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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도
골로새서 2:6-15절 2013/7/28(주일)
2:6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2:7 여러분은 그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을 굳게 하여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2:8 누가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로, 여러분을 노획물로 삼을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라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2:9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십니다.
2:10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와 권세의 머리이십니다.
2:11 그분 안에서 여러분도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 곧 육신의 몸을 벗어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2:12 여러분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2:13 또 여러분은 죄를 지은 것과 육신이 할례를 받지 않은 것 때문에 죽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2:14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으셔서, 우리 가운데서 제거해버리셨습니다.
2:15 그리고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셔서, 뭇 사람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상투적이지만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이 시간의 인사말이 참 좋습니다.
‘할렐루야 아멘’의 인삼말도 좋지만 저는 주님의 은총(카리스)과 주님의 평화(샬롬)를 나누는 이 인사말이 더 좋습니다.
첫째는 이 인사말 속에 저와 우리교회의 모든 정체성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의 삶의 자리인 교회공동체가 무엇인지를 드러내 주는 아주 귀한 인사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총(카리스)과 주님의 평화(샬롬)라는 이 인사말 속에 저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소명감입니다.
인생의 목적이지요.
이것이 이 인사말에 담겨져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존재입니다.
구원받을 만한 그 어떤 것도 없는 죄인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은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 은총 받은 자로서의 삶, 그 삶의 소명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상투적이지만 이아침에 여러분과 나누는 인사말 속에서 이런 저의 소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왕에 이렇게 된 것 상투적인 질문 하나 더 드리지요.
제가 설교 서두에 늘 즐겨 던지는 질문인데 혹 기억하십니까?
제가 늘 드리는 상투적인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주님 안에, 말씀 안에서 살려고 치열한 몸부림을 치셨는지요?
상투적인 질문 같습니다만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늘 이런 질문 앞에 서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살려고 몸부림을 쳤는지, 말씀 안에 살려고 애를 썼는지,
이런 질문을 늘 나 자신에게 던져보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건강해 지고 교회 공동체도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산다는 것, 말씀대로 산다는 것
사실 막연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사실 감이 잘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요.
이런 방법은 어떻습니까?
제자 즐겨 사용하는 방법인데 늘 주님과의 접촉점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손에 잡히는 곳에 말씀을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반드시 정해놓고 엎드리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특히 주일 예배를 목숨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과의 접촉점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과의 접촉을 중지해야 합니다. 우선 TV, 인터넷, 그리고 스마트 폰과 같은 문명의 이기와의 단절입니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에 완전한 단절은 불가능하지만 가능하면 그것들과의 접촉을 우선 줄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가끔 수도원적인 생활을 그리워합니다.
저에게 안식년이 주어진다면 강원도 태백에 있는 예수원에서 일정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수도원이 정한 성무일과(聖務日課, Officium Divinum)에 따라 매일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노동함으로 기도의 영적 근육, 말씀의 영적 근육, 사랑의 영적 근육을 만들고 싶습니다.
우리에게는 낯선 전통이지만 이슬람 세계에서는 7월 10일을 전후로 해서 종교적 의무가 있는 라마단 절기를 지킵니다.
라마단 들어보셨지요?
라마단이란 이슬람력으로 아홉 번째 달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슬람력에서 아홉 번째 달은 하나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무함마드에게 꾸란을 가르쳤다 하여 무슬림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달입니다.
지금이 라마단 기간입니다.
라마단이 되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종교적 의무가 있습니다.
해 뜰 무렵부터 해 질 때까지 금식을 하면서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를 드리는 일입니다.
해 뜰 무렵부터 해 질 때까지 물 한 모금 마셔도 안 됩니다.
그만큼 라마단 기간의 종교적 의무는 아주 엄격합니다.
대낮 기온이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중동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금식을 한다는 것은 정말 참기 어려운 입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노약자, 환자, 어린이, 임산부 등은 금식의 의무를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종교적 열심을 드러내기 위해 금식의 의무가 없는 노약자, 환자, 어린이, 임산부까지 라마단에 동참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정도로 그들은 아주 열심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들은 이런 고행에 가까운 종교적 의무를 행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라마단이 주는 유익 때문입니다.
1961년 5월 16일 제2사령부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에 의해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처럼 1958년 이라크에서도 군사쿠데타가 일어납니다.
