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을 기다렸다. 단 하루 촬영한 <초록물고기>부터 인터넷 영화 <극단적 하루>까지 꼽으면 출연작은 줄잡아 10편.
눈 까뒤집고 찾지 않아도 정재영이 발견되는 영화는 <킬러들의 수다> 정도일까.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하고 대학로에 뛰어든 스물여섯부터 약 6년. 연극무대와 조·단역 생활을 거쳐온 많은 배우들의 길을 따라 걸으며 정재영은 묵묵히 기다렸다.
<킬러들의 수다>의 냉철하고도 엉뚱한 킬러로 멋지게 한방 날렸던 그는, 마침내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펄펄 난다.
전직 복서 출신의 투견꾼 독불이로 물고 물리는 개싸움 같은 인생의 진창을 뒹굴며, 살기 위해 한없이 비굴해지는, 그러나 원시적 폭력성이 터져나오는 순간 마침내 모든 곤경을 휴지통에 처박아버리는, 거세당한 마초의 속살을 드러내면서.
삐쭉삐쭉하게 내린 앞머리도 독불이의 컨셉 때문이라지만, 예쁘장하기까지 한 눈에 사람좋은 웃음만 봐서는 그에게서 좀체 험악한 구석을 찾아보기 힘들다.
하긴 <박봉곤 가출사건> <조용한 가족> <공포택시> 등의 단역부터 <간첩 리철진>의 택시강도, <킬러들의 수다>까지 웃음기 어린 양아치, 깡패 역할이 많았던 것도 진지해 보이는 외모 때문은 아니었다.
<피도…>를 하게 된 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간첩 리철진> 때 만난 김성제 PD와의 인연 때문이다.
유망한 감독 지망생이 단편을 찍는데 무보수로 도와달라는 그의 소개로, <현대인>에서 주인공 성빈의 형을 맡아 류승완 감독과 처음 만났던 것이다. 그리고 <킬러들의 수다>를 찍을 때 <피도…>의 시나리오를 건네받고는, “우리 같은 인간군상들”을 보여줄 수 있겠다 싶어 독불이가 되기로 했다. “그처럼 강한 이미지와 맞는지도, 해본 적 없는 액션도 자신은 없었지만”, 모험이라서 더욱 끌린 것도 사실이다.
각오는 했어도, <피도…>는 꽤나 고된 작업이었다. 정두홍 액션스쿨에서 3개월간 훈련은 기본, 남녀 할 것 없이 치고 받는 액션을 찍느라 “나이 먹고 군대 다시 갔다온 느낌”이었다고. 과장이 아닌 게, 발톱이 뒤집히고, 투견장 철조망에 걸려 손이 찢어져 난생처음 스무 바늘을 꿰맨 부상의 흉터가 훈장처럼 남아 있다.
맞는 것도 고됐지만, 정말 난제는 두 여배우, 특히 애인역의 전도연씨와 무지막지하게 싸우는 연기. “사실적으로 보여주려면 몸으로 때워야 되는데, 머리채를 잡을 때 머리카락이 한움큼씩 빠지면”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도 머리 잡혔을 때 악 하는 게 연기가 아니다. 진짜 아팠다.”
“예전엔 시나리오를 보면 이 배역 좋다, 그러곤 내가 할 건 뭐 없나 하고 한참 아래에서 찾고 그랬는데, 기회의 폭이 많이 커졌다.”
PD나 기자를 꿈꾸던 고교 방송반 시절 우연히 시작한 연극에서부터 <허탕> <매직타임> 등의 무대에 서고 10편의 영화를 기다리는 사이, “조금씩 배우로 보기 시작하는, 배우로 인정하는 것 같은 시선”이 가장 기쁜 변화다.
겨울에는 대학 시절부터 꾸준히 함께 일해온 선배 장진 감독과 LG아트센터에서 연극을 한편 같이 한다며, 영화는 아직 정해진 게 없지만 또 안 해본 것을 하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과 함께 다짐처럼 남긴 한마디. “앞으로도 계속 이럴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