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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 Ⅲ
- 일제의 식민통치정책과 협력조선인(1919~1937) -
차 례
* 발간사 ···························································································································· 4
* 해제 : ‘문화정치’의 허울과 실상, 협력하는 조선인들 ··········································· 13
Ⅰ. 일제의 조선 통치 방침
1.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훈시 35
2. 사이토 마코토 총독, 조선 통치 사견(私見) 37
3. 사이토 마코토 총독, 조선 통치에 대하여 45
4. 종래의 방침을 답습, 야마나시(山梨) 총독의 성명 49
5. 야마나시 총독의 성명에 대하여(사설) 49
6. 야마나시 총독,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청 직원에 훈시 51
7.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총독, 각 도지사에 훈시 52
8.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 농촌진흥운동에 대한 훈시 55
9.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 시정 25주년 기념 훈시 64
10. 우가키 총독 및 사이토 전(前) 총독의 기념 방송 66
11.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일 총독 유고(諭告) 71
12.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 도지사 훈시 72
13. 취임 시의 총독 유고(야마나시, 사이토, 우가키, 미나미 총독) 77
14. 미나미 총독, 본기(本期)의 시정방침 81
Ⅱ. 치안유지법
1. 법령과 해설 85
1) 치안유지법(1925) 85
2) 치안유지법 개정(1928) 86
3) 와카즈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치안유지법 제안 설명(귀족원) 87
4) 반도우 고타로(坂東幸太郞), 반대의견(중의원) 88
5) 와카즈키 레이지로, 치안유지법 제안 설명(중의원) 91
6) 조선사회운동단속법 요의(要義)(1932) 92
7) 개정 치안유지법안 해설(1935) 111
8) 조선·대만에서 공산운동자 검거 수가 최근 격증한 이유 115
9) 치안유지법 개정(1941) 116
10) 재판소 및 검사국 감독관회의, 미나미 총독 훈시 125
2. 관련 기사 129
1) 독립과 적색(赤色) 기사는 학설이라도 단속할 수 있다
-검사장과 본사 기자 문답 129
2) 일본 정치가의 고루(固陋)를 비웃음, 소위 치안유지법안(사설) 130
3) 치안유지법과 조선의 관계(사설) 132
4) 치안법 조선엔 꼭 실시, 사이토 총독 귀임담(歸任談) 134
5) 조선독립운동에도 치안유지법을 적용, 야마오카(山岡) 정부위원 답변 135
6) 치안유지법안과 보안법안(기사) 138
7) 다시 치안유지법안 실시에 대하여(사설) 138
8) 경찰정치와 사상단체, 치안법을 빙자하여(사설) 140
9) 금일부터 실시하는 ‘특법’ 치안유지법, 우선 관계당국 의견 142
10) 치안유지법 실시에 대하여, 파급되는 영향 여하(사설) 143
11) 치안법의 해석에 대하여(사설) 145
12) 조선의 사회운동, 금후의 추세는 여하(사설) 147
13) 러시아에 있는 언론의 통제(상·하)(사설) 151
14) 치안유지법에 관한 긴급칙령안(사설) 154
15) 각 방면에서 반대하는 치안유지법 긴급칙령안(기사) 156
16) 국체변혁 엄벌주의(사설) 157
17) 치안유지법 개정안의 추부(樞府) 통과(사설) 159
18) 치안유지법 개정에 대하여(사설) 160
19) 조선독립운동과 치안유지법 적용 문제, 치안유지법·제령위반·보안법의 차이점,
마츠데라(松寺) 법무국장 담(談) 162
20) 치안유지법의 실시와 금후의 조선사회운동(1925) 163
21) 치안유지법과 조선독립운동(1925) 171
Ⅲ. 주요 경제기구와 제도
1. 동양척식주식회사 179
1) 동양척식주식회사 정관 179
2) 동양척식주식회사 업무지역 및 업무종류 189
3) 궁삼면(宮三面) 사건 관계 191
2. 산업조사위원회 199
1) 산업조사위원회 규정 199
2) 산업조사위원회 개황 200
3) 산업조사위원회에서의 총독 연술(演述) 201
4) 산업조사위원회의 결정사항에 관한 건 202
5) 산업조사회와 향후 조선의 산업정책(사설) 208
6) 조선 산업조사회 개회에 제하여(사설) 210
7) 조선인 산업대회 건의안 212
8) 횡설수설(기사) 219
9) 산업조사회 결의안 220
10) 산업조사회의 결의안, 조선인 본위의 반대로 일본인 본위의 정책(사설) 225
11) 조선 산업에 관한 일반 방침 및 계획에 대하여(1922) 227
3. 조선식산은행 234
1) 조선식산은행령 개정(1924) 234
2) 조선식산은행의 연혁과 임무 235
3) 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 정관(1936) 240
4) 조선식산은행 간부 249
4.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 255
1) 토지개량사업 합병조건 발표(기사) 255
2)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 설립 취의서(趣意書) 및 정관 256
3) 토지개량부의 폐지와 산미증식계획의 중지 262
5. 금융 관계 법령 263
1) 은행령 개정(1920) 263
2) 은행령 개정(1923) 264
3) 조선금융제도조사회 규정(1928) 265
4) 은행령 개정(1928) 266
5) 저축은행령(1928) 271
6) 금융조합령 개정(1929) 274
7) 저축은행령 시행규칙(1929) 280
8) 발포될 신탁업령은 현상을 참작 안할 듯, 따로 과도법규로 정리(기사) 284
9) 조선신탁업령(1931) 285
10) 조선신탁업령 시행규칙(1931) 291
Ⅳ. 조선교육령과 시학관제도
1. 조선교육령 개정(1920) 305
2. 조선교육령 개정(1922) 308
3. 조선교육령 개정(1929) 314
4. 조선교육령 개정(1938) 315
5. 조선교육령 개정(1943) 318
6. 조선총독부시학관특별임용령(1911) 320
7. 조선총독부시학관특별임용령 개정(1922) 320
8. 일본어 상용 여부에 따른 입학에 관한 건(1922) 321
9. 조선총독부 시학관 및 조선총독부 시학위원 학사시찰 규정(1928) 322
10. 조선총독부 도 시학관 특별임용령(1930) 324
Ⅴ. 언론계 상황과 매일신보의 주요 논설
1. 신문·잡지의 발간 현황(1936) 329
2. 경성일보사 개황(1920) 338
3. 송순기(勿齋學人), 송이기수영창(頌以其壽永昌) 340
4. 홍승구(木春山人), 조선 언론계의 과거와 현재(1~3) 341
5. 홍승구, 평림(評林)의 평림 신문의 신문(1) 359
6. 이익상(李益相), 백두산 가는 길에 368
7. 이익상, 만주기행 370
8. 천장절축일(天長節祝日, 1921·1923년 사설) 372
9. 내선(內鮮) 양 민족의 관계를 논하노라(사설) 376
10. 매일신보가 본 반도 20년간, 을사에서 병인까지(연재기사의 일부) 378
11. 조선 통치의 정신(사설)-의회에서 한 총감 답변 384
12. 논조(論爼)에 오른 학교맹휴(상, 하)(사설) 385
13. 고마다(兒玉) 정무총감을 맞이함(사설) 388
14. 사이토 총독을 맞이함(사설) 390
15. 학생 제자(諸子)를 위하여(사설) 392
16. 우가키 총독을 맞이함(사설) 393
17. 홍승구(洪承耈), 오는 총독 가는 총독(1~5) 395
18. 홍승구, 육군기념일 407
19. 국민적 자각의 현현(顯現)(사설) 409
20. 조선 통치의 5대 지침(사설) 410
Ⅵ. 사이토 총독에게 보낸 조선인의 서간 발췌
1. 김관현(金寬鉉) 415
2. 김명수(金明秀) 416
3. 김성수(金性洙) 423
4. 김용주(金用柱) 424
5. 김윤복(金允福) 431
6. 김택현(金澤鉉) 432
7. 남궁영(南宮營) 436
8. 민병석(閔丙奭) 439
9. 박영효(朴泳孝) 442
10. 박중양(朴重陽) 444
11. 박춘금(朴春琴) 456
12. 백흥기(白興基) 458
13. 석진형(石鎭衡) 459
14. 선우갑(鮮于甲) 462
15. 선우순(鮮于金筍) 463
16. 송병준(宋秉畯) 464
17. 신석린(申錫麟) 466
18. 심우섭(沈友燮) 468
19. 심형진(沈衡鎭) 475
20. 유일선(柳一宣) 477
21. 육종윤(陸鐘允) 490
22. 윤갑병(尹甲炳) 492
23. 이방협(李邦協) 493
24. 이완구(李完求) 495
25. 이진호(李軫鎬) 498
26. 장우근(張宇根) 503
27. 장헌식(張憲植) 504
28. 조병상(曺秉相) 506
29. 최화주(崔華疇) 507
30. 한규복(韓圭復) 5 10
31. 한상룡(韓相龍) 514
32. 한창수(韓昌洙) 522
33. 홍승균(洪承均) 523
34. 홍준표(洪埈杓) 524
* 찾아보기 ··················································································································· 529
(상단 생략)
Ⅴ. 언론계 상황과 매일신보의 주요 논설
1. 신문·잡지의 발간 현황(1936)
제1장 개설
1919년 제도 개정 이전에는 조선에서 신문, 통신, 잡지, 기타 보통 출판물에 대하여 엄중하게 관리했다.
특히 신문, 잡지의 발행에는 인가 또는 허가 제도를 통해 이를 제한하고 조선인의 발행에 관련한 것은 대부분 이를 허가하지 않는 방침을 취해 왔기 때문에 출판에 대해서는 일본인과 조선인 모두 일반적으로 극히 부진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것은 조선 내 민의(民意)의 창달(暢達)을 위하여 매우 유감일 뿐만 아니라, 조선 문화의 향상을 저해하였다.
따라서 점차 관리 방침을 개정하고 천천히 이를 완화하여 필요에 따라서는 신문과 잡지의 새로운 발행을 인정하고,
또한 보통 출판물의 출판에 대해서도 공서(公序) 양속(良俗)에 반하지 않는 한 출판을 인정하는 등 일본인과 조선인의 구별 없이 언론의 자유를 존중하여 공정하고 평등한 방침으로 민의의 창달과 문화의 향상, 촉진에 이바지함으로써 민심의 지도, 완화에 노력해 왔다.
이와 같이 조선 출판계가 기운발흥(起運勃興)하여 특히 조선인이 발행하는 신문은 널리 전 조선에 배포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신문과 잡지의 종류도 해마다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고, 신문과 잡지는 반도 문화의 향상에 공헌하는 바가 지대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조선인이 발행하는 것은 때에 따라서는 총독정치를 비방하거나 민족의식을 앙양(昻揚)하여 불온하고 과격한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조선 대중의 여론을 호도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해서는 종래의 엄중한 관리를 가하는 한편 선도에 힘쓴다.
또한 중일전쟁 발발 이후 수입되는 신문과 잡지에는 우리의 대(對) 중국 정책과 ‘황군(皇軍)’의 행동을 왜곡하거나 무고(誣告), 비방하여 반군(反軍)·반전(反戰) 사상을 고취하여 ‘황군’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등 불온하고 과격한 기사가 있다. 이런 종류의 간행물에 대해서는 각 관계기관과 긴밀한 연락하에 엄중한 관리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내에서 신문출판물의 관리법규는 모두 병합 이전에 제정되었다.
즉 조선 내에 거주하는 일본인 및 외국인에 대하여 적용해야 하는 통감부령에 따른 신문규칙과 출판규칙 또는 조선인에게만 적용해야 할 구(舊)한국법률인 신문지법과 출판법이다.
현재에는 제령(制令)에 따라 이를 관리하지만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그 적용이 다르고, 또한 그 규정하는 사항도 세상의 진보에 적응하지 못한다.
따라서 운용에 관하여 적당한 조치를 강구하고 불비(不備), 결함을 보충하고 있는 것이 실황(實況)이다.
제2장 신문, 잡지, 보통 출판물의 발행 및 출판 상황
제1절 신문, 잡지의 발행 상황
신문규칙에 따라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 잡지는 1937년 말 현재 신문 31종, 잡지 15 종, 통신 8종 등 총 54종이며,
같은 해 신문의 경우 경성일보(京城日報)의 자매지인 영문(英文) 일간지 '서울프레스'는 최근 조선에 있는 구미인(歐米人)이 감소하는 시세의 추이에 따라 종래처럼 큰 희생을 지불하면서 발행을 계속하여도 효과가 없어 1937년 6월1일
폐간하였다.
같은 해 10월 9일에는 일반 수산(水産) 관계기사를 게재하는 월간 신문 '조선수산시보'를 인가하였고, 잡지도 같은 해 8월 27일 일반교육기사를 게재하는 '문교의 조선'이 새롭게 인가를 받았다.
이들 신문, 잡지는 일부를 제외하면 그 주의 주장이 온건하여 총독정치에 유용하며 조선 문화의 향상과 개발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어느 것이나 진면목인 논조(論調)로 발행을 계속하고 있으며, 그 발행부수는 배포 상세표와 같이 일반 경제계의 성쇠(盛衰)나 논조, 기타 환경 등에 따라 부수에 다소 증감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다 할 변동은 없다.
신문지법에 의해 조선인이 발행하는 신문, 잡지는 종래 본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申報)' 및 정치기사 등을 게재하지 않는 월간 잡지인 '천도교회월보', '신외의약신보' 등 3종뿐이었으나, 1920년에는 일간 신문인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과 월간 잡지인 '개벽' 등 4종이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시사신문은 '시사평론'으로 개칭하고 월간 잡지로 바뀌었다가, 1930년 1월에 주간 '민중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어 친일단체 국민협회의 기관지로서 다시 신문으로 복귀하였다.
이후 발행된 것은 1921년에 현 진흥(振興)의 전신인 유도진흥회(儒道振興會)의 기관지인 월간 잡지 '유도', 1922년에
일간 '신생활', 월간 잡지 '동명(東明)'(다음해 시대일보로 변경) 및 친일단체 평양 대동동지회의 기관지로서 주간지인
'대동신보(大東申報)'와 월간 잡지 '조선지광(朝鮮之光)', 1924년에는 조선인의 유일한 경제신문으로서 현 '남선경제일보(南鮮經濟日報)'의 전신인 '대구상보(大邱商報)', 1932년에는 마찬가지로 경제, 시사만을 게재하는 현 '동아경제신문'의 전신인 '동아상공시보(東亞商工時報)'와 월간 잡지 '조선실업구락부', '내외호모정보(內外護謨情報)'의 4종이 허가되었다.
