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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학 칼럼] 서사적 존재
요즈음은 그렇지 않지만, 시골에서 자랐던 세대는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 한 두 편쯤은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굳이 ‘부엉이가 울던 밤’이 아니더라도 별자리 이야기며 ‘여우 나는’ 산골 이야기 등 숱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그 동네 전설은 물론, 앞서 살았던 조상들의 영웅담을 듣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할 수많은 역사와 교훈을 접하게 됩니다. 유목민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구약성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별이 쏟아지는 밤에 하늘을 보면서 선조들이 겪었던 신앙의 역사를 이야기로 듣습니다. 낙원에 살았던 첫 조상 이야기를 비롯해서 형제 간 싸움 이야기는 물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고향을 떠났던 아브라함과 모세를 비롯한 성조 이야기와 그밖에 수많은 이스라엘의 고난과 영광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마침내 하느님이 인간을 더 이상 멸망시키지 않고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겠다고 하신 이야기를 듣고, 그 계약의 표시로 하느님께서 만드셨다는 별과 무지개를 보면서 그 안에 담긴 장대한 서사를 접하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은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 인간다운 인간으로, 또는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은 천문학적으로는 아무런 관련도 없지만, 우리는 그 안에 우리의 역사적 경험과 삶의 교훈,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의 규범 따위를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별자리를 만들면서 인간은 비로소 생물학적 인간에서 문화적 인간으로, 또는 윤리적이며 예술적인 인간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런 인간의 본성적 측면을 ‘서사적 존재’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그 이야기에는 역사적 경험에 대한 반성과 해석이 담겨있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현재의 삶에 필요한 수많은 이해와 함께 미래에 대한 기대와 기획이 담겨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인간다운 현재는 이렇게 과거를 해석한 이야기와 미래를 기획하는 이해가 만나 이루어집니다. 인간은 ‘지금’, ‘여기’의 시간을 살아가지만 그 현재는, 해석하고 이해한 과거와 기획하고 기대하는 미래가 만나는 그 ‘지금’이며 바로 ‘여기’입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인간이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도 이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서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서사 안에 해석과 이해가 담겨있고, 현재의 규범과 의미는 물론, 미래의 기획과 희망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서사를 통한 이해와 해석의 행위를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대한 지성적 작업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소박한 의미에서이지만 ‘철학적 존재’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야기를 통해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서사적 본능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있나요? 또 어떤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있나요? 이야기 안에는 나 자신의 역사와 미래가, 나의 윤리와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이야기를 잊어버리면 우리는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물질적 풍요로움은 말하지만 이러한 서사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밤은 어릴 적 나를 만들었던 그 이야기를 떠올려 보고,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를 만들어보았으면 합니다. 인간은 서사적 존재니까요.
[인간학 칼럼] 의미를 찾는 인간
인간을 서사적 존재라고 하는 까닭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이야기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물론, 경험하는 수많은 사건에 대한 나 자신의 이해가 담겨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스스로 이해하고 해석한 것이 바로 나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그 이야기는 곧 내 삶이자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를 서사라고 하는 까닭은 어렵게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는 일정한 의미 체계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이를 통해 다가올 삶과 내일의 우리 존재에 대해 기획합니다. 그것이 내 삶의 모든 것이며, 내 존재 전부가 그런 서사를 통해 해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의 서사가 곧 나 자신입니다. 서사를 바꾸면 내 삶과 그 안의 관계가 바뀌게 되고, 다가올 삶도 새롭게 이루어집니다. 내 삶에 담긴 객관적 사실과 무관하게 그 안의 의미는 이 서사를 통해 거듭 새롭게 드러나게 됩니다. 서사의 새로움은 내 존재의 새로움이니, 나의 서사가 바로 나 자신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삶의 서사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의미입니다. 의미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나의 이해이며 나의 해석입니다. 인간은 경험하는 모든 것, 만나는 모든 사람, 살아가야 할 모든 삶에 거듭거듭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 의미가 곧 서사의 본질이며, 내 삶의 모든 것입니다. 단순한 이야기를 서사로 드높이는 것은 바로 그 안에 담긴 의미입니다. 이 의미는 내 삶의 진실이며 내 존재의 의미입니다. 그 의미 전체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은 그 의미 안에 담겨있으며, 그 의미를 통해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무의미한 일을 참지 못합니다. 삶이 지겨운 까닭은 그 안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의미가 있으면 어떻게든 이겨내게 됩니다. 마침내 불가능한 것들이 이루어지고, 전혀 새로운 삶이 다가오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의미가 깊을수록 삶은 드높아지고, 더 높은 존재로 도약하게 됩니다. 인간을 ‘그 이상의 존재’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의미를 통해 결단으로 다가옵니다. 낯설었고 미웠던 그 사람도 다른 존재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 안에 내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 의미를 통해 자신의 삶과 존재를 만들어가는, 로고스(logos)적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이 의미는 어떻게 주어지는 걸까요? 현대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체제를 보통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정치와 경제를 포함한 사회 체제로서 자본주의와 사물을 해명하고 지식을 설정하는 체제로 과학주의를 말합니다. 그와 함께 정치와 사회 체제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런 체계들은 이 존재론적 의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 문제를 개인의 자유와 결단으로 돌려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의미 체계는 인간 존재의 근본입니다. 이 체계가 없다면 인간은 깊은 공허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을 존재론적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그것이 인간의 존재 전체를 결정하는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를 추구하
