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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자들
김상호
국짐당을 지지하는 아스팔트보수와 일부 교인들의 공산주의 종북 좌빨 친중 친러에 대해 기겁을 하고 게거품을 물고 발악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거기엔 공산주의 이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다시피 자본주의 폐해로 자본과 토지를 갖지 못한 노동자들은 공산주의 낙원을 건설하려면 자본과 토지를 소유한 유산자를 폭력으로 쳐죽이고 그것을 빼앗아서 함께 일하고 필요한 만큼 나눠갖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고
이 공산주의 혁명은 예상과 달리 자본주의가 발달한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가장 민중이 고통받던 러시아와 중국에서 일어나서 성공했고 혁명은 전세계로 수출되었으며 혁명과정에서 러시아에서만 유산자 와 반혁명세력으로 몰려 사천만 명 이상 살해되었다
다른 국가도 마찬가지로
한국전쟁도 공산주의자들이 보면 혁명전쟁이었으며 무려 이백만 명 이상 살해된 것이 사실이다.
세월이 흘러 공산주의는 패망했고 자본주의는 번영의 길로 접어들었다.
레닌이나 막스가 주장한 노동자들은 자본가와 같은 사업가적인 두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러시아는 계획경제 실패로 수천만 명이 아사하고 중공 역시 인민들이 수천만 명이 아사하는 비극을 빚었다. 북한은 지금도 아사자가 속출하는 지구상 최악의 지옥이다
차르와 귀족들을 살해하고 소비에트연방을 만들어 동구권과 중국과 북한 동남아 심지어 중남미까지 창궐하던 공산주의의 계획경제는 패망했고 중국은 정치체제는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지만 경제체제는 자본주의다
러시아도 공산주의를 포기한지 옛날이고
남아있는 북한과 쿠바도 극빈국가로 전락한 것은 공산주의의 완벽한 패배를 입증하고 있다
지금 현재 지구상에 공산주의는 더 이상 발 붙일 곳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파의 후손들이 주축인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그네 윤뚱이 공산주의를 배척한다며 정쟁의 상대인 민주당을 향해 좌파니 종북 친중 친러라고 낙인을 찍는 것은 한국전쟁에서 체험한 공산주의가 얼마나 무섭게 폭력적이었던지를 체득한 한국민에게 정치이념이 다른 상대방을 공산주의자로 폭력과 살인이 정당하다 주장하는 살인자들이라고 몰아부쳐 정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비열한 술책에 불과하다
정작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살해한 것은 4.19 5.16 10.26 5.18과
지난달 12.3 내란에서
그들 자신이었고 수없이 많은 국민이 간첩으로 몰려 그들에게 처형되었다
대중선생의 납치 살해시도와 사형 판결이 그 대표적인 실례다
놀랍게도 간첩조작사건은 최근의 유우성사건에서도 있었다
반대로 그들이 종북 좌익이라고 입에 달고 있던 민주당정부는 그 누구도 국민을 향해 발포한 적이 없다
저들은 한국전쟁에 놀란 국민을 겁박하여 독재 연장과 영구집권을 위해 독재자인 자신들이 자유민주주의자들이라 우기고
단 한번도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거나 독재를 한 적 없는 민주당을 종북좌익이라 누명 씌우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프랑스 국민들이 철저하게 나치협력자를 색출하여 처벌한 데 비해 우리민족은 군정이 바로 실시되어 일제앞잡이들을 처벌할 기회가 없었다 반민특위는 일제앞잡이 경찰들에게 철저히 유린되었고 이승만은 묵인했다
초창기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고생하던 이승만은 상해로 가서 임정 초대 주석이 되었지만 그의 편협함은 동지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미국으로 건너가서 그곳 미국인 기독교인들과 교유하며 패거리를 만든다
미국에 건너간 이승만은 1세대 이민자들이 많이 가 있던 하와이로 넘어가 교민들이 모아놓은 독림군자금을 가로채고 심지어 교민학교를 설립할 돈 마저 강탈학고 반대하는 교민을 곡괭이로 등을 찍어 중상을 입혔다는 설이 있다
독립군자금이 미국에서 오지 않자 임정의 김구선생과 동지들은 굶기가 일쑤였고
밑창이 떨어진 구두를 신고 다니며 김구선생의 모친은 시장에서 배추시레기를 주워 국을 끓여서 동지들의 밥상에 올렸다고 한다.
