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1(히3:7-19)
히브리서는 모세와 아들과의 대비를 통하여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한다(히3:1).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잡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는 것이다(히3:6).
여기에서 집이라는 말은 모세 언어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교회를 가리킨다.
구약에서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휘장으로 가리고 계셨다.
그러나 종말에는 아무런 가림이 없이 교회 가운데 거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이처럼 히브리서는 모세 제도를 토대로 교회를 설명한다.
성전제도를 토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과 은혜를 설명한다.
히브리서는 율법 아래의 일들을 예로 들어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굳게 잡을 것을 강조한다(히3:7-11).
시편을 인용하여 권고함.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95편을 인용하여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을 권면한다.
시편 95편을 인용하여 조상들처럼 불평하지 말고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 경배해야 함을 말한다.
출애굽 1세대는 므리바와 맛사에서 여호와를 시험하다가 광야에서 다 죽었다.
그들은 모세에게 속하여 바로의 권세 아래에서 구원을 받고
구름과 바다를 지날 때 세례를 받은 자들이었다(고전10:1-2).
그러나 중보자 모세를 믿고 붙들지 않음으로 여호와를 거절하였다.
그 결과 언약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다.
광야 40년 동안 만나와 반석의 물을 공급하신 그리스도가 누구인가(고전10:3-4).
바로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셔서 광야로 인도하시고,
광야 40년 동안 만나와 반석의 물로 먹이고 입히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끄신 여호와이시다.
이처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바로의 권세 아래에서 구원하시고,
광야 40년 동안 만나와 생수로 먹이셨던 구약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그들은 여호와께서 보내신 모세를 불평하고,
모세를 끝까지 믿지 못하고 붙잡지 않음으로,
그를 보내신 여호와께 불순종하였다.
이는 모세를 믿지 못함은 그를 보내신 여호와를 대적함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1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함.
이스라엘은 아래로부터 나서 할례를 행하여 여호와 언약에 참여하였다.
언약에 참여함이란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처럼 아래로부터 나서 땅에 속한 백성이므로
그들에게 주어진 기업은 가나안땅이다.
그들이 드려야 할 제물과 예물도 가나안땅에서 생산된 소산물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아래로부터 나서 땅에 속하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도 휘장으로 가리시고 가나안땅에 거하셨으며,
가나안땅의 소산물로 제물과 예물을 드릴 것을 요구하셨다.
그런데 가나안땅의 소산물로 드리는 제물과 예물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불을 통과해야 하였다.
이는 이스라엘의 기업인 가나안땅은 죄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아래로부터 나서 육신에 속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주어진 기업도 가나안땅이며,
그들에게 요구된 제물과 예물도 가나안땅의 소산물이다.
그런데 아래로부터 났다고 함은 인간의 출생방식을 따라 태어났다는 말이다.
이는 죄와 사망 아래에 세워졌다는 말이다.
이러한 신분과 위치에 합당한 언약(계약) 내용이 모세율법이다.
따라서 모세율법은 이스라엘의 종과 어린아이와 같음에 맞춰진 언약(계약)내용이며
이스라엘 완악한 수준에 맞춰진 여호와의 뜻이고
죄의 울타리 안에서 시행된 여호와의 통치질서이다.
그런데 개혁신학은 율법은 지고한 여호와의 뜻이므로
인간이 지킬 수가 없으며
하나님이고 사람이신 예수께서 율법을 온전히 지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율법을 지켜서 얻은 의는 율법의 의로움이다.
율법의 의로는 가나안땅에 거할 수 있으나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이스라엘은 아래로부터 나서 세상(땅)에 속한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기업은 가나안땅이며
그들에게 주어진 안식도 가나안땅에서 주어지는 안식이다.
이는 가나안에서 전쟁이 없는 평화와 전염병이 없이 장수함,
자녀들의 많음과 세상의 머리가 됨과 같은 것들이다.
이는 모세를 믿고 붙들어서 들어간 가나안땅에서 주어지는 안식이다.
모세를 믿고 그의 말을 붙든다고 함은
모세를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믿고 따른다는 말이다.
모세의 말은 여호와의 음성이며
모세의 사역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로 믿는다는 말이다.
가나안땅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신 거룩한 영토이다.
따라서 가나안땅은 아담 이후로 옛 세상에 설립된 새로운 에덴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안식의 땅이다.
그러나 출애굽 1세대는 모세를 믿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시험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다.
