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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내리던 비는 저녁이되자 아예 비바람으로 바뀌었다
그 비바람속에 낡은 1톤 화물차는 비포장인 좁은 산길을 위태롭게
달리고있었다
라이트 한쪽은 고장이 난데다 낡아빠진 와이퍼는 쏟아지는 빗물을
쓸어내기엔 이미 힘이 부친듯 삐그덕 거렸다
이런 날씨에 어떻게 이런 고물차를 운전할수 있는지 의아스롭기도
하지만 운전하는 50대의 남자는 전혀 개의치않고 낡은 카스테레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목이 터져라 따라 부르는데 여념이 없었다
울리지 않을꺼어야~~
나의 여자로 만들꺼어야~~~
내게 은제나 너뿐이야아아아아
웃으며 내애게 돌아와줘어어~~
곤드레..만드레..
음정도 박자도 맞지 않지만 무척이나 흥에 겨운듯했다
사실 남자는 오늘 무지 기분이 좋은 날이다
사과 과수원을 20년가까이 했지만 올해처럼 좋은 가격에 수매를 하기는
처음이다
남자가 생각해도 올해 사과는 색깔과 당도도 그렇고 크기도 예년보다
월등히 좋았다
거기다 수확량도 좋아 그야말로 무슨 갑부라도된 기분이었다
남자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객지로 떠돌았다
노동일에 장사, 사업..안한것없이 다했지만 고생만 죽도록하고
돈은 벌기는커녕 밥도 제대로 먹지못해 몸만 축났다
그러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물려준 땅에 사과나무를 심었다
사과나무를심고 난후 10년동안 남자는 말로 다할수없는 고생을했다
처음엔 과실작농법을 몰라 일년내내 손이 부르트도록 정성을 쏟았지만
사과는 무우처럼 맹탕에다가 크기는 겨우해야 계란만했다
그 이유를 알기까지 3년이 걸렸다
겨우 사과다운 사과를 기르자 이번엔 벌레가먹어 썩어문드러졌다
또 어느해는 제대로 됐다 싶으니 늦태풍에 전부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이고생 저고생해서 제대로된 사과를 길러 수확을 앞두고 남자는 감격에
눈물을 흘렸는데 그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싸그리 도둑을맞아 몇날 몇일을
피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10년동안 남자는 평생동안 울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이 거름이 되었는지 10년이 지나자 겨우 사과다운 사과를
수매할수있었다
겨우 생활이 안정이되자 남자의 나이는 40을 훌쩍 넘었다
40이 넘어 겨우 결혼을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않을 딸자식도 얻었다
남자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했다
사과는 자신의 인생이라고..
그 인생이 이제서야 활짝 만개를 하는것같아 가슴이 이루말할수없이
뿌듯했다
카스테레오에서는 송대관의 네박자가 막나오고 있었다
요즘 남자가 열심히 배우는 노래다
신이난 목청으로 막 노래를 따라부르려는순간 그렇지 않아도
비실비실대던 와이퍼가 기어코 고장이난듯 멈춰버린다
“뭐여, 저놈이 겨코 사단이 난겨”
20년이 넘게 다니던 길이라 웬만하면 갈수있는데 양동이로 쏟아붓는듯한
이 빗속에는 아무래도 무리다싶어 남자는 어떻게든 와이퍼를 작동시켜볼
요량에 화물차에서 내렸다
이제는 갑부 아닌가
갑부는 몸조심을 해야지..
남자는 흠뻑젖은 몸으로 와이퍼를 억지로 움직여도보고 두들겨도 보지만
한번 맛이간 와이퍼는 다시 소생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빌어먹을..당장 이놈의 화물차부터 바꾸든가해야지..”
그때 남자의 뒤통수에 차가운 금속이 닿는 느낌이었다
“뭐여..”
몸을 돌린 남자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죄수..
푸른색 죄수복을 입은 남자 두명이 자신의 눈앞에 서있었다
그중 한명, 20대쯤으로 보이는 죄수는 권총을 남자에게 겨누고있었다
이게 꿈인가..
내가 영화를 보고있는건가..
아니다, 생시다
그렇군, 맞아, 생시가 확실하다
남자는 아침에 집을 나서기전 티브이에서 빗길에 죄수호송차가 굴러
죄수 8명이 탈출했다는 뉴스를 봤다
그건 저 산너머인데..
그럼 이 죄수들이 이 빗속에 저산을 넘어왔다는 얘긴가
남자는 도대체 자신한테 왜 이런일이 벌어진건지 믿을수가 없었다
“어이, 아저씨, 뭐야, 왜 그렇게 얼이 빠져있어, 어?”
