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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는 사도 도마에 의해 복음화되었는가?1) - 고대 한국에 있어서 그리스도교 전래 가능성 연구
1. 서 론
근래에 들어와서 복음이 고대 가야에 전래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이런 주장은 근래 국사학계에서 가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나는 이 자리에서 가야 역사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고 다만 본 주제에 관련해서 최근의 연구 를 토대로 내 입장을 밝히고자 한다. 국사학계에서 가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된 계기는 아동 문학가 이종기의 글 때문이었다. 그는 三國遺事 紀異篇 駕洛國記에 언급된 首露王의 비 許黃玉의 출신지 아유타국(阿踰陀國)을 답사하고, 아유타국은 서기 20년까지 존재했던 인도의 아요디야국으로 그 위치가 갠지스 강 유역의 내륙지방이었다고 단정하였다. 이종기는 그 근거로 아요디야에서 많이 볼 수 있고, 또한 주(州)의 문장으로 삼은 쌍어문(雙魚文)은 김해 首露王陵 정문의 쌍어문과 동일하다고 것을 내세웠다.2) 이종기의 글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엇갈렸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글에 대한 검증작업 없이 가야의 건국 설화를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임으로써 허왕후의 출신지에 대한 치열한 논란이 있었다. 그러면서 소위 ‘역사 만들기’가 시작되었고, 매스컴까지 가세하여 이 문제에 대해 세인들의 주목을 집중시켰다.3) 그러나 이런 역사 만들기에 관여한 사람들은, 가야 건국 설화가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전승들과의 복합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편집된 것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4) 그런데 문제는 이런 역사 만들기’가 교회사학계에서도 그 동안에 이루어졌고 여기에 대해 학계에서 별 반응이 없었다는 것이다.
1987년에 당시 관악고등학교 역사 교사 유우식은 영주시 평은면 왕유리에서 특이한 형태의 석상을 발견하였는데, 그는 이 석상이 사도 도마의 상이라고 주장하였다.5) 내가 2005년 10월에 현장 답사한 바에 의하면 석상은 크기 7m 폭 11m 정도의 자연석에 음각되어 있다. 인물의 머리는 없으며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있으며 맨발의 형상이었다. 관찰자가 볼 때 인물상 우측에 4개의 특이한 각자(刻字)가 있고, 또한 인물상 좌측에도 한자 刻字가 있었다. 유우식은 우측의 刻字를 히브리어 로 읽고, 이것은 “도마의 손과 눈”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좌측의 刻字를 한자 耶蘇花王 引導者 刀馬 名全行으로 읽었다. 그는 이밖에 인물상 발가락 밑에서 장미와 모란 문양을 찾아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발견에 근거해서 400년경 이 지역을 점령한 고구려의 好太王 즉 廣開土大王이 全行으로 하여금 이 지역에서 복음을 전한 사도 도마를 기리기 위해서 형상을 새기게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유우식의 발굴 경위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신앙계」의 보고서에 의하면 그는 고대 한국의 전래 가능성을 입증할 물증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으며 하나님이 응답을 주었으므로 문제의 석상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즉 유우식은 이 석상이 그리스도교 유물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조사에 임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에게는 종교적 선입견은 금물이다. 예를 들자면, 15세기에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유럽인들은 그곳의 원주민들이 사용하고 있는 십자 문양을 보고서 자신들이 도달하기도 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곳에 전파된 것인가 하고 놀란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 사람들은 십자 형상이 그리스도 탄생 이전부터 이미 세계 도처에서 사용되었던 부호임을 알게 되었다.6) 그 조성 시기나 조성 경위가 불분명한 석상 하나를 방증 자료 하나 없이 그리스도교 유물로 단정하고 고대 한국의 그리스도교 전래 가능성을 운운하는 것은 학문적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다른 한편 고령의 김도윤 장로와 대구의 조국현 목사는 이 석상과 가야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물을 근거로 해서 가야가 사도 도마를 통해서 복음화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김도윤 장로는 왕유리 석상 외에도 옛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동로마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근거로 제시하였다.7) 다른 한편 조국현은 가야에는 불교 유물이 발견되
다른 한편 조국현은 가야에는 불교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점에 주목하였다. 여기서 조국현이 주장한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왕유리 석상은 사도 도마를 기념하는 석상이다. 2. 수로왕은 세례를 받고 왕위에 등극하였다. 3. 허왕후는 인도 아요디야에서 3개월의 항해 끝에 가야에 도착했다. 4. 허왕후의 부모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그녀를 수로왕에게 시집보냈다. 5. 가야 시대 유물 중 고배와 뿔잔은 성찬기다. 6. 쌍어문은 오병이어에서 유래했다. 그러므로 쌍어문은 그리스도교 상징이다. 7. 三國遺事가 기록한 바, 수로왕의 출현을 노래한 龜旨歌는 찬송가다. 8. 경산군 자인면 일언동 인흥사에서 발견된 석상은 목자상이다.8)
나는 이런 주장들이 이종기의 글 이후에 나온 것을 고려할 때, 이종기의 이론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허왕후가 아유타국으로부터 3개월의 항해 끝에 가야에 도착했다는 모티브와 사도 도마가 인도에서 가야에 도착했다는 모티브는 매우 흡사하며, 또한 오병이어 모티브는 쌍어문의 확대 해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밖에 경주에서 발견된 돌 십자가와 소위 성모자상을 그리스도교 유물이라고 보고 신라에 그리스도교 전래 가능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 문제를 한번 학문적으로 검증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다음 순서로 고찰해 보기로 한다: 1) 사도 도마의 인도 선교는 역사적 사실인가? 2) 사도 도마는 한국에 왔는가? 3) 가야는 과연 그리스도교 국가인가?
1) 이 논문은 2006년 한신대학교 학술 연구비에 의해 연구되었음. 2) 이종기, 駕洛國 探査, 87-89. 3) 조선일보 1991년 4월 23일, 4월 30일, 5월 14일자 기사; 김병모, 김수로왕비 허황옥, 조선일보사 1994 참조. 4) 김태식, 가야연맹사, 35; 이광수, “가락국 허왕후 도래 설화의 재검토”, 한국고대사연구 31(2003), 180-182 참조. 5) “1900년 전, 한반도에 사도 도마가”, 신앙계 , 1988, 9월호, 49-53 참조. 6) Goblet d'Alviella, "Cross", Encyclopaedia of Religion and Ethics , vol. 4 (1951), 324 참조. 7) 김도윤, “동서 문화 교류에서 본 기독교와 가야, 일본”, 크리스챤 신문, 2003년 2월 3일자; 2월10일자; 2월 17일자; 5월 12일자 기사 참조. 8) 이장식, 고대 아시아 기독교사 , 부록, 373-394 참조.
