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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8. 묵상글 들 ( 부활 5주 토요일-흙탕물 속의 연꽃같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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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8.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5주 토요일-흙탕물 속의 연꽃같은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오래전에 저는 세속이라는 말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이라는 바로 오늘 말씀 때문인데
세속世俗을 별생각 없이 세속世屬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자어에서 속屬은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어디에 속한다고 할 때의
속은 어떤 부류나 단체에 딸려 있다는 뜻이고,
그래서 다른 부류나 단체와는 무관하거나 적대적일 수도 있지요.
예를 들어, 옛날 이정재 파에 속한 깡패는 김두한 파와는
상종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적대적이기도 하지요.
아무튼, 저는 별생각 없이 세상에 속한다는 뜻으로
세속世俗을 세속世屬이라고 잘못 생각했던 것인데
그런데 이런 생각이 의미적으로는 그리 큰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왜냐면 세상에 속한다는 사람은 그저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와 세상 중에서 세상을 선택하는 사람이며
하늘나라를 반대하거나 하느님 뜻에 따라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이고,
하느님 없이 이 세상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 곧 무늬만 신자이고 말로만 신자인 사람은
우리 신앙인들 안에서도 얼마든지 많이 발견할 수 있고,
저는 이런 신앙인을 일컬어 실천적 무신론자라고 하지요.
실천적 무신론자란 하느님 존재를 부정하지 않지만, 굳이 논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있건 없건 자기와 상관이 없기에 굳이 열을 올리며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지 않고 하느님이 계신다고 해도
나와 상관없이 저기 하늘에 계시거나 딴 나라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을 이런 세상에서 뽑았다는 것은
제자들을 이 세상에서 빼어내어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드셨다는 뜻이 하나이고
당신 제자로 뽑으셨고 삼으셨다는 뜻이 다른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제자로 뽑힌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데
이때 세상을 떠나는 것이 엄밀한 의미에서는 세속을 떠나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세상을 떠나지만, 그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고,
프란치스코가 회개한 뒤 마음은 세속을 떠났지만
몸은 오히려 세상 가운데로 들어간 것처럼 세상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며
세상 가운데로 들어가되 복음을 들고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흙탕물 속의 연꽃 같은 사람>이라고 하지요.
불교에서 깨달은 사람 곧 부처는 연꽃처럼 흙탕물 속에 피고,
그 안에서 아름다움과 향기를 풍기지만
결코, 그 흙탕물에 잠기는 법이 없다고 하지요.
이런 사람을 우리 신앙은 세상에 살지만 세속화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복음화하는 사람이라고 일컫고,
복음화되었기에 세상에 살아도 세속화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 '아, 바로 나를 두고 얘기하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분이 되시길 비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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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8.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택한 사람들이기 때문”
우리는 이번 주 내내, 관계 안에서의 ‘사랑의 계명’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곧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서, 제자들과 제자들이 관계에서의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은 제자들과 세상의 관계에서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당하게 될 것에 대한 예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제자들의 신원과 사명으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 사람들의 몰이해로부터 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결국, 세상과 제자들의 관계에서도 제자들의 사명 역시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이유를,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택한 사람들이기 때문”(15,19)이며, 또한 “내 이름 때문”(15, 21), 곧 “내 제자라 해서” 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께 속한다.’는 것과, ‘예수님께로부터 선택받았다.’는 것과, ‘예수님 이름’, 이 세 가지가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되는 <제자들 편>에서의 이유입니다.
사실, 이는 우리 존재의 의미요, 우리 삶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세상 편>에서의 이유는 “그들 곧 세상이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모르기”(15,21)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세상이 아무리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자신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누구에게 선택받았는지? 제자로서의 신분을 잃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곧 세상의 미움과 박해 속에서도, 오직 예수님께 믿음을 두고, 꿋꿋이 복음을 선포하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비록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을지라도 당신께서 하셨던 것처럼, 당신을 보내신 분을 알게 하여야 하는 소명을 일깨워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께 속해 있다면, 미움과 박해는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특권에 해당한 것입니다. 이 특권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립 1,29)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명과 함께 고난의 특권도 부여받았습니다.
한스 큉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고난을 없애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사랑하신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세상이 아무리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오직 당신을 보내신 분인 아버지께만 믿음을 두셨던 주님이요 스승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믿음으로 복음을 선포하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요한 15,19)
주님!
세상에 속하지 않기에, 세상의 사랑을 구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 속하니, 당신의 사랑에 목마르게 하소서!
고난을 겪는 특권을 받았으니, 그 속에서 당신을 만나 뵙게 하소서!
그 어떤 미움과 배척에서도 사랑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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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8.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어버이날에 드리는 시
어머니께 드리는 노래 / 이해인
어디에 계시든지
사랑으로 흘러
우리에겐 고향의 강이 되는
푸른 어머니
제 앞길만 가리며
바삐사는 자식들에게
더러는 잊혀지면서도
보이지 않게 함께 있는 바람처럼
끝없는 용서로 우리를 감싸안은
어머니
당신의 고통 속에 생명을 받아
이만큼 자라온 날들을
깊이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기쁨보다는 근심이
만남보다는 이별이 더 많은
어머니의 언덕 길에선
하얗게 머리푼 억새풀처럼
흔들리는 슬픔도 모두 기도가 됩니다
삶이 고단하고 괴로울 때
눈물 속에서 불러보는
가장 따뜻한 이름 어머니
집은 있으나 사랑이 없어 울고 있는
이 시대의 방황하는 자식들에게
영원한 그리움으로 다시 오십시오
어머니
아름답게 열려 있는 사랑을 하고 싶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어제의 기억을 묻고
우리도 이제는 어머니처럼
살아있는 강이 되겠습니다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푸른 어머니가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눈물 / 이채
남자로 태어나 한평생 멋지게 살고 싶었다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하며
떳떳하게 정의롭게
사나이답게 보란 듯이 살고 싶었다
남자보다 강한 것이 아버지라 했던가
나 하나만을 의지하며 살아온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위해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하지 못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세상살이더라
오늘이 어제와 같을지라도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란 희망으로
하루를 걸어온 길 끝에서
피곤한 밤손님을 비추는 달빛 아래
쓴 소주잔을 기울이면
소주보다 더 쓴 것이 인생살이더라
변변한 옷 한 벌 없어도
번듯한 집 한 채 없어도
내 몸 같은 아내와
금쪽 같은 자식을 위해
이 한 몸 던질 각오로 살아온 세월
애당초 사치스런 자존심은 버린 지 오래구나
하늘을 보면 생각이 많고
땅을 보면 마음이 복잡한 것은
누가 건네준 짐도 아니건만
바위보다 무거운
무겁다 한들 내려놓을 수도 없는
힘들다 한들 마다할 수도 없는 짐을 진 까닭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울어도 소리가 없고
소리가 없으니 목이 메일 수밖에
용기를 잃은 것도
열정이 사라진 것도 아니건만
쉬운 일보다 어려운 일이 더 많아
살아가는 일은 버겁고
무엇 하나 만만치 않아도
책임이라는 말로 인내를 배우고
도리라는 말로 노릇을 다할 뿐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울어도 눈물이 없고
눈물이 없으니 가슴으로 울 수밖에
아버지가 되어 본 사람은 안다
아버지는 고달프고 고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버지는 가정을 지키는 수호신이기에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약해서도 울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그래서 아버지는 혼자서 운다
아무도 몰래 혼자서 운다
하늘만 알고
아버지만 아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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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8.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이덕무(1741~1793)는 박학다식하고 문장이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출세에 제약이 많은 서자 출신이었지만, 정조대왕에게 발탁되어 규장각 검서관이 되기도 합니다. 그의 학문은 훗날 정약용, 김정희 등에 영향을 미치게 되지요.