권총을 겨눈 20대 죄수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을했다
“아..아니..그..그게 아니고..”
남자는 뭔가 말을 해야하는데 말이 목에걸려 나오지 않았다
“뭐야, 이거 맛탱이가 간 인간 아냐? 뭐? 뭐? 어? 말을 하라구..말을..”
“그만둬”
그때 다른 죄수가 나즈막히 20대를 막아섰다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죄수였다
“집이 어디요”
“저..저.. 산모퉁이를 돌아가면..과..과수원이..”
“과수원이 집이야”
20대가 또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네..네”
“해칠 생각은없소,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못해서 요기좀하고 잠시 쉬어갈
생각이오, 그렇게 해주시오“
40대 죄수는 무척이나 정중했다
죄수라고 믿을수없을 정도였다
남자는 40대 죄수의 말투에 그나마 조금은 안도를하며 정신을차렸다
“어이, 꼰대, 지금 뭐하는거야, 우리가 지금 부탁할 처지야”
20대의 말에 40대가 힐끗 쳐다봤다
40대의 눈빛에 한발 물러선 20대가 공연히 남자에게 성질을 부렸다
“어이, 아저씨, 뭐해!! 빨리 운전하라구!”
“네..네..”
황급히 운전석을 오르는 남자를 따라서 20대와 40대도 화물차에 올랐다
화물차에는 고물 오디오가 계속해서 트로트를 토해내고 있었다
“이거 끕시다”
“네..네”
40대는 시끄러운걸 싫어하는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죄수들 가슴에는 번호표가 붙어있었다
20대는 484
40대는 336
아마도 수인번호인 모양이다
와이퍼가 고장나 한치앞도 보이지않는 화물차는 엉금엉금 기듯이
겨우 산모퉁이를 돌았다
산모퉁이를 돌자 저만치 어둠속에 묻힌 과수원이 보였다
과수원 옆쪽엔 넓은 공터가 있었고 남자가 살고있는 거택(居宅)이
있었다
실평수 20평쯤되는 거택은 남자가 과수원을 시작할때 손수 지은 집이다
벌써 20년 가까이 됐으니 거의 쓰러질듯 낡은 집이지만 남자에게는
어떤 호화주택보다도 소중한 집이었다
“집에는 누가있소”
“아..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아저씨 혼자 산단 말이야?”
“저..저기 집사람과 딸내미가 있는데..지금은 서울갔습니다”
“씨발..왜 말을 더듬고 지랄이야, 서울은 왜갔어”
젠장, 누구는 말을 더듬고 싶어서 더듬는가
지금 이판국에 제대로 말이 나올리가 만무이지 않는가
“딸내미가 공부하러가서..집사람하고 같이..”
“그러니까 딸이 서울로 유학을가서 기러기아빠라는 얘기아냐”
“그..그렇습니다”
“알았어, 차 세워”
484는 자기 아버지뻘인 남자에게 계속 반말 짓꺼리였다
하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남자는 빨리 이 악몽이 깨기만을 기도했다
화물차가 거택 마당에 정차하자 마당에 묶어놓은 누렁이가 미친듯이
짖어댔다
“저 개새끼가..”
484번이 화물차에서 내리며 금방이라도 누렁이를 쏴죽일 기세로 권총을
빼들자 남자는 기겁을하며 황급히 누렁이를 진정시켰다
주인의 손길에 짖는걸 멈춘 누렁이는 그래도 낯선 이방인이 마음에
들지않는지 계속해서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릉 거렸다
“자..자 들어가십시요”
남자는 죄수들을 거택 안으로 안내했다
남자가 거택 불을켜자 초라하지만 깨끗하게 정리된 집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돈된 모습이 남자의 성격을 말해주는듯했다
“시장들 하시죠..금방 밥상 차릴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남자는 어떻게든 이놈들을 빨리 내보낼 생각에 부랴부랴 밥상을 차렸다
그때 484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남자는 화들짝 놀랐다
484는 거실에 놓여져있는 가족사진이 담긴 탁상용 액자를 들고 따지듯이
물었다
“이거 뭐야, 이게 아저씨 마누라하고 딸이야”
“네네..”
“근데 왜 이렇게 젊어, 딸은 이제 겨우 초딩이잖아”
“제..제가 늦게 결혼을해서 나이차가 좀 납니다..”
“몇살차인데..”
“15살..”