2. 사도 도마의 인도 선교의 역사성
도마 행전에 의하면 사도 도마는 인도에서 선교를 하다가 순교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마 행전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사도 도마가 실제로 인도에 와서 복음을 전했는가 하는가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우선 도마 행전이 정경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도마의 인도 선교의 역사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토마스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도마가 토마스 교회의 창설자라는 것을 확고히 믿고 있다. 도마 행전이 서술한 사도 도마의 인도 선교를 허구로 평가하였던 학자들이 내세운 중요 이유 중 하나는, 1세기에 로마 제국과 인도 사이의 여행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구 결과 이집트와 인도 사이의 항해가 빈번히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소아시아 출신의 지리학자 스트라보(Strabo)는 서기 20년경에 쓴 한 글에서 이집트 방문 시 일년에 120척의 선박이 이집트로부터 인도로 항해했다고 보고한다.9) 또한 한 이집트의 항해사는 서기 60년경에 기록한 항해 일지에서 인도까지의 항로 및 해풍,조류, 항구, 시장, 다양한 족속과 통치자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10) 1세기에는 로마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 상황 때문에 상인들은 주로 항로를 이용하였다. 기원전 1세기 중엽에 획기적 발견이 이루어졌으니, 곧 아랍인들과 페르시아 항해사들 간에만 알려져 왔던 항해상의 비밀이 로마의 항해사 히팔루스(Hipalus)에게 알려지게 되었다.11) 그것은 몬순(monsoon)의 비밀이었다. 몬순은 아라비아 해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한 방향으로 부는 바람을 말한다. 5월부터 9월까지 바람은 인도 방향으로 불고, 겨울에는 바람이 반대로 홍해 방향으로 분다. 그러므로 종전에는 인도 행 선박들은 대해로 나갈 경우 풍랑의 위험 때문에 많은 시간이 걸림에도 불구하고 연안 항해를 선호했다. 그러나 이제 몬순의 비밀이 알려지면서 인도로 가는 선박은 여름의 몬순을 이용하여 대해를 가로질러 항해할 수 있었다. 당시 여행자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인도로 갈 경우 먼저 낙타를 타고 홍해 연안의 항구 미오스 호르모스(Myos Hormos)까지 가고 그곳에서 7개의 돛과 200 내지 300 톤 중량의 범선을 이용할 경우 대략 94일 만에 인더스 강 어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12) 또 하나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많은 유대인들이 세계 도처로 흩어져 살았는데, 그들 중 일부가 인도에 이르러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70년 예루살렘의 몰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100년경 남 인도에는 이미 유대인 정착촌이 있었다.13) 그러므로 1세기에 무역로를 따라서 로마 제국에서 인도로 가는 것이 기술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대개 초기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은 사도 바울이 그러했듯이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다. 따라서 인도에 정착한 유대인들이 사도 도마가 아니더라도 다른 유대인 선교사에 의해서 복음을 전수 받았을 개연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2세기 에데싸(Edessa)의 저술가 바르다이산(Bardai an 154-222)이『나라들의 법의 책』에서 박트리아[Bactria. 현 북인도 및 아프가니스탄]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고 기술한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14)
클레인(Klijn)의 연구에 의하면15) 도마 행전은 다른 외경 행전들, 즉 베드로 행전,바울 행전, 요한 행전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3세기 초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집필 장소는 에데싸일 것으로 본다. 현존하는 시리아어,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라틴어, 아랍어 사본들을 대조해 본 결과 도마 행전은 시리아어로 집필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판단된다. 이 문서는 다른 행전들처럼 3개의 큰 주제를 가지는데, 첫 번째는 복음 전파, 두 번째는 사도의 이적 행위, 세 번째는 사도의 순교다. 다른 외경의 행전들처럼 도마 행전은 이적 행위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사도가 모여 온 세상을 분할하여 어디에서 그들의 복음 사역을 담당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로 도마 행전은 시작된다. 유다 도마에게 인도가 할당된다. 그는 인도로 가기를 거절하지만, 그리스도는 인도 왕 구드나파르(Gudnaphar)의 궁전을 지을 목수를 구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던 상인 하반( abban)에게 도마를 팔아넘긴다. 그들은 배를 타고 인도로 출발한다. 그들은 중도에 산다 루크(Sandaruk)에 기항하는데, 이곳에서 혼인식이 열린다. 사도는 혼인 잔치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피리를 부는 한 히브리 소녀가 그에게 접근할 때, 사도는 기이한 혼인식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합당한 유일한 혼인은 영혼과 그리스도의 혼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사도가 신혼부부를 떠났을 때 혼인은 그의 쌍둥이 형제 도마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에 의해 중단된다. 구드나파르의 궁에 도착했을 때, 사도는 왕을 위해 궁전을 짓도록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사도는 왕으로부터 받은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는 진노한 왕에게 하늘의 궁전이 왕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왕은 사도를 감옥에 집어넣는다. 그날 밤 왕의 동생 가드(Gad)는 죽어서 하늘의 궁전을 본다. 그는 그것에 매료되어 다시 살아난 후 자기 형에게 자기가 본 궁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도록 허락할 것을 신께 간청한다. 마침내 왕은 자신의 궁전은 지상이 아니라 하늘에 세워졌다는 것을 확신했을 때, 왕은 사도를 감옥에서 석방하고 그의 설교를 듣는다. 왕은 개종을 선언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세 가지 표지를 ㅜ받는다: 도유와 세례와 성찬. 이로써 사도의 인도 선교는 성공적으로 끝난다. 행전은 사도가 인도의 다른 지역을 여행하는 것으로 마감된다. 그는 예수를 선포할 집사를 임명하고 자신은 구드나파르 왕의 땅에서 거주한다. 그 다음으로 그는 마즈다이(Mazdai) 왕국에서 마지막으로 선교 활동을 한다. 그곳에서
행전은 사도가 인도의 다른 지역을 여행하는 것으로 마감된다. 그는 예수를 선포할 집사를 임명하고 자신은 구드나파르 왕의 땅에서 거주한다. 그 다음으로 그는 마즈다이(Mazdai) 왕국에서 마지막으로 선교 활동을 한다. 그곳에서 혼인을 반대하는 그의 금욕주의적 설교는 물의를 일으킨다. 왕비를 포함한 왕국의 귀부인들이 개종하고 새로운 가르침에 순종하여 동침을 거부한다. 진노한 왕은 도마가 그녀들에게 마법을 걸었다고 고발하고 그의 처형을 명령한다. 사도는 시 밖의 언덕으로 끌려간다. 그는 군인들의 창에 찔려서 순교한다.
이상 도마 행전의 내용은 사도행전과는 달리 환상과 이적으로 가득하다. 이밖에 이 문서는 정경 본문을 인용한 듯 보이는 내용들이 종종 발견된다. 예를 들어 제자들이 선교 지역을 분할하는 내용(1)은 제자들에게 세상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의 명령(마태 28:19; 행전 1:8)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도마는 마태복음 10:2-4와 마가복음 3:16-19의 12 제자 명단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 주께서 밤의 환상 속에 그에게 나타나서, 도마야, 두려워 말라, 내 은총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과 유사한 표현이 출애굽기 18:9, 사사기 6:16, 예레미야 1:8, 사도행전 18:9에 등장한다. 주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모티브는 출애굽기 3:11;사사기 6:13; 예레미야 1:6; 요나 1:3에 이미 나타난다. 도마 일행이 산다루크에 도달했을 때, 왕의 전령이 마을의 모든 사람은 혼인 잔치에 참석해야 한다고 선포한다.(4)
이 동기는 마태복음 22:1-14에 이미 발견된다. 피리 부는 소녀가 “이 사람은 신이거나 신의 사도”(9)라고 말한 것은 행전 14:11을 연상케 한다. 이와 유사한 예는 이하 본문에도 종종 발견된다. 사도 도마의 유골을 통해서 이루어진 기적적 역사(170)는 엘리사 사후에 일어난 기적을 연상케 한다.(왕하 13:21) 그러므로 여러 학자들은 도마 행전을 정경에서 인용한 표현들로 이루어진 허구적 문서로 취급하였다.