그런데 1926년 9월에 일간 '시대일보'는 발행허가를 상실하여 폐간됨과 동시에 같은 명칭으로 새롭게 허가받은 것이 일간 '중외일보(中外日報)'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7년 1월에는 월간 잡지 현대평론이 허가를 받았고, 앞의 중외일보는 1931년 10월 26일 '중앙일보'로 개제(改題)하고 또 1933년 3월 6일에는 다시 '조선중앙일보'로 개칭하였다.
이 신문은 1936년 9월 5일 소위 ‘일장기 말소 사건’에 관련되어 휴간하게 되어 다음해 11월 5일 발행권을 상실하고 결국 폐간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생활'은 그 후 공산주의, 계급투쟁, 사회혁명을 제창, 고취하게 되어 1923년 1월 8일 안녕과 질서를 방해하는 것으로 인정되어 폐간되었다.
'개벽'은 반도에서 유일한 유력한 대중잡지였는데, 주의적 색채가 농후하여 1926년 8월 1일 이 또한 치안방해라는 이유로 모두 발행금지처분을 당했다.
'현대평론'은 이후 경영이 어려워져 발행 불능 상태에 빠지고, 1928년 1월 실질적으로 폐간되었으며, '조선지광'도 경영이 어려워져 영구 휴간 상태에 있다가 1932년 7월 14일 폐간되었다.
'내외호모정보'도 역시 경영난에 빠져 1935년 9월 25일 마찬가지로 실질적으로 폐간되었다.
또 '기독신보'는 종래 외국인이 발행했지만, 1933년 7월 31일 폐간하고 같은 날 조선인에게 발행이 허가되었다.
하지만 이후 경영이 뜻대로 되지 않아 결국 1937년 8월 1일에 앞으로 2개월간 휴간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만회하지 못하고 같은 해 12월 1일 결국 폐간하기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이 현재 조선인이 발행하는 신문, 잡지는 12종에 이르고 허가받은 신문, 잡지의 최근 발행 상황은 배포 상세표와 같다. 그런데 조선인이 발행하는 신문, 잡지는 일본인이 발행하는 것과는 내용이 다르다. 즉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겨우 63만 명을 넘지못하는 데 반해 조선에는 2,168만여 명의 조선 대중이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 내 문화의 향상은 향학열의 발흥으로 이어져 통치의 혜택은 산간벽지에 이르기까지 교학(敎學) 보급되어 문자를 이해하는 자가 매우 많고 신문, 잡지에 대해서도 점차 이해가 깊어져 최근에 이르러서는 생활상 어려움이 없는 구매자가 점차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모든 신문, 잡지는 뜻대로 되지 않아 대부분 경영난에 빠져 있는 상황이다.
또 언문 신문, 잡지는 별도로 관리 상황에서 서술하는 바와 같이 종래 민족의식에 치우쳐 총독정치를 비방, 곡필하는 등 반도 대중의 여론을 호도하는 폐단이 있다.
하지만 언문 신문의 논조는 바로 대중에게 반영되어 통치에 미치는 영향이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에, 당국은 당시 이에 대한 관리를 맡겨 그 잘못된 편견을 시정하게 하고 또 한편으로 업자에게도 시정을 요구하여 특히 중일전쟁 발발 이래 눈에 띄게 태도가 바뀌었다.
그 논조와 필치는 점차 국책에 순응하고 제국 궐기의 참 정신, 국위의 선양, 출정 장병의 사기 고무, 시국에 국민의 대한 인식, 총후(銃後) 국민의 결속 후원, 애국운동, 시난 극복, 기타 시국에 관한 기사로 지면을 채우게 되었다.
이제 논조와 다른 상황에 대하여 두세 가지를 지적하자면 다음과 같다.
즉 언문 신문은 만주사변 이래 적극적으로 불온한 태도를 고쳤지만 계속하여 소극적으로 불온한 것은 남아 있다.
그 특징은 (1) 황실기사, 관청기사 등에 대한 성의의 결여, (2) 사상범, 불순운동자에 관한 기사의 과대 취급, (3) 사물을 곡해하여 논하고자 하는 폐풍(弊風)을 지적할 수 있지만, ‘일장기 마크 사건’에 따른 동아일보 등에 대한 당국의 과감한 강압에 따라 이러한 소극적인 불온한 태도도 눈에 띄게 개선되어 1937년 1월 1일의 조선일보에는 양 폐하의 초상이 게재되었다(동아, 중앙은 휴, 정간 중).
이처럼 황실기사와 같은 것은 대부분 이를 게재하고 관청기사 또한 생략하는 폐풍이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들 기사는 크게 취급하지 않고, 그다지 성의를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설란에는 아직 스스로 당국의 시정(施政)을 성원하지 않는다.
또한 전년부터 계속된 기독교계 학교의 문제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선교사 측에 동정하는 기색도 있고, 자자교(自自敎) 사건에 대해서도 공연히 당국의 발각 지연에 대한 책임을 묻는 등 필치에 있어서 '동아일보' 정간 청분 이전에 비하면
개선되었다고는 해도 아직 유감스러운 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당국에서는 수시로 그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정간에서 풀린 '동아일보'와 함께 서서히 그 개선을 촉구하여 지도방침을 확립하여 실행 해야 한다.
그런데 올해 7월 8일에 이번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노구교(蘆溝橋) 사건이 발생하자 '매일신보'는 솔선하여 중국 측의 부정불신(不正不信), 요컨대 응징을 설파하고 또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는 당초에는 사변에 관하여 아무런 사설을 게재하지 않고 회피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보도기사에 관한 한 성실하게 제국 측의 성명과 주장을 게재한 것은 비교적 잘한 일로서 지도 편달한 효과가 크다고 인정된다.
그리고 사태는 매일 중대화하고 있으며 언문 신문의 태도도 이와 함께 급변하여 조선일보는 7월 19일에는 ‘아군’, ‘황실’ 등의 문자를 사용하고, '동아일보'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7월 20일자 '조선일보'는 지상(紙上)에 중일전쟁을 해설할 때 “사변은 중국 측의 협정 무시에 의해 일어났다.”고 밝혔으며, 이어 '동아일보'는 “우리는 어떠한 사변에 당면해서도 그것을 정관대응(靜觀對應)하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논하였다.
'조선일보는 “우리는 최악의 경우에도 협력, 일치하는 한 가지 길이 있을 뿐”이라고 논단하였는데,
사태는 이미 이처럼 미온적인 필치를 허락하지 않는 데까지 진전하여 언문 신문의 논조는 한층 강화, 개선될 것이 요망되었다.
동아일보는 마침내 7월 31일 지상에 “우리는 사변의 완급과 진퇴를 우리의 휴척(休戚)에 관련시킴으로써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였고, '조선일보'도 8월 2일자 지상에 “국민 각 개인은 응분의 성의를 다하여 출정 장병을 위로, 고무해야 한다.”고 반도 대중에게 호소하여 군국비상 시를 맞이하는 제국의 신문으로서 그 충성을 인정받기에 이르
렀다.
이후 새롭게 상해에서 돌발한 사건을 계기로 하여 중일전쟁은 전 중국으로 확대되었는데, 언문지는 사변의 해설 인식에 노력하면서 또한 거국일치로 중국을 응징해야 한다고 설파하는가 하면 전사자의 영령을 위로하고 전승(戰勝)을 축복하는 등 종래 전혀 볼 수 없던 태도를 보여 일반 민중에게 준 효과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언문 신문은 이상과 같이 ‘일장기 마크 사건’을 계기로 일반적으로 개선되었으며 이번 중일전쟁에 의해 한층 더 개선되어 현재 그 필치는 당국의 기대에 근접했다고 하더라도 황실기사, 관청기사 및 총후 기사의 취급은 유감스러운 점이 적지 않다.
여전히 개선을 촉구할 필요가 있다.
일본인 발행 신문·통신·잡지 표
신문
제호 인가년월일 발행시기 게재사항 사용문자 소속도명 비고
경성일보 1906.8.10. 월간 일반시사 일문 경기 괄호 안은 사용 할 수 있다는 뜻
중선신보 1908.6.12. 주간 동상(同上) 동상(同上) 동상(同上)
조선신문 1908.11.20. 일간 동상 일문(영문) 동상
경성신문 1909.3.24. 주간 동상 일문(영문) 동상
동아경제시보 1919.12.13. 월간 일반경제시사 일문 동상
조선일일신문 1920.4.17. 일간 일반시사 동상 동상
법정신문 1920.6.29. 5일 25일 법조관계를중심으로한 시사 동상 동상
조선상공신문 1920.11.29. 일간 일반경제시사 일문(영문) 동상
조선경찰신문 1920.12.9. 1일 15일 경찰시사 동상 동상
조선매일신문 1921.5.13. 일간 일반시사 일문 동상
조선교육신문 1925.12.29. 월간 교육시사 동상 동상
조선수산시보 1937.10.9. 동상(同上) 일반수산관계 동상 동상
중선일보 1909.8.1일간 일반시사 동상 충남
전북일보 1905.12.25. 동상 동상 동상 전북
군산일보 1908.4.15. 동상 동상 일문(한글) 동상
동광신문 1920.11.18. 동상 동상 한글(일문) 동상
목포신보 1908.6.11. 동상 동상 일문 전남
광주일보 1909.5.9. 동상 동상 동상 동상
조선민보 1905.3.26. 동상 동상 동상 경북
대구일보 1928.8.11. 동상 동상 동상 동상
조선시보 1892.7.11. 동상 동상 동상 경남
부산일보 1907.10.1. 동상 동상 동상 동상
남선일보 1908.10.1. 동상 동상 동상 동상
조선수산신문 1925.12.3. 동상 동상 동상 동상
평양매일신문 1920.4.1. 순간 수산시사 동상 평남
서선일보 1923.7.18. 일간 일반시사일문 (한글) 동상
압강일보 1906.12.1. 동상 동상 동상 동상
북선시사신보 1908.12.4. 동상 동상 동상 함남
원산매일신보 1909.1.1. 동상 동상 동상 동상
북선일보 1908.8.1. 동상 동상 동상 함북
북선일일신문 1919.12.13. 동상 동상일문 (한글) 동상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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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전보통신 1906.4.3. 일간 일반시사 일문 경기
일간대륙통신 1920.2.20. 동상 동상 동상 동상
조선경제일보 1920.3.10. 동상 일반경제시사 동상 동상
상업통신 1922.11.8. 동상 동상 동상 동상
제국통신 1923.4.14. 동상 일반시사 동상 동상
조선통신 1926.4.23. 동상 일반시사 한글 번역 동상 동상
동맹통신 1935.12.31. 동상 일반시사 동상 동상
동맹통신 1936.6.1. 동상 동상 동상 경남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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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만주
(朝鮮及滿洲)1908.2.1. 월간 일반시사 일문 경기
경기잡필 1920.2.9. 동상 동상 동상
조선공론 1920.10.8. 동상 동상 일문(한글)
조선철도협회
회지 1922. 1.16. 동상 철도시사 일문
경성토목건축
업협회보 1922.1.23. 순간 토목건축기사 동상
조선지방행정 1923.12.10. 월간 일반시사 일문(한글)
철도의 벗
(鐵道之友)1926.4.23. 동상 철도에 관한일체의 사항 일문
경무휘보 1926.6.10. 동상 일반시사 동상
조선소방 1929.2.26. 동상 소방학술통계회사일반시사 일문(한글)
사법협회잡지 1930.1.30. 동상 사법일반시사
일문 선만의 위생(鮮滿之衛生)1936.10.29. 동상 위생에 관한일반시사와광고 동상
문교의 조선
(文敎之朝鮮)1937.8.27. 동상 교육기사 동상
실업의 조선
(失業之朝鮮)1919.12.26. 동상 일반시사 동상
함남경우 1922.9.1. 동상 경찰기사 동상
함북경우 1933.9.5. 동상 동상 동상
조선인 발행 신문·잡지 표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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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06.2. 일간 일반시사 한글 경기
조선일보 1920.1.6. 동상 동상 한글(일문) 동상
동아일보 1920.1.6. 동상 동상 한글 동상
민중신문 1930.1.25. 주간 동상 일문(한글) 동상조선인이발행하였지만 일문을 사용함
동아경제신문 1932.4.3. 월 2회 경제시사문예 한글 동상
남선경제일보 1924.11.19. 일간 일반경제시사 일문(한글) 경북조선인이발행하였지만일문을 사용함
대동신문 1922.5.27. 주간 일반시사 한글 평남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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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외의약신보 1908.8.25. 월간 의약기사 한글 경기
천도교회월보 1909.8.15. 동상 종교기사 동상 동상
진흥 1921.1.29. 동상 사회교화기사 동상 동상
조선실업구락부 1932.4.3. 동상 경제시사 일문(한글) 동상조선인이발행했지만일문을사용함
의약시보 1932.4.3. 동상 의약기사 한글 동상
신문·통신·잡지 발행시기 구분 표
도별 신문, 통신,
잡지 발행 수 발행시기의 구분
일간 주간 순간 월 2회 월간 계
일본인 조선인 일본인 조선인 일본인 조선인 일본인 조선인 일본인 조선인 일본인 조선인
경기 41 12 3 2 1 1 2 1 14 5 31 10
충북
충남 1 1 1
전북 4 2 1 1 4
전남 2 2 2
경북 3 2 1 2 1
경남 5 4 1 5
황해
평남 3 2 1 2 1
평북 1 1 1
강원
함남 3 2 1 3
함북 3 2 1 3
계 66 30 4 3 2 2 2 1 17 5 54 12
신문·통신·잡지 게재사항 종류 표
도별 신문, 통신, 게재사항
잡지 발행 수 정치 및 일반 시사를
게재한 것 기타 계
일본인발행 조선인발행 일본인발행 조선인발행 일본인발행 조선인발행
경기 41 18 4 13 6 31 10
충북
충남 1 1 1
전북 4 3 1 4
전남 2 2 2
경북 3 2 1 2 1
경남 5 4 1 5
황해
평남 3 2 1 2 1
평북 1 1 1
강원
함남 3 2 1 3
함북 3 2 1 3
계 66 37 5 17 7 54 12
신문·통신·잡지 사용문자 종별(種別) 표
사용
문자
종별 인별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평남 평북 강원 함남 함북 계
일문 일본인 24 1 2 2 2 5 1 3 2 42
조선인
한글 일본인
조선인 7 1 8
영문 일본인
조선인
일문 일본인 6 2 2 1 11
한글 조선인 3 1 4
일문 일본인 1 1
영문 조선인
일문 일본인
한글
영문 조선인
계 일본인 31 1 4 2 2 5 2 1 3 3 54
조선인 10 1 1 12
(하략)
<출전 : '朝鮮出版警察槪要', 朝鮮總督府 警務局, 1936년, 1~18쪽>
2. 경성일보사 개황(1920)
(상략)
2) 사시(社是)
'경성일보(京城日報)'의 창립은 앞 장에서 개술(槪述)한 것처럼 그 연유를 사시에 명백히 밝혔지만, 1910년 10월 2일
데라우치(寺內) 총독은 다음의 훈시(訓示)를 주어 구체적으로 이를 명확히 하였다.