이런 학문적 깊이를 갖게 된 것은 그가 엄청난 독서광이었기 때문입니다. 온종일 책만 읽어도 될 정도로 책에 대한 그의 사랑은 대단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책 읽은 곳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많은 이가 책 읽는 분위기를 신경 씁니다. 조용해서 책에 집중할 수 있는 곳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집에서 주로 책을 읽었고, 그의 집은 당시 가장 번화한 거리였던 종로 사거리였습니다.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이었고, 가장 시끄러운 곳이었지만 책 읽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는 것만 그러할까요? 사실 많은 상황에서 안 되는 이유를 찾는데 익숙한 우리입니다. 기도가 잘 안 되는 이유, 공부 안 되는 이유,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 취업이 안 되는 이유…. 이런 식으로 안 되는 이유를 얼마나 많이 찾고 있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실학자 이덕무처럼, 위대한 위인들은 모두 안 되는 이유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되는 이유를 찾았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되는 이유가 참 많았습니다. ‘안 한다, 못한다.’ 등의 결론을 미리 내리고 보니, 되는 이유가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나햐면 세상이 주님을 먼저 미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미워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의 것을 좋아하고 또 세상의 눈으로만 보고 있으니, 하느님의 뜻을 볼 수도 없고 하느님의 일을 좋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놀라운 표징과 하늘나라의 말씀을 전해주셔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움’이라는 감정으로만 마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앞에 계시는데도 미움으로 가득 찼던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눈앞에 직접 보이지도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도 없는 우리는 어떠할까요? 우리가 더 ‘미움’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힘을 넣어주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서, 세상이 미워해도 사랑하는 힘을 주셨습니다.
어떤 이유를 말하며 사는 나 자신인지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되는 이유를 찾고 있는 나 자신일 때,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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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서로에게 힘을 주는 거야. 혼자 강한 사람은 없단다(영화 ‘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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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사람을 만드지 마세요.
언젠가 우편물 하나를 받았는데, 그 안에 ‘금가락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게 뭐야?’ 하면서 동봉해 있는 편지를 읽어보니, 저를 아들로 삼고 싶다면서 ‘엄마가 아들에게 물려주는 유품’으로 받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금가락지를 다시 그분께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편지 한 통을 남겼습니다.
‘저는 누구 한 사람의 사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사제입니다. 따라서 저를 아들로 삼고 싶으셔도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자매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금가락지를 돌려드립니다. 본인에게 필요 없다고 생각하시면 좋은 곳에 쓰시길 바랍니다.’
솔직히 자기만의 사제가 되기를 바라는 분이 많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차갑게 대하고 그 자리를 도망칩니다. 그렇게 친한 관계를 만들면 저부터가 사제로 온전히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께서 주님 곁으로 가시고, 종종 “신부님, 제가 신부님 엄마 해 줄게요.”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고마운 마음이지만 솔직히 자기만의 사제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경계심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모두 한 형제, 자매입니다. 소유하겠다는 마음에서는 불편과 어려움이 가득해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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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8.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더 큰 사랑으로
꿈은 크게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룰 수 있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바라는 것에 걸맞은 노력과 정성이 함께한다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대한 꿈을 지니되 선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거나 선에 대치되는 꿈과 희망은 결코 현실화 될 수 없습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모 그룹 재벌회장이 술집에서 폭행을 당한 아들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조직 폭력배를 동원하여 보복을 하였다는 얘기가 떠들썩하였습니다. 결국 그 아버지는 구속되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고귀한 마음은 나무랄 수 없지만, 선에 대치되는 방법을 선택하였기에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식을 사랑한다는 빌미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선생님을 폭행한 학부모도 있습니다. 폭행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녀 교육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자녀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것입니다. 스승을 존경하지 않는 부모의 자녀에게는 바른 인성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보고 자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방법을 좋아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내세우며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그것을 즐깁니다. 옳고 그렇지 않고는 상관없이, 좋고 싫고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그것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가치를 두지만,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저 멀리 하늘의 가치를 봅니다. 그래서 결국 미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두려워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곧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증거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움을 당하는 것은 악에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실 사악한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고 그들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조직폭력배와 공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누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구애 없이 선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뽑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삶이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극복해야 할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유로움과 영원함을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표지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은 우리의 발판이고 세상을 회피할 수 없기에 끝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힘을 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데 있어 '가장 뛰어난 형태의 자선'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온갖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치에 참여하기란 쉽지 않다는 현실에 공감하시고 "매일 공동선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일종의 순교와 같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저분하게 되거나 지치게 되더라도 우리는 현실 안에서 다시 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면 더 큰 사랑으로 갚아 주길 다짐하며……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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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8.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5,18-21: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18절)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시려고 고난을 겪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하느님의 자녀로 계속 남아 있게 해 줄 고난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의 미움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고 하지만, 주님께서 먼저 세상의 미움을 견디셨다. 우리가 이 세상의 비난을 받고 귀양을 가고 고문을 받지만, 주님께서는 이보다 더한 일을 겪으셨다. 저주받은 세상은 박해하고 하느님과 화해한 세상, 즉 교회는 박해를 당한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19절) 주님의 제자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현세에 살지만, 그것은 우리를 붙들어 놓을 수 없다. 세상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니다. 같은 행동으로 하느님과 세상을 똑같이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리에 복종하는 사람은 진리의 원수들과 싸워야 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20절) 이 말씀을 제자들이 온갖 종류의 박해를 당할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도 사악한 자들이 방자한 말로 그분을 공격했고, 온갖 말로 당신을 모욕하였지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그분이 받으신 모욕과 굴욕적인 상황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닮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그분께 싸움을 걸더니, 그분이 하늘로 올라가시니까 제자들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이미 제자들에 앞서 당신이 먼저 박해를 받으셨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20절)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쥐고 계시는 그분이 당신을 박해하는 자들이 각자 자신의 행실을 선택하도록 허락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박해를 받으셨다. 우리도 그분과 같은 길을 걸으려 한다면 박해를 당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이다. 이것 모두가 역시 우리 자신과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행하고 열매를 맺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21절) 여기서 ‘그 모든 일’은 세상이 당신의 이름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고 박해하고 우리의 말을 업신여기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세상은 주님 대신 우리를 미워할 것이며, 주님 대신 우리를 박해할 것이고, 세상이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그것이 당신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에 속한 자들과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완전히 다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어떠한 삶으로 주님을 닮아야 할지를 생각하며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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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8. 부활 제5주간 토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요한 15, 19)
어버이
날이다.
