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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과학산책 이슬람 문명의 태동과 기후문명의 성쇠에 영향을 준 기후 이야기
이슬람교 제2의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 메디나의 알 마스지드 안 나바위(예언자의 모스크)<출처: (cc) Noumenon at Wikimedia.org>원본보기 목차
이슬람교의 태동마호메트는 종교적 예언자이자 이슬람교의 창시자다. 그의 가족은 소금과 금, 상아, 노예 등을 낙타에 실어 나르는 일을 했다. 기록에 의하면 젊어서부터 정직하고 지혜롭다는 명성을 들었던 그는 메카라는 도시에서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자신에게 참된 말을 계시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마호메트는 계시를 따라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그는 이슬람교도가 지켜야 하는 생활방식을 규정하는 행동 규범을 만들었다.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은 단순하지만 강력한 신조다. 그것은 알라만이 유일하게 참된 신이고 마호메트가 신의 사자임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을 하라, 하루에 다섯 번 알라신에게 기도하라, 가난한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풀어라, 금식 기간을 지켜라, 평생에 한 번은 메카 순례를 하라는 것이다.
서기 613년경부터 마호메트는 가족과 친구를 시작으로 메카 시민들에게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유일신에 대한 간명한 믿음은 가난한 사람들과 외국인들에게 큰 호소력이 있었다. 그는 식량을 나누지 않는 이기심, 음주, 간음, 유아 살해, 우상 숭배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선포했다. 그의 혁신적인 외침은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 목숨에 위협을 느낀 그는 622년 메디나로 도망쳤다. 마호메트는 기후변화로 어려워진 아랍 민족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문명이든 사람들을 결집시키기에 가장 좋은 것이 종교다. 마호메트는 이슬람교를 창시했고 그가 선포한 메시지는 식량이 없어 굶어죽어 가던 대다수 아랍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마호메트는 이슬람 신도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만들었다. 이슬람 병력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해 식량을 조달한다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이슬람 경전 코란에 나오는 말처럼 “신은 많은 전리품을 너희에게 약속했다. 자, 그것을 얻을 수 있다”는 말과 “전쟁에서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는 말로 이슬람 병사들이 전쟁에서 목숨을 걸도록 만들었다.
그는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병사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다. 이슬람 병사들은 알라의 편에 서면 천국에 가서 예언자가 약속한 가장 관능적인 쾌락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근 부족이 모두 이슬람에 가담해 그 깃발 밑에서 싸움을 시작했다. 이제 물과 식량이 풍부한 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이슬람교를 확산시키고 식량도 구할 수 있었다.
627년의 군사적 승리는 마호메트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신은 자기들 편이라는 강한 확신을 주었다. 새로운 종교의 증거를 원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이슬람교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드디어 630년에 추종자 1만 명이 메디나에서 메카로 향했고, 기존 정치세력이던 메카는 항복했다. 마호메트는 카바의 우상숭배를 없애고 카바를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성스러운 사원으로 바꾸었다.
원래 이슬람교가 나타나기 전에 아라비아의 종교는 다신교였다. 카바는 아라비아 사막 한복판에 있는 메카에서 360명의 신을 모신 성소였다. 메카를 순례하는 하지 때면 유목민들이 카바에 모였다. 사람들은 카바가 하늘과 땅이 교차하는 곳이라고 믿었다. 카바의 동쪽 구석에 있는 성스러운 검은 돌은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이다. 하늘과 땅이 연결되어 있음을 상징했다. 검은 돌은 지금도 카바에 있다.
