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세쿼이아와 전봇대
한 잔의 술도 마시지 않고
나는 레이첼 카슨의 가르침과
전기톱에 알몸이 된 메타세쿼이아의 맨살을 아파 한다
잘린 가지는 몸통 수피를 버리고 신음조차 경적에 묻으며
강풍 부는 봄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내 목에서 톱날이 돌아간다
한 점 남았을 듯한 나무 조각은 빗물에 쓸려 하수구 앞에서 캑캑거린다
오랫동안 내 꿈을 하늘로 올려주던 그대는
18층 아파트 옆에서 그보다 낮게 자라도
1억 년 시원(始原)의 빛을 뿜어주고
오드리 햅번 같은 입술을 건네었는데
그대는 죽고 나는 살고
레이첼 카슨보다 깊은 침묵이 봄을 때려도
그대 팔다리 하나라도 지켜줄 수 없는 처지
이제 나는 생태와 작별을 고해야 한다
여름이 오기도 전에 척후병처럼 소리 없이 다가올 모기
뜯어진 곳 없나 방충망에 눈길 주는 외면
이제 아무의 눈도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가로등 걸릴 전봇대 없는 화단
그저 어릴 적 회한이나 삼아야 하나
술병 들고 가다 다리 올리고 오줌 눈 사연
장맛비처럼 기억하여야 하나
아니 기억하여야 한다 메타세쿼이아가 잃은 삶
기능 없는 전봇대로 변한 사연 밤새 붙잡고 씨름해야 한다
침묵의 봄에 제비꽃 한 송이 피어오르지 못하고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까지
멀쩡한 사지는 왜 발 디딜 곳조차 없는 전봇대가 되었는가
그대는 마르고 나는 찌고
그래서 인생은 박스에 담긴 채 팔려나가지 않은 신간처럼 비애스럽다
목 놓아 울어 흠뻑 적시기에는 아까워 남기는 걸까
멀쩡한 한낮에 눈 번쩍 뜬 채 허물어진 메타세쿼이아의 비명
차라리 진짜 전봇대라도 있으면 번갯불이라도 던져줄 텐데
그저 시름없이 무너지기만 하였다
마신 술이 없으니 술병도 없고 아무 소리도 귓가에 철렁거리지 않고
죽음보다 깊은 침묵이 봄을 베이고 이른 여름을 가져와도
방충망 위에서 하늘거리는 에어컨 실외기
보이지 않는 전봇대 타고 들어와 돌고 도는 그늘보다 시원한 세상
전기톱 소리는 봄바람 타고 흘러 어디에 쓰러졌을까
목메어 울 술병도 없는데
메타세쿼이아는 울음도 소리 내어 토하지 못하는데
하늘에서 침묵의 봄비가 폭염의 피눈물 되어 콸콸거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