이밖에 도마 행전에 나타난 지명 중 “산다루크” 는 그리스어 판에는 안드라폴리스( νδρ πολι )로 표기되었다. 그러나 이 지명은 현대인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인도 왕 마즈다이(Mazdai)(87장)는 그리스어 판에는 미스다이오스(Μισδαιο )로표기되었다. 레비(Sylvain Levi)는 마즈다이를 마즈다교(=조로아스터교) 영향 아래 ‘바수데바’(Vasudeva)의 변형으로 보았으며 이 인물을 쿠샨 왕조의 카니쉬카(Kanishka †서기 126년경)의 후계자 마두라의 바수데바(Vasudeva of Mathura) 왕과 동일 인물로 보았다.16) 만일 레비의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마즈다이는 사도 도마와 동시대인이 아닐 것이다. 도마 행전에 의하면 사도는 마즈다이 왕의 명령으로 군인들의 창에 찔려 살해되었다. 그러나 행전은 그의 유해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행전의 저자는 유해의 행방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서술한다: “형제들은 좋은 겉옷과 많은 아마포를 가져왔고 유다스를 옛날 왕들이 매장된 무덤에 매장했다.”(168장) 그런데 마르코 폴로는 『동방 견문록』에서 사도 도마의 순교에 대한 언급은 없이 다만 그의 유해가 말라바르(Malabar) 지방에 안치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17)
실제로 4세기 이전의 전승 가운데 도마 행전과 시리아 교부 에프라엠(Ephraem) 등의 시리아전승을 제외하고는 사도 도마의 선교 및 순교를 인도와 연결시키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영지주의자 헤라클레온(Heracleon) 및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사도 도마가 자연사했다고 주장했다.18) 오리게네스와 유세비우스 등의 고대 교부들은 사도 도마를 파르티아(Parthia)의 선교사로 믿었다.19) 오히려 유세비우스는 판테누스(Pantaenus)를 언급하면서 사도 바돌로메오가 인도에 최초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한다: “판테누스는 인도까지 갔고 그곳에서 보고된 대로,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가진 일부 그곳의 원주민에게서 이미 그가 도착하기 전에 도달한 마태복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사도 중 한 사람인 바르돌로메오는 이들에게 설교했으며, 당시까지 보존되어 있는 히브리어로 된 마태의 글을 남겨 주었다고 한다.”20)
판테누스의 생존시기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190년경 주교 데메트리오스(Demetrios)와 함께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이끌었으며 그곳의 최초의 교사로 알려진 인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판테누스가 인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바르돌로메오가 그곳에 이르러 ‘히브리어 마태복음’을 원주민들에게 전해 주었다는 주장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고대 세계에 인도는 더 이상 낯선 이상향이 아니라 무역로를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나라였다면, 판테누스가 도달한 지역이 인도가 아니라 아라비아반도를 의미한다는 주장은 이미 설득력을 잃는다.21) 반면에 사도 도마를 인도의 선교사로 보는 것은 시리아 교회 전통이다: 도마 행전뿐 아니라 250년경 시리아어로 기록된 『사도 교훈』(Didascalia apostolorum)은 사도 도마가 인도에서 서신을 보냈고 인도는 도마로부터 복음을 받았다고 기록한다.22) 또한 약 100년 후 시리아 교부 에프라엠(Ephraem)은 도마가 인도에서 순교했고 그의 유골의 일부는 에데싸에, 일부는 인도에 있다고 주장했다.23)
에프라엠의 주장은 도마행전에서 연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도마의 선교지에 대해서 시리아 교회와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이런 점들이 도마 행전의 역사성을 의심케만드는 또 다른 이유다. 그러나 우리는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시리아 전통이 완전히 배치된다고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고대 북부 인도의 역사는 인접한 파르티아와 밀접한 관계 속에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파르티아가 북부 인도를 지배했던 역사를 감안할 때,24) 고대 저자들이 사도 도마를 때로는 인도의 선교사로, 때로는 파르티아의 선교사로 진술하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시리아 전통과 알렉산드리아 전통 모두가 분명히 인도 교회의 사도적 기원을 증언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도마 행전이 언급하는 인도 왕 구드나파르는 실재 인물인가? 인도 역사에서 찬드라굽타(Chandragupta), 아쇼카(Ashoka), 메난더(Menander) 왕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구드나파르라는 이름을 가진 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런데 1834년에 영국인 메이슨(Charles Masson)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많은 고대 동전을 발견했다.25) 그 동전에는 잊혀졌던 왕들의 이름과 초상이 각인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그리스어와 고대 인도어 문자로 새겨진 동전이 있었다. 그 이름은 구드나파르였다. 뒤를 이어서 그의 이름이 새겨진 많은 동전들이 박트리아에서부터 푼잡(Punjab)에 이르기까지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구드나파르는 누구이며 그의 통치기는 언제인가? 과연 그를 사도 도마와 동시대인으로 볼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풀어 줄 중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졌으니, 19세기 말에 페샤와르(Peshawar) 부근의 타크티바히(Takht-i-Bahi) 폐허에서 인도-박트리아어로 기록된 6행의 비문이 발견되었다.26) 해독을 해 본 결과 비문의 내용은 이렇다: “대왕 구드나파라 제 26년, 삼바트(samvat) 103년 바이사크(Vaisakh) 달에 ...”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인도 북부에서 사용하던 기원(紀元)은 B.C. 58년에 시작되는 비크라마 삼바트(Vikrama samvat)라는 데 일치한다.
따라서 삼바트 103년은 A.D. 45 혹은 46년에 해당한다.27) 물론 정확한 천문학적 자료가 없기 때문에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도 없지 않다. 로후이젠 데 레위우(J. van Lohuizen de Leeuw)는 구드나파르 왕의통치기를 기원전 30-15년경으로 보았고, 또한 구드나파르는 아기 예수를 경배한 동방박사 중 한 사람이라는 전통이 있을 정도로 서방에 이미 잘 알려진 왕이었으며 따라서 구드나파르의 이름에서 도마 행전의 역사성을 입증하려는 것은 무리라고 주장했다.28)
이 주장에 대해 모라에스(Moraes)는 반론을 제기하였다: “타크티바히 비문은 파르티아 달의 표시가 매겨진 타크샤실라(Taksha ila) 동판에 새겨진 연대와 같은 기원(紀元)으로 날짜가 매겨졌다. 그러나 서기 19년을 그의 등극의 해로 볼 때, 비크라마 기원에 따르면 103년은 서기 46년에 일치한다. 이것은 우리가 타크티바히 비문의 증거와 무관하게 우리가 도달한 연대와 일치한다.”29) 이 견해를 수용할 때, 도마 행전이 언급한 구드나파르 왕이 사도 도마와 동시대 인물이라는 데 별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구드나파르 왕이 실존 인물이고 도마와 동시대인일지라도 이것이 곧 도마의 인도 선교의 역사성을 입증해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구드나파르 동전에 새겨진 도상들은 왕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는 어떠한 단서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시리아에까지 알려져서 도마 행전의 저자가 그의 이름을 차용했을 가능성도 없지않다.
