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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완성
히브리서 2:5~9
5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7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8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저는 어려서 자식이 없는 고모 댁에서 자랐습니다. 그곳에서 어린 나이였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인지를 알 수 있는 반면교사 역할을 해 준 분이 제 고모부였습니다. 고모부는 고모께서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자 첩을 얻어 딴 살림을 했습니다. 그리고 시골에 있는 땅을 소작인에게 세를 주고 생활하면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첩이 사는 춘천에서 내려와 며칠을 머물다 가곤 하였습니다.
제가 경험한 고모부는 무뚝뚝한 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조카인 제게는 말할 것도 없고 고모에게도 살갑게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고모부가 집에 오면 고모는 놋대야에 더운물을 담아 안방에서 발을 씻겨주고 발톱과 손톱을 잘라주기도 하였습니다. 배가 불쑥 나온 뚱뚱한 몸에 얼굴의 턱은 두툼하여 목과 얼굴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고모부가 첩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고모가 쫓아 나와 돈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고모부는 냉정한 어투로 무뚝뚝하게 “없어!”라고 합니다. 고모는 돈이 꼭 필요하니 달라며 저를 핑계 삼아 “수옥이가 학교에 돈을 내야 하니 조금이라도 주시오!”하면서 사정을 하니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돈을 꺼내어 땅바닥에 던지는 것입니다.
저는 그때 8살 초등학교 1학년 때로 기억되고 고모부와 고모의 나이는 동갑으로 50이 채 안 되는 연세였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무정한 고모부나 그런 수모를 겪으며 땅바닥에서 돈을 줍는 고모의 모습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며 내가 왜 이런 집에 있어야 하는지 속이 상한 적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이지만 저는 이런 일을 겪으면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은 굴종의 관계가 아닙니다. 높은 자와 낮은 자의 구분으로는 사랑을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랑은 너와 나의 간격이 좁혀지고 대등한 관계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셨다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대상으로 지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사람은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서로 사랑하도록 하였습니다.
처음 사람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인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이르렀을 때 아담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창 2: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자’란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잇샤 ishshah’ אִשָּׁה라고 하는데 이는 성별을 구분하는 것으로 남자와 더불어 대등한 위치에 놓여 있는 존귀한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서로서로 존중하게 여기는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함을 받았습니다. 창 2: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숨길 것이 없이 서로를 아끼며 보살피며 사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구원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에게 죄가 들어 온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랑은 자기의 모든 것을 주어 대등한 관계에서 아낌없이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지으신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간교하기 그지없는 사탄을 뱀에 모습으로 나타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들고 하나님께서 숨겨 놓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선과 악을 구별하고 선택하여 좋은 것을 이루며 살 수 있다는 유혹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고 인간 살 수 있다는 유혹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저버리고 이것 없이도 사람은 존재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이 사탄의 유혹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이뤄 놓으신 놀라운 업적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돌아가는 완벽한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우리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 2:5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중에 천사는 탁월한 지식과 지혜 그리고 능력을 갖춘 영적이 존재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천사가 뛰어난 존재라 할지라도 장차 펼쳐질 세상을 그들에게 맡기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히 2:6,7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누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에서 누가 어디에서라고 말한 것은 저자가 시편 8편 4-7절의 저자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에 나오는 장(chapter)과 절(verse)의 구분, 그리고 심지어 제목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장(chapter)의 구분이 처음 나타난 것은 4세기입니다. 그런데 그 장(chapter)의 구분도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의 장 구분과 다릅니다. 그리고 4세기에 있었던 장 구분은 신약만 있었습니다. 구약의 장 구분이 처음 나타난 것은 1200년대에 들어와서입니다
그러므로 저자는 당시의 관용적인 인용법에 따라 구약성경에 익숙한 독자들을 전제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저자는 히브리어 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 역을 인용하였습니다. 칠십인역(七十人譯, Septuagint)은 한마디로 말하면 가장 오래된 헬라어 역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70인역과 히브리 원문과의 차이점은 시편 8편 6절의 첫 번째 행입니다. 히브리 원문은 ‘당신께서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로 되어 있으며, 70인역은 ‘당신께서 그를 천사보다 잠깐 못하게 하셨다’로 되어 있습니다. ‘조금’은 시간상으로 ‘잠깐’의 의미가 됩니다. 이렇게 볼 때 히브리서 저자가 시편 8편을 인용한 것은 일단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원래 천사보다 월등한 존재이실 뿐 아니라 그 천사를 창조하신 창조자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라는 의미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택하심을 받고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시편 8편은 다윗이 인간의 존귀함을 노래한 것입니다. 인간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쓴 존재이며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 27-28절에 이것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국, 예수님과 더불어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 중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가 예수님과 함께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을 약속하시고 성취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능력의 회복입니다.