조건없는
부모님의
사랑에
머리숙여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은총이다.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역동적이다.
뒷걸음질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주님께서
직접
뽑으신
우리들이다.
우리를
뽑으신 분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신앙은
확신이다.
확신은
착각을
걷어낸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뽑으셨다.
하느님
사랑안에서
살아간다는
이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기쁠 수 없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를
뽑으신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미움과
두려움을
내려놓는다.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것보다
더 크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선하신
계획이다.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 모두를
살리시는 것이다.
뽑힌 이들은
다름아닌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이들이다.
하느님의
가장 좋으신
사랑이
우리 모두를
더 좋은
사랑으로
이끌어 가고
있음을 믿는다.
사랑은
모두가
소중하며
모두를
철들게 한다.
하느님
사랑으로
성장하는
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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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8.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도 바오로는 데르베를 거쳐 리스트라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그곳 형제들에게 좋은 평판을 듣고 있는 티모테오를 만납니다.
그곳 유다인들의 생각하여 니코데모에게 할례를 베풉니다.(사도 16,3)1)
그리고 바오로는 니코데와 동행하기를 원하는데 그의 여생동안 충실한 바오로의 제자가 됩니다.
바오로는 여러 고을들을 다니며,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의 정한 규정들을 신자들에게
전하며 지키게 하는데 공동체들은 믿음도 굳건해지고 신자들의 숫자가 나날이 늘어납니다.
사도 바오로 일행은 프리기아와 갈라티아 지방, 미시아를 지나 트로아스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바오로는 어느 날 밤에 환시를 보고 난 뒤, 마케도니아로 내려갈 것을 확신합니다.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는 로마에서 박해하던 이들에 의해서 순교하셨습니다. 이 두분은 출발부터
대조를 이루고 성경에 나타나는 모습에서도 서로 성격이 틀립니다.
베드로 사도는 인간적이고 부족한 점들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지만 사도 바오로는 비판적이고
예리한 면이 두드러집니다.
사도 바오로가 할례문제로 유다인들의 눈치를 본다고 비판했지만 그도 유다인들을 의식해서
‘이방인들에게 구약의 짐을 지우지 않아야 한다.’ 주장하던 그도 니코데모에게 할례를 줍니다.
사도 바오로의 모습에서 사람은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읽게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한 점을 살펴야 하고 올바로 살려고 노력해야 되겠지만 이웃에게는
비판보다는 부족한 죄인이라는 점을 잊지 말고 너그럽고 이해심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 만큼 어렵지만 우리가 주님의 사랑에 잠긴다면 그렇게 실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엄격하지 말하야 하며 가르치려 하지 말고 많이 듣고 기도해주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9)2)
그래서 장차 스승께서 박해를 받으셨듯이 제자들도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조건에 맞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잘 알 듯이 세상은 때로 전쟁터와 같이 혼탁하고 또 변화도 심합니다.
여기에 맞추고 살려면 우리도 빨라야 하고 또 약아져하겠지요.
그런데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진실하고 순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 살다보면 모든 것이 돈이고 이익창출이며 권리주장입니다.
이러다보니 양보하는 것이 바보스럽고 손해보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의 소중한 생명을 내어주신 모범을 우리도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
노력해야지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어둠에서 빛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우리는 믿고 세상에 살면서도 주님이 가르침대로
살면서 어려움이나 뜻대로 되지 않는 고통과 실망이 있다하더라도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다’하신
주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아무리 어둡더라도 우리는 실망하지 않고 빛이신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의 제자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이 세상을 못 보는 날이 오겠지요. 우리가 언제가는 듣지 못하는 순간이 오겠지요.
그러나 오늘은 저 빛나는 햇살과 녹음 우거진 나무들과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숲 속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 어디에서든 버튼 하나로 웅장한 베오토벤의 심오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오늘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도 바오로도 말했듯이 지금은 확실히 ‘그날’을 모르지만 언젠가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여기에서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이 엄청난 것들에 대해 주님과 이웃에 감사하며
‘오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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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톨릭을 반대하는 이들은 사도 바오로가 사도 베드로를 나무라는 대목을 근거로 삼고 있다. 베드로 사도가
안티오키아와 왔을 때, 다른 민족과 음식을 먹더니,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니까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하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둔 사실을 두고 사도 바오로는 베드로 뿐만 아니라 바르나바도를 위선으로 비난한다(갈라 2,11-14) 그러나 바오로도 티모테오가 그리스 아버지를 둔 이방인이라는 점을 두고 유다인들에게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출까봐 티모테오에게 할례를 베푼다. 당당하던 사도 바오로도 유다인들 눈치를 보는 것이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 공동체에서 할례
문제가 시끄러워지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원로들이 이 문제를 검토하려고 모이고 사도 베드로가
대표로 이방인들에게 구약의 율법의 짐을 지워주지 않기로 했다는 결정을 발표한다.(사도 15,6-10) 예루살렘 교회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보내기로 하고 또한 유다와 실라스 뽑아 편지를 안티오키아 공동체에 보내고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여러 고을을 두루다니며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이 정한 규정을 전한다.(사도 16,4) 예루살렘 공동체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엨 투 코스무 웈 에스테 ἐκ τοῦ κόσμου οὐκ ἐστέ)’ ‘내가 너희를 뽑았다(에고 엨셀렉사멘
휘마스 ἐγὼ ἐξελεξάμην ὑμᾶς)’ 예수님께서 다시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라고, 또 제자들을 위한 기도 중에,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한 17,14)라고
하셨다. 주님께서 ‘친히 제자 선택과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의 근본 신원이라 할 수 있다.
교회 봉사자들에게 중요한 말씀이며 힘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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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8.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처음으로 성지순례를 갔던 것은 1982년 여름입니다. 당시 성소국에서는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도보성지순례를 기획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은 절두산 성지에서 함께 기도를 한 후에 대부분의 성지를 도보로 순례하였습니다. 미리내, 양지, 솔뫼, 해미, 갈매못, 나바위, 치명자 산까지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모두 순례자들을 맞이할 수 있는 성지로 조성이 되어있지만 40년 전에는 대부분 빈 공간에 성지라는 안내표시만 있었습니다. 본당신부로 있으면서 기차로 떠나는 성지순례를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영등포 역에서 기차를 타고 구학 역에서 내렸습니다. 구학 역에서 베론 성지까지는 도보로 순례하였습니다. 성지는 순례하는 사람이 없으면 잊혀지게 됩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박해를 받아 순교하였던 곳,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하여 묻혔던 곳을 찾아 순례하는 것은 우리들 또한 신앙의 선조들을 따라 충실하게 살아가려는 다짐입니다.
