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6년, 아직 첫눈이 내리기 전인 늦가을 어느 날, 백발의 수염을 흩날리며 나귀 등에 몸을 싣고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로 들어오는 어떤 이탈리아 노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두 수행인들이 이끄는 나귀 등에는 짐이 실려 있었는데...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을 찾아드는 수많은 미술 애호가들이 잊지 않고 구경하고 싶어하는 명화<모나리자>는 바로 이 짐 속에 있었습니다. 그 노인은 레오나르드 다빈치였고 그는 프랑스 국왕 프랑스와 1세의 초청으로 그의 처소인 르와르 강변의 클로 뤼세 성관으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 르와르 강변의 앙부아즈 王城
바로 3년전, 1513년 육십이 넘어선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이제 막 교황 레옹 10세로 선출 된 장 드 메디치의 후광을 업고 밀라노를 떠나 로마의 바티칸 궁전에 도착하여 3년을 그곳에서 보냅니다. 그러나 젊고 야심 많은 예술가들에 에워 쌓인 채 명성을 떨치던 라파엘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스틴 성당의 궁륭을 장식한 대작 이후 다른 예술가들과 비교를 거부하는 거장 미켈란제로의 위력에 밀려 이 노인은 오직 우수와 신비에 싸인 채 고독한 생활을 영위했을 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다빈치는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르네상스의 대군(大君) 프랑스와 1세의 초청을 받습니다. 이리하여 루아르 강변의 고성 앙브아즈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담한 르네상스 양식의 성관 클로 뤼세는 비극적이고 신비스러운 천재의 일생 중 마지막 3년을 처음이자 마지막인 고요와 여유 속에 보호하게 되었습니다.
* 다빈치가 말년을 지냈던 클로 뤼세 성관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드 다빈치를 맞아 들이자 곧 그에게 이 성관을 하사하였고, 왕성에서 가까운 이곳으로 자주 노예술가를 방문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다빈치가 죽은 뒤 20년이 지난 뒤에도 왕은 다빈치에게서 받은 충격적인 인상을 잊지 못했습니다.
" 그 어느 인간도 회화건 조각이건 건축이건 어느 분야에 있어서도 다빈치만큼 깊은 지식을 가질 수는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는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이자 철학자이기도 하였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국 이탈리아에서와는 달리 거리낌 없이 말할 수도 있고, 마음대로 계획한 일들을 실험할 수도 있고, 마음 내키는 대로 공상에 잠길 수도 있게 된 이 노인이 어떻게 하여 프랑스에서의 3년 동안에 실상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않았는지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 다빈치가 고안하였다는 일종의 장갑차, 앙브아즈 성관에 있습니다
물론 루아르 강물을 로 모랑텡에까지 끌어 들이는 수로공사 계획에 깊은 관심을 나타낸 도면 댓상, 루아르 강가의 성들을 위한 건축 설계의 초안들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모든 것이 미완성에 그치고 있을 뿐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 대 예술가는 기껏 궁내의 대연회나 놀이를 기획. 조직하는 일에 몰두하거나 마르그리트 공주가 베푸는 축제를 위하여 가슴을 두드리면 백합꽃을 토해내는 기인한 자동인형을 제작하는 데 골몰했다고 합니다.
다빈치의 마지막 3년은 이와 같이 하여 인간이 기록한 문화사 속에서 그 유례가 없는 비범한 두뇌와 창조력을 발휘하여 고투하고서도 끝내 그의 능력에 걸맞는 결실을 거두지 못한 천재의 모순과 비극의 상징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 프랑수아 1세와 임종하는 다빈치
[ 르네상스의 기적, 레오나르드 다빈치 ]
"매혹이라는 낱말은 언제나 그(다빈치)를 설명하는 적절한 명칭"이라고 <르네상스>의 저자 월터 페이터는 말하고 있습니다. 30구가 넘는 주검을 해부하여 인체의 비밀을 탐구하였고 자궁 속에서 태아가 자라는 것을 조사한 최초의 사람.
파도와 조류의 법칙을 연구하고, 날고 싶은 이카루스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비행기구를 고안한 사람. 요새를 파괴하는 법, 운하, 전차와 박격포를 구상한 사람. 그러한 사람과 저 신비로운 "모나리자"의 미소를 형상화한 위대한 화가가 도대체 어떻게 동일인 일수가 있다는 말인가요?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는 그야말로 르네상스의 기적이었습니다.