이슬람교는 마호메트가 죽은 후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오늘날에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 13억 명이 넘는다. 이슬람교는 기독교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널리 퍼진 종교가 되었다(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약 21억 명). 이슬람 제국을 만든 기후“기후가 아랍 민족을 세계사의 전면에 나서게 만들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중간, 250만 km2 이상에 걸친 덥고 건조한 쐐기 모양의 아라비아 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베두인족이었다. 그들은 가진 것도 별로 없는 유목민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이 사는 곳은 3분의 1이 모래언덕으로 뒤덮여 있다. 1년 내내 물이 끊이지 않고 흐르는 강이 하나도 없다. 돌, 나뭇조각 등을 숭배하던 그들은 사막지역의 기후 특성 때문에 모든 것이 부족했다. 항상 부족한 목초와 물을 놓고 부족 간의 전쟁이 벌어지곤 했다. 아라비아 반도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수요를 채울 만한 식량조차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성적인 식량부족 때문에 아랍인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천일야화(The Thousand and One Nights)’에 등장하는 주인공 중에 신드바드가 있다. 그는 7번의 항해에서 겪은 모험담을 재미있게 풀어나가는데 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이야기였다. 신드바드의 고생담은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동인도 제도나 중국과 무역하던 아랍 상인들의 경험에 의거한 것이다. 왜 이들은 일찍부터 엄청난 고생을 감수하며 먼 중국이나 동인도와 교역을 했을까? 바로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아랍인들은 배를 타고 인도양을 넘어 중국까지 갔던 것이다. 그러나 7세기에 접어들면서 심각한 기후변화가 아라비아를 강타했다. 아라비아는 더 건조해졌고 식량도 더 부족해졌다. 아랍인들은 배고파 우는 아이들의 입을 막기 위해 서슴없이 유아들을 죽였다. 유목민의 가장 큰 덕목인 식량을 나누는 일도 멈추었다. 자기 가족과 부족만을 챙기는 이기심이 팽배해지고 우상 숭배도 심각해졌다. 기후가 아랍 민족의 공동체를 파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의 기후를 살펴보자. 아라비아의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으므로 유럽의 기후를 통해 유추해 보자. 서기 520년경 계속된 소빙하기가 거대한 폭풍을 자주 만들어 냈다. 폭풍으로 제방이 유실되어 웨일스 서해안에 위치한 카디건 만(Cardigan Bay)의 캔트레프 전체 영지가 침수되었다. 또 노르웨이 남서부 예렌(Jaeren) 해안 지역의 넓은 경지와 취락이 방치되었다. 이것은 이 시기에 기후가 더 서늘하고 변화가 심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763~764년 겨울의 혹심한 추위에 관한 내용도 이 시기의 기후 특징이다. 겨울에는 엄청난 눈이 내렸고, 유럽 남부에서 올리브나무와 무화과나무 등이 크게 손상되었다는 기록이 유럽의 여러 지역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다르다넬스(Dardanelles) 해협에서도 바다가 얼었다. 600~700년경 사이에 알프스 산맥에 내려온 빙하의 위치는 1550~1850년경의 극심한 빙하 하강과 비슷했다. 이 빙하들은 이탈리아에서 알프스를 넘는 고대 로마의 교통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소빙하기는 남부 아라비아를 더욱 건조하게 만들었다. 살기 힘들어진 아랍인들은 민족 대이동을 시작한다. 북부지역인 현재의 팔레스타인과 초승달 지역으로 이동한 것이다. 바로 이 시기가 마호메트의 이슬람교 창시 및 정복전쟁과 연결된다. 기후변화로 인한 정복전쟁기후변화로 인해 중동의 초승달 지역으로 이주한 아랍인들의 세력은 급속도로 팽창했다. 마호메트가 죽고 100년도 지나지 않아 이슬람교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시리아는 물론 중동의 나머지 지역까지 전파되었다. 이들은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전쟁을 통해 식량을 얻고 이슬람교를 전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동지역을 지배하던 동로마 제국을 격파하고 651년에는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렸다. 북쪽으로는 흑해, 남쪽으로는 오늘날의 파키스탄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 이슬람이 중동과 페르시아 지역을 석권하게 된 전투가 야르무크 강 전투와 카디시야 전투다. 마호메트가 죽은 후 그의 후계자들은 이슬람에 대항하는 세력들을 제압하고, 마호메트의 가르침들을 모아 코란(Qur'an)을 만들었다. 아라비아를 통일한 이슬람군은 이라크 원정대와 시리아 원정대를 조직했다. 또 중동지역을 지배하던 비잔틴 제국의 근거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635년 다마스쿠스를 포위해 승리를 이끌어 낸 이슬람군은 본격적으로 동로마(비잔틴) 제국군과의 전투를 준비한다. 이슬람 세력은 도처에 있는 비잔틴의 수비대를 공격하고 다마스쿠스를 비롯한 도시들을 점령해 나갔다. 비잔틴 제국은 5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군대를 일으켰는데 이에 맞선 이슬람의 병력 수는 그 절반도 채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슬람의 장군 칼리드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을 발휘해 이슬람군을 하나로 통합시켰다.