- '경성일보' 사원은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정신을 발휘하여 조선총독부 시정(施政)의 목적을 관철하는 데 힘쓸 것.
- 사원 일동이 질서를 지키고 기율(紀律)을 따라 한마음으로 협력, 정려(精勵), 분진(奮進)함으로써 사운(社運)의 융성을 도모할 것.
- 공정하고 온건한 필봉(筆鋒)을 근엄히 하여 경성일보의 품위를 높이고 신용을 두터이 하여 세력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될 것.
- 각 사원은 품행을 방정히 하여 위의(威儀)를 닦고 체면을 살려 신문기자로서 자격을 고상히 할 것.
- 어떠한 경우에도 윗사람의 명령을 잘 받들고 각자의 능력을 경주(傾注)하여 자발적인 활동을 통해 직무에 충실하도록 할 것.
1919년 3월 사칙(社則) 개정(更正) 시에 가토(加藤) 사장은 다시 한 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 사칙, 회계규칙, 직공(職工) 규칙, 직공 부조(扶助) 규칙을 개정(改訂)하게 된 것은 1910년 10월 2일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각하가 본사에 주신 훈시를 명심하여 사시(社是)를 표명하고 사원이 준수해야 할 조항을 규정한 것이다.
즉 엄숙한 규율 아래 직무에 종사하고 노력하여 직책을 완수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며 품행을 바르게 하고 품위를 유지하며 동료 간에 서로 화합함으로써 사운(社運)을 융성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3) 조직 및 사원
(가) 분과
창립 시에 조직은 일반적인 예에 따라 매우 단순한 것이지만, 그 후 몇 차례 변경하여 1915년 3월에는 비로소 사칙(社則)을 제정하기에 이르렀으며, 1919년 3월 이를 경정(更正)하고 다음해인 1920년 3월 다시 일부를 개정하여, 경일편집(京日編輯), 매신편집(每申編輯), 영업의 3국(局) 및 비서과(秘書課)를 설치하고, 각 부를 여기에 다음과 같이 예속
시킨다.
경일편집국-논설부, 통신부, 정치부, 경제부, 사회부, 편집부, 조사부
매신편집국-논설부, 편집부, 외사부, 사회부, 지방부
영업국-서무부, 경리부, 광고부, 판매부, 대리부, 사진부, 주조부, 공장
(중략)
5) '매일신보(每日申報)'
'매일신보'는 '경성일보'보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초기에 영국인 베델이 경영하던 것을 '대한매일신보'라고 하였다.
통감부를 설치할 때, 베델은 극단적인 반대론을 주창하여 조선인을 선동하고 마침내 일본과 영국의 국교를 저해하기에 이르렀다.
국법에 따라 처벌받아 출옥 후 바로 병사하였으며, 같은 영국인인 마남이 승계했지만 역시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바로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매수하여 '매일신보'로 제호를 바꾸고 독립회계로 경영하게 되었는데, 1913년 본사를 합자회사로 하여 완전히
합동하였다.
현재 편집국은 이를 분치(分置)하고(조직은 앞 장에 나온다) 영업은 합동처리하고 있다.
현재 '매일신보'에 전속하는 지국은 18, 분국은 47, 판매점은 78개소에 이르며 판로(販路)는 점점 더 확충할 계획이다.
'매일신보'의 주의 주장은 '경성일보'와 다를 바 없지만 온전히 조선인을 구매자로하고 있기 때문에 기사의 선택과 취사에는 다소의 차이가 없지는 않다.
1910년 10월 도쿠토미(德富) 감독이 다음과 같이 훈시하였다.
- '매일신보'가 신문으로서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 천황 폐하의 지극한 인애(仁愛)가 일본인과 조선인을 일시동인(一視同仁)하시는 것을 조선인에게 선전하는 것에 있다.
- 집필자는 공정해야 한다. 결코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 당동벌이(黨同伐異)한 붓을 휘두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 문장은 간정명창(簡淨明暢)해야 한다.
- 일반적으로 논조는 온건 타당하도록 한다. 결코 궤언망설(詭言妄說)을 고취하지 않도록 한다.
- '매일신보'는 '경성일보'와 제휴하여 보조를 맞추도록 한다.
(하략)
<출전 : '京城日報社誌', 京城日報社, 1920년 9월 1일, 5~8쪽, 22~24쪽>
3. 송순기(勿齋學人), 송이기수영창(頌以其壽永昌)
우리 '매일신보(毎日申報)'는 창간 이래로 물(物)은 서(誓)하고 성(星)은 옮기어 이미 20춘추에 이르렀도다.
이 20춘추가 아득하지 않은 바가 아니며, 많지 않은 바가 아니다.
그러나 천추(千秋)를 다하도록 누(漏)치 아니할 우리 매일신보는 오히려 소장기(少壮期)에 있는 것이다. 아니다,
□란기(□亂期)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우리 신문의 생명은 무한하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생존은 영구하지 않지만 우리 신문의 생존은 영구하다. 인(仁)한 자는 반드시 장수(寿)한다는 것과 같이 공명정대한 신문은 반드시 □□하는 것이다.
신문이란 천하의 공기(公器)이다. 민중의 목탁이다.
또는 사회의 경종이다.
그리고 신문은 자체가 역사이다. 명□(明□)하면 역사는 과거의 신문이며, 신문은 현재의 역사이다.
예로부터 소위통고금달사리□(所謂通古今達事理□)라는 자(者)라야 상당한 인격적 지위를 □하였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옛 것과 통하고자 함이요, 신문을 읽는다는 것은 현재를 알고자 함이다. 이미 옛 것과 통하고, 현재를 아는 자가 된다면, 이는 즉 사리(事理)에 통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통하지 못한 자와 신문을 읽지 못한자는 상식의 소유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문은 사람의 상식을 양성하는 기관이다. 즉 말하자면 청심□지(清心□智)의 약석(薬石)이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우리 '매일신보'는 조선 민중에 있어서 얼마나 절대적 공로를 하였으며, 또 조선 사회에 대하여 얼마나 지대한 많은 공헌을 □□였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본지의 자찬(自讚)인 듯하지만 실은 자찬이 아니며, 또 자부(自負)인 듯 하지만 실은 자부가 아니다.
명백히 말하지만, 우리 '매일신보'는 조선에서 신문계로는 어머니(母)이며, 패왕(覇王)이다.
더구나 본지는 어디까지나 불편부당하며, 또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다. 지령(紙齢)이 다하도록 사운(社運)은 날로 □□하여 오며, 사운이 융창(隆昌)할수록 민중의 신뢰가 더욱 두터워진다. 성쇠는 인간의 원리라 하지만 본사는 날로 성할지언정 결코 쇠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매일신보사는 영구히 사멸하지 않을 것이다. 언론사의 생명이 영구할수록 우리의 책임이 더욱 중하고 사명이 더욱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본지의 강령을 더욱 간명하며, 또 어떻게 하면 민중의 신뢰에 부합할까 하고 전고자지(戦鼓自持)하는 바이다.
우리 언론사는 이에 융창(隆昌)의 운(運)을 편하는 동시에 사옥을 신축하고 오늘로써 낙성(落成)을 고하게 되었다.
요헌(瑶軒)이라 할까, 기구(綺搆)라 할까, 자각(紫閣)이라 할까. 단루(丹樓)라 할까, 윤(輪)하고, 환(奐)하며, 영(玲)하고,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이 굉걸(宏傑)의 사옥을 신축하였다 하여, 이로써 만족하다 여기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외관의 미를 갖춘 동시에 더불어 내관의 미를 장식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관의 미는 신문지상에 드러
나는 것이며, 외관의 미는 건물에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 언론사는 이를 겸비해야 할 것이다.
이에 「어만사년 영세무투(於萬斯年 永世無渝)」를 □하는 바이다.
<출전 : 勿齋學人, 頌以其壽永昌, '每日申報', 1924년 6월 1일>
4. 홍승구(木春山人), 조선 언론계의 과거와 현재(1~3)
- 조고자(操角瓜者)1) 예찬
하산(霞山)형. 청우중하(青牛仲夏)의 계절에 고고(呱呱)한 제일성(第一声)을 드날린 이래 건전하고 또 견실한 발달을
이룬 귀지(貴誌) '신민(新民)'이 새로이 웅대한 대비약을
시작하려는 적호(赤虎)의 신력(新曆)을 맞이하는 것을 먼저 치하합니다.
조선의 문운왕1) 문필가.성(文運旺盛)을 위하니 뭐니 하는 세속 외교적 예찬으로 그럴 뿐 아니라, 내가 평소 경애하는
귀형이 주장(主掌)하기 때문이 한 가지요, 또 무사(無似)한 졸문(拙文)을 가지고 왕왕 그 귀중한 지면을 허비하여 오던 불천(不浅)한 인연을 가진 나의 사정으로도 억제하지 못할 기쁨의 정이 넘치는 것이 두 가지외다.
그런데 이와 같이 뜻 깊은 신년호 신장(新裝)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제공하라고 징발령을 내리시기에 사불획(辭不獲)할 것을 예기하고, 쉽게 받기는 하였습니다만 물러와 생각한 즉, 형이 요구하신바 과거와 현재의 우리 언론계 비판이라는 제목이 과연 나에게 있어 미문부산(微蚊負山) 이상의 과중한 부담인 것을 깨닫고 뉘우쳤습니다.
불문(不文)과 단식(短識)은 지금에 시작된 것이 아닌즉 새삼스러운 겸양(謙讓)은 그만둘지라도 조고계(操觚界)2)의 현역을 사퇴한 이래로 벽항(僻巷)에 누워 외계사물과 접촉하는 기회가 적음에 따라 자연의 약속으로 옛 지식은 모두 잊고,
새 지식에 매진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자미(紫米)와 교전하기에 골몰하여 상두연전(床頭硯田)이 황무한 곳이므로 이러한 주문을 받으면 광영도 지극하지만은 적지 않은 고통이 수반됩니다.
물을 떠난 물고기 떼, 칼을 버린 군인, 붓대를 던진 신문기자를 아울러 연상하여 보시오.
분수를 자췌(自揣)하지 못하고 인수한 나의 맹목적 대담보다도 비재(菲才)에게 큰 임무를 부담시킨 형의 현명하지 못한 비례(比例)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잘못된 전제가 재미있는 결론을 낳지 못할 것은 천지간의 정칙(定則)이올시다. 독자에게 노졸(露拙)시키는 것을 원망하여 두는 것은 반드시 나의 비겁함이 그렇게 할 뿐 아니라 지면을 더럽히는 것을 자각한 양심이 그렇게 하는 것이외다.
◇
하산형. 모진 바람이 창에 노호(怒号)하고, 동우(凍雨)가 집을 난타하여 나의 서재는 지금 만주대륙에서 번복(翻覆)되는 장곽양웅전투(張郭兩雄戰鬪)3) 이상으로 처참하고, 맹렬한 광경을 연출합니다. 외출 못하는 무료한 여가에 안상잔질(案上残帙)을 신수념출(信手拈出)하여 읽고 있습니다.
크고 우렁차게 노래를 부른다(浩浩浩浩浩浩歌)
천지 만물이 내게 어찌하랴(天地万物如吾何)
옥당 금마는 어디에 있는가(玉堂金馬在何處)
운산 석실은 우뚝 높이 솟아 있도다(雲山石室高嵯峨)
머리 숙여 땅은 비록 작으나 경작하고 싶고(低頭欲耕地雖少)
하늘을 우러러 길게 휘파람 부니 하늘이 얼마나 많은지(仰天長嘯天何多)
그대는 나에게 한 말 술로 취하게 하니(請君醉我一斗酒)
붉은 햇빛 얼굴에 부딪히니 봄바람 화락하구나(紅光入面春風和)
<마자재가(馬子才歌)>
누가 조정에 걸터앉아 좋은 음식을 먹는가(誰踞廊廟飽甘肥)
천하의 문장은 재야에 있도다(宇內文章在布衣)
노 하나 잡고 강과 바다를 어지러이 다니니(一棹去來湖海濶)
잔잔한 안개 낀 물에서 흰 갈매기가 나는구나(烟波洗蕩白鷗飛)
<일본 모씨(某氏) 작(作)>
2) 문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사회. 신문·잡지의 기자, 편집자, 평론가, 문필가들의 사회를 이르는 말.
3) 장, 곽은 만주군벌.
과연 내 마음을 타인이 선도하였습니다. 식자우환인지는 모르겠으나, 낭핍일전(囊乏一銭)하여 모자 귀가 축 처져 상가(喪家)의 개와 흡사하면서도 글줄이나 쓴다고 의기양양한 세상의 신문기자선생들이 아마 이 맛으로 사는 모양입니다.
정권(政權)과 금권(金權)은 남에게 맡겨라, 나는 오직 문장으로 살겠다는 것이 기자선생들의 자위사(自慰辞)인 듯합
니다.
신문과 신문기자에게는 칭호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이른바 무관의 제왕, 사회의 목탁, 여론의 선구자, 사조의 지남철 등 무엇하면서 교활한 세상 사람들이 비행기 위로 떠받들 뿐 아니라, 그들 자신도 이러한 마취약에 과도로 취하면, 쉽게 과대망상환자로 변하여 그럴듯한 착각의 혼수상태에 빠지는 모양입니다.
자기가 면허(免許)를 받은 이천만 민중의 무슨 기관이니, 혹은 세계의 정의와 인도(人道)를 한 손으로 제조 겸 판매하는
듯이 무산대중의 친구이니, 정의인도주의이니 무엇 무엇하면서 떠드는 선생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가련한 활계(滑稽)라 할까요, 통쾌한 비참이라 할까요…….
세상에 초인간이 있다면 모르거니와 우리처럼 사신곡복(絲身穀腹)하는 동물들은 권세를 가져야 하고, 금전을 가져야
사는 것이외다.
그뿐이리오. 저 창생(蒼生)들의 두상에 정권과 금권의 위력을 종횡무애(縦横無碍)하게 발휘하며, 통쾌림리(痛快淋漓)하게 사용하는 것이 남자의 본심일 것이다.
이 점에 있어 문필가들은 간혹 극소수의 예외가 있지만은 실로 수평선 이하에 있습니다.
우주를 포괄할 듯한 심흉과 산하를 울릴 듯 한 기백을 가졌다 하여도 반문(半文)의 가치가 없는데 어찌합니까?
