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단수필의 생성과 확산, 안 된다
- 힘겹게 쌓아올린 수필의 위상을 무너뜨릴 위험한 시도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이 글은 1990년 한때 우리 문학계에 붐을 이루었던 미니문학의 기원에 대해 알아보고, 현재 수필계 일부에서 불고 있는 단수필과 그것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진단해서, 왜 단수필이 수필을 위협하는지 그 이유를 에세이문예 가을호부터 권두언에 실어, 연재 형식으로 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무슨 일이고 간에 안 하니만 못한 게 있다. 바로 단수필의 시도, 생성과 확산이다.
수필문단의 가장 큰 문제는 분별력 없는 실험성이 난무하는 것이며, 이를 추종하는 일이다. 나는 우리 수필을 어지럽게 하고 있는 요인으로 전시성 효과와 안일한 창작성을 부추기는 행위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단수필이 단순히 전통적인 수필의 틀에 반기를 든 것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단수필의 유행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우리 수필의 외연을 확대한 것뿐이다. 외연의 확대는 수필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천 자도 안 되는 제한된 글자수로 주제를 내면화하고, 문장을 형상화하기에는 한계가 따르기 마련이다 보니, 짧은 수필에서 문학성을 찾기는 어렵고, 한 나절이면 쉽게 쓸 수 있으니 너도나도 단수필에 달려들고 있다. 격이 떨어지는 단수필은 쉬운 접근성을 내세워 수필의 권위를 떨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본격문학으로서 수필문학의 위상을 서민문학으로 끌어내렸다고 하겠다.
흔히 ‘미니픽션’의 원조로 남미의 스페인문학을 꼽는 경우가 많은데, 물론 장르 명칭이나 1990년대 이후 ‘미니픽션’이 한국문학에 소개된 데는 남미문학이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나 우리 문학에서도 그 뿌리를 찾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혹자는 우리 문학사에서 단수필의 뿌리를 고려시대에 향유되었던 가전체문학과 설문학을 들기도 한다. 그러나 전자는 길이가, 후자는 길이는 짧지만 장르적 속성이 수필과 달라 단수필의 기원으로 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참고로 고려조 가전체문학은 인간사의 다양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특정 사물을 의인화하여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선함과 악함, 옳음과 그름을 강한 풍자성을 가지고 표현한 글로 그 길이가 번역문 기준으로 보면, 2000~3000자 정도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술’을 의인화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는 군주를 비판하면서 술로 인한 폐해를 드러낸 『국순전』을 비롯하여, 누룩 등을 의인화하여 당시의 문란한 정치·사회상을 비판한『국선생전』등이 있다. 한편 설문학은 일반적으로 사실과 의견의 2단 구성을 취하게 된다. 즉 ‘전제와 결론’, ‘사실 제시와 의미부여’, ‘개인적 체험과 그 체험에 따른 보편화 및 깨달음’ 등의 양상으로 글이 전개된다. 이는 수필문학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기도 하지만 허구적 내용으로 창작되어 소설적 요소를 지닌 것들도 있다. 『슬견설』, 『차마설』, 『경설』 등이 있는데 이 작품들은 모두 번역문 기준으로 1000자 안팎의 짧은 글로서 풍자, 의인, 우의와 같은 문학적 기교를 고도로 사용하고 있다.
앞서 약술한 바와 같이 가전체문학은 그 길이가 현재 단수필로 지칭되는 수필의 길이와 두서너 배 이상 길기 때문에 단수필과 거리가 멀고, 설문학은 길이가 1000자 정도로서 현재 단수필과 비슷하나 허구로 창작된 글로서 소설적 요소를 가지기 때문에 단수필의 기원이나 뿌리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하겠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단수필은 고려조 가전체문학이나 설문학의 역사적 뿌리를 계승하면서 발전적으로 이어져 온 게 아니라, 단지 스피드를 중요시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하나의 어설픈 시도에 불과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