쁨을 알리는 잔치 좌석에서 유수어른은 물론 집안대소가 내외빈이 모인가운대 축하 하는 시를써 주고 밭은 문장이 잇는대 그 내용이 1987년 발행 편집 간행된 정당유고 부록 숙민공유고에 유수어른의 글과 우리 참군공의 글이 실려 있다 그리고 공의 묘는 수원 서면에서 10여리 떨어진 당시 남양 금산에 모셨으나 어쩐 일인지 훗날 나의 팔촌 병화(炳華)형님 (유진건설사장)이 9살때 썼다는 가승에 그 묘를 수원 서면으로 이장 하엿다라고 기록 되여 있으며 그 비문은 공이 먼저 장례 치루워진 금산에 묻었다고 하였다 그런대 약 20년전 그 비석이 인근 주민이 목장을 개간하다가 비가 발견 되여 비문의 후손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잇던 차 1994년 벽재 시향에서 물원리에 사는 나이든 조카 원재(元在)가 네게 그 사실을 말하여 산 주인을 만나 자초지종을 들어봤더니 산 주인 왈 [그 산에서 사슴을 기르는 대 왼지 사슴들이 부실하게 자라고 자꾸만 죽어가는차 어느 날 사슴의 무리가 참군공 비문이 묻친 자리를 발로 파해치는 행동을 반복 하기에 그 자리를 파 보니 영농한 대리석 빛을 발하는 참군공의 비가 나왔으며 산 주인은 예사롭치 안타하고 술을 붓고 재를올린 다음 대학에 다니는 아들을 시켜 교수를 초빙 비문을 해석도 해보는 등 예를 갖추니까 사슴도 잘 자라고 하여 15년동안 차분이 비문의 후손을기다렸읍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인근에 사는 일가들은 그 비가 발견된 사실을 알서도 15년이 되도록 내용의 곤경 성을 잘 모르는 탓에 방치된 상태엿던겄을 나와 병찬(炳瓚)형이 주동 되여 수원 서면 유씨 일가들과 시남선생 유허비 건립시 참군공의 비문을 모셔다가 (물론 비문을 재건하여 세울 때는 전문가들에게 상의하여 시신이 없어도 괸찮타는 충고를 듣고) 현재를 사는 수원 유씨 종인 들이 장만한 방오산 종산에 재건하여 비록 시신은 없으나 조상의 얼을 기리기 위하여 곤경 하니 황공하옵고 안쓰러워 언제인가는 이장 지를 찾는다든지 비문의 누각을 장만한다든지 하는 대사가 후손이 이여지는한 있을 겄을기원하며 공의 영령이 안주하기를 합장 기도한다.
2004년 3월 공의 9세손 병은 이 적는다
수원 기계유씨 진사공파 서면 (발안종중)일동
2017년 6월 23일 참군공을기리며 다시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