보시오. 일상에 대언장담하고 호기로운 기자선생들의 생활 상태를. 무관의 제왕이라면서도 자그마한 일개 지주의 악행을 말하여도 경리(警吏)의 포승줄이 신변을 위협하지 않습니까?
피근견족(疲筋繭足)4) 밤낮으로 활동하다가도 일차로 사주(社主)를 화내게 하면, 쪽지 한 장으로 단두대에 올라 생활의 근거를 치탈(褫奪)당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경고문을 보내고 성토서를 돌린다 해도 정권, 금권자들의 귀에는 풀벌레 울음소리만도 못합니다.
그러하기에 항우(項羽)라는 영웅이 책은 성명을 쓰면 그만이라고 갈파하였고, 일본의 어떤 배우(俳謔師)는 ‘시를 짓느니 밭을 갈고 어떤 과자보다도 얼음과자(高利貸)’ 라는 격언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듯합니다.
◇
하산형. 이렇게 쓰고 보니 퍽이나 탈선이 되었습니다. 탈선도 참으로 대탈선이외다.
현역은 아닐지라도 신문사 밥을 먹어 왔던 나로서 물론 「초록은 동색」이라는 격으로 신문기자 예찬을 써볼까 한 것인데 예찬은 고사하고, 저주하였으며, 비웃고 꾸짖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이 현명치 못하다고 예언한 것이지요.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고금인(古今人) 시집 중 우리 선철(先哲) 중에서도 대철학자인 율곡 이이 선생의 작품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출세와 은퇴 모두 천명이요 어찌 사람에게 달렸으랴마는(行藏由命豈由人)
뜻은 일찍이 자신만 깨끗이 하자는게 아니었다네(素志曾非在潔身)
궐문에 세 번 상소로 성스러운 임금 하직하고(閶闔三章辭聖主)
강호의 조각배에 외로운 신하 실었구나(江湖一葦載孤臣)
재주 용렬해 남묘의 밭갈이에나 적합한데(疎才只合耕南畝)
맑은 꿈 부질없이 북신(임금 계신 곳)을 향한다네(淸夢依然繞北宸)
풀로 엮은 집에 자갈밭 옛 가업에 돌아왔으니(茅屋石田還舊業)
반평생의 심사 가난쯤은 걱정 않네(半生心事不憂貧)
<율곡 이이 작품>
참으로 일창삼탄(一唱三嘆)할 가치가 있습니다. 더욱이 제2구는 선생의 우시개세(憂時慨世)하는 충애(忠愛)의 정신으로 일세의 지도자로 자임하여 일신의 명리(名利)를 희생하여도 후회하지 않을 결심이 말씀에 드러나지 않습니까.
4) 발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피곤함.
이것이외다. 신문기자를 예찬할 것은 …… 위언(危言)과 당론(黨論)이 시대의 집권자에게 기휘(忌諱)되어 박해의 화를 입어도 후회하지 않으며, 가무담석(家無擔石)으로 삼순구식(三旬九食)할지라도, 태연자약하여 일관된 필(筆)로 만복불평(満腹不平)의 기를 토하고, 가천예지(呵天睨地)5)하며, 특립불기(特立不覊)6)하는 곳에 또한 남아의 진골두(真骨頭)가 있는 것이외다.
완적(阮籍)의 백안(白眼)과 묵자(墨子)의 열장(熱膓)을 구비한 것은 오직 신문기자 하나뿐인가 합니다.
신문의 종류가 많은 동시에 기자의 종류도 천수만별이 합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기자는 절옥투향(竊玉偸香)7)의 음란한 행태를 그리거나, 빙작청취(憑酌聴酔)의 누취(陋趣)를 묘사하거나, 기타 모든 사회의 어두운 면을 척결하고, 인간의 추악성을 폭로하는 기자들을 가리킨 것은 아니외다.
적어도 마음에 도의애인(道義愛人)의 주장을 가지고 필하(筆下)에 경세제물(經世濟物)의 논의를 펼쳐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에 패익(稗益)할 것을 기하는 오당(吾黨)의 사(士)를 이른 것이외다.
그런데 나는 비록 짧은 경험이지만은, 이러한 기자선생이 있음을 보지 못한 것이 한갓 나의 불행이 아니라 조선 언론계를 위하여 불행이요, 다시 세도를 위하여 대불행이라 합니다.
편편(翩翩)한 소재자(小才子)들은 있습니다.
사이비 지사(志士)들도 있습니다. 그
러나 우리 문필계를 돌아보면, 서양은 그만두고라도 일개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가 없고, 일개 양치차오(梁啓超)가 없고, 일개 도쿠토미 조이치로(徳富猪一郞)가 있지 아니합니다. 모든 것에 낙오된 우리인 즉 걸출한 신문기자가 없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하면,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
하산형.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우리 과거에 있는 신문과 신문기자에 대하여 적어볼까 합니다.
조선 신문의 기원으로는 누구나 계미(癸未) 갑신(甲申)년에 창간한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郎) 씨의 '한성순보(漢城旬報)'를 가리킴에 이의가 없을 것이외다.
벼슬 없는 선비들이 멋대로 논의하는 패악이 심했던 그 시대에는 시정득실(時政得失)을 논의하는 길이 오직 원수(元首)에게 상소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일정한 격례와 격식이 있어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던지 '한성순보'가 조선에 있어 근대식 신문지의 원조인 것은 사실이외다.
5) 하늘을 꾸짖고 땅을 노려봄.
6)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홀로 섬.
7) 남녀 간의 은밀한 사랑.
그러나 주재자 이노우에(井上) 씨는 한국 정부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渉通商事務衙門)의 촉탁원이라는 준관리였고, '한성순보'는 관설(官設)박문국(博文局)에서 간행한 것인즉 따라서 신문지라는 것보다도 어찌 보면 관보(官報)의 일종이라는 것이 타당할 것이외다.
나는 한 친구의 집에 보존되어 있는 몇 장을 보았습니다.
그 체재는 조선 백지(白紙)에 구식주자(舊式鑄字)로 인쇄한 것이 마치 이삼백 년 전의 인쇄한 문집과 같고, 기사의 내용도 궁정록사(宮廷錄事)와 내외관리이동(内外官吏異動)과 외교조약과 법령 등을 가득 게재할 뿐이요, 독자도 각 관공서에 한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내려와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에 와서 비로소 신문다운 체재와 성질을 가진 여러 개의 언론기관이 출현하였다 합니다.
그 발행된 연도의 선후는 모르나, '독립신문(獨立新聞)', '황성신문(皇城新聞)' 및 '제국신문(帝國新聞)' 등은 우리 사람의 손으로 발행되었고, 일본인 측에서는 '한성신보(漢城新報)', '대동일보(大東日報)', '대한일보(大韓日報)'라는 것이 조선국한문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장지연(張志淵)이니, 누구누구 하는 사람들이 오늘에 와서 혹존혹몰(或存或没)한 노인들은 그때 우리 언론계의 용장(勇
將)들이라 합니다.
그들의 혹자들은 황국협회(皇國協會)라는 부보상(負褓商)의 거봉(巨棒)에 맞아서 생사가 오락가락하였고, 유명하던 혹리(酷吏) 김척안(金隻眼, 永準) 같은 마호(魔豪)에게 잡혀 영해(嶺海)와 질곡(桎梏)의 고초도 두루 겪었다 합니다.
무슨 일이고 처음 창업시대에는 모든 곤란이 수반되는 것은 면치 못할 일이지만 조선의 신문지도 출생 초부터 비상(非常)한 악전과 고투를 겪어 왔습니다.
갑오(甲午)로부터 갑진(甲辰), 즉 청일 전쟁으로부터 러일 전쟁에 이르기까지는 조선의 언론계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으나,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전후부터 경술병합(庚戌倂合) 당시까지 6, 7년 동안은 가장 파란중첩하여 신문지의 전성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그 종류로 볼지라도 전기 신문 외에 신간된 중요한 것을 적어보면, '만세보(萬歳報)', '국민신보(国民新報)', '대한신문(大韓新聞)', '대한민보(大韓民報)',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시사신문(時事新聞)' 등 국한문지와 '경성일보(京城日報)', '경성신보(京城新報)' 등 일문지와 '서울프레스'라는 영자지 이외에 일본인 측의 경판제신문(京阪諸新聞), 즉 보지(報知), 시사(時事), 국민(國民), 만조(萬朝), 조일(朝日), 매일(毎日),중앙(中央) 등 각지가 모두 전속 특파원을 경성(京城)에 주재시켜 통감정치에 성원하는 한편 그들의 국민적 대한(對韓) 여론이라는 것을 고취하기에 노력하였습니다.
◇
하산형. 그때나 지금이나 조선 사람들이 신문, 잡지 대금을 잘 안 냈습니다.
등통(鄧通)8)의 동산(銅山)을 가져도 경영난에 빠질 것은 당연한 일인데, 미약한 그때 신문경영자들의 곤란이야 실로
상상 이상일 것이외다.
일진회(一進會)의 기관지인 '국민신보'와 이완용(李完用) 내각 원조하에 있던 '대한신문'은 당시 하늘을 찌를 기세를
가진 대정당과 집권자의 배경이 있으므로 수지계산에 그다지 열중하지 않았겠지만 그 외에는 비록 영국인의 치외법권 엄호로 통감부가 어쩌지 못하여 일세를 풍미하던 베델(裴説) 씨의 '대한매일신보'까지도 50전이니 1원이니 하는 대금만 보내주어도 영수증 외에 '문명록(文明錄)'이라는 참신 기발한 고찰(考察)을 내어, 그 사람을 천하에 소개하며 대금지불
을 장려하던 것을 모두 알 것이외다.
그때에 있던 각 신문에 대하여 한마디 할 것은 각각 그 신문에 특색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주의와 주장뿐 아니외다.
즉 '대한민보'는 인물풍자만화를 처음 게재
하여 호평을 받았고, '대한신문'은 조선소 설계의 비조(鼻祖)인 국초(菊初) 이인직(李人稙) 씨의 '귀(鬼)의 성(聲)', '은세계(銀世界)', '치악산(雉岳山)' 등의 창간 대작이 특히 가정부인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또한 '제국신문'의 순조선 국문 사용과 '국민신보'가 독자에게 지상투표모집을 시행한 것이며, '대한매일신보'의 시사단평이라든지, '만세보'가 새로이 루비 활자를 쓴 것이 모두 그때에는 파천황(破天荒)의 신시험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때의 신문은 아직도 초창시대이요, 혼돈시대이며, 따라서 유치(幼穉)하던 시대이외다.
그 편집방법의 난잡무륜(亂雜無倫)한 것이라든지, 활자와 기계의 불비한 것이라든지, 논지의 조지대엽(粗枝大葉)으로 공막(空漠)한 추상적 문자라든지, 기사가 동월인신공격(動軏人身攻擊)으로 흘러 오늘날 함흥 김모(金某) 같으면 명예
훼손 고소로 유일부족(維日不足)할 만큼 악매난조(悪罵亂嘲)하여 심지어 호구호마(呼狗呼馬)를 하였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중휴(衆咻)와 군방(群謗)이 일신(一身)에 총집하여 개인 비행을 매일 후욕(詬辱)하여도 고소하기는
고사하고,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있던 이모(李某) 씨는 과연 함흥(咸興) 씨 이상의 거복활량(巨腹濶量)일 뿐 아니라, 초인간적이 아니면 초범인적 아회가(雅懐家)인가 합니다.
그렇지만 하여간 문장대가들이요, 우국지사들이 집합한 연총(淵叢)이었습니다.
8) 한나라 문제 때 충신. 황제 문제의 등창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자 이에 감격한 문제가 총애하여 촉 땅 엄도에 있는 동
산을 주고, 그곳에서 동전을 주조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황태자가 문제에 이어 즉위한 후 등통을 면직시키고, 화폐주조도 금지시켜 결국 돈 한푼 가지지 못한 채 굶어죽었다.
영욕 이해를 도외시하고, 모든 심혈을 경주하여 기자의 천직을 다하려고 애쓰던 까닭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거필(巨筆)을 발휘해 뜨거운 눈물을 뿌리던 위암거사(韋庵居士)라든지, 일본 합방건백서(合邦建白書)를
기초하여 거세(擧世)로 당시(瞠視)하게 하던 매하산인(梅下山人)9)이라든지, 시비와 선악은 논외로 하고, 어찌했던 진정
(眞情)은 유유히 흐르고, 활기는 넘쳤습니다. 근일과 같이 과학과 미술을 응용하여 교묘히 상품화한 ‘하이카라’적 감상은 아니 생기지만 일종의 늠름한 고무사식(古武士式) 면모는 있었습니다. 동시에 보도기관의 임무보다도 교과서식으로
신문지를 발행한 듯한 기억이 납니다. 다음은 다음 호로…….
(12월 15일 삼청서옥(三清書屋)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이상 (1)>
◇
하산형. 전 월호에서 나는 우리 언론계의 갑오(甲午)로부터 경술(庚戌)에 이르기까지 약 십수년 동안의 대강의 내용을 극히 개괄적으로 서술하였습니다.
그리고 초창기에 있었던 우리의 언론계 선배들이 정치상으로 온갖 박해를 받아가며, 물질적으로 모든 고통을 겪어 경영난에 경영난을 거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능히 이것을 인내하며, 반항하여 기자의 천직을 다하기에 노력하여 오던 그 국사(國士)적 태도를 예찬하였습니다.
과연 그때 선배들의 고심참담(故心惨憺)한 경험담을 들어보면 문장의 서투름과 편집기술의 우열은 제쳐두고, 그 풍상(風霜)에 단련된 기개와 국가를 위한 열렬하고 비장한 혈성(血性)이며, 의연한 선각자의 생각을 가진 점에서 존경하며, 시세(時勢)가 좋지 못해 만사가 진적(陳跡)을 이루고, 오늘날에 와서 혹존혹몰(或存或沒)하여 사회의 기억으로부터 사라
져 가는 것을 보면, 서글픈 마음을 금치 못합니다.
'한성순보(漢城旬報)'가 조선 신문의 시발점이란 것은 전에 소개하였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신문으로 볼 수 없다는 것도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조선에서 신문다운 신문이 시작된 것은 아마도 조선 개화당(開化黨)의 지도자로 지금 미주에 살고 있는 노지사(老志士) 서재필씨(徐載弼氏)의 지도하에 생겨난 「독립신문」을 가리킬 것이외다.
그가 1884년에 동지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 여러 명과 함께 종국(宗國) 혁신을 도모하고자, 먼저 착수하였던 정부 전복 계획이 겨우 삼일천하가 되고, 청수(清帥) 위안스카이(袁世凱)의 군대에 패하여 동지의 다수가 검두(劍頭)의 혼이 되었습니다.