남자는 무슨 큰 죄라도 지은것처럼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이 아저씨 완전히 도씨네, 세상에 15살이나 어린 여자하고 결혼을
했단 말이야?“
“말조심해, 아버지뻘이야”
묵묵히 있던 336번이 484를 나즈막히 나무랬다
“이거 웃기는 짜장이구만.. 어이, 꼰대, 빵살이 하면서 나이따져?
나이가 무슨 벼슬이냐고.. 글고..왜 그렇게 시비야, 가만히 보니까..
아주 내가 쫄로 보이는 모양인데.. 여기서 한따까리 해볼까? 어?“
484는 336에게 금방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로 바짝 대들었다
484의 행동에 당황한건 남자였다
지금 두사람이 싸워서 좋을건 없다
어떻게든 말썽없이 밥술이라도 먹여 이 뜻밖의 불청객들을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내보내는게 남자로서는 최상수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에 남자는 두사람 사이로 황급히 끼어들어 금방이라도 한바탕
붙을 싸움을 말린다
“이..이러지들 마쇼..그렇지 않아도 몸이 천근만근일텐데..
자자.. 금방 밥상차릴테니 좀 앉아서 쉬시구랴..“
남자의 만류에 분위기는 일단 진정된듯했다
그런데 기어코 사단이 난건 바둑판때문이었다
484가 투덜대며 돌아서 거실 한쪽 벽에 놓여진 바둑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둑판은 남자가 애지중지 아끼는 물건이었다
아니, 물건이라기보다도 보물이었다
남자는 아침에 일어나면 바둑판부터 닦는것이 하루 일과였다
그래서인지 바둑판은 원목색깔이 고스란히 드러나며 윤이났다
484가 그 바둑판에 앉는걸보며 남자는 울컥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며
“당장 바둑판에서 일어나!!”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런데 남자대신 그말을 해준건 336이었다
“거기서 일어나”
“뭐?”
336의 말에 484가 힐끗 무슨 귀신신나락 까먹는 소린가 쳐다본다
“일어나”
336의 말이 한 톤 올라갔다
“이 꼰대새끼가 보자보자하니까..”
484가 벌떡 박차고 일어났다
484가 미처 일어나기도전에 336의 발이 먼저 484의 안면을 뭉갠다
484가 벽으로 나가떨어지자 336이 무자비하게 484를 발로 짓뭉갰다
남자는 기겁을해서 336을 끌어안듯이 떼어놓았다
484의 얼굴은 피떡이다
“어디봅시다, 끌끌..이거 약이라도 바르든가 해야지..”
“저리 비켜!”
484가 애꿋은 남자에게 화풀이를하듯 밀친다
“꼰대, 두고보자”
“두고보는건 나중이고 앉아”
336의 목소리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듯 다시 나즈막했다
“그..그래요, 일단 앉아요, 내 금방 밥상 차려올테니까..”
남자는 빨리 이분위기를 수습하려는듯 허겁지겁 밥상을 차렸다
밥상이 차려지자 484는 금방까지 치밀어 올랐던 화는 까마득하게 잊은듯
게걸스럽게 밥을 입안으로 퍼넣었다
484와달리 336은 밥먹는것도 조용했다
그런 336에게 남자는 묘한 호감을 느꼇다
밥상을 물리자 484는 앉아서 꾸벅꾸벅 병든 닭처럼 졸더니 급기야
코까지 골아대며 곤잠에 빠졌다
적막한 거실에는 빗소리만이 가득했다
숨막히는 침묵에 남자가 입을 열었다
조심스런 말투였다
“저어..이런 말을 물어봐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무슨 일로..”
남자는 차마 ‘죄’란 말을 입에 담기 어려워 ‘일’이란 표현을썻다
“그냥 죄라고 그러시지요, 죄를 졌지요, 그래서 이렇게 죄수복을
입고 있는것이고..“
336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무슨..”
“아내를 죽였습니다”
남자는 깜짝놀랐다
“전 선생이었습니다, 어느날 몸이 아파 일찍 집엘 왔더니 아내가 다른 남자와
그짓을 하고있었어요, 그런거야 그러려니 할수있지만 그짓하는 아내앞에
3살먹은 아들이 울고있었지요, 우는 아이앞에서 다른 남자와 그짓이라니..
눈이 뒤집히더군요, 그 남자놈은 벌거벗은채 도망가고 아내와 티격태격하다
그만.. 그렇게 됐습니다“
“그..그렇군요, 그럼 형량은..”