인도 교회의 사도적 기원을 부인하는 학자들은 도마 행전이나 유세비우스의 보고를 평가절하하고 네스토리안 교회가 인도에 비로소 선교사를 파송했다고 주장한다. 네스토리안 교회의 한 연대기에 의하면, 네스토리안 교회의 인도 선교는 295년경에 시작되었다: “동방 교회의 카톨리코스 샤흐루파(Sha lupha)와 파파(Papa)의 시대에 바스라의 주교 두디(Dudi 혹은 David)는 그의 교구를 떠나 인도로 가서 많은 사람을 개종시켰다.”30) 그 다음으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기록은 칼케돈 회의(325)의 참석자 명단인데, 요한이라는 인물이 “대 인도와 페르시아의 주교”라고 서명한 바 있다.31) 과연 요한이라는 인물이 실제로 인도의 주교였는지는 알 수 없다. 345년에 동방 교회의 카톨리코스는 말라바르 지방에 에데싸의 요한을 파송했다고 한다.32) 이런 사료들은 인도교회가 페르시아에 본부를 둔 동방 교회로부터 복음을 전수 받았음을 지시한다.
결정적인 문헌 사료의 결핍에도 불구하고, 또한 서구 학자들이 사도적 기원설을 부인할수록 토마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도마가 복음을 자신들에게 최초로 전해 준 인물임을 더욱 더 고집하고 있다. 남서부 인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성 토마스 그리스도인’이라 칭한다. 어느 종교에 있어서나 초기로 올라갈수록 그 역사는 베일이 싸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베드로의 로마 순교에 관해서 우리는 어떤 확실한 증거를 가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것을 사실로 믿는 다. 인도의 고온다습한 기후 때문에 문서를 보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였을 뿐 아니라 고대 인도인들은 문서 기록을 보존하는 습관이 없었다. 그 대신 인도에는 토마스라반 파투(Thomas Rabban Pattu)와 마르감 칼리 파투(Margam Kali Pattu)와 같이 구전으로 전해지는 시가들이 남아 있는데, 이것들도 17세기 이전에는 기록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자는 이것은 케랄라(Kerala)의 혼인식 가요인데 사도 도마의 도착을 서기 50년으로 잡는다. 후자는 도마가 왕궁을 세운 것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말라바르 교회가 사용한 「일과 기도서」에는 다음의 구절이 들어 있다: 성 도마에 의해서 우상숭배의 오류가 인도인들로부터 추방되었다. 성 도마에 의해서 중국인과 에티오피아인들은 진리로 돌아왔다. 성 도마에 의해서 생명의 가르침의 빛이 온 인도에 빛났다. 성 도마에 의해서 하늘나라가 중국인들 가운데서 날라 올랐다.33)
또한 말라바르 교회의 찬송가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인도인들, 중국인들과 페르시아인들, 그리고 바다 섬의 모든 백성들, 그리고 시리아와 아르메니아, 이오니아, 로마니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도마를 기억하고 당신의 이름을 경배하나이다. 오 우리의 구주여.”34) 이런 오랜 가요들이 도마 행전의 내용을 편집한 것인지, 아니면 이와는 무관하게 고대 인도 교회의 역사에 대한 기억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의 역사성을 경솔히 무시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현재의 사료만을 근거해서 도마 행전이 서술한 인도 교회의 사도적 기원을 간단히 부정할 수 없다. 그리스도 탄생 이전부터 그리스인들이 육로로 이미 인도 북부를 정복했으며, 또한 해로를 통해 이집트와 인도 사이의 교역이 빈번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세기에 있어서 인도는 로마인들에게 결코 생소한 나라가 아니었다. 또한 구드나파르 왕에 대한 증거 발견, 오랜 구전에 대한 관심이 오히려 인도 교회의 사도적 기원을 긍정하는 쪽으로 기울게 만든다. 물론 인도에 최초로 복음을 전해 준 인물이 누구인지, 사도 도마나 바르돌로메오, 혹은 제 3의 인물인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9) Geographica 2.5.12, S. H. Moffett,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Asia , vol. 1, 31에서 재인용. 10) Periplus Maris Erythraei , transl. by W. H. Schoff, Moffett, op. cit. , 31에서 재인용. 11) 정수일, 씰크로드학 , 56. 12) E. H. Warmington, The Commerce between the Roman Empire and India , 6ff. 참조. 13) J. H. Lord, "Jews in Cochin", Encyclopedia of Religion and Ethics , vol. 7, 557-559 참조. 14) F. C. Burkitt, Early Eastern Christianity , 184 참조. 15) A. F. J. Klijn, The Acts of Thomas , 1-16 참조. 16) "St. Thomas, Gondophares et Mazdeo", Journal Asiatique , 1897, 27-42, J. F. Fleet, "St. Thomas and Gondopfernes", Journal of Royal Asiatic Society , 1905, 223-236에서 재인용. 17) Marco Polo, 동방견문록 , 176장 참조. 18)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 IV, 9 참조. 19) Origenes, Comm. in Genesis. 3; Eusebius, Historia Ecclesiastica , III, 1. 20) Eusebius, op. cit. , V, 10. 21) A. Mingana, Early spread of Christianity in India , 449 참조. 22) W. Cureton (ed.), Ancient Syriac Documents relative to the earliest establishment of Christianity in Edessa , 32-33. 23) St. Ephraem, Carmina Nisibena Hymni dispersi 5-7 참조. 24) 이 사실에 대해서 G. M. Moraes,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India , vol. 1, 17-24 참조. 25) A. Cunningham, "Coins of Indian Buddhist Satraps with Greek Inscriptions", Journal of the Asiatic Society of Bengal , 23 (1854), 679-719; S. Neill,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India , vol. 1, 27f. 26) 이 소위 Takht-i-Bahi 비문은 현재 Lahore 푼잡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27) E. J. Rapson (ed.), Cambridge History of India , vol. 1, 576 참조. 28) The Scythian Period , 352-356 참조. 29) Taksha ila 동판에는 위대한 왕 Moga의 이름이 각인되었고 파르티아 기원 78년의 날짜가 매겨진 명문이 있다. G. M. Moraes는 Moga를 동부 푼잡에서부터 인더스강까지 지배한 Saka 왕조의 Maues 왕으로 추정한다. op. cit. , 18f. 22f. 참조. 30) Chronique de Seert , ed & trans. Addai Scher, Pat. Orient., IV, 236. 292, A. Mingana,op. cit., 450에서 재인용. 31) A. Mingana, op. cit., 495. 32) S. Giamil, Genuinae Relationes , 578-579, A. Mingana, op. cit., 496에서 재인용. 33) Breviarum Chaldaicum , ed. P. Bedjan, Paris 1887 vol. 3, 476, A. C. Moule, Christiansin China before the year 1550 , 11에서 재인용. 34) Assemani, Bibliotheca Orientalis , 32, 516, Henry Yule, Cathay and the Way thither , vol.1, 101에서 재인용.