올해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분은 순교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다른 한분은 길 위에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주춧돌을 놓았고, 최양업 신부님은 주춧돌 위에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유럽과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가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상해와 연길로 성지순례를 가는 것도 좋습니다. 상해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서품을 받은 성당이 있습니다. 연길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이 부제품을 받은 성당이 있습니다. 두 신부님은 만주벌판을 지나서 그리운 조선으로 오는 길을 찾았습니다.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신부님들도 만주벌판을 지나서 조선으로 입국했습니다. 말이 좋아 만주벌판이지 크기가 조선의 8배라고 합니다. 도중에 사나운 짐승도 있고, 도적 때도 있고, 살을 에는 추위도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압록강물이 어는 추운 겨울에 조선으로 와야 했습니다. 순례의 여정에 백두산 천지를 바라보며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좋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글이 있습니다. 베들레헴 성당 입구에 있던 글입니다. “만일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가가 되어서 돌아가십시오. 만일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가십시오.” 어쩌면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로 나가는 순례의 길인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지 못하고, 세상의 것들에 취해서 여행객으로 머물다가 떠나갑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아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지만 유혹이 다가오면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의 선조들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된 것처럼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찾아서 길을 떠납니다. 비록 순례의 길에 고난과 유혹이 찾아오지만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거룩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천상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비록 많은 고통과 박해가 있었지만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디모테오와 같은 좋은 협조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마케도니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지만 천상에서의 삶을 희망하는 순례자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가난할지라도, 비록 병고에 시달릴지라도, 비록 일찍 죽을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알렐루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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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8.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예수님처럼, 하느님처럼, 어머님처럼 -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대신 하느님처럼!을 넣어도 되겠습니다. 하느님처럼의 삶을 그대로 사신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 가장 하느님 사랑을 닮은 분이 누구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어머니일 것입니다. 그러니 이어 ‘어머니처럼! 넣어도 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이 살아야 할 삶은 파스카의 삶뿐이겠습니다.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저 역시 나이를 먹어 갈수록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회한悔恨만 가득한 마음이 됩니다. 죽을 때까지 어머니에 대해 회개하는 마음은 계속될 것입니다. 잘 해드린 것은 별로 없고 잘 해드리지 못한 것만 생각이 납니다. 가장 보고 싶은 분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없이 예수님과 더불어 어머니를 꼽을 것입니다.
거의 50년전 여섯째 숙부 환갑때 어머니(제 할머니)를 그리며 ‘어머님 은혜’를 부르다 목이 메어 흐느껴 우시던 숙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어린이 날은 ‘어린이 날’노래를 불렀는데 오늘은 ‘어머님 은혜’를 불러봐야 되겠습니다.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기를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손발이 다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어머님의 희생을 가이없어라.”-
3절 까지 이르는 구구절절 감동적인 가사와 곡을 전 세대에 걸쳐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얼마전 읽은 춘천교구 카톨릭 문우회 회원인 시인 심순덕 자매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시가 감동적이라 소개합니다.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일해도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이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 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코이노니아 한 자매님의 자전적 고백도 감동적이라 주고 받은 카톡 메시지를 소개합니다.
-“저희 아들이 6살 때 일이 생각납니다. 집에서 축구공을 갖고 놀지 말라고 여러 번 주의를 줬는데도 거실에서 공을 갖고 놀다 남편이 귀하게 여기는 도자기를 깨서 회초리로 엉덩이를 때리는데 아이가 엉엉 울면서 ‘엄마가 날 때려도 난 엄마를 사랑해요’라고 하더군요. 울면서 하는 말에 가슴이 찡했습니다. 저도 주님이 지금 저를 때려도 사랑합니다.”
“자매님, 아드님 6살 때 울면서 한 고백이 감동입니다. 지금 몇 살 되었나요?”
“지금 울 아들이 벌써 33살이네요. 생활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해보면 한편의 드라마같은 일들이 참 많네요.”
“분명 효자 아드님일 것입니다.”
“네, 중학교때는 말안들어서 제가 야단을 치고 속상해하는데 아들이 하는 말이 ‘엄마의 길은 참 멀고도 험난하네요. 엄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하더라구요. 믿고 기다려주니 지금은 든든한 아들이 되었네요.”
“‘저도 주님이 지금 저를 때려도 사랑합니다’란 자매님 주님 사랑 고백도 감동입니다.”-
바로 주님으로 인한 어떤 시련이나 고난, 박해가, 순교의 죽음이 와도 주님을 사랑하겠다는 주님 사랑의 고백입니다. 바로 순교자들의 사랑이 그러했습니다. 지금도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무수한 형제자매들 마음안에 끊임없이 타오르는 주님 사랑의 불입니다.
이런 대화의 계기가 된 숙소에서 집무실 문앞까지 엊그제 깔린 카페트(야자매트;야자수로 만들었다 하며 요즘 공원이나 등산로에 많이 깔아놓는다 함)입니다. 사진에 담으니 흡사 수도원길 하늘길이 연상되는 천국에 오르는 하늘길을 상징하는 듯 하여 사진과 함께 다음 댓글도 달았습니다.
“집무실 가는 카페트 깔린 길이 흡사 천국에 가는 하늘길, 파스카의 길, 겸손의 길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내려 감으로 올라가는 역설적 겸손의 하늘길!”
평생 내려감의 섬김과 순종의 사랑 길을, 비움의 길을 가시다가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 파스카의 길과 더불어 역시 평생 떠남의 비움의 길을 가시다가 임종후 하늘길에 오르시던 사부 성 베네딕도의 일화가 생각났습니다. 그레고리오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에 성인의 제자가 성인 임종시 본 환시입니다.
‘성인의 방에서부터 동쪽을 향해 하늘에 이르기까지 똑바로 나있는 길을 보았는데, 그 길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고 수없이 많은 등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자 그 위에 빛나는 옷을 입은 존엄한 분이 나타나시어 이 길이 누구를 위한 길인지 알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들이 모른다고 하자, “이 길은 주님께 사랑받는 베네딕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다”라고 말씀하시더라는 것이다.’(베전 37장)
참 깊은 깨우침을 주는 상징적 구원의 아름다운 일화입니다. 이 파스카의 하늘 길을 따라 이미 예수님에 이어 성모님이 올라가셨고 무수한 성인들, 그리고 성모님을 닮아 희생적 사랑을 다하시다 돌아가신 익명의 성녀들인 우리 어머니들이라 주저없이 말하고 싶습니다. 파스카의 하늘길, 바로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요, 용기백배하여 백절불굴, 칠전팔기의 순교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을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를 미워하는 것이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한 말을 기억하여라.”
예수님 당시 세상에 미움받고 박해받던 제자들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지금은 신앙 자유의 좋은 세상이라 눈에 보이는 박해나 미움은 없지만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신원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것은 외적 박해나 미움보다는 세속화로 세상에 동화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존재이유를 잃는 것입니다.