그 때 감옥에 수감된 한 정치지도자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금식은 개인적으로 알라에 대한 순종과 그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는 정신적 훈련이며, 사회적으로는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에 대한 동정과 모든 무슬림들의 연대의식과 동등의식을 권장하는 집단훈련이다."(정수일, <이슬람 문명>, 창작과비평사, p. 149)
신에 대한 순종, 그리고 그의 은총에 대한 감사하는 신앙적 훈련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동정과 무슬림 사회의 연대성을 강화하는 공동체 훈련을 라마단을 통해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훈련’이라는 사실입니다.
첫째는 신앙, 경건의 훈련 둘째는 공동체 곧 사랑의 훈련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신앙의 훈련입니다.
그것도 아주 빡센 신앙의 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간 훈련 받은 것처럼 우리에게도 빡센 신앙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종종 우리 교회가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신앙의 훈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훈련이 없는 신앙생활은 무기력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요.
여러분이 이 훈련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땀을 흘리려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교회가 빡세지 않다고, 우리 교회도 다른 교회처럼 빡센 신앙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기도도 빡세게 하고, 말씀도 빡세게 하고, 전도도 빡세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에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사실 교회가 정한 프로그램만으로도 충분이 빡셉니다.
우리 교회가 정한 프로그램만으로도 기도 훈련, 말씀 훈련, 전도 훈련 충분이 빡세게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없는 것이 있다면 빡센 교관이 없을 뿐입니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한 번 해보자’는 구령이 없을 뿐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이 훈육할 때 보통 이렇게 합니다.
아주 어릴 때는 이놈 하면 됩니다.
조금 크면 먹는 것과 장난감 돈으로 달래면 됩니다.
그런데 장성하면요?
중요한 것은 훈련을 참여하는 이의 자발성과 창조성입니다.
교회가 마련한 신앙 훈련의 장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땀을 흘려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세상 속에서 창조적 삶을 살아 보는 것입니다.
교회의 정한 기도의 장에서 기도 훈련 받고, 말씀 훈련의 장에서 말씀 훈련 받는 일에 게으름 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일어난다고 저는 믿습니다.
주보를 보시지요?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크레도credo’입니다.
‘나는 믿습니다’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때 사용되는 단어가 크레도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도가 전해 준 크레도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사도신경(어퍼설스 크레도 Apostles Creed)입니다.
사도신경 원문은 라틴어로 되어 있는데, 라틴어 원문에 보면 Credo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우선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에서 나옵니다.
라틴어 원어로 옮기면 ‘크레도 인 데움 파트렘 옴니포텐템, 크레아토렘 첼리 에트 테래’입니다. 사도신경의 전체서론이면서 그 이후에 나오는 12신조의 전체 요약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1)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2)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3)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4)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5)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6)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7)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8)성령을 믿사오며
9)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10)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11)몸이 다시 사는 것과
12)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Creatorem caeli et terrae.
Et in Jesum Christum, Filium ejus unicum, Dominum nostrum;
qui conceptus est de Spiritu Sancto, natus ex Maria virgine;
passus sub Pontio Pilato, crucifixus, mortuus, et sepultus;descendit ad inferna;tertia die resurrexit a mortuis;ascendit ad caelos;sedet ad dexteram Dei Patris omnipotentis;inde venturus (est) judicare vivos et mortuos.
Credo in Spiritum Sanctum;sanctam ecclesiam catholicam;
sanctorum communionem;remissionem peccatorum;carnis resurrectionem;
vitam aeternam. Amen
끄레도 인 데움 파트렘 옴니포뗀뗌 끄레아토렘 첼리 에트 테레
엣 인 예숨 크리스툼 필룸 에유스 우니꿈, 도미눔 노스트룸
퀴 꽁켑투스 에스트 데 스삐릭뚜 상또 나뚜스 엑스 마리아 비르기네
빠수스 숩 뽄띠오 삘라또 크루키픽수스, 모르뚜-스 엣 쎄뿔뚜스 데스켄딧 아드 인페르나
떼르띠아 디에 레수렉씻 아 모르튀스 아스켄딧 앗 껠-로스 쎄뎃 앗 덱스떼람 데이 빠뜨리스 옴니뽀뗀티스, 인데 벤투루스 에스트 유디까레 비보스 엣 모르뚜오스
끄레도 인 스삐릭툼 상툼 상땀 에끌레씨암 카톨리캄
상또룸 꼼무니오넴 레미씨오넴 뻭까토룸 까르니스 레수렉티오넴
비땀 에-떼르남 아멘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된 12개의 신앙 고백 속에 ‘나는 믿습니다’라는 크레도가 두 번 등장합니다.