워치만 니의 <영에 속한 사람>이란 책에서 아담은 현대인의 지능과 능력에 비하면 백만 배 이상이었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근거를 창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세계의 생물 종 수는 1천만에서 1억 종 범위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 2: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생물이든 그 앞으로 지나가면 특성에 걸맞는 이름으로 겹치지 않게 지을 수 있는 능력은 가히 헤아리기 어려움 지능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능력은 어디서 주어졌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므로 얻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의 원리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히 2:8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8:6의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의 뒷부분을 인용합니다. “만물을 예수님의 발아래에 두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더니 예수님께 하신 약속의 말씀이 빌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순종을 기쁘게 받으시고 그를 지극히 높이게 된 배경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저주요, 참을 수 없는 모독이요 고통입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예수님이 변치 않고 마음을 굳건하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을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제 9절 앞부분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까지 인용했던 시편 8편을 다시 요약하여 인용하며 그 구절을 정확하게 예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주님을 따릅니다.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오신 이유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맛본 것은 사람이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가장 비참한 지경에 이르는 자리인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어떤 누구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여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에서 건져 살리기 위함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표에 대하여 빌 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아직 부활의 몸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벌써 2000년 전에 부활의 몸을 입으셨고, 우리에게 우리 주님과 같은 부활의 몸을 입을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그(예수)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하나님)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제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는 예수님과 같은 부활의 몸을 입게 하셔서 영원토록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의 권세자로 세울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깊은 사정까지 통달하시는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시고 최고의 행복을 누리기 위하여 땅에 속한 피조물을 하늘에 속한 자로 그 지위를 높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하나님이 사랑의 원리로 다스리시는 능력을 주어 창조주 하나님이 누리시는 기쁨을 함께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저는 겨울이 되면 즐거운 추억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공부하고 방학이 되어 형님들이 집으로 돌아오면 공기총을 가지고 사냥개와 더불어 산으로 들로 꿩을 잡으러 나갑니다. 저는 어려서 공기총을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마당에서 둘째 형님이 공기총을 내어주면서 판자로 만든 과녁에 총을 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 얼마나 설레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어린 나를 인정해 주고 형님이 누리는 기쁨을 누리게 하는 배려였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시고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든 모든 만물을 다스리며 하나님은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그 기쁨을 택하신 자녀에게 베풀어 주면서 “너희도 내가 만물을 다스리며 누리는 행복을 가져 보아라”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만물을 다스릴 때 우리는 세심한 하나님의 사랑에 탄성을 지르며 사랑의 하나님을 노래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통하여 세상에서 낙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에게 밝고 환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만찬을 나눌 때였습니다. 잠시 후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음식을 드시던 중에 일어나셔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그들의 발이 더럽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기에 사랑을 어떻게 하는지를 보이신 실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발을 씻기신 후에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천한 종의 모습을 지니시고 말없이 낮은 자리에 머물러 허리를 숙이시고 겸손한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사랑은 낮은 자리로 내려앉아 눈높이 맞춰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높이거나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돈을 잃거나 명예를 잃고 건강을 잃었다고 해서 실패가 아닙니다. 사랑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고 받을 줄도 모른 인생이 실패자입니다.
최고의 인생 실패자는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지 않고 평생을 살다가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는 지옥으로 빠지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성령 충만은 사랑 충만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이웃을 위하여 나의 것을 내어주며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을 베풀고 사랑을 나눌 때 우리는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완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앞에 놓여 있는 큰 구원을 향하여 전진에 전진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