9) '제국신문(帝國新聞)'을 주재하였던 최영년(崔永年)의 호.
그때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서씨가 이후 수십 년을 일본으로, 미국으로 망명생활을 계속하다가 자유의 낙천지(樂天地)라는 미국에 입적까지 하였으나, ‘워싱턴’의 감화를 받은 서씨는 그래도 부모의 나라 고려족을 위하여 공헌을 하고자, 1896년에 본국에 돌아 왔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의 형세는 갑오대경장(甲午大更張) 후에 시모노세키조약의 명백한 증거로 독립국의 명칭을 가지게 되었으나, 남에게 빌붙어 벼슬이나 탐하는 정부의 관리들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이러한 좋은 기회에 천지를 정돈하며 천지를 굴러가게 할 꾀와 정성이 없고, 오직 정권쟁탈을 시사(是事)하여 묘당(廟堂)에는 친일이니, 친러니하는 기괴무쌍한 명목이 사색붕당과 대칭이 되어 일성일쇠(一盛一衰)로 살육이 빈번하 였습니다.
단두를 할지언정 단발은 못한다는 공맹(孔孟)의 글을 잘못 읽은 유림양반들은 개화군(開化軍)을 뱀과 전갈같이 보고,
구식 지사(志士)들은 복수설한(復讐雪恨)의 의병을 일으켰는데, 최익현(崔益鉉), 유인석(柳麟錫), 이설(李偰), 김복한(金福漢) 이들은 그 당시 복수파의 거두(巨頭)들이외다.
이처럼 난마(亂麻) 같은 판국에 황제는 외국 관저에 머무시고, 잡류(雜流)가 조정에 충만하여 일대 혁명이 없이는 도저히 수습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
하산형. 서씨의 귀국은 조선의 모든 사람들이 시국의 회전(廻轉)을 요구하던 그때 이외다.
민간의 지식계급이 씨(氏)를 구세주처럼 환영한 것은 물론이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외교책을 가장 민활하게 발휘하시던 고종 황제께서도 한참 러시아당(露國黨)의 압박에 불만을 가지시던 때이므로 서씨의 배후에 있는 미국 세력을
이용하여 러시아를 견제하시려 하였습니다.
서씨의 갑신역안(甲申逆案)은 바로 특사가 되고, 일약 제왕의 사좌(師佐)로 파격의 은총을 받게 되었으나, 미국식의
평민주의로 귀화한 서씨는 벼슬과 녹봉을 사양하고, 중추원의 고문 격으로 뛰어난 자문의 대응자(應對者)로 만족하였다 합니다.
그리하여 한때는 언청계종(言聴計従)10)으로 고종 황제의 장량(張良)도 되고, 제갈량도 되어 한성 정계의 풍운(風雲)을 좌우하였습니다.
경운궁 이어(移御)11)도 그때의 일이요, 대한제국 개칭도 그때의 일이외다. 건양(建陽)의 연호는 광무(光武)로, 대군주 존칭은 대황제로, 남별궁(南別宮)12)이 원구단(園邱壇)으로, 모화관(慕華館)13)이 독립관(獨立館)으로, 영은문(迎恩門)
14)이 독립문(獨立門)으로, 관리의 지식교섭소(智識交涉所)가 독립협회(獨立協會)라는 정당으로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바뀌고, 개화진취 부국강병의 여덟 자가 표어가 되어, 대한제국의 국시(國是)가 수립되었습니다.
10) 남의 말을 듣고 계책을 쓴다는 뜻.
11) 임금이 거처하는 곳을 옮김.
12) 선조 때 의안군(義安君) 성(城)의 신궁으로서 1593년에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주둔한 이래로 중국 사신의 여사(旅舍)로 썼다.
그리하여 우리 사람들이 비로소 어렴풋하게나마 개화니, 독립이니 하는 글자의 뜻을 알게 되었고, 우리 신문의 조상이라는 '독립신문(獨立新聞)'은 실로 이 조류를 인도하며, 국민에게 정치적 교과서로 자임하여 세상에 출현한 것입니다.
그때의 신문으로는 '독립신문' 이외에 '경성신문(京城新聞)'과 '매일신문(每日新聞)'이 있었다고 합니다.
전자는 그때 미국식 개화당의 선봉이라던 윤치호(尹致昊) 씨의 사촌 동생 되는 윤치소(尹致昭) 형제가 100원 미만의
사재(私財)로 손바닥 크기의 인쇄물을 간행한 것이요, 후자는 양홍묵(梁弘黙) 외 여러 명의 배재학당 관계자가 발행한 것이라 합니다.
독립사상이 최고조에 달하고, 애국정신이 전 사회에 유행하던 때인즉, 각 신문의 특색으로는 전부가 우리 국문을 사용한 것이요.
외국어라는 한문을 일체 사용하지 않은 것은 오늘날 한자 제한을 운운하는 도쿄 오사카(大板)의 각 신문이 안색(顔色)이
없는 일이외다.
여담(餘談)은 차치하고, 그때의 신문이 전술한 것과 같이 서재필 씨를 중심으로 미국 출신자와 혹은 미인(米人) 접근자들에 의하여 간행된 것은 비록 시세의 사연(使然)이지만은 일종의 이채(異彩)라 할 것이오. 따라서 조선문화사(朝鮮文化史), 특히 신문 역사상에서 미국인이 직접, 간접으로 공헌한 것을 제외하지 못할 것이며, 신문기사에도 정치론 이외에는 기독교 취미가 많이 포함되었고, 계급 타파, 노예 해방 등 자유와 평등의 사조가 한 세상을 풍미하던 것도, 미국 색채와 기독교 정신을 띤 앞의 각 신문 논조가 적지 않게 조장하며 성원한 힘을 간과치 못할 것입니다.
한편, 양반이 망하는 것을 분개하고, 유교가 추멸(墜滅)되는 것을 한탄하는 반동계급이 신문을 매우 증오하여 이단사설(異端邪說)이라 배척하며, 이적금수(夷狄禽獸)라고 비웃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
하산형. 1897년 늦가을부터 1898년 초여름까지는 조선에 있어 독립협회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시정 득실을 논의하고, 국권 융성을 표방하는 모든 정치 활동이 협회 중심으로 생길 뿐 아니라, 문화제도의 수립과 문명사업의 수입이 또한 협회 중심으로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신문지도 그 속에서 나온 것은 전술한 것과 같습니다.
당시 협회의 몇몇 유지들은 여론을 일으키는 길이 신문에 있음을 알고, 유력한 신문을 만들 필요를 깨달았습니다.
13) 명나라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곳.
14)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맞아들이던 문.
지식 계급을 상대로는 고상한 정도로 국한문을 호용(互用)하는 오히려 한문 본위의 신문을 만든 다음, 일반 민중과 부인을 상대로는 한글 신문을 만들 생각으로 전자를 위해서는 윤씨(尹氏)들이 개인적으로 경영하던 '경성신문'이 재정난으로 폐간 상태에 있던 것을 인수하여 '황성신문(皇城新聞)'으로 이름을 바꾸고, 남궁억(南宮檍), 나수연(羅寿淵) 양씨(兩氏)가 오로지 경영에 임하여 황토현(黃土峴)에 있는 기념비각(記念碑閣) 자리에 좌순영(左巡營)이라는 관가 소유의 건물을 빌려 주식회사로 설립하기로 하였습니다.
후자는 이종일(李鍾一) 씨의 손으로 '매일신문'을 '제국신문(帝國新聞)'으로 변형하여, 한양동(漢陽洞, 지금은 돈의동)에서 발행하게 되었다 합니다.
그리하여 일본인 기쿠치 겐조(菊池謙譲) 씨 등의 '한성신보(漢城新報)'와 하기야(萩谷籌夫), 아리후 쥬로(蟻生十郎) 씨 등의 '대한일보(大韓日報)', '대동신보(大東新報)'와 대치하여 경성 논단을 번성케 하였습니다.
독립협회가 계속하여 왕성해지고, 지사들이 협조하고 서로 사이좋게 지지하였다면, 앞의 두 신문도 순조롭게 발전하였을 것이요, 조선의 문운(文運)과 일본 국맥(國脈)으로 까지 연장되었을 것이외다.
그리하여 조선 사람도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제법 사람다운 생활을 하며 우리 청년들도 현대와 같이 우울하게 딱한
세월을 보내지 않았어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불행이란 운명신에게 붙잡힌 백의 국민들은 이러한 때에도 엄숙한 자각이 없었고, 절실한 노력이
없었습니다.
독립협회가 기세가 등등하여 일세(一世)를 흔감(掀撼)하던 때에는 내부에 난치의 악질이 생기고, 외부로부터 강적이
습격하여 왔습니다.
무엇을 내부의 악질이라 하겠습니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정권병(政權病)이요, 권리욕이 그것이외다.
약간의 진정한 우국지사들은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은 자들은 독립협회를 관직을 얻을 수 있는 시장으로 알았습니다.
지껄이는 말이 모두 추악한 동기에서 배태(胚胎)된 것이외다.
그 놈의 원수 같은 벼슬하고자 하는 열망과 권세병이 겨우 다시 살아나려던 우리 사회를 영원히 멸망시키려고 마위(魔威)를 내둘렀습니다.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배타, 중상, 음모, 반역자들이 생겨납니다.
독립협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병은 더 심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실지원국(失志怨國)이니, 사란악화(思亂樂禍)니, 무엄망상(無嚴罔上)이니 하는 아름답지 못한 명칭을 쓰게
되고, 보부상의 추봉(麁棒)이 일비(一飛)할 때에는 수분서찬(獸奔鼠竄)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타버리고 말았
습니다.
협회라는 모체가 그 지경이 되고, 시대는 다시 낭심구행(狼心狗行)15)의 추악한 무리가 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보게 되고 반동사상이 대두하여 개화당이 역적이 되게 되었은즉, 협회 중심으로 나오려던 신문이 순조롭게 나올 수가 없습니다.
15) 이리의 심보와 개 같은 행동.
출자하려던 사람은 거절하고, 위정자의 박해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경
무청 구류장을 자기 사랑(舍廊)으로 알고 곤봉과 주뢰(周牢)16)를 자양제(滋養劑)로 생각하는, 상식을 넘어서는 비범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때에 신문기자가 되려 했겠습니까?
지금의 필화(筆禍) 사건이라는 것은 거론할 것도 없고, 신문사라는 곳은 인간 세상의 지옥이라고 보면 그때의 일반(一斑)을 헤아릴 것이외다.
나는 생존하여 있는 어떤 선배의 실화를 듣고 오히려 의아했고, 놀라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대로 사실인 모양인 것을
어찌합니까?
◇
하산형. 우리의 신문이 이러한 형편에서 광무(光武) 초년부터 약 10년간을 자라 왔다 합니다.
삼간두옥(三間斗屋)이 경영자금으로 떠나가고 아내와 자식들은 몹시 가난하여 배고픔과 추위에 울고, 자신은 매월 몇
차례씩 감옥에 갇히는 수치를 당하고, 정적(政敵)들은 때를 만나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기회를 얻어 손뼉을 치는 잡배들은 권력자의 앞잡이가 되며, 무지한 탐관혹리(貪官酷吏)가 권세를 제멋대로 행할 때에, 모든 것을 희생하고, 한편 빛나는 나라 사랑의 마음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논진(論陣)을 펼쳐 백성의 지식 계발에 힘쓰던 선배들이 있었던 것을 나는 우리 언론계의 큰 자랑거리로 생각합니다.
신문기자를 천직이 아닌 직업으로 생각하는 오늘날의 신문기자를 볼 때 그들은 일종의 어리석은 사람이외다.
그렇지만 나는 신문기자들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며, 그들을 존경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둔하지만은 열정이 있었고, 진실이 있었습니다.
그런 선배들 중에서도 나는 작고한 장위암(張韋庵) 같은 이를 그 전형적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진솔하고 곧은 심사(心事)와 깨끗하고, 강안(剛岸)한 인격은 거의 참사람에 가까운 듯 합니다.
영남인(嶺南人)의 장점을 많이 가진 선생은 혼신(渾身)이 견인(堅忍), 그것이외다.
소방(疎放) 그것이외다.
다시 말하면 천진(天眞) 그것이외다. 장씨(張氏)와 함께 수고할 뿐 아니라 국사범(國事犯) 혐의로 감옥에 들어간 후
'황성신문'의 경영을 장씨에게 일임한 나소봉(羅小篷) 씨는 항상 죽은 친구를 추억하면서, 그 인격을 칭찬하더이다.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時日也放声大哭)」과 「척필대호(擲筆大号)」의 두 글은 그때 청소년들의 열혈(熱血)을 얼마나
끓어오르게 하였습니까?
또 '대한매일신보' 에 있으면서 통감부에 반항하고, 몹시 혹독한 꾸짖음으로 오칠대신(五七大臣)을 거부하게 만들었던 양기탁(梁起鐸氏) 씨나, 지금도 북경에서 모지(某紙)에 통신하는 신채호(申寀浩) 씨도 그때에 청년 기자로 글쓰는 재주를 두루 갖춘 사람이라 합니다.
16) 죄인의 두 다리를 한데 묶고 다리 사이에 두 개의 주릿대를 끼워 비트는 형벌.
말로(末路)는 조용하였고 비난과 지탄을 받았으나 극재(克斎) 정운복(鄭雲复)과 같은 사람도 그 재지변력(才智辯力)이 출중할 뿐 아니라 한문도 알고, 일본어와 영어에도 정통하여 '제국신문(帝國新聞)'에 있을 때에는 당시의 신지식 소유자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대한협회 월보에 매월마다 웅문(雄文)을 쓸 뿐 아니라, 연설 잘 하는 정객이던 윤효정(尹孝定) 어른은 기자 사회에서도 투장(鬪將)이었고, '대한민보'에서 경영의 핵심에 해당하는 심의성(沈宜性) 씨도 기자 사회에 공적이 있던 사람이외다. 어쨌든 그들이 가짜 지사인지, 진짜 지사인지는 논외(論外)로 하고, 우리 언론계의 초창기에 이들에게 빚진 것이 많은 것은 물론이외다.
그리하여 고난을 헤치고 성장하던 신문지가 러일전쟁 후에는 수효가 늘고, 세력도 증가하여 각 계급을 막론하고 신문을 많이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언론계의 특색은 종래와 같이 개화, 부강주의 선전을 하던 것과 달리 국권회복주의에 대한 동양평화주의 즉 대세복종주의(大勢服從主義)가 대두하게 된 것이외다.