국공합작과 내분을 거듭하던 장개석은 모택동과 겨루면서 삼천만 명이 넘는 중국인이 학살 당해도 아무도 나서지 않는데 우리 민족은 안중근 윤봉길 등의 여러 의사들의 의거로 일본총리를 비롯 왜적을 처형할 때마다 탄복을 하며 김구선생에게 우리민족의 독립을 약속했고 전후 회담의 결과 독립은 이루어졌다.
나의 다른 글에서도 이미 밝혔듯이 우리와 같은 시기에 일제에 합병되고 비슷한 시기에 헤이그 만국평화회담에 밀사를 파견했고 같은 시기에 종전을 맞았던 지금은 일본땅이 되어 있는 오키나와도 원래는 유구국이라는 독립국가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피흘린 선열들의 피의 대가로 독립을 이뤘고 유구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한줄로 줄이면 지금의 이 자유로운 대한민국 민주주의 국가는 우리 선열들의 피가 얼룩진 눈물겨운 열매다.
그 거룩한 선열의 이름 속에 망국이 되자마자 수없이 자결한 애국자들의 염원과
전재산을 팔아 거금 육백억에 달하는 재산을 갖고 만주로 가서 독립을 위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에 육형제가 같이 매진했던 이회영 가문과 청산리 봉오동 전투에 빛나는 김좌진 홍범도 장군과 동지들 우리 밀양출신의 의열단장 약산과 석정을 비롯한 동지들과 임정을 수립하고 장개석과 적극 협력하며 한편으로 일제의 총리며 대장 등 우두머리들을 처형한 김구선생과 그 동지들의 목숨바친 피와 그 가족의 눈물이 우리의 지금 이 자랑스런 선진대한민국을 만든 주역이었다.
의열단장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한 약산과 그 동지들을 비롯 삼천오백여 독립군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는 광복 후 부활하여 지금의 경희대학교가 되었다
광복이 되고 일제가 패망하자 그들의 앞잡이 역할을 하던 자들은 처음에는 음지로 숨어들었다. 민중의 보복이 두려웠던 것
그렇게 일제가 패망해 물러가고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을 펴기 전까지 무정부상태였던 그때 우리 민중은
일제앞잡이들을 처형하지 못했다.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장교가 되어서 독립군토벌에 앞장섰다던 다카키 마사오도 처형되었어야 할 부류다.
주로 중공군과 상해임정 멀리는 미국까지 가서 군에 몸담고 일제와 독립전쟁을 치르던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이 귀국하였을 때는 이미 미군정은 일제시절 앞잡이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정의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군정을 수행해줄 조직이 필요했고 그것에 딱 맞는 존재가 왜정시절 일제 앞잡이들이 그것이어서 노덕술 같은 이가 거꾸로 한국경찰이 되었고 다카키마사오와 김창룡 등 일본장교와 하사관이었던 자들도 국군에 편성되었다.
맥아더에게 편지질하던 이승만은 통일정부수립에 반대하고 정적이던 여운형과 김구 등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하던 이들은 다 암살되고 만다.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하던 동지들의 지지를 못 받으니 군정에 가담한 일제앞잡이들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흡수하여 자유당을 만들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 이전에 제주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게 되었고 토벌대를 보내려다 여순항거가 일어났다. 당시 여순 주둔 군대가 제주토벌대로 가기를 거부한 명분이 민간인 살해는 못한다는 것
군정이 정의를 외면하고 민중을 통치대상으로 그 수단을 일제앞잡이들로 하자 민중은 반감을 가지고 많은 수의 사람들이 남로당에 가담한다.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그 자신도 여운형이나 김구와 같이 암살위기에 놓인 약산은 월북하여 북에서 외무상이 되기도 했다
물론 제주와 여순 사태에 남로당이 가담할 것은 당연지사
이승만은 북을 차지한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대대적인 남로당색출작업을 벌이고 거기에 명단을 올린 것이 보도연맹이다.
과거에는 공산주의를 신봉했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는 서약아래 만들어진 명단으로 여차하면 잡아들일 대상이 된 그들의 숫자는 이십만 명이 넘었고, 정부는 행정단위별로 목표숫자를 할당해두어 아무것도 모르고 마을 이장에 의해 이름이 올라간 사람도 부지기 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재빨리 한강을 건너 남으로 도망가면서 자기는 서울에 있다고 서울은 반드시 지킬거라고 방송을 한다.
다른 한편으로 전국적인 보도연맹원 처형이 시작되었다.