. 3. 가야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전래 가능성
위에서 도마(혹은 바르돌로메오 혹은 제 3의 인물)의 인도 선교의 개연성은 있으나 확실한 것은 단언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과연 사도 도마가 가야에 복음을 전했다고 하는 주장이 신빙성이 있는가? 앞에서 인용한 대로 말라바르 지역의 시리아어 「일과 기도서」에는 도마의 중국 선교에 대한 짤막한 언급이 있다. 그러나 이 「일과 기도서」는 7세기에 카톨리코스 이슈야브 3세(I u-yabh III. 647-657)와 하난이슈(Hanani u)에 의해서 개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중국에 대한 언급은, 唐 長安에 네스토리안 선교사가 도착한 당시 (635), 혹은 그 이후에 삽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35)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몬테 코르비노(John of Monte Corvino)는 교황 특사 자격으로 인도를 경유하여 元의 수도 칸-발리크(Kahn-baliq. 현 北京)를 방문하였다. 그는 인도에서 13개월을 체류하면서 약 10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그곳에서 사도 도마에 대해 많이 들었을 것이다. 1292년 혹은 1293년 12월에 그는 몰레아포르에서 배를 타고 泉州 혹은 廣州에 도달했고, 거기서 육로로 칸-발리크로 갔다. 그는 1305년 1월 8일자 서신에서 “이 지역에는 어떤 사도도 사도의 제자도 온 적이 없다”고 말했다.36)
1556년 明에 입국한 도미니크회 선교사 가스파르 데 크루즈(Gaspar de Cruz)는 자신이 인도에 체류했을 때 한 아르메니아인으로부터 들은 사도 도마의 중국 선교에 대해 전한다: “사도 도마는 몰레아포르(Moleapor)에서 순교 당하기 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중국에 갔고, 거기서 여러 날 머물 후에 아무 열매를 거둘 수 없음을 깨닫고 중국에 서너 명의 제자를 남겨두고 몰레아포르로 귀환했다.”37) 16세기 예수회 선교사 ㅜ자비에르(F. Xavier)와 데 구베아(De Gouvea)도 유사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38)
구전으로만 떠돌았던 이런 이야기에는 인도 토마스 교회가 중국 교회에 대한 자신들의 종주권을 주장하려는 의도도 다분히 숨어 있었던 것 같다. 또는 元에 시리아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교도들이 있었다는 것을 들었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그들의 기원을 사도 도마에게 돌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사도 도마의 중국 선교는 소문에 지나지 않았고, 그 소문을 뒷받침해 주는 어떤 단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사도 도마의 중국 선교는 그의 인도 선교를 후대인들이 확대 해석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인 듯하다. 이제 그렇다면 도마의 가야 선교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의 중국 선교에 대해서는 모호한 전승들이나마 발견되는 반면, 도마의 가야 선교에 관해서는 어떤 전승도 전해진 것이 없다.
35) A. C. Moule, op. cit. , 12 참조. 36) ibid., 172에서 인용. 37) ibid., 12-13. 38) ibid., 12-15 참조.
3.1. 먼저 사도 도마 혹은 다른 선교사가 인도 동부 해안을 출발해서 가야로 올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앞에서 이미 밝힌 대로 로마제국과 인도 사이의 항로는 이미 기원전부터 알려져 왔고, 몬순을 이용한 항해술 덕분에 인도 항해는 이전보다 수월해졌다. 선박 발달사를 보면, 원시적인 통나무배에서 나무판을 묶어 만든 목판선(木板船)으로, 그리고 다시 범선(帆船)으로 발달하였다. 은(殷)대에 이미 범선이 출현했다고 하는데,39) 초기 범선은 가로돛을 사용하다가 서기 1300년경에 가서야 비로소 세로 돛과 삼각돛을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초기에는 단수의 돛을 사용하다가 점차로 복수돛을 사용하였다. 서기 1세기경의 선박은 돛을 갖추었으되 주로 인력을 이용해 노를ㅜ 저어 항해했으므로 오늘의 선박에 비해 속도 면에서 매우 느렸다.40) 조선술의 발전에 상응해서 항해술도 점진적으로 발전했는데, 해상 활동의 초기에는 모든 선박은 예외 없이 해안에 가까운 연해로를 따라서 항해하였다. 도서와 육지의 지형 지물을 기준으로 삼아 어림짐작으로 항행하는 원시적 항법을 지문도항법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지문도항법에 의해서 항해하던 시절에는 해안선을 따라서 항행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소요할뿐더러 리아시스식 해안 곳곳에 숨어 있는 암초에 걸리거나 섬들 사이를 흐르는 빠른 해류 때문에 난파하기가 십상이었고 또한 늘 해적들이 연안을 통과하는 선박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또한 원거리 항해를 해야 할 경우, 중도 기항없이 목적지까지 항해를 할 수 없고 구간 항해를 해야 했다.41)
일례를 들어서 東晋의 고승 法顯(338-423)의 「佛國記」에 의하면, 法顯은 天竺[인도]에서 11년간 구도하다가 409년 초겨울 갠지스 강 하구에 있는 多摩梨帝國에서 계절풍을 이용하여 14일 만에 獅子國[현 스리랑카]에 이르러 2년간 체류한 후 중국 상선을 타고 3개월여 간의 난항 끝에 耶婆帝國[현 수마트라]에 도착하였다. 그는 거기서 5개월 머물다가 412년 4월에 인도 상선을 타고 북상해서 3개월 만에 산동반도 뇌산(牢山)에 도착하였다. 그가 귀국하는 데 소요한 시간은 2년 8개월이나 되었다. 그가 갠지스강 하구에서 곧바로 동진하지 않고 남행하여 獅子國으로 간 것은 귀국할 배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가 2년간이나 獅子國에 머문 이유는 중국행 선박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42) 또한 耶婆帝國에서 산동반도까지 항해할 때 法顯이 탄 선박은 근해 항해를 했을것이다.43) 만일 1세기에 인도에서 가야로 오려고 한다면, 일단 중국까지 항해한 후 중국과 한반도 간의 항해로를 따라서 항해했을 것이다.44) 한중간의 고대 항로는 횡단로와 연안로가 있었다. 즉 明州[현 寧波] 혹은 沙尾에서 출항하여 남지나해를 통과하여 흑산도에 이르는 횡단로가 있었다.45) 그러나 이 해로에는 해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난파의 위험이 매우 높았고 불안전했다.46) 그래서 이 남방 횡단로는 6세기말 통일 신라 시대 이후에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47) 그러므로 중국에서 가야로 올 경우, 산동반도에서 출발해서 발해만을 건너 요동반도에 이르고 거기서부터 압록강 하구에 도달하고, 그 다음 서해안을 따라 내려와 가야에 도달하거나 혹은 부안에 도착해서 육로를 이용해서 가야에 도달하게 된다.48) 그렇지만 이상의 서술은 공간적 이동경로가 그러했다는 것을 이론상으로 말할 뿐이다. 사도 도마가 활동했던 1세기에는 조선술과 항해술의 아직 원시 상태를 면치 못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도마나 혹은 다른 사도가 인도에서 가야까지 오기 위해서 해로를 택했다고 가정했을 경우, 매우 많은 시간을 소요해야 함은 고사하고, 난파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39) 정수일, 실크로드학, 193 참조. 40) 김인배는 허황옥이 인도에서 타고 온 것은 범선이 아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무근거한 주장이다. 단 1세기의 범선은 현대적 의미의 범선과는 수준이 틀렸다. “해류를 통해 본 한국 고대 민족의 이동”, 역사 비평, 1988, 가을호, 121 참조. 41) 우리는 그 단적인 예를 사도 바울의 항해 이야기(사도행전 27-28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42) 6세기경 중국에서 지문도항법에서 벗어나 해와 달, 별 등 천문 대상을 기준으로 정하여 항해하는 천문도항법이 도입됨으로써 근해 항해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원거리 항해는 불안전성을 면치 못하고 장시간을 요했으며 연안 및 근해 항해가 위주였다. 정수일, op. cit. , 59 참조. 43) 항해 방향을 잡는 데 필수적인 나침반은 1세기에는 물론 알려지지 않았다. 나침반은 11세기말 北 宋대에 비로소 처음으로 항해에 도입되었다. 나침반은 12세기 후반 南宋대에 아랍인들에게 전해졌으며 유럽인들은 12세기말에 아랍인들을 통해서 전수 받았다. 나침반의 도입은 비로소 심해 항해를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따라서 선박들이 연안을 따라 항행하는 연해 혹은 근해 항해 대신 직항로를 통과하는 심해 항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정수일, op. cit ., 293 이하 참조. 44) 물론 육로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육로는 훨씬 위험하고 많은 시간을 요했다. 예를 들어서 唐의 玄은 629년에 四川을 출발하여 633년에 갠지스 강 동북부의 불교 성지에 도달했다. 45) 무함마드 깐수[정수일], 신라 서역 교역사 , 522 이하 참조. 46) 이에 관해서 김인배, op. cit. , 117-120 참조. 47) 정수일, 고대 문명 교류사 , 674f. 참조. 48) ibid. , 667; 권주현, 가야인의 삶과 문화 , 88f. 참조.