부와 권력, 탐욕으로 인한 세속화와 더불어 내적부패와 분열은 외적 박해나 미움보다 더 무서운 악마의 흉계입니다. 정말 대적하기 힘든 것은 눈에 보이는 적이 아니라 우리의 무지와 탐욕안에 숨어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입니다.
악마의 간교한 획책으로 인해 부패와 분열로 안에서 부터 무너져 내리면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요, 세상을 성화해야할 마지막 세상의 희망의 보루와 같은 교회가 속화되어 부패하고 분열된다면 대안이 없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여기에 있다 봅니다. 세상의 성화가 아니라 세상에 속화되어 세상을 닮아 세상에 동화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세상과 교회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코로나 사태요 기후재난이 아닌가 싶습니다.
참으로 순교적 삶이, 자발적 극기와 절제의 삶, 생태적 회개와 내적혁명의 삶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요, 주님 사랑의 관상적 차원을, 삶의 깊이와 순수를 회복해야 할 절박한 시기같습니다. 제1독서 바오로 일행의 성령에 따른 제2차 선교열정이 놀랍습니다. 바로 주님 사랑에 불붙었기에 지칠줄 모르는 자발적 순교적 선교활동이요, 마침내 순교로서 주님 사랑을 입증한 바오로 사도입니다.
우리 어버이들, 특히 어머니들은 익명의 파스카 삶의 증인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참으로 날마다 죽고 부활하는 파스카의 삶과 길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이미 하늘길 등정登程에 오른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파스카 잔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파스카의 신비를 실천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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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8.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 환호송을 통하여 바오로 사도는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으로 온 세상에 주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은 주님께 선택된 사람들로서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것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도 당신처럼 적대자들로부터 박해와 고통을 받을 수 있음을 암시하시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 적대자들에게 받으신 고통과 어려움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놓으시고, 세상의 고통과 죄를 대신 짊어지셨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자신들을 뽑으신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그분과의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수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은 자신의 삶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녹록하지 않은 세상의 많은 어려움 속에 살면서 그분을 따르는 힘은 ‘주님과 하나 됨’입니다. 그래서 오늘 영성체송을 통하여 전해 주시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위하여 삼위일체 하느님과 하나가 되시어 그분 안에서 믿음이 충만하고, 희망을 넘어 희망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위하여 비오니, 이들이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고,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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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8.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두려워하라!>
오늘 복음도 역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는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을 받기 때문에 사랑이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의 뜻, 즉 하느님 본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와 세상, 이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원수지간입니다. 요한의 세계관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5,19)
그러나 악마는 교묘하게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과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허물려는 시도를 벌입니다. 그래서 이원론은 나쁘다고 하며 통합을 강조합니다.
저도 처음엔 다른 사람들이 저를 미워한다고 하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사람이 저를 사랑할 수 있도록 모든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저를 미워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어떤 이들이 나를 미워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언가 허전했습니다. 이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받지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내가 참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미움받지 않는 것을 두려워했어야 합니다. 세상이 나를 사랑하면 나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막에서 거칠게 살아가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는 독침은 다른 동물들에게는 참으로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별히 자신의 머리를 짓밟는 이들에게는 더욱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전갈 한 마리가 개구리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개구리들은 모두 전갈을 피해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워낙 착한 전갈처럼 보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개구리들은 전갈이 자기 꼬리의 독침을 사용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존재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고을의 개구리들과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그 전갈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곧 다른 고을과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고을과의 사이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는데 개구리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무기인 그 전갈을 자신들의 등에 태우고 개울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갈은 수영도 못하는 자기가 개구리들과 어울리는 것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단 한 순간이라도 자기 본성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태운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자신도 죽고 개구리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마치 이런 전갈처럼 오셨습니다. 그리고 등에 업은 사람을 당신 십자가에서 흐르는 피로 죽이십니다. 그러니 세상이 자신의 지배 아래에 있는 백성을 빼앗아가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세상은 악의 욕망, 즉 세속-육신-마귀의 지배 아래에 사는 사람들이고,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본성, 즉 사랑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 본성과 반대되는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죽입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으면 두려워하십시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영화 ‘그린 존’(2010)은 2003년에 발생한 이라크 전쟁을 배경으로 합니다.
미국은 이라크가 생화학무기를 만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이라크를 무력침공합니다. 미군 해병대 팀장 ‘맷 데이먼’은 해병대원들과 화학무기가 있다는 지역을 타격합니다. 그런데 매번 화학무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에 의문을 품은 팀장은 한 집을 습격하던 중 그곳에 이라크 장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를 추격합니다. 그 이라크 장군이 미국에 잘못된 정보를 주는 대상임을 알아낸 것입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장군을 찾아내어 왜 잘못된 정보를 주느냐고 하지만 사실 그는 미국에서도 이라크에서도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그가 처음 미국에 주었던 정보는 이라크에 생화학무기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원전을 자신들 소유로 만들고 싶었던 미국에게는 이 정보는 쓸모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화학무기가 있다는 정보를 주었다고 속이고 일단 이라크를 침공한 것입니다. 그리고 특공대원들을 시켜 그를 찾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미국은 맷 데이먼이 그를 찾게 만들어 그 뒤를 쫓아 장군을 살해하려고 합니다. 맷 데이먼은 미군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려고 하지만 결국엔 자기 나라 사람에게 사살당하고 맙니다. 그 사람들도 장군이 미국에 정보를 주어 미국이 자신들을 침공하게 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맷 데이먼은 미국이 승리한 후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내각을 구성하여 이익을 챙기는 정치인들에게 맞서려고 하지만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화학무기도 없는데 그것을 빌미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다는 사실을 인터넷에 흘리고 그렇게 전 세계가 미국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고한 이라크를 침공한 사실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진실을 말하는 이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이들이 미움을 받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진실을 싫어합니다. 돈을 좋아하고 권력을 좋아하고 편안함만을 찾습니다. 그러니 돈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곧 진실하지 못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으면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 나라에 속하지 않았음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믿고 증거하면 개구리 마을의 전갈처럼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이리 떼 가운데 양을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 백성과 세상 백성은 그 본성상 통합될 수 없습니다. 하늘 나라 백성은 세상을 미워하지 않지만, 세상은 하늘 나라 백성을 미워합니다.
우리가 사는 교회 안에도 세상에 속한 이들이 속해있습니다. 그들을 구별하는 법은 쉽습니다. 성당에 다니면서도 돈과 먹고 마시는 것과 권위와 교만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 세상 사람입니다. 이 경계선을 통과하는 것이 저는 ‘십일조’라고 생각합니다. 재물에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한다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다면 경계하십시오. 나도 교회에 속한 척하며 실제로는 세상에 속해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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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8.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지금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어서 일어나 도와주십시오!
‘오늘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교회 공동체의 정의, 본질, 의미는 무엇인가?’ 묻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인듯 합니다.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답을 알고 있어야, 구성원으로서 합당한 가치관이나 지향점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가 기대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웬만한 파도 앞에서는 미동도 하지 않는 크고 안전한 배? 그 안에서 누리는 잔잔한 마음의 평화? 건강과 안전? 가화만사성? 끝도 없는 승승장구?