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며, 우리 삶의 전부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나는 어떤 의미 체계 위에서 살아가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그를 부둥켜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공허의 심연을 벗어나 그 이상의 존재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인간학 칼럼] 로고스적 존재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의 핵심 물음입니다. 철학은 인간이 관계되는 모든 주제를 해명하는 학문이지만, 그 과제는 인간에 대한 이해로 모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지만, 그 이해가 또한 인간이 접하게 되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토대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철학의 핵심이며, 그에 따라 세계의 모든 사물과 사건이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이를 철학에서는 해석학적 순환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자기 이해이면서 또한 이 자기 이해가 인간이 이루는 모든 활동의 토대가 된다는 말이지요. 문화와 과학기술, 학문과 예술 등 모든 것은 이 자기 이해 위에 자리합니다.
고대 철학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자기 이해를 ‘로고스를 지닌 존재’라고 표현합니다. 로고스(logos) 개념은 다양한 의미를 지닙니다. 인간이 가진 ‘말’을 가리키거나 또는 인간의 본성적 능력인 이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나아가 세계를 이루는 근본 원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한 단어가 여러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한 단어로 이 모든 것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을 로고스적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해명하는 지성적 능력을 지녔으며, 그것이 말/말씀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 핵심적 원리가 세계의 근본 이치이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이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유럽 철학의 핵심적 주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철학의 질문이 결국 인간에 대한 자기 해명에 있다면 이 전통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인간에 대한 정의에 가장 잘 부합한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근대에 이르러 유럽의 계몽주의는 이런 전통을 바탕으로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해명합니다. 그래서 칸트는 이성을 인간의 본질로 이해하고, 이를 실현하는 계몽을 인간의 본질적 의무로 강조합니다. 계몽이란 자신의 이성을 스스로 사용하지 못하는 미성숙함에서 벗어나 이성을 토대로 해서 외부적 권위가 아니라 ‘감히 스스로 행동’하도록 촉구합니다. 계몽은 인간의 의무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 되는 결정적 원리입니다. 계몽은 밖으로는 현대 세계의 모든 것은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면서 또한 안으로는 인간다움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이성의 빛을 내면으로 비추어 성찰하는 것이 인간이 인간인 까닭이란 말이지요.
오늘날 많은 철학이 이런 전통을 비판하는 까닭은 이 안에 담긴 인간중심주의 때문입니다. 과연 인간은 세계의 주인이며 모든 존재의 중심일까요? 아니면 인간은 그저 세계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생명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일까요?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철학은 인간은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 생명이 이루는 거대한 그물망의 한 코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그 안에는 현재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현실적이며 문화적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일면적인 인간 중심과 로고스 중심의 철학을 비판하는 흐름이 자리하고 있지요.
[인간학 칼럼] 공동체적 존재
흔히들 실존적이며 생리적인 관점 때문에 인간을 독립된 개체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을 넘어 보다 깊이 생각해 보면 사람은 개체적 측면 이상으로 공동체적 존재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사람과 관계 안에서만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없으면 말을 배울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없으면 인격적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우리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입니다. 인간다움을 인격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우리가 다른 인격체와 관계 안에서 우리의 인격을 형성하고 또 그렇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인격이란 사람과 사람이 맺는 인간다움에 대한 표현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을 인격적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인간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위격적 관계를 따르는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인간이 다른 인격과 맺는 관계 안에서야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은 그의 본질이 공동체적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인간의 관계적 본성을 흔히 사회적이거나 공동체적 존재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까닭에 인간은 가정과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교회나 학교, 마을은 물론 넓게는 국가와 같은 다양한 공동체의 모습은 이런 본성이 표현된 결과입니다. 또한 우리가 만드는 모든 문화, 과학과 예술, 학문 역시 이러한 본성 때문에 가능해집니다. 그럼에도 공동체는 이렇게 형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인간이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공동체적 본성은 인격적 관계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공동체는 그 집단의 외형적 모습이나 그 체제가 아니라 그 안에서 맺는 인격적 관계의 총합입니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공동체적 존재라는 말은 우리의 인간다움은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 안에서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관계맺음 안에서 인간이 되고, 이렇게 이루어가는 공동체적 특성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이런 본성을 얼마나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격적 크기가 결정됩니다. 내가 만든 공동체의 크기가 바로 나 자신의 크기입니다. 그 공동체의 인격적 관계가 바로 나의 인격입니다. 또한 개인의 이익을 넘어서는 공동체적 덕목인 공동선이 중요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두 관계는 결코 대립적이거나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보증하는 상호성 안에 자리합니다.