예전에 독립협회로 통일되었던 여론이 자강회(自强會)와 일진회(一進會)로 나뉨에 따라 신문에도 정당의 색채가 짙어지고, 국권파(國權派)가 대세파(大勢派)를 매국노로 욕하면 대세파는 다시 국권파를 사이비 애국자라 하면서 서로 상하(上下)치 않았습니다.
도리는 전자에 있으나, 시세는 후자에 이로운 것이었습니다.
즉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제국신문' 두 신문과 '대한민보', 자강회주재(自強会主宰)에 대한 '국민신보',
일진회기관(一進会機関)과 '대한신문', 한국정부기관(韓国政府機関)의 논쟁이 그것이외다.
국채 보상, 금연 실행, 교육열 고취, 이권 보호 등은 전자들의 기치요, 대세 순응, 실력 양성 등은 후자의 주장이라 하겠습니다.
◇
하산형.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라는 정치가는 어떠한 의미에서든지 조선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사람이외다.
그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완성하고 일본의 헌장을 기초하고 정당을 발기한 사람이므로 그를 호악(好惡)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하고 문명정치가라고 부르는 점에서는 내외가 일치하였습니다.
보호조약을 체결한 그가 제1대 통감으로 경성에 주재하게 되자 그는 소위 인도주의와 평화주의를 정강으로 할 것을
분명히 선언하고, 밖으로는 한국의 국익을 보호하며 안으로는 한국 국민의 복리를 꾀한다는, 즉 일본의 대표자인 동시에 한국의 시정 개선을 지도하는 스승이라고 스스로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신문에도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조건은 많고 제한도 심하였지만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어느 정도까지 용인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의 기밀비(機密費)를 가지고 '경성일보'와 '서울프레스' 두 신문을 발행하여 통감 겸 신문의 실제 사장이 되었습니다.
천성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이른바 한국인 회유와 외국인에게도 문명정치가라는 상찬(賞讚)을 듣고자 하는
복잡한 동기에서 신문 단속을 그다지 가혹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신문은 날로 늘어나고, 서로 경쟁적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그리고 보통학교의 일본어 교과 문제, 송병준(宋秉畯)의 발검(拔劍)문제, 동양척식회사 문제, 지방의 의병 소동, 기유년(己酉年) 콜레라 유행, 모 대신의 규방문제, 황태자의 유학 등의 문제가 있고, 기생 단속령이 발포되고, 화홍문(華虹門) 지폐가 돌아다니던 때이므로 정치로나, 사회로나, 경제로나 신문 재료가 한참 풍부하던 시대이외다.
외근기자 단 1~2명을 가지고도 넉넉히 편집되던 때이외다.
외국의 전보와 통신을 지금과 같이 게재한다고 하면, 8페이지나 10페이지 신문도 용이하게 제작하였을 것이외다.
그러나 성하면 쇠하는 원리가 실재한 까닭인지 하얼빈 들판(原頭)의 총성이 일어나 이토 히로부미 태사(太師)가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예물을 가지고 죽은 후 시국은 급속도로 바뀌어 일진회의 원납장서(願納長書)가 국민신보에 발표되고, 국시유세단(國是遊說團)이 대활약을 하고, 이재명(李在明)의 검광(劍光)이 번득이며, 세상이 시끄럽고 소나기와 사나운 바람이 함께 일어나던 때에 첨두장군(尖頭將軍)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향취함(香取艦)을 타고 인천항에 도착하니, 오호라! 신문의 운명은 이씨(李氏)의 사직과 함께 ‘휴의(休矣)’ 두 자로 결정되었도다.
과연 그같이 많던 신문이 1910년 8월 29일에 동시에 폐간사(廢刊詞)를 내고,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가 내어주는 소위 누금일봉(淚金一封)을 받고 경무총감부 문 앞을 나서는 주뇌자(主腦者)17)들의 종적과 함께 우리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로부터 약 10년간을 소위 조선 언론계의 엄동시대(嚴冬時代)라고 볼 수 있습니다.
메이지(明治)와 다이쇼(大正)를 통해 일본 기자 사회가 산출한 걸작의 하나인 소봉학인(蘇峰學人) 도쿠토미 조이치로(徳富猪一郞) 씨가 데라우치 백작의 뒤를 이어 '경성일보' 와 '매일신보'의 경영권을 동일한 수법으로 인수하고, 무문곡필(無文曲筆)이라는 천재적 수완을 발휘하여 경성천지는 물론이요, 반도 삼천리 내에 신문을 두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일본으로부터 수입되는 신문까지도 부산 부두에서 압수하여 소위 신문 쇄국주의를 철저하게 실행하던 때이외다.
자세한 것은 또 다음 호에……. (미완)
<이상 (2)>
17) 어떤 조직, 단체, 기관의 가장 중요한 자리의 인물.
◇
하산형. 데라우치(寺內) 시대의 조선 언론계가 추운 겨울의 새싹처럼 동시에 사그라진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이외다.
원래 데라우치라는 사람은 세상에서 무단전제(武斷專制)의 대가로 명성이 높았던 만큼 자신의 정책에 대한 기탄없는
논의(비판)를 남보다 유달리 싫어했습니다.
장주(長州) 군벌의 정통 상속자로서 그들의 선배가 유신(維新) 도모의 대업에 참여하여 말 위에서 천하를 취한 뒤를
이은 데라우치 씨는 어느 순간 정계의 교만한 자가 되어 그 천성의 준초강편(峻峭剛偏)한 것과 함께, 용물하사(容物下士)의 도량이 없었고, 남을 따르는 도량이 적었습니다.
그가 국회에서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에 중의원의 여당이 입헌정치에 있어 정당에 기초를 두지 않은 초연내각으로 시대착오가 심한 것이라 하여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하였더니 그는 폐하가 직접 임명한 자기에게 의회가 가부(可否)를 따지는 것은 폐하의 권한을 침범하는 불손한 행동이라 하여 그 자리에서 해산을 행한 사람이외다.
이와 같은 데라우치 씨가 조선총독으로 정치와 군사의 전권을 장악하고, 독재 군왕과 같이 반도에 임하였으니, 대개는 생각하고 헤아릴 부분이 있을 것이외다.
더욱이 데라우치 씨의 총애를 받는 신하로 유신에 참가하였던 경무총장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는 제정러시아
시대에 전제정치를 오랫동안 현장에서 보고 배운 사람이요, 정찰에 뛰어난 자로 내외에 유명한 그가 데라우치 씨의 언론정책을 어떻게 보좌하였는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신문과 잡지의 논조가 1차 총독정치를 비방하거나 관헌(官憲)의 행동을 공격하면, 압수, 정간은 물론이고 집필자에게 박해가 가해지고 심하면 추방이요, 아니면 경찰 비박(秘薄)에 붉은 점을 칠하여 소위 주의인물이라는 자미스럽지 못한 오명을 가하였습니다.
조선인에게 한 개의 민간지도 허용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려니와 도쿄, 오사카의 유력한 신문지까지 조선 내에서는 똑똑히 고개를 들지 못하였고, 그중 오사카 '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은 데라우치 씨가 가장 꺼리는 대상이 되어 끝까지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각 신문지는 각자의 생존을 위해 관헌에 아부하고 데라우치의 정치를 크게 칭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외다.
그러나 데라우치 씨라도 언론기관이라면 무엇이든지 압박한 것은 아니 외다.
자기가 절대 신임하는 사람이거나 또는 그의 정책에 영합(迎合)하는 신문지에게는 반대로 특별한 원조를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데라우치 씨의 철저하다던 언론 압박정책도 실상은 이기주의의 타산에서 생겨난 불철저하고 불공평한 것임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외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본인과 조선인을 불문하고, 조선에서 살기 위해서는 데라우치에 대해 반대 언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
하산형. 데라우치 씨의 언론정책은 이와 같이 무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모에 가까울 정도로 엄한 것이요, 철두철미
자신의 지상주의(至上主義)를 발휘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외다.
그러나 그 수단의 교묘함과 견해의 옳고 그름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자신에게 강한 것과 부랑요마배(浮浪幺麽輩)를 소탕하던 용기에 이르러서는 한편으로 존경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는 조선 사람의 단속에 무한한 고심을 하는 동시에 일본 사람에게는 더욱 사정을 봐 주지 않았습니다.
지난날 잔인하고 난폭하던 각지의 일본인 고리대금업자가 기를 펴지 못한 것, 어부지리로 정권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던 무리가 마음대로 날뛰지 못한 것, 관리와 일반 풍기(風紀)가 어느 정도까지 바로잡혀 긴장된 분위기가 있었던
것 등을 지금 생각하면, 마음에 드는 점도 적지 않았습니다.
무릇 정치의 핵심은 덕으로 사람을 달래지 못하면, 힘으로라도 신용을 세워야한다는 것입니다.
데라우치 씨의 무단정치(武斷政治)라는 것은 여러 가지 결함도 많았지만 힘도 있었고, 신뢰도 있었습니다.
적어도 기강은 섰고, 질서는 유지되어 서릿발 같은 기개가 있었고, 해괴한 짓을 하는 추극(醜劇)은 없었습니다.
더욱이 조선의 산업방침을 세울 때 자작자급(自作自給)을 표준으로 하고, 이권 개방을 함부로 하지 않아, 대부분의 목적이 조선 사람을 본위로하고, 굶주리지 않게 하려던 노력은 우리가 특별히 기억해 둘 일이외다.
즉 데라우치라는 사람도 피와 눈물은 있어서, 일개 정치가로 비방할 것이 아니외다.
오히려 어떤 점에서는 조선 사람으로 그에게 감사할 만한 것도 적지 않은 것은 우리가 감정을 떠나서 이성적 판단을 할 필요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회사령(會社令)이란 것을 가지고, 일본 대자본가들의 조선 투자를 제한하여 경험, 자력, 기술이 매우 부족한 조선
인과의 기업적 경쟁을 차단하였습니다.
종래 대부분 서양인에게 독점되어 있던 광산에 대해 외국인의 신규 청원을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동묘지와 화장(火葬) 규칙을 만들어 조선 수백 년의 큰 폐단이던 산송(山訟)을 없앴습니다.
토지조사의 대사업을 단행하여, 고려 이후로 황폐되었던 토지세를 조사하였습니다.
사찰령(寺刹令)을 만들어 승려를 해방시켰습니다.
이렇게 따져보면, 그 시대의 무단정치라는 것이 반드시 조선 사람이 저주할 것만이 아니요.
일본 측에 훼방이 있었던 것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나는 데라우치 백작의 정치적 공로와 잘못을 말하는 것이 본론의 취지가 아닌 까닭에 이 정도에 그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조선 언론계와 데라우치의 관계를 말하고자 합니다.
조선언론계라 하지만 '매일신보'를 제외하고는 조선 사람이 관계하던 신문지가 없었기 때문에 조선 언론계라기보다는 조선에 있는 일본인의 언론계라고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여튼 일본어 신문들은 앞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기관지 이외에는 거의 총독정치를 반대 하였습니다.
비록 겉으로는 공손하고 온순했지만 안으로는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그들의 여론을 대표하는 국회에서 데라우치를 공격할 때에는 반드시 조선의 언론 압박이란 것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면에 일본인에게 이권을 함부로 허락하지 않은 것이 가장 중요한 동기였던 것을 보면, 충분히 그 사정을 알 것이외다.
◇
하산형. 데라우치 씨가 1915년에 조선 시정5년 기념공진회를 개최하고, 자신의 통치정책이 성공한 것을 안팎에 과시했습니다.
그리고 1916년에는 공진회로 한 시대의 경계선을 긋고, 다시 신정책을 수립하여 어떤 전환을 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은 1915년 벽두에 발표한 그의 대유고문(大諭告文)이 설명하던 것이외다.
그 내용은 동화정책의 실현에 있으며, 지방자치제의 전제(前提)에 있었지만 하여간 그때의 현제(現制)에 일보(一步)
를 나아가려던 사실이외다.
그러나 데라우치 씨의 신정책 방침이 수립되기 전에, 일본정치 정세가 관료파(官僚派)와 정우회(政友會)의 연합으로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의 내각을 파괴하고,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중국, 러시아에 대한 어떤 신국면을
타개하려던 때였기 때문에, 데라우치는 그들의 추대로 동경 정국(政局)의 주인공이 되고, 일족낭당(一族郞黨)을 인솔하여 조선을 떠나게 되었고, 소위 신정책은 그대로 실현 할 기회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임 총독으로 전(前) 주한사령관으로 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백작이 기용되었습니다.
하세가와는 역시 데라우치와 같이 죠슈(長州) 숙장(宿將)의 한 사람으로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데라우치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그때의 조선총독으로 이와 같은 무식노물(無識老物)을 끌어내지 않더라도 일본 조정에 인물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으나 몰락해가는 하세가와 벌(閥)의 세력 만회를 위해서는 조선총독 같은 요지(要地)에 타인을 보내어
자기가 경영해 놓은 것을 유린하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 데라우치 씨의 심사였습니다.
그리하여 “약속을 지키고 받들어 어기지 않는다”라는 조건부로 하세가와 씨가 취임했습니다.
그리하여 하세가와는 총독 재임 3년 동안에 시위(施爲)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굳이 말하자면 종래 의식(儀式) 때
외에는 착용을 자유로 하던 문관의 대검(帶劍)을 평상시에도 가지고 다니게하여 공판정(公判廷)에 나타나는 사법관이 검을 하지 않고, 죄수를 재단(裁斷)하게 되며, 칠판 밑에서는 소학훈도(小學訓導)가 장검(長劍)과 분필을 함께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데라우치 시대보다도 나빠져 가는 조선총독 정치에 언론에 대한 단속인들 완화될 가망이 있었겠습니까?
아전들의 오류 많은 자가광고적(自家廣告的) 보고서와 관변(官邊)에 영합하는 자들의 노랫소리만이 들리고 조선
사람의 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인보다도 어떤 의미에서는 불평을 더 많이 가지고 있던 일본인의 반동이 더욱 맹렬하여 총독정치에 대한 비난이 폭발하자 많은 군사들 가운데서 횡행하던 쓸모없던 노장군(老將軍)도 어쩔 수 없이 혼자
떠들썩하게 삼각산(三角山)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공평하게 말하자면 하세가와가 퇴임한 것은 조선인의 만세소리보다도 데라우치 시대부터 커져 온 일본인의 저주가
만세소동을 도화선으로 하여 하세가와를 몰아낸 것이외다.
물(物)은 평(平)을 얻지 못하면 우는 것이외다. 더욱이 제(抑制)에 참고 있던 울음 소리는 큰 것이외다.
그때 일본사람들의 시끄러운 부르짖음은 하세가와의 신변에 총집(叢集)하여 심지어 생선 장사와 인육을 파는 추업자(醜業者)들까지 총독 공격에 기염(氣焰)을 토하던 활계극(滑稽劇)을 도처에서 봤습니다.