일정 부분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존경하는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교회에 대한 정의는 참으로 인간적이고 따뜻하며, 동시에 설득력이 있습니다.
“교회는 모자라고 나약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비틀거리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 교부의 정의도 매력적입니다.
“하느님의 위로와 세상의 박해 사이를 걸어가는 양떼들의 모임.”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 여정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우리 한 가운데 굳게 현존하심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동시에 세상과 적대자들로부터 받게 되는 멸시와 수모 역시 기정 사실입니다. 고통과 시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이지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복음 15장 18~19절)
결국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지상 여정을 나아가는 동안 겪게 될 다양한 고통과 시련 앞에서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박해와 미움 앞에서 너무 분노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한쪽에서는 역동적인 성령의 활동에 힘입어 우리 교회는 순풍에 돛단듯이 앞으로 전진하며 성장해나가지만, 다른 한편에는 언제나 교회를 분열시키고 파괴시키려는 악의 세력이 존재합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언제나 두 세력의 투쟁이 계속 되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교회가 적대자들과 세속의 권력자들로부터 받은 박해와 고통은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마다 하느님의 더 큰 위로와 격려가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과 구원이 있었습니다.
교회 공동체라는 배 위에 승선한 우리가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교회라는 배는 세상이라는 배와는 근본적으로 결이 다른 집단, 철저하게 차별화된 집단입니다. 교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세속적 가치의 충돌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로인해 발생하는 고통과 박해 역시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참으로 아이러니 한 공동체입니다. 거룩함과 공동선을 지향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흔들리며 틈만 나면 표류합니다. 근본적으로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인 우리 인간들의 집합체여서 그렇습니다.
쉼없이 흔들리고 표류함에도 불구하고 선장이신 주님께서 교회 공동체 안에 변함없이 현존하고 계심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때로 아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잠시 휴식을 취하시거나 잠드셨을 때일 것입니다.
그러니 견디기 힘들때, 감당하기 벅찬 파도가 밀려올 때면 목청껏 선장이신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겠습니다. 그분을 흔들어 깨워야겠습니다. 사도들처럼 말입니다. “주님, 지금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어서 일어나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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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8.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되,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나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길을 알려 주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9)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은 영의 세계와 구분되는 영역일 겁니다.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성령의 인도에 마음을 여는 이는 세상의 지배 아래 매여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세상과 별개로 살아갈 수는 없지요. 이천 년 전 제자들도 그랬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인보다 우월한 존재가 되려고 돈과 권력을 탐하며 불법과 불의도 마다 않고 달려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에 철저히 역행합니다. 가진 바를 나누고, 이웃을 섬기며, 약하고 가난한 이들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고, 스스로 가난을 택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니까요.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이 여기에 계시니까요.
그러니 세상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나 신자들을 불편해 합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발 맞추지 않으면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의심과 무시의 눈초리로 보기도 하고 심지어 박해까지 일삼지요.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 15,21)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 대해 세상이 저지르는 미움과 증오의 이유를 "무지"라고 하십니다. 아버지 하느님도 모르고, 구원을 위해 아들을 보내신 사랑도 모르니 그런 것이라고 여기시지요. 만일 세상이 아버지와 그분의 사랑을 알았다면,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로서 응당 아버지를 섬기고 아드님을 사랑했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끝까지 그들이 지닌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거룩함을 믿어주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바오로의 선교 여행이 어떤 원동력으로 이루어지는지가 드러납니다.
"그 고장에 사는 유다인들을 생각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베풀었다."(사도 16,3)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이 정한 규정을 신자들에게 전해 주며 지키게 하였다."(사도 16,4)
사도행전 저자는 이방 지역에서 바오로가 행한 이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을 가감 없이 전합니다. 전통이라는 예민한 쟁점에 대해, 그 고장의 유다인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누구에게는 할례를 베풀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기로 한 예루살렘 회의의 규정을 알려 주지요.
이는 바오로의 사명이 단 하나의 목적, 구원을 향하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일 겁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이러한 모순처럼 보이는 선교 방식에 대해 그의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합니다. "유다인들을 얻으려고 유다인들에게는 유다인처럼 되었습니다. ...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19-23 참조)
사도 바오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틀을 넘어섭니다. 그가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들이 무지를 깨고 비로소 알게 된다면 그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전통과 관습, 기득권과 평판이라는 세상의 틀을 과감히 뛰어넘는 그의 원동력은 복음이지요. 그렇다면 그는 저마다 상황이 다른 선교 현장에서 어떻게 식별을 하고 방향을 잡았을까요?
"성령께서 막으셨으므로"(사도 16,6)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사도 16,7)
사도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은 철저히 성령께 의지해 나아갑니다. 그들은 모든 일을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의탁하고 순중하여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식별하며 움직였습니다. 막으시면 멈추고 열어 주시면 담대히 발걸음을 옮겼지요.
세상의 방식으로 인간적 기대와 욕심이 앞섰다면 계획이 틀어진 것을 불편해하고 고집을 부려 강행했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순히 따릅니다. 그들은 복음 선포의 주도권을 오로지 성령께 일임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세상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도록 잘 가꾸어 나가며 사랑하고 돌보아야 하는 터전임이 분명하지만, 우리를 끌어당기는 세상 논리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세상은 크고 강하고 높고 많은 것을 추구하느라 작고 약하고 낮고 미소한 것을 착취하고 무시하며 소외시키기 일쑤니까요. 거기 하느님이 계심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무지"한 세상이 하릴없이 지배당하고 있는 물질 논리와 힘의 논리는 선하고 좋으신 사랑의 하느님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더라도 세상과 야합하지 않고 성령께 이끌려 살아갈 때 유지됩니다. 물론 거센 세속의 물살을 역행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닐 거고요, 주위에서도 그런 우리가 불편해서 그냥 대충 살라고 끌어내리기도 할겁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해 나아가는 영의 사람들인 것을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의 사람으로서 사랑과 겸손, 나눔을 통해 얻는 평화와 행복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선물입니다.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순종하며, 복되고 복된 기쁨을 누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소유한 영의 사람들인 벗님을 이렇게 만나고 함께 나아갈 수 있어 행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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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8.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어버이 날-.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요한15,18)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미워한 사람들, 예수님을 박해한 사람들이 당신의 제자들도, 그리고 지금의 우리도 미워하고 박해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그분의 뒤를 '삶으로' 따라가는 사람들, 곧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그 길'을 그대로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본질'이요,
'교회의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작부터 마침까지, 예수님의 오심과 예수님께서 흘리신 땀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미움과 박해를 이겨내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스테파노 죽음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움과 박해가 오히려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 밖으로 전해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사도16,1-10)가 전하고 있는 것처럼,
그 미움과 박해가 이제는 복음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더 나아가 온 세상으로 전해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요한15,18)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15,20ㄴ)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러니 나로 인해 너희가 겪는 미움과 박해를 견디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고 박해했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의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그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오늘은 '어버이 날'입니다.
