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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모형 속죄소
25: 17-22
17.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8.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 한 그룹은 이 끝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찌며
20.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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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성막 여행을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소는 외소와 내소로 나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깥들인 외소에는 맨 먼저 번제단이 있었지요? 희생제물을 드리는 번제단에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죄사함을 받고 나면,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징된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어야 했는데,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라도 영혼의 거울인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회개하는 일을 등한히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외소에서 내소인 성소로 들어서면 좌측 중앙에 금촛대가 있었다고 했지요? 창문 하나 없는 성소는 이 금촛대에서 비취는 빛으로 말미암아 금빛이 찬란하다고 했습니다. 이 촛대는 죄악으로 어두운 세상에 참빛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천국 시민된 그리스도인의 사명으로서 우리는 어둔 죄악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금촛대의 반대편에는 진설병을 항상 진설해 놓은 떡상이 있었다고 했지요? 이 떡상의 진설병은 곧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생존경쟁을 하고, 죽지 않으려고 하루 세끼 꼬박 꼬박 밥을 챙겨 먹지만 그러나 그 밥을 먹고 영원히 산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오직 하늘로부터 내려 온 산 떡이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소 안에 있는 세 번째 성구는 분향단이었습니다. 분향단은 제사장들이 향을 사르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던 곳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저절로 풍기는 소합향 같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기도의 갈급함에서 우러나온 기도이어야 하고, 조개껍질을 부수어서 만든 나감향 같이 자아가 완전히 깨어지고 부수어진 기도라야 하고, 소독제로 쓰였던 풍자향처럼 영혼의 독소를 제거하는 회개의 기도라야 하며, 유향처럼 우리에게 닥친 재난과 불행을 제거해달라는 얍복강가의 야곱과 같은 간청의 기도라야 하며, 이 모든 기도에 언약의 상징이었던 소금처럼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향같은 기도라야 하늘 보좌에까지 올라가는 응답받는 기도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기도하는 성도들 곧 진실하게 기도하는 성도를 가까이 하시고, 그리스도인의 신랑 되신 예수님 역시 기도의 향이 있는 신부를 더욱 사랑하시므로 기도의 향이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속죄소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형태상으로 볼 때는 법궤를 덮는 뚜껑에 불과합니다. 속죄소의 히브리어 원어인 ‘케포레트’는 ‘덮는다’(cover)라는 뜻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 성경에도 난외 각주에 ‘뚜껑’이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것은 법궤의 한 부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법궤의 한 부분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독립된 성구로 봅니다. 그리고 ‘덮는다’는 어원도 하나의 뚜껑으로 보기 보다는 ‘죄를 덮는다’ 뜻으로 보아서 속죄소라고 번역된 것입니다. 레 16:14절에는 ‘시은좌’라고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곳에서 이스라엘과 만나기를 약속했고, 거기에서 이스라엘에게 말할 모든 것을 이르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속죄소란 바로 이스라엘의 자녀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악을 속량하는 처소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처소로 지정된 곳입니다. 영문 번역에서는 흔히 이것을 mercy-seat라고 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1. 속죄소의 구조
속죄소는 순 정금으로 만들어졌고, 그 길이와 넓이는 꼭 법궤와 같습니다. 길이가 2. 5 규빗이요, 폭이 1.5 규빗입니다. 이것을 환산한다면 길이는 5척이요, 폭은 약 3척이 됩니다. 그 두께는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정금판입니다. 그 양 끝의 두 그룹도 정금으로 쳐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성소 안에 순 정금으로만 되어진 성구는 속죄소와 금 등대뿐입니다. 이렇게 정금으로만 되어졌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면 이제 그 속죄소가 보여 주는 계시는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속죄소의 계시
위에서 언급한 대로 속죄소란 구조상으로 법궤 뚜껑입니다. 그 법궤 안에는 하나님의 계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 첫 번 계명의 돌비는 모세가 아론과 이스라엘의 군중 앞에서 깨어 버렸다는 사실은 너무도 유명한 일입니다. 그러한 그의 행동은 생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법한 이스라엘은 영원한 죽음 밖에 다른 길이 없음을 알고, 그들과 같이 자기도 하나님 앞에서 죽으려고 했던 것이 그 때의 모세의 결심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낙심한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꾸짖지 않으시고 다시 불러서 처음 것과 같은 계명을 다시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계명이 표면으로 드러날 때는 이스라엘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써 그의 준엄한 율법이 드러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과 자비의 뚜껑이라고 하는 속죄소입니다. 그런데 이 속죄소가 상징하는 계시는 성경에 나타난 대로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구원은 오직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질 것을 계시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우리 앞에 내세운다면 아무도 살 사람은 없음을 속죄소는 보여줍니다. 그 증거로 삼삼 6:19에 보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 5만 70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심으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벧세메스 사람들이 5만 70인이나 그처럼 갑자기 죽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법궤를 들여다 본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법궤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그 뚜껑을 열었을 것이 아닙니까? 그 뚜껑은 곧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표시하는 속죄소입니다.