조선 사람의 운동이 결과적으로 아무 소득이 없고, 오히려 일본사람의 힘을 조장하여 준 것은 소위 33인이라는 그 운동의 대표자들이 상상하지도 못하였을 것이오.
대기별저(大磯別邸)에서 요양하던 첨두 백작의 두발이 상지(上指)하여 분한(憤恨)의 절정에 달한 것도 오히려 동정할 만한 일인 듯합니다.
◇
하산형. 하세가와가 퇴진한 뒤에 제3대 총독으로 조선에 온 사람이 지금 녹천정(綠泉亭)의 주인공인 고수노인(皐水老人)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입니다.
그는 외모로만 봐도 온후한 사람으로 그 성격도 데라우치 씨와 반대되며, 더욱이 무단정치가 실패한 뒤에 왔기 때문에 형식으로라도 전임자와는 다른 방향을 취했을 것이외다.
그리하여 ‘문화정치’라는 간판을 붙이고, ‘민의 창달’이라는 광고를 돌리며, 조선에 부임했습니다.
그리하여 남대문 역 앞의 폭탄 세례는 그로 하여금 그 당초의 계획보다는 심각한 고려를 하게 하였다고 합니다만, 어찌되었든 그가 성명한 것을 실현하여 몇 개의 신문과 잡지의 발행권을 조선인에게도 허가해 주었습니다.
경술로부터 경신, 만 10년 만에 비로소 조선에 민간지가 부활하였습니다. 주의와 색채는 모두 달랐지만, 동아, 조선,
시사의 세 신문이 일시에 허가되고, 천도교도의 손에 의해 월간잡지 '개벽'이 발행되고, 계속하여 지금에 와서는 그 제호까지 잊어버리게 된 크고 작은 잡지가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사이토 씨의 사적(事績) 중에 제일 특필(特筆)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찌되었든 인간이라는 동물은 뱃속의 가스를 발산하고서야 견디는 것이외다.
불완전하고, 작은 자유라 해도 불평을 글이나 말로 토로하게 되면, 약간은 스스로 위로가 되는 것이외다.
그러므로 몇 개의 언론기관이라도 조선인에게 준 것은 그만큼 조선인의 불평을 발산하게 하는 것으로, 저들로서는 가장 현명한 시설(施設)이라 하겠습니다.
혹자들은 절대 자유가 없는 언론기관은 주지 않는 것과 같다 하여, 문화정치라는 양의 탈을 쓰고, 개를 파는 것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언론정책이 어느 정도 완화된 것을 나는 폄하하고 싶지 않습니다.
절대의 자유라는 것은 어떤 통치자를 막론하고, 그에게 요구하는 자의 어리석은 수작이외다.
그러고 보면 차선(次善)의 차선으로 라도 그만한 무기가 부여된 것을 다행으로 알 수밖에 없습니다.
남이 주는 물건에 흡족한 자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민족을 통치하는 그들의 입장에서 대단한 언론자유를 허용하는 것을 주저하는 것은 결코 무리한 것이 아니
외다.
그것보다도 기관지 외에 오래간만에 민간에서 의사를 발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사실이 데라우치 시대보다는 나
아졌다고 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이 정도의 언론 완화까지도 일본인 측의 다수는 조선 당국자의 방만(放漫)한 처치라 하여 공격함을 잊지 않고 주의해야 할 것이외다. 상세는 또 다음 호에…….
<이상 (3)>
<출전 : 木春山人, 朝鮮 言論界의 과거와 현재(1~3), '新民' 9~11호, 1926년>
5. 홍승구, 평림(評林)의 평림 신문의 신문(1)
- 조고계 예찬에 이어진 원고
1.
하산형. '신민(新民)' 6월호 지상에 게재하도록 무엇이든지 쓰라던 주문도 있었고, 나역시 현재 낭인(浪人)의 처지로
긴 여름 소일거리를 돈무(頓無)하던 까닭으로 무엇이든지 써볼 마음이 있기에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22일 이른 아침이외다.
존경하던 긍제유장(兢齊兪丈)이 금강(錦江)에서 새로 금강산 관리자로 영전(榮轉)되어 축하인사를 갔다 돌아오니, 문뜩 전신에 오한(惡寒)이 생기고, 이마 위에는 고한(膏汗)이 솟아나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두통, 신열(身熱), 지절통(肢節痛), 기침이 일어나기에 처음에는 평범한 감기로 피곤해서 생겼다 했는데, 이렇게 하루 이틀 지내는 동안 작년 이때부터 발병해서 여름과 가을 내내 앓던 오랜 병의 재발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원래 선천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까닭에 어릴 때에는 약을 끼고 사는 잔병의 주인공이었지만 20살 전후로부터 최근까지 약 15~16년간은 폭음(暴飮) 때문에 누워서 지냈을 뿐 병으로 누워 지낸 일이 없기 때문에 건강한 체질의 소유자라고
찬사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더니 재작년부터는 당뇨로 처음 고생하고, 그것이 치료되기도 전에 다시 늑막에 염증이 일어나 700일 동안이나
편안한 날보다는 병든 날이 많아 배작(杯酌)을 삼가고, 밤에 외출을 하지 않고, 아침 등산도 계속 가면서 비교적 건강관리에 노력할 뿐 아니라, 평생에 찾지 않던 병원도 찾게 되고, 의원 선생 중에 아는 사람도 많이 생겼습니다.
외상 지고 못낸 것도 있지만 그동안 병원에 낸 약값을 따지면, 일본의 다액의원(多額議員) 자격이라도 넉넉히 가졌을
것이외다.
그런데 작년 말경부터는 건강이 점점 회복되기에 때마침 매일신보를 사퇴하고 낭인이 된 까닭으로 낭인이 되면 병마까지도 절교를 하나보다 하여 적잖이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전투에 견딜 수 있는 건강한 몸이되면, 무엇이고 사회의 전선에 나서서 뛸 각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정(多情)한 잠자던 병이 무엇을 잊을 수 없었는지, 1차 퇴진(退陣)하고 있다가, 다시 찾아와 맹위(猛威)를 보이려고 합니다.
숙명설(宿命說)에 의지하는 자는 아니지만, 나는 삶과 죽음 그것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습니다.
성인이나 평범한 사람이나,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 모두 한 번씩은 의례적으로 당하는 일이요, 한번 지내면 두 번도 없는 것이 죽음, 그것이 아닙니까?
자살도 원치 않는 대신에 병사(病死)도 원치 않습니다.
도리어 최명부(催命符) 가진 황건역사(黃巾力士)가 오기 전에 도방(道芳)을 하든지 유취(遺臭)를 하든지 마음껏 목숨을 걸고 싸우리라는 용기도 생깁니다.
소계자(蘇季子)에게 부곽이경전(負郭二頃田)이 있었다면, 여섯 나라 재상의 도장을 찰 수가 없었다 하니, 이런 견지에서 나는 병이 많고 건강하지 않을 때에 마음을 바꾸려고 합니다.
원고가 늦은 변명이 아니라 병상에 누어서 붓을 잡는 것이 어떻게 뜻대로 되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일과 싸우기 전에 병마와 먼저 싸워서 승리해 볼 결심으로 있는 것만은 형에게 알려 둡니다.
근육을 불로 지지는 형벌을 참지 못하고는 박태보(朴泰輔)가 되지 못하는 식으로, 병마 따위를 정복하지 못하고서야
세상사를 어찌해보겠습니까?
깊이 감사하니 병마여, 너는 내 생명을 뺏으려는 적이지만은 너로 인하여 나약한 내가 용맹심이 생기고, 몸을 관리하지 못하던 내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너에게 깊이 감사할 일이다.
2.
하산형. 평론도 좋고, 수필도 좋고, 비평도 무방하고, 문필생활의 회고기(回顧記)도 좋다는 의견은 잘 알았으나, 나로서는 그것보다도 '신민'에 대하여 채무가 남아 있으므로 특수한 조건부 주문이 아닌 이상 빚부터 갚는 것이 양심이 명하는 바이외다.
지난해 초봄에 나는 '신민'의 탄생 제2년 기념의 의미로 「조고자 예찬」이라는 졸고(拙稿)를 연재하다가 '경성일보' 부사장이던 미야베 게이지(宮部敬治) 씨의 요청에 따라 경성일보사로 돌아갔다가, 작년 겨울 경성일보사에 지진이 생겨서
사장과 모(某) 백작의 일생일대 만용으로 청룡도(靑龍刀)를 휘두르는 바람에 부사장 이상 간부 여러 명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강이 피로 붉게 물드는 참극을 보았습니다.
나로서는 굳이 그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라고까지 할 필요도 없었으며, 새로운 간부 중 어떤 요인은 만류도 하였지만 기색이 좋지 않고, 입장이 곤란할 뿐 아니라, 약간의 비난도 있었지만 미야베 씨, 그 사람은 하여간 그 사회의 원로외다.
우리의 생활과 심정에 이해도 있고, 개인적으로 급인(汲引)18) 받은 관계도 있어, 그 밑에서 일할 마음도 있었으나, 백작 사장은 미야베씨와 달라서 반년은 동경생활이요, 따라서 얼굴조차 볼 기회가 적었으니, 모든 것이 생소한 것은 물론이요, 그런 자리에 새로이 임명한다는 통지를 얻으려고 애쓸 필요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각종 유언비어가 있어, 매우 심약한 나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점이 있기에 아홉 달 만에 사직서를 집어던지고
다시 방랑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낌새를 알아채고 미리 조치한 것이라면 모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한 사직이지, 누구에게 끔찍한 형벌을 당한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히 말하여 둡니다.
하여튼 이러한 사정상 내가 다른 회사에서 임금을 받으면서 귀사(貴社)에 집필하는 것은 시간의 여유가 없을 뿐 아니라, 일하는 곳에 전심(專心)하겠다는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아서 본의는 아니지만, 죄송하게도 중단하였습니다.
이 점은 독자 여러분에게 이 기회에 깊이 사죄합니다.
그런데 다시 낭인이 된 후에는 8~9개월 중단하였던 것을 부활한다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오.
신문사를 그만두고 나서 바로 신문사 이야기를 쓰는 것도 왠지 싫은데다가, 내가 그만둔 '경성일보'에 그 후에도 다시
큰 일이 일어나고, 여러 가지 시끄러운 문제도 있어 형옥(刑獄)이 생기며, 사장의 퇴진문제도 논의되어 매우 시끄러운데, '경성일보' 사람들은 나 같은 낭인에게 무슨 의심을 가지고 말한다기에 그따위 구자(狗子)의 방귀같은 수작은 그냥 비웃을지라도 중요한 신문평론만은 좋든 싫든 하지 않는 것이 신사도(神士道), 아니 낭인도(浪人道)라고 생각했습니다(그렇다고 '매일신보'만 제외할 수도없었고).
요즈음에는 '경성일보'의 진영이 새롭게 되고, 색(色)이 다른 분자는 마구 단두대에 보내어 잠시나마 잠잠해졌다는 좋은 소식이 있기에 때마침 귀형(貴兄)이 무엇이라도 좋으니 두어 줄 쓰라하시기에 비로소 오랜 빚을 갚을 기회로 알고 다시 변변치 못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
18) 인재를 뽑아 씀.
그러나 소위 오랜 빚을 갚는다는 것은 내 마음으로 그런 것이오. 쓰라는 원고 그것은 반드시 사회(死灰)의 재연(再燃)은 아니외다.
1년 만에야 빚을 갚는 것을 또 반드시 나의 죄로만 돌리지 마시고, 1년이든지, 2년이든지 빚을 갚을 마음을 가지고 그 뜻을 관철할 시기가 온 것만을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좋을 것이외다.
일찍이 한국 정부는 당당한 삼천리 만승(萬乘)19)의 국가로 1천 3백만 원의 소액을 전국의 노유(老幼)가 단연계식(斷烟
戒食)을 하면서도 소리만 크고 실행은 못하던 것에 비하면, 한낱 벼슬 없는 선비 서생인 나로서 이 정도의 불꽃 같은
기세를 드러낸다고 해도 큰 벌은 오지 않을 듯합니다.
따분한 병 타령과 낭인이 된 경과보고로 본문이 늦어져서는 안 되겠기에 더 늘어놓고 싶으나 토론 종결을 스스로 동의
합니다.
3.
하산형. 무엇을 쓸 때에 개인에게 보내는 사사로운 편지 형식으로 써서 공개하는 것은 누가 시작했는지는 모르나 매우 좋은 생각인 걸로 압니다.
각설(却說), 이때의 케케묵음은 말할 것도 없고 문졸(文拙)한 나로서는 무엇이든지 서두(書頭)를 쓸 때마다 애를 씁니다.
그런데 감사할 선배 대가의 덕택으로 이런 좋은 안(案)이 발명되어 좋은 보기가 된 것이 더할 수 없이 다행입니다.
여담이 또 들어가서 미안하여 바로 곧 본론으로 향하 겠습니다.
그런데 저번에 내가 쓴 것은 대체로 1910년 한일합병이 있기 전까지 조선 신문계의 약사(略史)를 개괄적으로 쓴 것입
니다.
조선 언론계의 상태를 역사적으로 고찰하자면 창시(創始) 이래 오늘날까지 대체로 3기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즉 '한성순보' 이후로 1910년까지를 초창기시대라 하고, 이 27~28년 동안을 가리켜 제1기라고 하면, 1910 년 이후로
1919년까지의 약 10년간은 소위 '매일신보' 독점시대로 천하태평이던 제2기 라 하겠고, 현 총독 부임 이후 현재까지의 소위 제3기라는 약 8년간이 초한풍운(楚漢風雲) 기간과 마찬가지로 많은 영웅들이 경쟁하며 세력을 형성하는 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보잘 것 없는 원고도 우연인지 필연인지 제1기 시대를 개술(槪述)하고, 제2기에 들어가려 하던 때에 중단되었던 것인즉 비록 내용과 형식은 약간 앞의 원고와 다르지만 서술하는 데 불편이 없는 것이 다행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유감스러운 일은 작년에 '조고자예찬'이란 것을 쓸 때까지 오히려
19) 1만 대의 병거를 갖출 수 있는 광대한 영토를 만승지국(萬乘之國)이라 하며, 그 영주를 만승지군(萬乘之君)이라
하였다. 중국 주(周)나라 때의 천자(天子)는 자기 직할영토에서 1만 대의 병거를 갖추어야 하는 제도가 있었으므로
만승은 천자의 호칭이 되었다.
건재하던 '시대일보(時代日報)'가 존속되지 못하고, 벌써 역사에만 이름이 남아 있게 된 것이외다.