우리 밀양에서도 무안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와 삼랑진 임천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보도연맹원 처형장소로 선정되어 경찰서로 끌려간 나의 부친과 집안의 형님도 땅바닥에 엎드려 벌벌떨며 분류되어 다행히 처형은 면하였다고 그날 밤을 회상했다.
트럭에 실려간 그들은 고개 위에서 모두 처형되었다.
그렇게 전쟁초기에 순식간에 처형된 사람이 이십만 명이 넘었다.
이것은 보도연맹이란 책으로 집필되어 역사에 증언하고 있다.
이승만은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 집권을 원했고 그것은 사사오입개헌으로 이어졌고 4.19에 의해 하와이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자유당 독재가 끝난 것이었는데
그날 이후 다카키마사오가 나서서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십 년을 장기집권하면서 반대파를 빨갱이로 몰아 처형하기 일쑤였다. 이승만이 농지개혁의 성공적인 혁신을 이끌었던 조봉암이 인기가 올라 유력한 정적으로 부상하자 그를 간첩으로 몰아 처형해버린 것을 보고 배운 것인가?
그 대표적인 것이 사법살인과 동백림사건 재일교포간첩단사건 등등 우리는 평생을 간첩사건을 지상으로 뉴스로 보면서 두려움에 떨었다
공산주의자가 보여준 한국전쟁 전후의 그 무자비한 폭력과 살해의 현장을 보았던 우리 민족은 세상에 가장 나쁜 것이 공산주의자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다카키가 살해되게 한 원인은 부마항쟁이 그 저변에 있다. 첫 쿠데타에 이어 친위쿠데타로 다시 유신헌법을 만들어 영구집권을 노리자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당시 중정을 책임지고 있던 김재규가 사태의 심각성을 보고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차지철은 캄보디아를 보라며 삼백만 명 정도는 탱크로 밀어 죽여버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김재규는 권총을 뽑아 다카키의 가슴을 쏘았고 놀라 도망가는 차지철을 화장실까지 따라가 처형한다
가슴에 총을 맞은 다카키는 김재규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의식이 있었고 당시 안가의 모임에 불려가 함께한 가수 심*봉의 물음에 괜찮다고 대답도 했지만 다시 돌아온 김재규는 그의 머리에 콩알구멍을 내고 말았다.
전두환은 당시 방첩대사령관으로 하나회의 우두머리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장태완사령관은 병력을 움직여 이들을 제압하게 되었는데 두환이 쪽이 전화로 항복하겠다고 하자 진격하던 공수부대를 물리고 이에 두환은 역습으로 장태완사령관을 제압하고 쿠데타를 성공한다.
광주는 두환이 무리에게 선택된 살륙의 대상이 된 도시였다.
그들은 계엄을 전국적으로 확산하여 쿠데타를 합법화 하기위해 반대하는 시위를 진압하고자 희생시킬 도시를 선정하는데 대전은 서울과 너무 가까워 위험해서 제외하고 부산과 대구는 인구가 너무 많아 제외하고 목포는 거리가 너무 멀어 제외하고 결국 남은 도시가 광주로 선정되었다고
당시 광주의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던 금마부대 공수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학생들과 평화롭게 대치하다가 나중에는 몽둥이로 학생들의 머리가 터지고 팔이 부러지는 상황이 되자 시민들이 함께 나서서 밀어부치니 군인들이 밀려 도시 밖으로 퇴각을 했는데 진격보다도 퇴각이 더 어려워 대형이 무너지면서 군인들이 다수 학생들과 시민군에 잡혀 폭행을 당하고 종래엔 서로 죽이는 상황이 되었는데
골목 속에 미리 매복대를 배치하고 학생들을 토끼몰이하듯 몰아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으면 학생들은 급한 김에 담장으로 뛰어오르고 군인들은 총은 각개로 뒤로 메고 대검을 뽑아 달려가서 담장에 붙은 학생들의 허벅지를 찔러 끌어내렸다고 했다
나중에는 상대방을 잡아서 머리를 전차의 궤도 밑에 넣어 부수는 일도 있었고
건물의 옥상에 앉아서 남녀노소 불구하고 사람만 보이면 백발백중 사격실력으로 머리를 맞추어서 살해했다고 한다
그렇게 살해된 광주시민이 공식적으로 육백여 명이고 비공식적으로 삼천 명이 넘는다
이 현장의 지옥도를 공수부대 친구가 휴가를 얻어 밀양 와서 밤이 새도록 증언했고 우리는 몸서리쳐지는 두려움에 떨었다
북한군 육백명 이야기는 없었다
누구를 위해 쿠데타를 무엇을 위해 일으켰던가?