이처럼 속죄소를 제거한 법궤는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그 은혜를 제하여 버린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준엄한 율법 앞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동적으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벧세메스의 사건은 이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벧세메스의 사건은 이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벧세메스의 심판은 무슨 예고 없이 주의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벌써 민 4:20절에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법궤)를 보지 말 것은 죽을까 함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것은 그의 율법을 바라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곧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법궤가 하나님의 율법을 계시하는 것이라면, 그 뚜껑인 속죄소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계시합니다. 속죄함이 없는 율법만이라면 그것은 죽음이요 심판을 의미하는 것뿐입니다. 속죄소가 없는 법궤는 참으로 무서운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의 율법을 때가 올 때까지 덮어두도록 했습니다.
이 사실은 곧 범죄한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속죄소를 ‘시은좌’라고 번역함도 그러한 뜻일 것입니다.
레 16:14절에 보면 “그는 또 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번 뿌릴 것이며”라고 한 것을 봅니다. 이것은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속죄소를 위하여 행해야 할 예식을 지시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속죄 역사의 완전성을 계시한 것이라고 봅니다. 분명히 송아지의 피는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또 일곱번이라는 7 수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완전을 계시하는 소위 완전수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이 1년에 1차씩 속죄소를 향하여 수송아지의 피를 일곱번 뿌려야 한다는 그 예식은 곧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의 은혜가 어떻게 완전한 것임을 가르쳐 주기 위한 하나의 모형인 것입니다.
2)속죄소는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확실성을 보여줍니다.
출 25:20절에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ㅏ로 대하여”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즉 두 그룹이 속죄소의 양 끝에서 서로 속죄소를 바라보며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것을 덮게 했습니다. 성경에서 보는 대로 그룹의 직임의 하나는 하나님의 역사가 완전히 성취되기까지 지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지소를 주목하며 그것을 덮고 있는 두 그룹들은 곧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의 속죄사업을 주의 천사들이 어떻게 지키며 확실케 할 것을 모형적으로 보여 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를 막을 자는 없습니다. 왜 속죄소의 두 그룹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자들로 그것을 친히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3)속죄소는 인간이 만나는 유일한 곳이 어디인지를 보여 주는 모형입니다.
출 25:25절에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개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네게 이르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속죄소는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교통하는 곳입니다. 사람이 속죄소 밖의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과 만날 수 없었습니다. 만나는 때는 곧 죽음이었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속죄소는 하나님의 공의는 덮어지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만이 나타나는 곳이었습니다. 이처럼 법궤를 덮는 속죄소는 하나님의 공의를 그의 긍휼로 덮어버리는 모형인 동시에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 긍휼이 같이 만나고 서로 입맞추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곧 중보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모형인 것입니다. 인간은 오직 그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누구나 그 속죄소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직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대속의 피를 가지고만 나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속죄소 안에는 곧 휘장이 쳐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속죄의 길이 일년에 한번씩의 수송아지의 피로 드리는 아론의 제사로서는 완전히 열리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제 히브리서의 기자는 누구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제사로써 휘장은 완전히 제거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운명의 바로 그 시간은 곧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그 휘장은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업은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부터 이 땅 위에 이루어질 것임을 계시하는 것이라고 보아 좋을 것입니다. 또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그 휘장은 꼭 중앙이 찢어졌습니다. 이것은 지성소에 있는 법궤와 속죄소가 온전히 드러나기 위함일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벌써 그 지성소에는 법궤도 속죄소도 있지 않았습니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휘장이 제거되었지만 옛날의 그 지성소의 속죄소 앞으로 나갈 수는 없습니다. 정금으로 되어진 속죄소는 벌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지성소아 아니라 영원한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셨습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을 힘입어 그 하늘의 시은좌로 직접 담대히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지상의 지성소는 영원히 허무하게 만든 것으로 믿습니다. 지상의 성소는 현재까지의 비유라고 히브리서의 기자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성소가 그리스도 자신의 비유라면 속죄소는 그의 십자가의 비유요 모형입니다. 이 십자가는 구약의 속죄소의 실체이며 시은좌의 실상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