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40] 김관해 (金官楷) - 여생도 최선을 다하리라 9. 종로교회 목사와 서울교구장 시절 1 1974년 5월에 서울교구장을 맡게 되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교구장으로는 한국에서 마지막이라 하시고 앞으로 해외에 나가려면 서울교구장을 거쳐야 한다고 하셨다. 2 서울 복귀를 위해 문서선교에 역점을 두었다. 원리강론 5백 권을 장관, 국회의원, 언론기관 대표, 구청장, 경찰서장, 대학 총장, 학장들에게 배포했다. 원리강론 첫 표지에 이런 글을 찍었다. “국사를 의논하시거나 인생을 사는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원리강론을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3 많은 회답도 받았다(특히 공화당 원내총무 김용태(金龍泰) 의원과 김재광(金在光) 의원 등).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1974년 서울교구 내 교역 본부에만 전화가 2~3대 정도 있었다. 음국배(陰國培) 교역장이 수백만 원을 헌금(전화 가설비)하여 전체 교역 본부에(10개소) 전화를 가설할 수 있었다.
4 종로교회가 교구 본부로서 면모를 갖추지 못한 것은 우선 성전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매입을 위해 엄덕문(厳徳文) 장로께서 3백만 원, 협회 보조 3백만 원, 그 외 식구들의 헌금 등으로 9백만 원을 주고 종로구 팔판동에 3층 건물을 구입하고 헌납하였다.
5 여의도에서 개최됐던 역사적인 구국세계대회와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희망의 날 행사, 논산 할머니의 조상해원식 역사는 서울교구장 시절에 있었던 기억할 만한 일이다.
6 할머니와 같이 1개월여 철야를 하며 경남과 서울 교회들을 순회하였다. 국제승공연합 서울특별시단을 창립하고 초대 시단장을 맡아 승공 강의를 본격적으로 했다. 그때 잊을 수 없는 것은 궐기대회(한•일 관계 악화로)를 열고 시가지(종로•세종로)를 돌며 시위를 한 것이다. 7 1975년 7월 청평회의 시 선생님은 나에게 중앙수련소 부소장과 120일 수련회 강사로 임명해 주셨다. 이때부터 수련회를 강화하여 21일, 40일, 120일 수련(3단계)을 실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