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2년 , 쿠바 미사일 위기
1962년 7월 미국은 소련이 쿠바로 미사일을 수송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쿠바 상공을 비행하는 미국의 U-2 정찰기를 통해 쿠바에 새로운 군기지가 건설되고 있으며, 소련 기술자들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발사 기지에 탄도 미사일이 배치된 사실도 보고 되었다. 미국 정부는 즉각적으로 쿠바에 쳐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한층 더 외교적 노력을 기울일 것인지를 두고 고심하던 끝에, 쿠바에 대한 해상 '격리'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10월 22일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격리 조치를 발표했으며, 다음날 미주 기구가 이를 승인했다. 케네디는 미군이 소련 함정이 쿠바로 이송하려고 하는, 공격용 무기와 관련 자재를 압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위기 동안 무기류를 실은 어떤 소련 선박도, 격리 지역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케네디와 흐루시초프 간에 메시지가 교환되었다.
미국이 전쟁 준비를 하는 가운데, 긴장된 1주일이 지나자, 10월 28일 흐루시초프는 '무기 건설기지' 작업의 중단과, 이미 쿠바에 배치된 미사일은 소련으로 회수하겠다는 사실을 케네디에게 통보했다.흐루시초프는 그 미사일이 지대지 중거리 공격용 미사일임을 시인했다. 그는 국제연합(UN) 사찰단이 쿠바 현지 시찰을 통해, 그의 통보를 확인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사찰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미국 정부는 계속해서 U-2 정찰기를 통해 사찰을 실시하는 데 만족하는 듯했다. 그리고 11월 20일에는 격리 조치를 해제했다. 카스트로가 미국 정찰기를 격추시키겠다고 위협하자, 흐루시초프는 그같은 행위를 하지 말도록 경고했다. 카스트로는 소련의 위축된 태도에 분개했으나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힘이 없었다. 미사일 위기로 미국과 소련의 냉전관계는 절정에 이르렀다. 쿠바에서 당한 소련의 굴욕은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의 실각과, 적어도 미국과 대등한 핵능력을 보유하겠다는 소련의 비장한 결의에 중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1,990년 ,독일 통일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481년 서유럽 지역에는 프랑크 왕국이 성립 된다. 768년 유럽의 아버지로 불리는 카롤대제가 국왕에 즉위하고, 교황에 의해 황제에 오르게 된다. 이후 843년 프랑크왕국은 동프랑크, 서프랑크, 남프랑크로 분열된다. 919년 동프랑크에서 작센의 공작 하인리히1세가 왕에 오르는데, 그는 최초의 독일왕으로 불린다. 952년, 신성로마제국이 출범하고 하인리히1세의 아들 오토1세는, 교황과 주교의 권한을 인정해주고 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받아, 신성로마제국의 첫번째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은 허울뿐인 제국이었다. 각 지방마다 주교와 대공이 다스리는, 지방국가가 실질적인 자치권한을 가졌다. 로마제국의 후계자라고 자처했지만, 주변국에서는 인정을 하지 않았고, 황제는 얼굴 마담에 불과 헀다.
신성로마제국은 1806년까지 존속하고, 이후 독일은 38개 공국이 모인 독일연방, 북독일연방, 북독일 연방이 남독일을 흡수 합병한 독일제국(1871~1918), 바이마르공화국(1933~1949)등으로 이어진다. 2차세계대전 이후 동서로 분단된 동독 정부가 농업집단화를 추진하고 사상통제를 강화하자, 서독으로 도주하는 사람이 해마다 늘어났다. 1953년에는 폭동사태까지 초래되자 동독은 서방측의 선동을 차단한다는 구실로 1961년 베를린 장벽을 구축했다.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화 움직임 속에서 동독에서도 경제 불황과 공산당 일당 독재를 비판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헝가리가 동독 국경일대의 철조망을 제거하자 약 20만 명 이상의 동독인들이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탈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동독 내에서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본격화하였고, 시위대에 의해 동서 독일의 경계선이무너졌다. 그리고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는 형태로 독일 통일은 실현되었다.