모든 부모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영적 꽃다발인 미사와 기도 올립니다.
저도 천상에 계신 부모님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엄마이신 성모님 앞에 카네이션 꽃을 바칩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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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8.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복음.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16세기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사화가 일어났습니다. 대표적인 사화가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입니다. 학교 다닐 때 역사 시간에 배운 내용이라 대충은 알고 계실 겁니다. 오늘날에도 정치권을 보면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들의 노선에 따라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기 때문에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것보다 당리당략을 최우선으로 하고 그다음으로 국민을 생각하곤 합니다. 조선시대에 일어난 사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에라도 권력과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는 분명한 노선을 견지해야만 자신의 권력기반을 제대로 구축할 수가 있습니다. 양쪽 진영을 놓고서 중간에서 어부지리 같은 반사이익만 얻으려고 하면 양 진영 모두에게도 배척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원리는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에도 나옵니다. 차면 차고 뜨거우면 뜨거워야 합니다. 미지근한 것은 좋지 못합니다. 전쟁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적군과 아군이 분명해야 전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이 그렇지 못할 때보다 더 높습니다. 중간 노선을 취하면 적군과 아군 모두의 적이 될 수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이런 결단이 필요할 것입니다. 두부 짜르듯이 현실적으로는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무게 중심을 두고 살지 아니면 세상보다는 영혼의 세계를 더 무게 중심을 둘지 말입니다. 세상에서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면 좋겠지만 신앙 안에서는 그게 말처럼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핀셋으로 딱 찝어서 뽑힌 그리스도인입니다. 만왕의 왕으로부터 성은을 입은 사람입니다. 옛날에 궁녀들은 임금으로부터 성은을 입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는 사극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궁녀들이 궁에 들어갈 때는 그걸 누구나 꿈을 꿉니다. 성은을 입지 못할지라도 그냥 궁녀의 삶으로서만 평생을 만족하고 살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많은 시기와 보이지 않는 음모가 항상 있어 왔던 것입니다. 한 번 성은을 입었다고 해서 왕비의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가 있는 게 아닙니다. 숙종 때 장희빈처럼 비참한 삶으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역사에서 지켜봤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선택을 받은 사람이지만 우리의 이 선택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영원히 자리를 유지할 수가 있는 게 아닐 겁니다. 복음에서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합니다. 이때 세상은 단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단순한 세상도 포함하겠지만, 우리의 신앙 여정에 수많은 고난과 핍박, 박해 같은 게 해당될 것입니다. 이건 그리스도인이 된 이상은 어쩔 수 없이 당연히 감수해야만 하는 십자가일 것입니다. 달리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하늘 나라의 정예의 용사가 될 동량재가 되어라는 하느님의 준엄한 명령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걸 잘 수행할 때 하늘 나라에서 하늘 나라의 유업을 잘 물려받아서 에수님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라고 세상에서 저희를 미리 뽑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길을 가는 데에 어떤 난관이 있어도 조금은 더 잘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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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8. 부활 제5주간 토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제1독서 (사도16,1-10)
"성령께서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셨으므로, 그들은 프리기아와 갈라티아 지방을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미시아에 이르러 비티니아로 가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바오로가 그 환시를 보고 난 뒤,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떠날 방도를 찾았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6~7.10)
사도행전 16장 6절부터 10절까지는 바오로가 트로아스에서 본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시와 바오로의 선교 여행 진로 변경의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바오로는 성령의 강력한 권고와 같은 주도적 개입으로 계속해서 아시아로 향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그 진로를 유럽으로 향했다. 따라서 본 단락은 유럽 복음화의 출발점이 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바오로의 선교 여행이 사도행전 16장 5절에서 처럼, '그리하여 그 곳 교회들은 믿음이 굳건해지고 신자들의 수도 늘어갔다'는 놀라운 성과 뒤에는 바오로의 복음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방법론적인 면에서의 지혜가 동반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공적인 활동에 뒤이은 아시아에서의 선교 활동이 성령에 의해 금지됨으로써 그의 선교 여행은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본문에서는 성령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바오로에게 뜻을 전했는지는 언급되지 않고 그 결과만을 저자가 언급할 뿐이다.
또한 그 일로 인해 바오로가 어떤 심리적인 반응을 일으켰는지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막으셨으므로'로 번역된 '콜뤼텐테스'(kolythentes)의 원형 '콜뤼오'(kolyo)동사가 '반대하다'(사도11,17; 27,43), '금지하다'(1티모4,3),'거절하다' (루카6,29; 사도10,47)라는 매우 강력한 의미로 쓰인 것을 볼 때, 당시 성령께서는 바오로가 깨달을 수 있는 분명한 방법으로 아시아의 선교 활동을 막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로서는 성령께서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선교 활동의 진로를 왜 가로막았는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었지만, 바오로는 성령의 뜻에 순종하였다. 이처럼 완전하게 성령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바오로에게서 참다운 하느님의 봉사자로서의 자세를 보게 된다.
더불어 이것은 바오로의 선교 여행의 놀라운 성과는 모두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임을 우리들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바오로가 유럽으로 발걸음을 옮겨 유럽을 복음화시키게 된 것이 그 자신이나 예루살렘 모교회의 선교 전략과 정책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주관적인 역사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임을 분명히 밝혀준다.
이것은 오늘날 선교사가 선교 지역을 택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교회가 어떤 결정을 함에 있어서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할 지에 대하여 좋은 본본기가 된다.
바오로는 애초에 제2차 선교 여행 지역을 제1차때 선교했던 곳으로 계획했었는데 (사도15,36), 이러한 단락은 인간의 계획이 성령의 강력한 개입으로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잠언16,9)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7)
본절에 나오는 지명 중 '미시아'는 소아시아의 서북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그리고 '비티니아'는 '미시아'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다. 바오로 일행이 미시아에서 비티니아를 가고자 애썼다는 것은 지금까지 계속 서쪽으로 전진했지만, 미시아에 이르러서는 방향을 바꾸어 다시 동쪽으로 가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아시아의 서단에까지 이르자 다시 방향을 돌려 아시아의 다른 지역을 선교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의 인간적 생각은 예수님의 영에 의해 막혔다. 우리는 사도행전 16장 6절에서 '성령'께서 바오로의 선교를 이끄시는 주체로 묘사되어 있었는데, 본절인 사도행전 16장 7절에서는 '예수님의 영'으로 바뀌고, 사도행전 16장 10절에서는 '하느님'으로 또 다시 바뀐다는 것을 본다.
이것은 각각의 절에 서로 모순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바오로의 선교 활동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이심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카이 우크 에이아센 아우투스'(kai uk eiasen autus; but not suffered them) '허락하지 않으셨다'라고 번역된 '우크(uk) 에이아센(eiasen)'에서 '에이아센' 동사의 원형은 '에아오'(eao)이다.