이런 공동체적 본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실존적이며 개체적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공동체적 특성에 담긴 양면성이 자리합니다. 이 두 가지 특성은 따로 존재하는 각기의 요소가 아니라 어우러져 하나가 됨으로써 우리 본성을 만들어가는 요소입니다. 그런 까닭에 인간이 만드는 공동체에는 흩어짐이라는 특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 본성의 근본적 모순은 이런 양면성 때문에 생깁니다. 공동체적 존재이기에 한 데 모일 수밖에 없지만 각자의 실존적 본성을 유지해야 하는 존재이기에 우리 본성에는 ‘따로, 그러나 함께’라는 특성이 작용합니다.
이런 특성을 철학적으로 ‘흩어지는 공동체’라는, 얼핏 보기에는, 모순적인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내 인격의 고유함과 독특함을 유지하고 달성함으로써 공동체를 만들어간다는 뜻이지요. 공동체적 존재이기에 우리가 전체에 흡수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큰 잘못입니다. 오히려 그 특성은 각기 인격의 고유함과 특성을 달성하기 위한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이 두 가지 본성을 잘 어우르고 통합하면서, 그 갈등과 모순을 조절하는 데서 우리 인격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인간학 칼럼] 아름다움 – 심미적 존재
우리는 본능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좋아합니다. 아름다운 노래, 아름다운 꽃 등, 심지어 사람조차 아름답기를 원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찾는 마음은 인간 본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진화생물학에서는 생존에 유리한 형질이 아름다움의 토대라고 말합니다. 예술가들은 아름다운 예술의 기준을 만들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추하다고 합니다. 고급 예술과 고전 예술 작품이 지닌 탁월함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테지요. 과연 아름다움에 대한 이런 기준은 타당할까요?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사람은 생리적으로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마음을 통해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이 마음은 생리적 차원을 넘어 문화적이며 의미론적입니다. 그러니 아름다움은 문화적으로 결정된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진화생물학적 인간학은 문화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판단에 많은 오류가 있습니다. 물론 문화를 공유하기에 아름다움이나 예술에 대한 보편적 느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모두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 모두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하기도 하고, 그때마다 다르게 형성되기도 합니다. 이는 예술사를 돌아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지요.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몸과 마음에서 시작되지만, 우리가 지닌 의미의 터전을 벗어나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자연적 조건과 문화적 토대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람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아름다움 역시 그러합니다. 인간의 마음과 느낌은 몸이라는 보편성 안에서 형성되지만, 그럼에도 그때마다의 고유한 문화적 토대를 벗어나 있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학의 동일성과 차이 원리입니다. 같은 인간이기에 우리는 동일성을 지니지만, 그럼에도 나만의 고유함에서 오는 차이를 지닙니다. 예술은 아름다움의 동일성을 차이로 만들어냅니다. 차이의 아름다움이지요.
철학은 언제나 아름다움을 진리 및 선(善, 좋음)과 연관하여 논의합니다. 참됨과 좋음은 그 본성 때문에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참됨과 좋음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참되고 좋은 것이지요. 가짜 꽃이 초라하게 보이고, 표절 예술과 진부한 예술이 아름답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아름다움을 느끼고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은 우리 안에 참됨과 좋음에 대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도 본성적으로 이런 특성을 가꾸고 지켜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인생은 고난이 없거나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참됨과 좋음을 간직하기에 그러합니다.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라면 사람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존재일 수밖에 없지요.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올곧음과 참됨, 정의와 열정, 이웃을 향한 희생은 물론, 자기 절제가 뛰어난 사람을 아름답다고 말하지요.
철학에서는 “예술이 구원과 해방을 준다.”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아름다움을 만드는 그 마음이 우리를 온갖 억압과 구속, 무지와 야만의 어두움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뜻입니다. 야만이 넘치는 곳에서의 예술을 하고, 고통받고 죽어가는 이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기꺼이 함께하려는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마음 때문입니다. 인간은 아름다움 자체, 심미적 존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