3.2. 가야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가?
다음 몇 가지 경우를 고찰함으로써 이 의문에 답변해 보자.
1) 앞에서 언급한 왕유리 석상을 발견한 유 교사의 주장대로 이것이 5세기의 작품이라고 본다면, 십자가 형상이라도 보일 법도 하지만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는다.49) 종교적 선입견이 없는 관찰자가 왕유리 석상을 관찰한 후 그리스도교 도상이라고 판단한다면, 이 석상이 그리스도교 유물이라는 주장은 보다 설득력을 가질 것이다. 나는 고고학자인 한신대학교 이남규 교수에게 문제의 석상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그의 답변은 이러했다: “석상의 손 모습과 의복의 주름 모양을 보아서는 고려나 조선 시대의 불상으로 보이며, 刻字는 조선조의 것으로 보인다.” 인물상 좌측의 4 刻字는 현재로서는 해독이 불가능하다. 왼편으로부터 처음 두 문자는 히브리어 과 유사하지만, 이것을 ‘도마’로 읽을 수는 없다. ‘도마’는 아람어로 라고 표기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2개 刻字는 사람의 형상처럼 보인다. 다른 한편 유우식이 “名 全 行”이라고 읽은 우측의 刻字들은 누군가 서툰 솜씨로 암석에 새기려고 한 듯 보이며, 나로서는 판독할 수 없다. 나는 이 석상을 고려 혹은 조선 시대 불상으로 판단한 것이 100% 옳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석상에서 그리스도교와 연결할 만한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2) 순장(殉葬)이란 죽은 사람을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을 함께 매장하는 장례 행위다. 순장 묘가 되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피장자와 순장당한 자가 동시에 매장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순장당한 자는 강제로 죽음을 당해야 한다. 세 번째로, 시신의 위치나 부장품의 질과 양 등에서 피장자와 순장당한 사이의 주종 관계가 명백해야 한다. 가야 시대 고분들을 발굴한 결과 4세기부터 6세기 초까지의 고분들에서 많은 순장 시신이 발견되었다.50) 순장 행위는 사람을 강제로 죽여서 다른 사람의 장례에 사용한다는 점에서 인간에 대한 지배-예속 관계를 보여준다. 순장은 생사여탈권을 가진 지배자가 군림 하는 고대 사회에서 시행되었다. 순장은 피장자가 사후에도 순장 대상을 지배한다는 관념에서 기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순장은 인간이 사후에도 삶을 계속 이어간다는 원시적 신앙을 반영한다
순장은 고대 이집트, 그리스 뿐 아니라 고대 중국에서 시행되었고, 고조선, 부여, 고구려, 신라에서도 시행되었다. 고구려 中川王(3세기)은 순장을 非禮라고 여겨 금지했으며,51) 신라의 경우 지증왕 3년(502)에 순장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다.52)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율령 국가 체제를 갖춘 이후에는 순장 풍습은 사라졌다. 고구려에서는 고분벽화의 인물도들이 人身 犧牲을 대신하였고, 신라의 경우 흙으로 빚는 인형[土俑] 같은 것을 매장하는 풍습이 생겼다. 고구려, 신라에서 순장이 사라지게 된 원인에 관해서, 삼국이 장기간의 항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생산력이 대량 필요하였고 이를 위해서는 노비들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면서 순장제가 폐지되었다는 견해가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순장 대상의 부족화, 人身 供犧 사상의 쇠퇴 등으로 설명한다. 두 견해는 상호 보완적으로 볼 수 있으니, 생산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순장에 소모하는 것은 무모하다는 견해가 점차 지배했고, 또한 인간 인식의 변화와 내세관의 변화는 人身供犧 사상의 쇠퇴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53) 이것은 불교의 포교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가야의 경우 562년 대가야가 멸망할 때까지 순장 풍습이 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초로 추정되는 가야 고분에서도 순장 시신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가야에서는 왕족 뿐 아니라 상류층에서도 순장이 시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에서 순장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가야가 다른 국가에 비해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뒤떨어졌음을 말해 준다. 만일 가야가 복음화되었다면 인접한 신라에서는 금지된 이 원시 적이고 비인도적 풍습이 어째서 사라지지 않았을까?
3) 옛가야 지역에서 다수 출토된 高杯를 성찬에서 사용된 잔으로 볼 수 있는가? 학계에서는 고배를 일상적 식기라기보다는 祭器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고배를 장식하는 역할을 하였던 투창(透窓)을 형태별로 장방형, 삼각형, 원형, 화염형으로 구분한다. 그런데 조국현은 화염형 투창을 예수의 손에 박힌 못 자국을 상징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위해서는 좀더 설득력 있는 증빙 자료가 요구 된다. 또한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가야 시대의 器臺는 맨 밑 부분의 투창이 십자형으로 관찰자의 주목을 끈다.54) 그러나 십자 형상은 이미 언급한 대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문양이며, 그리스도교만의 상징물로 여기는 것은 금물이다.
4) 三國遺事 駕洛國記에 삽입된 龜旨歌는 四行詩歌다: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물론 龜旨歌는 애초에는 이렇게 불렸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번역상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번역은 이렇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머리를 내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龜旨歌는 집단 가요, 노동요, 혹은 거북의 목을 내게 하려고 부른 동요였던 것이 수로왕을 맞기 위한 呪術歌로 변이되었다고 보는 이론이 지배적이다.55) 최근에는 이주세력인 수로 집단이 토착세력인 가락 구촌을 정복하는 전쟁을 마친 후 승리를 축하하는 전승가라는 견해도 있다.56) 반면 조국현은 龜旨歌를 찬송가라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번역하였다: “구하소서 구하소서, 머리되신 성령이여 나타나시옵소서, 만약 나타나지 않으면 적군에게 태워지고 포로되어 갑니다” 龜何는 音讀하여 “구하소서”로 번역하고 그 이하는 鄕札 표기로 본 것은 전혀 설득력 없다. 또 “적군에게 태워지고 포로되어 간다”는 번역이 어떻게 가능한가?