그런데 이 동사는 하느님께서 그의 백성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시련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음을 나타낼 때나(1코린10,13),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침묵을 명하실 때(루카4,41) 등에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용례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금지에는 하느님의 섭리가 내포되어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본절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한계를 가진 인간의 생각으로 미쳐 헤아릴 수 없지만, 이러한 하느님의 금지 명령에는 분명히 오묘하신 하느님의 섭리가 있을 것임을 기대하게 만든다.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복음 (요한15,18-21)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18~19)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1~11절에서 믿는 이들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다룬 후, 범위를 확대해서 요한복음 15장 12~17절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한 믿는 이들 상호간의 관계를 다루고, 요한 복음 15장 18~27절에서 믿는 이들에 대한 세상의 핍박 및 이에 대한 믿는 이들의 자세를 교훈하신다.
특히 요한복음 15장 18~27절은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해야 할 당시 이 말씀을 듣던 제자들 및 믿는 이들이 이 세상에 대해 어떠한 시각을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다.
박해와 핍박에 대한 예고는 다음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게 됨으로써 가시화되고, 사도행전을 보면 제자들과 믿는 이들이 무수한 세상의 박해를 받으며, 사도 요한 복음사가가 이 복음을 쓴 1세기 후반에 있어서도 믿는 이들은 유대교 및 이방 종교의 박해만이 아니라 황제 숭배 등과 관련된 로마 공권력의 조직적인 박해를 받아 왔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5장 18~27절의 내용은 이 교훈을 직접 들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사도 요한 당시의 믿는 이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와 힘을 주었을 것이다.
여기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은 조건문인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으로 번역된 '코스모스'(kosmos; world)의 성격을 규명하는 열쇠가 된다.
당시 로마 세계를 지배하던 희랍 사상에 있어서 '코스모스'(kosmos)는 조화로운 곳이며, 신의 개념으로까지 숭배되기도 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와 정반대인데, 코스모스'(kosmos)는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죄로 말미암아 파멸되고 타락한 곳이다.
특히 이 구절에서 세상은 '코스모스'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사람, 즉 하느님과 동떨어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집단이며, 사탄의 지배아래 죄와 죽음의 올가미에 사로잡혀 영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눈이 먼 자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여기서 '미워하거든'으로 번역된 '에이~ 미세이'(ei~misei; if~hates)는 조건을 나타내는 불변사 '에이'(ei; if)가 현재 직설법 동사와 함께 쓰여 명백한 사실을 조건으로 나타내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너희를 박해하게 된다는 사실을 전제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미세이'(misei; hates)는 '미세오'(miseo)의 현재 3인칭 단수이며, '미워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미워서 박해하다'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까지 지니고 있다. '미세오'(miseo)는 고전 희랍어에서 '혐오하다', '배척하다'는 뜻으로 쓰였는데, 어떤 행동에 대한 반감만이 아니라 타인들, 심지어는 신(伸)에 대한 깊은 적개심을 드러낸다.
70인역(LXX)에서는 거의 히브리어 '사네'(sane)의 역어로 등장하는데, 원수로 여긴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런 것들로 볼 때, 세상의 믿는 이들에 대한 미움은 그 지배 세력이 하느님의 원수인 사탄이기 때문에, 믿는 이들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더불어 반드시 복수해야 할 원수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요한복음 15장 18절의 후반절처럼, 단순히 믿는 이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19)
이 구절은 세상이 믿는 이들에 대한 미움을 가지는 이유를 나타낸다. 믿는 이들에 대한 세상의 미움과 적개심은 영적 불일치에 근거한다. 믿는 이들이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세상은 믿는 이들을 미워하고 원수로 여긴다.
여기서 전치사 '에크'(ek; of)는 '에이미'(eimi)동사를 기본형으로 하고 있는 '에스테'(este; you are)와 함께 쓰였는데, 이때에는 '~에게 속한다'는 '소속'의 의미를 나타낸다. '에스테'(este)는 '에이미'(eimi)의 복수 2인칭 현재 시제이다.
여기서 계속성을 나타내는 현재형이 쓰인 것은 예수님과 일치한 제자들이 비록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항상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우리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한, 우리는 결코 이 세상의 지배를 받는 일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요한복음 15장 19절에서 '세상에(서)'에 해당하는 '에크 투 코스무'(ek tou kosmou; of the world)가 세 번이나 사용되고 있다. 즉 요한복음 15장 19절에서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과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와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에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믿는 이들과 세상의 관계가 너무나 미묘하기 때문에 거듭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앞의 두번은 '소속'의 의미로 사용되어 영어 번역에서 'of'로 번역했고, 뒤의 한번은 '분리'의 의미로 사용되어 'out of'로 번역했다.
이것은 '에크'(ek)라는 전치사가 가지는 포괄적 의미 때문에 대조적인 용례로 사용된 것이다. 하지만 앞선 두번의 '에크'(ek)도 내면적으로는 '분리'를 암시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내면적으로는 '분리'의 의미가 강한 '에크'(ek)라는 전치사의 중복 사용을 통해, 믿는 이들은 모름지기 이 세상에서 내면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역설하셨다.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요한15,18-21)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 세상은 인간의 道가 진리라 하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이 진리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계명으로 지킨 의로움으로는 하늘의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지금이 ‘참’이라 하고 예수님은 ‘이세상이 헛되다’하십니다. 왜요? 세상은 생명이 아닌 죽음으로 끝이고 하늘은 영원한 생명이기에~
세상의 물은 다시 목마르게 하지만, 예수님의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곧 사람의 말, 도덕과 윤리의 그 가르침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시니 세상이 미워합니다.
(요한14,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인간들의 길 그 사람의 의로움을 부인시키는 말씀입니다.
19ㄱ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 예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 도덕과 윤리로 들어 세상과 짝 한다면 세상이 좋아합니다.
19ㄴ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앞16절에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좋은 열매 구원을 말씀하심 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세상이 미워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구원의 길이 세상의 길과 다르다는 뜻입니다.
(루가9,23-25)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하셧듯이 세상의 자기 의로움을 버리고(부인하고) 십자가의 의로움을 진리로 말한다면 세상이 미워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 하늘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자기 생각, 뜻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마르4.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 돌풍- 세상의 물이 배(교회)에 들어와 섞여 버린 모습입니다. 오늘 그 섞여버린 세상 물을 버려야 합니다.
20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21 그러나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세상이 칭찬하는 신앙이라면 사람의 뜻을 만족 시키는 그 자기 말로, 또 그 행위의 자기 의로움으로 신앙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것, 맞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의로움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에 그것을 진리라 말한다면 다른 이에게 구원을 줄 수 없어 악인 인 것이고 또한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하기에 죄입니다.
곧 십자가의 길 만이 참 진리라고 말한다면 세상은 그 사람을 미워하고 말하지 않으면 당연히 칭찬한다는 것입니다.
(루가16,1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 올바른 신앙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나를 버리는 그 부인이 되었는지~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간 것은 아닌지~ 오늘 다시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1코린10,12)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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