635년 8월 19일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칼리드는 전 이슬람군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그런데 밤이 되면서 함신(Khamsin)이라 불리는 모래폭풍이 불어왔다. 남쪽으로부터 불어온 이 모래폭풍은 지척조차 분간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슬람군이 모래폭풍의 뒤를 따라 공격해 들어가자 로마가 자랑하는 기병대가 앞을 볼 수 없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보병도 따라서 후퇴하면서 로마군의 방어선이 무너져 버렸다.
낙타를 탄 이슬람 병사들은 뒤쫓아 가며 무수히 많은 로마군들을 베어넘겼다. 많은 로마군이 계곡 안에서 길을 잃었다. 지형을 훤히 꿰뚫고 있던 이슬람 병사들에게 그들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5만 명에 이르는 로마군은 이 전투에서 전멸했고, 중동지역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지배도 막을 내렸다. 야르무크 강 전투는 이슬람이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거둔 최초의 큰 승리였다. 칼리드 장군은 이 승리를 바탕으로 638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640년에는 가이사랴를 점령했다. 이집트, 스페인, 페르시아에 이르는 이슬람 대제국의 기반이 된 전투가 이 야르무크 강 전투였다. 승리를 거둔 칼리드 장군은 아직도 아랍권에서 '신의 검(Saif Allāh)'이라 불릴 정도로 존경받고 있다.
비잔틴을 무력화시킨 이슬람은 다음 해에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페르시아를 침공했다. 당시 페르시아는 비잔틴과의 싸움으로 지쳐 있었다. 전쟁에서의 패배로 왕이 살해되고, 정복한 땅과 전리품들을 빼앗겼다. 페르시아는 나이 어린 야즈데게르드 3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루스탐 장군이 섭정을 통해 이슬람에 대처했다.
공방전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이 전투에서도 이슬람군은 모래폭풍 함신의 도움을 받는다. 이슬람군은 전투에서 대승한 후 페르시아로 공격해 들어갔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힌두쿠시 산맥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죽었다. 이로써 지금의 이란과 터키 지역이 이슬람 세력으로 편입되었다. 이슬람이 카디시야에서 거둔 승리는 ‘다르 알 이슬람(Dar al Islam)', 곧 이슬람 세계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슬람 세계는 향후 천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 잡는다.
711년에 이슬람군은 북아프리카 정복전쟁을 마쳤다. 북아프리카 지역을 석권한 이슬람은 지중해를 건너 스페인을 침공한다. 그리고 5년 만에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손에 넣었다. 지금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이슬람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스페인이 이슬람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것은 거의 7세기가 흐른 뒤였다.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이슬람은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이들은 732년에 프랑스의 심장부에 있는 푸아티에 근처까지 쳐들어갔다. 당시 프랑크 왕국의 왕은 샤를 마르텔이었다. 그는 투르 전투에서 예상을 깨고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인해 이슬람은 유럽 정복을 포기한다. <로마 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은 “마르텔이 이 전투에서 이기지 못했다면 유럽은 이슬람교를 믿는 대륙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소빙하기의 기후변화가 이슬람교를 만들면서, 아라비아 반도에 살던 아랍인들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켰던 것이다. 발행일발행일 : 2017. 07. 11. 출처: 지구과학산책글 반기성 케이웨더 기후산업연구소장
[네이버 지식백과] 이슬람 문명의 태동과 기후 - 문명의 성쇠에 영향을 준 기후 이야기 (지구과학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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