5) 옛가야 지역에서 불교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리스도교 전파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학계에서는 고령 고아동 고분 천장에 그려진 蓮花文을 불교 유물로 추정한다.57) 김태식은 고구려, 백제가 차례로 불교를 공인함에 따라서 528년 불교를 공인한 신라를 통해서 가야도 뒤늦게 불교를 수용했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추정한다.58) 三國遺事 塔像篇 金官城 婆娑石塔條에 의하면 허왕후가 아유타국에서 올 때 婆娑石塔을 싣고 왔다고 하였다. 석탑은 인도 불교 예술에 속하므로, 인도불교가 이때 가야에 들어왔다고 보는 이론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김태식은 이 설화의 성립 시기를 駕洛國記가 편집된 고려 文宗代로 본다. 그러므로 이 설화는 편집된 시기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현재 김해 허왕후릉에 있는 婆娑石塔을 인도에서 온 불교 유물로 보아야 할 근거가 없어진 셈이다.
그렇다면 가야 사람들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어떤 신앙을 가졌을까? 고고학적 발굴을 근거로 해서 추정할 때 가야에서는 동물 뼈를 이용한 점복술이 성행했다.59)
또한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條에는 3세기 가야인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전해진다: “오월에 씨를 뿌리고 난 뒤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 시월에 농사 일이 끝난후에도 똑같이 한다. 귀신을 믿는다.” 5월 제사는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행위이고,10월 제사는 추수 감사제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어느 농경 사회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인데, 대상이 귀신이다. 여기서 말하는 귀신은 天神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어서 말하기를: “국읍에 각각 한 사람을 세우고 天神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했는데, 이름하여 天君이라 한다. 또 각 소국에는 별읍이 있어 이름을 蘇塗라 하며,방울과 북을 매단 큰 나무를 세워서 귀신을 섬겼다.”60) 이 기록은 가야를 포함한 三韓의 풍습을 언급한 것으로서 이를 통해서 가야인의 天神 숭배 신앙을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다.
6) 앞서 말한 대로 이종기는 인도 아요디야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수로왕릉 정문의 쌍어문과 유사한 형태의 것을 발견하고 수로왕릉의 쌍어문과의 연관성을 지시한 바 있다. 조국현은 여기서 유추해서 쌍어문이 그리스도교의 상징이며 수로왕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 三國遺事 駕洛國記에 언급된 아유타국은 도대체 어디를 말하며 어떻게 가야 건국 설화 속에 들어오게 되었는가?
최근 연구에 의하면 아유타국은 힌두 서사시 「라마야나」에 나타난 사라유(Sarayu) 강안에 위치한 아요디야(Ayodhya)를 말한다. 그러나 아요디야는 신화상으로는 존재하지만 5세기 이전에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도시였다. 따라서 「라마야나」에 나타난 아요디야는 역사적으로 존재한 특정 도시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진 가상의 도시로서 그 모델은 사라유 강안에 위치한 사께따(Saketa)였다. 5-6세기경 사께따는 다른 인도의 도시들과 더불어 몰락했다. 바로 이 시기에 라마야나의 최종 편집이 이루어졌는데, 이 무렵에 사께따는 신화 속의 도시 아요디야로 치환된 듯하다. 그리고 중세 이후 아요디야는 인도인의 성지로 자리 잡았다. 이광수는 허왕후 설화가 불교로 윤색되는 과정에서 아유타 모티브가 삽입된 것으로 본다. 아요디야라는 명칭은 힌두 문화의 전령으로서의 「라마야나」와 더불어 전해졌다고 보아야 한다. 아요디야라는 이름이 한국에 알려진 경위는 신라말 고려초 일부 불교 승려들 혹은 지식인들이 불경을 통해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곧 아유타국은 불경을 통해서 알려진 인도를 대표하는 성도로 인식되면서 가야 건국 설화의 확대 재생산 과정에서 삽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61)
그렇다면 수로왕릉의 쌍어문을 어떻게 볼 것인가? 쌍어문이 아요디야 고유의 문장이라는 이론은 더 이상 수용될 수 없다. 한 연구에 의하면, 쌍어문은 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神聖, 힘, 풍요를 상징한다.62) 한국에서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청동잔에서 발견된 쌍어문이 최고의 것이며,김해 銀河寺 대웅전, 양산 溪源寺 대웅전, 通度寺 三聖閣 등에서도 볼 수 있다. 김해 수로왕릉 정문 현판에는 불탑과 한 쌍의 잉어, 두 개의 양궁, 두 마리 코끼리, 두 개의 연꽃 봉우리가 새겨져 있다. 또한 安香閣 문 위 包에도 쌍어문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김태식의 연구에 의하면 수로왕릉의 정문 조성 연대는 정조 이후로 보아야하며, 이것은 쌍어문이 가야 시대부터 지속적으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을 부인하게 한다. 안향각의 조성은 이보다 더 늦은 순조 24년(1824)에 이루어졌다.63) 따라서 쌍어문은 수로왕의 신앙과는 무관한 후대인의 작품이다. 따라서 이것을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7) 마지막으로 故김양선 목사가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하였고,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 소장된 돌 십자가와 소위 성모자상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6세기에 건립된 불교 사찰에서 십자가와 성모자상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근거로 唐 景敎가 통일 신라에도 들어온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어떤 유물이 발견되었을 경우 출토된 경위가 중요하다. 내가 숭실대 박물관 학예관에게 문의한 결과 두 유물에 관한 발굴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런 경우 돌 십자가를 불국사에서 발견했다고 해서 불국사 승려가 이것을 사용했다고 볼 수도 없고, 또 불국사가 건립된 시기부터 있었다고 판단할 수도 없다. 돌 십자가는 외형적으로 관찰하건대, 수직선과 수평선의 길이가 거의 같고 오랜 세월 탓으로 모서리의 마모 상태가 매우 심하다. 그러나 현재 상태로는 이것은 景敎 십자가가 아니라 그리스식 십자가라고 판단된다. 景敎 십자가는 대개 양측 기단으로부터 잎사귀가 올라와 마치 불길처럼 십자가를 위요한 형태 (이것은 보통 잎을 가진 십자가로 칭해진다), 또한 계단 위에 놓여 있고 아래 다리가 이중으로 되어 있는 형태, 각 팔이 꽃봉오리형상을 가진 형태, 각 팔 끝을 진주 모양으로 장식한 형태 등이 발견된다. 그러므로 돌 십자가를 景敎 유물로 단정하고 여기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금물이 다.