한편 서독의 생산량은 유럽 공동체 전체 생산량의 27%를 차지하고, 대외무역량에 있어서도 미국·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동독의 경제는 서독 국민들이 누리는 생활수준이나 엄청난 구매력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공산주의 국가의 선거는 100%에 가까운 지지율을 보이는 것이 통례지만, 1989년 공산당 정부는 개표조작을 해야 했고 이는 격렬한 항의시위를 촉발했다. 민중의 힘은 결국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고, 제2차세계 대전 이후 동서로 분단된 독일이, 1990년 서독을 중심으로 독일 연방 공화국을 형성하여 국가적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이와 함께 공산당의 지배체제도 무너졌다.
# 1,991년 , 소련 해체
소련은 1917년 10월혁명에 의해 소비에트 정부가 성립되었으며, 볼셰비키가 정권을 획득한 직후인 1918년 1월에 개최된 제3차 전(全)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러시아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했다. 그뒤 1922년 12월 러시아 연방공화국에 우크라이나·벨라루스·자카프카지예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등 3개국이 가입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이 성립했다. 그후 레닌·스탈린·흐루시초프·브레주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고르바초프로 이어지는 공산당 서기장들이 소련을 이끌어왔다. 이 기간 동안 소련은 러시아 연방,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에스토니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조지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벨라루스, 몰도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15개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의 다민족 국가였다. 당시 소련의 헌법상 이들 15개 연방 구성 공화국에 소련연방으로부터 자유롭게 이탈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있었으나 사실상 그것은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1985년 서기장(후에 대통령)에 취임한 고르바초프가 시행한 페레스트로이카가, 소련뿐만 아니라 동유럽 전역에 여파를 미쳐 1989년 동독·서독이 통일되었고, 동유럽 각국은 소련의 영향권에서 점차적으로 벗어나 시장경제를 지향하게 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등의 개혁 정책에도 불구하고, 1990년 들어 소련의 위기는 더욱 심화됐다. 경제 성장은 1990년 마이너스 8퍼센트, 1991년 마이너스 20퍼센트를 기록했다. 생산과 분배 시스템은 사실상 붕괴했고, 물가는 급등했으며, 만성적인 물자 부족 상태가 야기됐다.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개혁파와 보수파 양쪽에서 공격을 받았다. 자본주의를 전면 도입해야 한다는 급진 개혁파는 고르바초프가 과감한 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보수파는 그가 공산당을 약화시키고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를 무너뜨렸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 시민들도,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그 책임을 물었다. 결정적으로 8월 18일 당과 정부의 보수파 지도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는 시민들의 반발과 군대의 명령 거부로 3일 만에 실패했지만, 이후 당과 고르바초프의 권위는 완전히 추락했다. 한편 쿠데타에 적극 저항했던 보리스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이 시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실권을 장악했다. 설상가상으로 소련 내 여러 공화국들이 차례로 독립을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는 새로운 연방 조약을 맺어 공화국들의 불만을 다독이려 했다. 그러나 소련 내부에서는 각 공화국이 독립국가로 재편성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결과 1991년 9월 발트해 연안의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3개 공화국이, 소련으로부터 탈퇴하여 독립국가로서 국제연합(UN)에 가입했다. 12월 1일에는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국민투표를 통해 연방에서 탈퇴했다.
이어 1991년 12월 8일 러시아 연방, 우크라이나, 벨라루스가 새로운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하는 데 서명함으로써 소비에트 연방(소련)은 정식으로 해체되었다. 12월 21일에는 옐친의 주도로 15개 중 11개 공화국이 독립국가연합(CIS)을 따로 결성했다. 마침내 12월 25일 소련은 해체돼 지도상에서 사라진다. 이로써 세계 사회주의 체제는 와해되고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가 본격화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