가장 르네상스적인 인간이었던 레오나르드 다빈치, 보고 싶고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고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분출한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걸맞는 이가 바로 레오나르드였습니다. 그처럼 다방면에 재주를 보였던 이가 도대체 역사상에 있었을까요? 그는 만능인이었습니다.
* 다빈치 생가
레오나르드는 1452년 4월 15일 피렌체에서 멀지 않은 안치아노에서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후에 공증인이 된 아버지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어머니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습니다. 밀라노에서 화가로서 생활할 때의 레오나르도의 일기에는 그가 카테리나라는 여자의 장례비를 지출한 기록은 있지만 그녀가 만년에 아들을 찾아온 그의 어머니인지 혹은 집안일을 거든 식모였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아버지가 시골 처녀인 생모를 버리고 부유한 집안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레오나르도는 서모 밑에서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토스카나(피렌체 지역)의 들과 산을 외롭게 돌아다니면서 자연과 동물을 사랑하고 관찰했습니다. 이때의 체험은 평생 동안 자연과 사물을 세밀히 연구하고 기록하는 그의 과학적이고 예술적인 습관을 길러주었습니다.
* 다빈치의 고향, 안치아노
아들의 그림 재주를 발견한 아버지는 1466년 당시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에게 사사시켰습니다. 그의 뛰어난 재능은 곧 선생을 능가했고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가 자기의 <세례>란 작품에 그린 한 천사상을 보고 아예 그림 그리기를 포기했다고 전해집니다.
레오나르도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수태고지>,<모나리자>,(최후의 만찬>,<동굴의 성모> 등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각지를 다니며 작품 활동을 하던 레오나르도는 말년에는 프랑스로 가게 됩니다. 당시 레오나르도를 좋아하고 존경했던 프랑스 왕 프랑스아 1세가 초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왕은 남프랑스의 앙부아즈 교외에 클로 뤼세 성을 레오나르도에게 제공하고 생활비나 그 밖의 모든 비용을 충당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연금도 주었습니다. 게다가 주문도 일체하지 않았습니다. 뭔가를 해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냥 프랑스에 있어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 다빈치가 안치되어 있는 앙브아즈 성관 내의 교회
그의 편안하고 조용했던 앙부아즈 생활은 3년 만에 끝났습니다. 생애를 마쳤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드는 프랑스 왕의 호의가 무척 고마웠는지 그때까지 어디에나 갖고 다니던 <모나리자>를 왕에게 준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모나리자>는 프랑스에 남았고 지금도 루브르 미술관의 최고 보물중의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 모나리자의 미소 ]
루브르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피렌체의 부호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의 부인인 엘리자베타를 그린 초상화입니다.
라 조콘다(La Gioconda)라고도 합니다. 모나리자의 모나는 이탈리아어로 유부녀에 대한 경칭, 리자는 엘리자베타의 약칭입니다. 이 작품은 부인의 나이 24∼27세 때의 초상입니다.
이 초상화에는 처음부터 눈썹이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典型)으로 여겨져, 여성들 사이에 눈썹을 뽑아버리는 일이 유행했기 때문이죠.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것을 그리기 위해 악사와 광대를 불러 부인의 심기를 항상 즐겁고 싱그럽게 함으로써 정숙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 편안한 손 등 신기(神技)를 표현할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보는 사람에게 신비성을 느끼게 하여 많은 풍설(風說)과 함께 ‘모나리자의 수수께끼’로서 오늘날도 적지 않은 문학적 관심거리입니다. 요컨대 이 그림은 레오다르도 다 빈치의 인간에 대한 오묘한 감정과 관능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 그림만큼 친근감을 주면서 많은 문제를 제시하는 작품도 드뭅니다.
[ 최후의 만찬 이야기 ]
* 벽화 <최후의 만찬>
다빈치가 밀라노의 권력자 스포르차 밑에서 일한지도 13년, 항상 일을 제대로 끝마치지 않기로 유명한 다빈치였지만 스포르차는 다빈치에게 큰일을 맡겨보기로 결심합니다. 그것은 바로 산타마리아 델레그라치 성당에 최후의 만찬을 묘사하는 벽화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은 전에도 몇번 제작된 바 있지만 다빈치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기로 합니다.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너희들 중 하나가 나를 배신할 것이다"라고 말할 때 제자들의 표정에 집중하기로 한 것입니다.
예수가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라는 성경 구절을 바탕으로 제자들 각각의 반응을 화가인 '다빈치' 자신의 해석으로 그린 것. 이 그림 속에서 분노, 체념, 고통, 충격, 당황, 공포 등 그 때 제자들의 여러 감정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