이러한 조상들의 불순종을 예로 들어서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 출신 형제들에게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들라고 권면한다.
출애굽 1세대가 여호와께 불순종하여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들지 않는다면,
참되고 온전한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고 경고한다.
믿는 도리를 굳게 붙들어라.
예수의 죽음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결과이다.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율법 아래에 보내셨기 때문이다(갈4:4).
그런데 율법 아래는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곳이다.
이는 율법이 시행되는 가나안땅을 의미한다.
가나안땅은 죄가 지배하는 세상에 속한 영역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순종하신 아버지의 뜻에 대하여 개혁신학은 모세율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예수를 율법 아래에 보내신 아버지 뜻이다.
이 말은 죽음의 자리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아버지께서 죽음의 자리에 보내셨음을 아셨음에도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신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죽음의 순간을 향하여 나아가신다.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으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신다.
이러한 예수의 믿음은 이전에는 없던 믿음이다.
이전의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불순종하여 다윗왕국은 멸망하였다.
따라서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온전한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창세 이후의 시대를 믿음이 오기 전과 후로 나눈다(갈3:23-29).
믿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 아래에 있었으나(갈3:23-24)
믿음이 온 후에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갈3:25-29).
이처럼 믿음이 오기 전과 후를 대비하여
바울은 이제는 율법을 따라 행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율법이 명하는 성전제사나 이방인과 교제를 금하는 일,
십일조와 같은 율법을 행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해보라고 충고한다.
이러한 충고는 우리의 중보자 예수의 말만을 따르라는 말이다.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다(히3:5).
따라서 이스라엘이 모세를 믿고 그의 말을 붙들면
모세가 충성한 그 집에서 모세와 같은 영광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생명과 의로움은 모세율법을 굳게 붙드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속하여 여호와의 백성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중보자 모세와 모든 것을 함께 한다.
그들은 모세가 증거한 이상의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모세가 누린 이상의 여호와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
이는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집 맡은 아들이며 상속자로서 충성하였다(히3:6).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의 말을 끝까지 붙들면 예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정결케 하시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
그런데도 만물은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재림하시면 만유의 후사임을 드러날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담대한 소망과 자랑의 토대이다.
이처럼 히브리서는 가나안땅의 안식과 그리스도 안의 안식을 대비하여
그리스도를 굳게 붙들라고 권면한다.
출애굽 1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개혁신학의 구원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서로 양립될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으며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훼손된다.
이러한 개혁신학 가르침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를 대립하는 개념으로 생각함은 합당하지가 않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각 시대 백성과 맺은 언약을 따라,
각 시대 백성과의 언약에 의한 관계를 따라 그들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은 구원역사의 진행 시점을 따라,
각 시점에서의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이루어진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는 언약에 따라 다르게 이루어진다.
이러한 언약에 의한 관계를 따라 하나님 사역 내용도 달라진다.
옛 언약 백성에게는 휘장으로 가리신 하나님으로 나타내시고
신약 백성에게는 아버지로 나타내신다.
구약에서는 휘장의 장벽을 두신 두려우신 하나님으로 역사하시며
신약에서는 아무런 가림이 없는 아버지로 역사하신다.
따라서 성경을 해석할 때는 구원역사의 어느 시점에 위치하는지를 살펴야 하며
우리의 중보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중보자 모세를 믿고 그의 말을 들어야 하고
우리는 아들 중보자 예수를 믿고 그의 말만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예수의 말을 들을 수 없고 우리는 모세의 말을 들으면 아니된다.
우리는 아들 중보자 예수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
구약성경은 우리의 실제가 아니라 거울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모세를 믿지 못하고 열 번이나 여호와를 시험하였다.
여호와를 시험한 이유는 먹고 마시는 문제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공급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자극적이며 정욕적인 것들을 원하였다.
또 여호와께서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 하셨으나
그들은 눈 앞에 펼쳐진 현실만을 보았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라.
목회자들은 구약성경도 성령으로 감동된 하나님 말씀이므로
십일조를 행하여 말라기서가 약속한 복을 누리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이스라엘처럼 옛 언약 당사자라면
여호와께서도 언약(계약)내용인 율법에서 약속한 복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새 언약에 속한 백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옛 언약(계약)내용인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기업도 가나안땅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천국이다.
우리의 중보자는 모세가 아니라 예수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말만을 들어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늘에 속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