대답은 간단하다. 다카키나 두환이나 마찬가지로 대통령이 되어서 부귀영화를 취하기 위해서였다
어찌보면 독립지사들을 빨갱이로 몰아 처형하고 권력을 독차지한 이승만과 자유당도 쿠데타라고 할 수 있다.
처벌 당하고 청산되었어야 할 일제 앞잡이들과 부역자들이 거꾸로 정권을 잡고 십 년 세월을 독립운동가들과 민중을 핍박하며 자유당독재를 일삼은 것이나
역시나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 토벌이 주임무인 일본군 소위였던
다카키의 쿠데타 이후 이십년의 개발독재와 간첩소탕놀음이나
실제로 간첩도 있었지만
다카키가 처형되자 그 바톤을 이어받은 두환이 무리의 쿠데타와 군부독재와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지금의 헌법
지금 헌법에는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 없다.
석열이는 헌법에 없는 짓을 포고령에 넣어 국회를 해산하고 두환이처럼 국보위입법부를 만들고 국회해산하고
사법부도 중지시키고 군사재판으로 영구집권을 획책한 쿠데타를 도모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이승만이 민주주의자인가?
민주주의의 반대개념은 군주주의다
제헌헌법은 민주주의를 채택했지만 이승만은 국민의 뜻에 반하여 사사오입개헌을 통해 영구집권을 원했으므로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민주주의란 말 그대로 민이 주인인 세상이다 국민의 뜻에 반하는 자는 그 누구도 민주주의자가 될 자격이 없다
다카키는 민주주의자인가?
그도 국민의 뜻에 반하여 쿠데타로 집권했고 유신헌법으로 영구집권을 노렸으니 군주주의자나 다름없다.
전두환은 민주주의자인가?
두환이도 마찬가지로 국민의 뜻에 반하여 쿠데타로 집권한 이상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석열이는 민주주의자가 맞는가?
이것도 역시 국민의 뜻에 반하여 쿠데타로 장기집권을 획책한 이상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결론은
자유민주주의를 마약처럼 입에 달고 사는 저들 자칭 보수 국짐당의 전신 자유당 이승만과 공화당 다카키 민정당 두환이 개누리당과 국짐당의 석열이
그 대부분이 국민의 뜻에 반하여 국외추방을 비롯 감옥과 처형 감옥으로 점철된 쿠데타의 독재자 무리들이 아닌가?
쿠데타로 일관되는 국민의 뜻에 반하는 자유당독재와 공화당 개발독재
신군부독재와 오늘의 이 검찰독재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이 독재자들이
어떻게 감히 스스로 자유민주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가?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저들의
뻔뻔한 행태
자유민주주의의 반대개념은 공산주의독재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의 반대개념은 군주주의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인 나라이고
군주주의는 왕이 주인인 나라이다
저들 쿠데타와 독재의 무리들이 노래하는 자유민주주의란 개념은 없다
그냥 민주주의와 군주주의가 있을 뿐
공산주의의 반대개념은 자본주의다
자본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공산주의가 나오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사회주의가 나왔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의 결함을 보완한 결과가 사회주의이고 수정자본주의다
우리는 평생동안 자유당과 공화당 민정당의 독재를 겪으며 살아왔고
그리고 다시 또 검찰독재를 겪었다
마침내 독재자는 감옥에 갇혔다
이종찬 광복회장의 표현을 빌자면
여우와 싸우던 곰이 마침내 철창에 갇힌 상황이다
이제 검찰독재를 끝내야 할 때다.
하루빨리 탄핵 인용으로 국민을 적으로 삼아 국회를 해산하고 사법부를 무력화하고 전쟁을 일으켜 통일을 하고 영구집권을 획책한 곰을 처형해야 한다.
우리 검찰도 선진 미국의 제도를 도입하여 검찰은 기소만 하고 수사는 경찰이 하여
다시는 검찰 쿠데타를 허용하지 않아야하고
대중선생의 사형판결이나 동백림사건 재일교포대학생간첩단사건과 사법살인과 같은 터무니없는 판결을 피하기 위해 배심원제 도입도 해야 한다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첫댓글 학교에선 배우지 못한 아픈 역사
감사합니다 선생님
건강하시고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