또한 소위 성모자상으로 알려진 유물에 관해서 문화재청의 안귀숙 박사에게 문의한 결과, 이것은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상이 아니라 訶利帝母像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訶利帝母는 아이를 낳게 해주는 여신이다. 北宋代에 百童子 신앙이 민간에 널리 신봉되었고, 이 민간 신앙에 따라서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의 주변에 아기들이 위요하고 있는 도상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어떤 도상으로도 남아 있지 않다. 訶利帝母像이 그리스도교의 성모자상과 유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인 주변에 아이들이 위요하고 있는 점이 큰 차이라고 하겠다. 이 訶利帝母像은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이 아니라 12-13세기경에 중국에서 제작되어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49) 십자가 형상은 4세기 중엽부터 그리스도교 도상에서 등장하기 시작한다. “경교 형상 유물 연구”, 한국교회사학회지 16 (2005), 219-223 참조. 50) 권오영, “고대 영남지방의 순장”, 한국 고대사 논총 , 4(1992) 31-50; 김태식,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 vol. 2, 116-121; 권주현, op. cit ., 210-207 참조. 51)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第五 東天王條 52) 三國史記 新羅本紀 第四 智證麻立干 53) 권오영, op. cit., 57 참조. 54) 김원룡, 안휘준, 한국 미술의 역사 , 250 참조; 이장식, op. cit ., 381 참조. 55) 이연숙, “龜旨歌考”, 한국문학논총 14집 (1993), 105-120; 유경환, “龜旨歌에 나타난 거북의 상징적 의미와 기능”, 어문 연구 98 (1998), 67-81. 56) 차재형, “龜旨歌의 전쟁 서사시적 성격 연구”, 한국문학논총 33집 (2003), 5-33. 57) 김원룡, 안휘준, op. cit., 240, 255 참조. 58) 김태식,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 128 참조. 59) 권주현, op. cit ., 224 참조. 60) ibid. , 208. 61) 이광수, “가락국 허왕후 渡來 說話의 재검토”, 한국 고대사 연구 31 (2003), 189-190 참조. 62) 이헌재, “雙魚文의 分布와 象徵”, 京畿史論 2 (1998), 33-34 참조. 63) 여기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김태식, “金海 首露王陵과 許王后陵의 補修過程 檢討”, 韓國史論 41-42 (1999), 33-96, 특히 75 이하 참조.
4. 결 론
학계의 일반적 견해에 따르자면 도마 행전에 등장하는 구드나파르 왕이 1세기경 실재했던 인물이라는 것이 판명된 이상 도마 행전이 전적으로 허구만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또한 인도 토마스 교회에서 전수되는 여러 가지 전승들이 사도 도마의 인도 선교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이유는, 구드나파르 왕이 동시대의 실재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사도 도마가 그를 개종시켰다는 것을 입증할 단서가 없고, 알렉산드리아 전통에서는 도마가 아니라 바르돌로메오를 인도의 선교사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 도마 혹은 다른 사도가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가 인도에서 가야까지 해로를 통해 도래했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가야는 비인간적인 순장 풍습과 점복술이 성행했으며 天神을 섬기는 풍습이 있었던 나라였다.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서 판단할 때, 가야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가야는 6세기경 인접한 신라를 통해서 불교를 받아들인 것으로 국사학계는 추정한다. 수로왕릉의 쌍어문은 수로왕의 신앙과는 무관하며 그리스도교적 상징도 아니다.
영주시 왕유리의 석상의 정체를 구명하는 것은 고고학자들의 몫이다. 그러나 단순히 도마의 가야 선교라는 허구에서 연역 추리하여 석상을 그리스도교의 유물로 보는 것은 전혀 설득력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설령 누군가 그 옛날에 한반도까지 와서 복음을 전했고 그래서 이런 석상을 남기고 돌 십자가를 남겼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리스도교 복음은 고대 한국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남기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따라서 이런 유물만을 가지고 확대 해석하는 것은 사실을 그르칠 우려가 있다.
황정욱 교수/한신대학교
<논찬원고>
“가야는 사도 도마에 의해 복음화 되었는가?”에 대한 논찬 황정욱 교수의 논문은 역사적 질문에 대한 충실한 답변이 되었다. 고대 한국에 있어서의 직접적인 그리스도교 전래의 가능성, 특히 그 중에서도 가야국에 사도 도마가 직접 전도했을 가능성에 대한 논구를 치밀하게 진행한 것이다. 결국 이 논문은 일부에서 주장을 하고, 또한 역사적 가설이나 질문을 던진 명제에 대해 역사적 논점을 통해 응답하여, 그 가설의 ‘가능성 희박’을 명증한 논의가 되었다. 사실, 어떤 가정의 명제를 증명해 나가는 일보다, 어떤 가정의 허구됨을 논박해 나가는 일이 지닌 상대적 곤혹스러움을 이해할 때, 이 논문 속에 배어 있는 노고와 그 지난한 과정을 더욱 평가할 수 있다.
첫째, 유우식이 주장한 경북 영주 평은의 왕유리 석상이 사도 도마의 상이라는 주장을 면밀히 부정하였다. 둘째, 김도윤과 조국현 등이 주장한 수로왕의 세례 등극이나 ‘쌍어문’의 그리스도교 상징 등의 주장을 논박, 부정하였다.
이어 황 교수는 앞의 주장에 전제가 되는 큰 가정에 대해서도 이의를 붙여 주었다. 첫째, 사도 도마의 인도선교에 대한 역사성이나 도마행전에 대한 개연성은 인정하나 부분적, 혹은 전체적 의혹을 논의하였다. 둘째, 사도 도마의 직접선교에 의한 것은 아닐지라도, 가야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 자체에 대한 의심을, 항해 교통로의 문제, 가야 발굴 유물들의 직접적인 그리스도교 관련문제 등을 면밀히 살펴 논의하였다. 물론 결론은 주장의 근거 미약이나 사실 희박의 방향으로 정해졌다. 학적 논의과정과 결론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 과정을 통해 보더라도, ‘문자 사료’가 부족한 상태의 가설이나 그 논증이 지닌 역사작업의 난해한 면면을 충분히 시사 받을 수 있다.
특히 유물 등에 대한 주관적 판별만으로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는 일이 얼마나 혹독한 비평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도 웅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 접근이, 일정한 선입관적 단정 하에서 진행되었을 때 따라오는 위험성도 충분히 예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전제 과정을 모두 밝히고 있음이 이 논문의 특징이며 강점이다. 더구나 이 논의를 진행해 나가면서 부수적으로, 여러 구체적 사실들의 이해를 제공하고 촉진시켰다. 예를 들면, 최근 가야사에 대한 연구 성과와 개요, 고대 인도교회의 전승, 도마복음의 진위, 서구와 인도, 혹은 중국과의 고대 문명 교류, 고대의 항해술이나 선박건조 기술, 발굴석상이나 순장풍습, 출토 고배 등을 통한 가야의 유물, 삼국유사의 ‘구지가’(龜旨歌) 해석 등등이 그에 속한다. 한국고대사와 고대교회사에 있어 풍부한 이해와 논점을 제공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논문임을 알고 다시 한 번 학문적 성과에 찬사를 더하는 바이다. 다만 논찬의 소임에 충실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첨부하고자 한다.
이상의 질문은 결코 황정욱 교수 논문의 가치와 관계되어 있지 않다. 다만 토론의 단초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다시 한 번 흥미 높은 논의를 대할 수 있게 된 기회에 감사를 드린다.
서정민/연세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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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