크레도란 ‘심장을 바친다’는 뜻의 ‘코르도’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을 경외하며, 그분 앞에 예배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 생각, 감정보다 더 깊은 내면의 중심, 생명의 중심을 하나님에게 바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바침(오퍼링, 헌신)은 신앙의 훈련을 잘 받은 사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저 감성적인 입술의 고백, 입술의 간증, 입술의 찬양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라스 윌라드라는 분은 ‘크레도’, 믿는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는다(크레도)는 말이나 믿는다는 확신만으로는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행동할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다."(게리 하우겐, <정의를 위한 용기>, IVP, p. 78ff)
그렇습니다.
‘나는 믿습니다’라는 뜻의 라틴어 ‘크레도credo’는 우리의 신앙 고백을 행동으로 옮길 때 비로소 ‘나는 믿습니다’라는 ‘크레도credo’가 되는 것입니다.
교관이 훈련병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안자 일어서’를 반복하듯이 믿습니까? 아멘이 아닙니다.
내면에서 나오는, 우리 삶의 중심에서 나오는 자발적 신앙 고백입니다.
‘크레도’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입술로는 주님을 시인하면서도 삶으로는 주님을 배신한다는 것입니다.
신앙 고백과 삶의 모습의 간격이 너무 큽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우리의 진실한 신앙 고백이 삶으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사도바울의 말을 빌린다면 우리의 삶 전부가, 우리의 전인격이 그분 안에 뿌리를 박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이런 신앙의 권면을 합니다.
2:6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2:7 여러분은 그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을 굳게 하여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진정한 신앙 고백, 크레도의 시작은 그분 안에 뿌리를 박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일심동체입니다.
그래야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쉽게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이 아무리 척박하다 할지라도 예수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려는 절박함 혹은 열정이 있다면 우리는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뿌리를 박은 사람이라야 세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우심을 받는다는 말은 신앙에 있어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주체적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왜요? 주님이 우리의 든든한 반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2:8 누가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로, 여러분을 노획물로 삼을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라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2:9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십니다.
2:10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와 권세의 머리이십니다
그래서 사탄이 주는 유혹의 바람, 적그리스도가 행하는 박해의 바람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물론 육체우선적인 존재이니 조금 흔들리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한 번 세우심을 받은 사람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제 세우심을 입은 사람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대로 ‘크레도’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요. 여기서 혼돈이 옵니다.
다 믿는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단도 믿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내면에서 오는, 중심 오는 곧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는 것과 외형적인,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신념으로 꾸며 된 믿는 척 하는 것을 반드시 분별하셔야 합니다.
골로새 교회는 에베소에서 바울을 통해 복음을 영접한 에바브라가 고향에 돌아가 세운 교회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도 역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교사들이 등장해서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적 전통에 매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전통인 할례, 예배 의식, 음식 규정, 절기 등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런 외적 행위들이 있어야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된다고 주장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런 외적 행위가 곧 좋은 믿음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믿는 척, 경건한 척 하는 열심을 참된 신앙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속사람의 변화가 없는 믿음은 허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꾸며낸 믿음, 꾸며낸 경건에 유혹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사람에 대해 신뢰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특히 유명 목회자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하지만 그것을 인정한다는 게 참 씁쓸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마음의 한 구석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우리도 날마다 자기 성찰을 하지 않으면, 자기 부인의 훈련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 속에 머물지 않으면 언제라도 유혹에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십니다"(9)라는 말씀에 우리가 주목해야합니다.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 우리 믿음의 뿌리는 두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믿는 사람들은 버려야할 버릇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칭얼거리는 버릇입니다.
이제 우리가 향해야할 푯대는 사도가 전해준 크레도가 아닌 나의 크레도, 나의 내면에서 나오는 나의 중심에서 나오는 크레도의 삶입니다.
부탁드립니다.
믿음의 패배자가 되지 마십시오.
그리고 스스로 꾸며 낸 믿는 척 하지도 마십시오.
있는 그대로 여러분의 삶 속에서 진실한 진정성이 있는 크레도의 삶을 날마다 살아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