이 신문은 세상에서 알던 것과 같이 민간지 중에서 가장 늦게 나온 것으로 '동아일보(東亞日報)', '조선일보(朝鮮日報)'에 비하여 어깨 수준의 해수밖에 되지 못하지만,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군이 창설한 것이요, 가인(可人) 홍명희(洪命憙) 군이 다시 일으킨 것으로 세상의 기대를 가장 많이 가졌던 것이외다.
그런데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굶주림과 목마름에 힘이 없던 태아는 겨우 분만은 하였으나 온갖 병이 몸에 들어와 험한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여러 의사가 치료의 노력을 다하다가 한 번은 ‘상투’ 가진 주문 외는 행자(行者)까지 덤비고, 마지막으로 경성(京城) 남북촌(南北村)의 재상(宰相) 자제와 경기도, 충청도의 일류 유산거반(有産巨班)이 총출동을 하였으나, 그것을 죽을 고비에서 건져내지 못하고, 출생 이래 만 2년 반에 그 나머지도 발행일수보다도 휴간, 정간의 일수가 더 많다가 명호애재(鳴呼哀哉)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궁내성(宮内省)의 최대 재혈(財穴)이라는 임야국에서 장관 노릇하는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 전 경무국장)
군이 조선 재임 중에 끼치고 간 사업에 대해 그 일례로 조봉협정(朝奉協定)을 비롯하여 상당한 분량의 기록이 남아 있지만 특히 조선인 측 언론계에 대해 여러 가지 기념할 것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성(姓)과 마찬가지로 조선인 언론계를 향해 화살 3발을 발사하고 갔습니다.
첫 번째 화살은 조선과 동아 두 신문에 대한 제2회 발행의 정지입니다.
두 번째 화살은 잡지 '개벽(開闢)'의 정간이 풀리자마자 최후로 극형(極刑)을 선고한 것입니다.
세 번째 화살은 '시대일보'의 폐간, 그것이라 하겠는데, 이것만은 미쓰야 씨도 어떻게 하지 못해서 뜻하지 않게 단행한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자살이지 타살은 아니외다.
그러나 비록 자살일지라도 숨이 끊어지는 마당에 참여한 사람이 미쓰야 그 사람이 아닙니까? 미쓰야 군 개인에 대해서는 이해할 만한 이유도 있지만, 이런 때에 화살 3발을 연속해서 쏜 것은 우리가 매우 불쾌해하는 것만큼 그에게도 불행이었습니다.
대관절(大關節) 사이토 총독의 8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시설(施設) 경영한 일이 꽤 많겠지만, 그중에 직접적이고 또
순전하게 조선인과 교섭한 것으로 묘지 규칙의 제한 완화, 태형(笞刑)의 폐지와 및 조선어 신문잡지의 발행 증가 허가를 가리켜 3대 시정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3대 시설(施設)의 하나인 언론기관의 증설이란 것이 미쓰야 씨의 재임 중에 생겨난 것보다도 없어진 것이
많은 점으로 보아 나는 서로에게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경무 당국자의 단속이 엄격했던 것만 책망할 것이 아니외다.
이 정치하에서 그 법규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들이 싫어하고 꺼리며, 금지하는 것을 죽기를 각오하고 굳세게 저항하고, 고의로 죄를 저지르는 경영자들의 두뇌에도 의문이 저절로 생깁니다. 그럴지라도 확고한 주의와 신념에서 처음부터
굴하지 않고, 만우난회(萬牛難回)의 열심(熱心)이 있는 것도 아니요, 어떠한 부끄러움도 없는 것과 판매 정책상 어쩔 수 없이 숨고 자촉(自觸)하여 압수를 피하지 않으려 하는데 기가 막혀한 마디도 더 말할 용기가 생기지 않고, 오히려 그 두꺼운 얼굴에 존경을 표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오. '시대일보'만은 사인(死因)의 거의 모두가 전후(前後) 이사자(理事者)들이 모졸(謀拙)한 것과 동신(銅神)의20) 은총을 받지 못하여 선천적으로 기형인데다 후천적으로 빈혈이 된 것입니다.
만일 그 '시대일보'에 경영의 귀재로 영리하고 학식이 깊은 이상협(李相協) 군이 실무를 맡고 배후에 김성수(金性洙) 군 같은 성의 있는 재주(財主)를 끼고서 또 다시 1919~1920년 같은 시대를 만났다면 오늘날과 반대의 결과를 분명히 봤을 것이기 때문이외다.
그리고 험담한 대가로 찬사를 올리는 것은 아니지만, 미쓰야 씨는 전기(前記)와 같이 조선 언론계에 중형(重刑)도 많이 부과하였고, 그가 경성을 떠날 때에는 '시대일보'를 없애고 다른 한편으로 '중외일보(中外日報)'를 새롭게 허가하였고,
그보다 앞서 조선출판물령(朝鮮出版物令)을 입안하여 종래에 복잡하던 법규를 통일하고자 하였을 뿐 아니라, 그 내용도 비교적 시대에 접근하도록 개선하려고 노력했던 것을 덧붙여 둡니다.
4.
하산형. 조선 언론계의 제2기 시대 즉 1910년 후로 1919년까지의 10년간이 '매일신보'의 전성시대, 아니 독보시대(獨步時代)라는 것은 앞에서 약술(略述)하였소.
그런데 과연 이 시대야말로 언론계 전체로 보면 일종의 암흑시대라 할 만큼 지난날 존재한 것은 모두 파괴되고, 새로운 것은 허용되지 않아서 간결하게 말하면 신문지가 눈서리를 치르던 겨울의 기간이었습니다.
요즈음 특히 '매일신보'만은 그 자매지 '경성일보'와 함께 뛰어난 일본 신문기자의 한 사람인 도쿠토미 조이치로(徳富猪一郎) 씨의 주재(主宰) 감독과 데라우치 첨두(尖頭) 백작의 특수한 보호 아래 광야의 외로운 나무처럼 존재하여 이상적 기관지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민중 측에서 환영을 하든지 반대를 하든지 그까짓 감정문제는 초월하고, 쓰든지 달든지 존재한 것이 그 신문 하나인 덕분으로 지금 같이 구차하게 면(面) 경비에 구독료를 편성하겠다고 도지사를 비롯하여 군수와 서무주임 등 속(屬)에게까지 음식정책(飮食政策)을 쓰지 않더라도 또 지방관 회의 때마다 총독부 고급간부의 명령적 종용과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관헌에 충성이 없을지라도 독자는 자식같이 모여드는 상황을 이루어 참으로 황금시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20) 구리귀신. 지독한 구두쇠를 뜻함.
근래에 와서는 민간지들에게 툭하면 ‘어용지, 어용기자’라는 창피한 소리도 듣게 되고 그런 일에 격동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떤 때에는 민간지들도 주저하는 문제에 대해 써보는 탈선도 하다가 백아관(白亞館)으로부터 꾸중도 듣고 달금(撻禁)도 당하는 희비극도 종종있으며, 당당한 기관지로서 명예훼손이니, 풍속을 어지럽힌다느니, 심하면 불경(不敬)
문제니 하는 이유로 고소와 처벌이 빈번하지만, 그 당시에 신문이라면 '매일신보' 그것을 의미함이요, 신문사라 하면
대한문 앞의 우뚝 솟은 건물을 지칭하던 때이니 속담의 이른바 호랑이가 담배 피고, 두꺼비가 비행기 타는 시대라.
이런 일이 생긴 원인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간부와 간부에 준하는 인물은 왜곡된 글을 쓰는 우두머리라는 평판도 높지만, 하여튼 소호(蘇峰) 씨 같은 뛰어난 작가이자 문학의 거두(巨頭)가 독재군왕(獨裁君王)격으로 엄연히 있고, 조선 사람과의 왕래가 많고 조선 사람의 친구로 자타가 인정하는 아베(阿部無仏) 씨가 사장으로 있으며, 조선통이라기보다도 조선인에 준하는 사람이라고 할 만큼 조선을 아는 나카무라 겐타로(中村健太郎), 마쓰오 모키치(松尾茂吉) 같은 이들이 관계할 뿐 아니라, 조선 사람으로 앞다투어 관계하던 사람으로 정운복(鄭雲复), 선우일(鮮于日), 김환(金丸) 같은 노장(老將)들이 있으며, 사교계에 활동가로
명성 높은 방태영(方台栄) 군도 세치 혀를 자본 삼아 그 무한한 정력에 힘입어 자기 멋대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매일신보'로 조선신문의 역사에 특필(特筆)할 새로운 성과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순국문이던 '제국신문(帝國新聞)'이 폐간된 이후로 약간의 예외도 있었겠지만 신문이라면 한문을 깨달아 터득한 일부
남자들이 전유하는 읽을 거리가 되고, 가정부인들은 물론 기타 대다수의 남자들과도 교섭하지 않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매일신보'가 종래 조선 신문지의 편집상에 일대 혁명을 가하여 사회면을 독립시키고, 이와 동시에 사회면 기사와 소설, 기타 가정부인들이 좋아하는 읽을거리는 순국문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니, 소설만은 국초(菊初) 이인직(李人稙) 씨가 주재(主宰)하던 '대한신문(大韓新聞)'에서도 씨의 창작에 순국문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신문이 가정과 거리에서 환영받아 그 방면의 계몽에 지대한 공적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주로 하몽(何夢) 이상협 군의 노력에 의한 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외다.
그리고 동 군의 '해왕성(海王星)'을 비롯하여, 조일재(趙一斎) 군의 '장한몽(長恨夢)', '상옥루(雙玉涙)ꡕ, 심천풍(沈天風) 군의 '산중화(山中花)', '형제(兄弟)', 민우섭(閔牛渉) 군의'애사(哀史)'며 기타 여러 동서(東西)의 걸작소설이 번역, 소개되어 원서를 다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특히 홍엽산인(紅葉山人)의 ‘금색야차(金色夜叉)’가
일재(一斎) 군의 곱고 막힘이 없는 필치로 '장한몽'으로 변형하는 동시에 이수일(李秀一)과 심순애(沈順愛)의 이름을
이제는 어린아이가 다투어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연문학(軟文学)21)의 맹아시대에 다른 한편으로는 장위암(張韋庵), 윤우당(尹于堂),안지정(安之亭)같이 예원노숙(禮苑老宿)들의 이름이 많이 나와 한학을 좋아하는 자들의 마음과 눈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제2기 말에는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군의 재치 있는 글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여 청년이 동경하는 대상이 될 만큼 세상의 갈채를 받았습니다.
5.
하산형. 현 '경성일보' 사장 소에지마(副島) 백작은 말하기를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는 기왕은 기관지인지 모르되, 내가 취임한 1925년 7월 이후로는 독립한 신문으로 편향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소에지마 씨의 말을 어느 정도까지
신용할 것인지는 우리가 관여하여 알 바가 아니오.
또 그 상세한 평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소에지마 씨보다도 10년이나 전에 기관지의 민영화를 주장 운동한 사람이 있었던 것만 여기에 간략하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씨가 만든 경성일보지는 소네(會彌), 데라우치(寺内)의 순서로 통감의 관인(官印)과 함께
전수되어 오다가, 다시 데라우치의 덕으로 '매일신보'까지 운영하게 된 후로 매년 5~6만 원의 수표가 고마다(兒玉)
총무국장의 손을 거쳐 도쿠토미(德富) 감독에게로 들어갔다 합니다.
그리하여 도쿠토미 씨는 그 타고난 영완(靈腕)을 발휘하여 주옥 같은 웅대한 글이 총독 정치를 칭송하는 것으로 지면에 출현하고, 그럴 때마다 첨두 장군은 자기 생각을 정성을 다해 교사(巧寫)하는 도쿠토미 씨의 입신묘재(入神妙才)에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데라우치 씨가 수상으로 취임하여 경성을 떠나고 후임으로 온 사람이 만세총감(萬歳総督)이라는 별명을 듣는 하세가와(長谷川) 원사(元帥) 그 사람이외다.
정치적으로 ‘약속을 지키고 받들어 어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부임한 하세가와 씨는 형식으로는 틀림없는 총독이나
실제로는 데라우치 씨의 대리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때에 도쿠토미 씨는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를 자기 수중으로 완전히 옮겨 보려고 소위 기관지 독립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술했던 것처럼 하세가와 씨는 정당한 상속을 하였으나, 재산처분은 임의로 못한 까닭에 요전순수(堯傳舜授)하여 오던 기관지에도 물론 그의 독단대로 하지 않고, 동경에 해야 할 일을 물어보았는데, 데라우치 백작의 노여움을 사서 당장 큰 벼락을 맞았습니다.
데라우치 씨는 말하기를, '경성일보', '매일신보'의 현재가 있는 것은 모두 총독이던 자기의 큰 은혜를 입은 결과이다.
이 때문에 자기는 다른 민간지로부터 완명불령(頑冥不靈)한 무단전제(武斷專制)의 악마같이 저주받고, 또 매년 막대한 기밀비를 써 가면서 특수보호를 한 기관지가 겨우 수지상상(收支相償)하게된 지금에 와서는 이유 없이 부친을 배반하려는 반역의 행위라 하여 단호한 처치를 취해 아주 빨리 도쿠토미 씨 이하 국민신문 계통의 최고 간부는 전부 파면되고,
데라우치 백작의 수행원으로 신임이 깊던 가토 후사조(加藤房蔵) 씨가 '산양신보(山陽新報)' 사장의 현직을 버리고,
'경성일보'로 전임하여 제5대 사장이 되었습니다.
21) 남녀 간의 연애, 정사를 주제로 한 문학.
이와 같은 역사를 가진 '경성일보'가 아무리 시대가 다르고 주인이 바뀌었다 할지라도 쉽게 특수한 역사적 관계를 끊고, 하루아침에 독립불패(独立不覇)한 소에지마 백작 개인의 전유물이 된것은 누구나 수긍할 수 없는 문제이외다.
그뿐 아니라 기관지란 것은 반드시 기관지로 있어야 그 존재의 이유가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권위도 있는데, 소에지마 씨의 말과 같이 개인의 소유로 총독부와 관계없이 된 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그 신문은 이미 존재의 의의를 잃어버린
추해(醜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것은 도쿠토미 씨의 분리운동은 절반의 성공도 이루지 못했고, 오히려 해강구실(蟹綱倶失)이 되어 천 번 생각에 한번 실수라는 좋은 예를 보이고, 경성 논단으로부터 그의 조리가 분명한 길고 웅대한 문장을 다시 볼 수 없게 되고 시세는 빠르게 제3기로 들어갔습니다.
(이하 다음 호, 5월 29일 삼청서옥(三清書屋) 병상에서)
<출전 : 木春山人, 評林의 評林 新聞의 新聞(其一), '新民' 26호, 1927년, 38~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