“7년 받았습니다, 이제 2년 남았는데 우연치않게 이렇게 되버렸군요”
“5년전이면 이제 아들도 꽤 컸을텐데 누가..”
“외국에 누이가 살고있지요, 누이가 데려갔어요
마침 누이도 자식이없어 잘된거지요, 아들을 데려갈때 누이한테 말했습니다
나는 없는걸로 치라고.. 나도 아들은 없는걸로 생각할테니..“
336은 자신의 얘기를 마치 남의 얘기하듯 무덤덤하게 말했다
꼭 남의 인생을 사는듯했다
그런 336앞에 남자는 더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이번엔 336이 침묵을깻다
“저 바둑판은 어디서 난겁니까, 꽤 좋아보이는데..”
“아..그건 내가 직접 만든겁니다”
“직접..?”
336이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경이롭다는 표정이다
“철없던 시절에 객지생활을 했어요, 10년넘는 생활에 남은건 저거 하납니다
우연히 비자나무를 얻었는데 몇달동안 공을들여 만든겁니다“
“비자나무군요..”
336은 마치 소중한 보물을 만지듯 바둑판을 쓰다듬었다
남자는 336이 바둑을 좋아하는듯해 물었다
“바둑을 두십니까”
“아..네, 전에는 제법 뒀지요”
336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보였다
“아..그렇군요, 난 한국기원 공인 5단입니다”
남자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누구한테든지 이말을 할때가 남자는 가장 자랑스러웠다
“아..그렇습니까”
바둑얘기가 나오자 두사람의 얼굴에 화색이돈다
남자는 이왕 말나온김에 한수를 청한다
“괜찮다면 우리 한수할까요”
“그럴까요”
336도 두말않고 응한다
바둑판앞에 앉자 두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된다
남자는 조금전까지 끔찍했던 상황은 모두 잊은듯이 즐거워했다
336도 모든것에 관조하는 자세에서 바뀐듯했다
“얘길 들어보니 약한 바둑은 아닌것 같은데 일단 호선으로 합시다
일단 한판두고 치수는 조정하면 되고..“
“그러지요”
돌을 가리자 남자가 흑이다
남자는 모처럼만에 두어보는 바둑에 기쁨이 충만한듯 심호흡을 한번하고
정성을다해 첫수를 두었다
336은 감읍한듯 바둑판을 훑어보았다
이 얼마만에 느껴보는 기분인가
336은 돌통에 손을 넣어 천천히 바둑돌의 촉감을 음미했다
달그락거림과 매끄럽게 손안에서 노는 바둑돌들..
그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골라 천천히..아주 천천히 첫점을 놓는다
..딱..
명징한 울림
적막한 거실안에는 아무것도없는 텅빈 공간처럼 빗소리와 바둑돌놓는
착점소리만이 존재했다
빗소리
착점소리
이 두 소리가 어떤 오케스트라보다도 더 훌륭한 음악을 연주해냈다
그렇게 100수쯤 지났을때..
그 청아한 화음을 깨는 소리가 있었다
누렁이의 짖는 소리다
무아지경에 빠진 두사람은 미처 그소리를 듣지못한다
잠을자던 484가 잠에서 화들짝 깨어난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제서야 두사람은 고개를 돌린다
누렁이의 짖는 소리
“뭐야”
484가 득달같이 몸을 일으켜 창쪽으로 가 몸을 숨기고 밖을 본다
경찰차, 경찰차가 과수원쪽으로 오고있었다
“짭새야!”
화들짝 놀란건 남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이 와봐야 상황이 좋을게 없다는 생각이다
경찰차가 거택 마당에 정차하고 경찰 두명이 내리자 누렁이는 목이
찢어져라 짖어댔다
“씨발.. 저거 뭐야, 짭새가 어떻게 온거야”
“지금 이럴때가 아니야, 빨리 숨어요”
남자는 어떻게든 두사람을 숨길생각에 등을 떠밀었다
“이 코딱지만한 집구석에 숨을데가 어디있다고 숨어!”
“그저 순찰온거니 집안에는 안들어올거요, 그러니 저 방으로..”
“끝났어, 여기까지야”
두사람의 실강이에 끼어든건 336의 나즈막한 목소리였다
“뭐야, 뭐가 끝나”
“자수해”
“뭐? 지금 이 꼰대가 뭐라고 지랄하는거야”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남자는 기겁을했다
“잘알고있겠지만 자수하는거하고 체포되는건 형량이달라, 나야 상관없지만
자넨 앞길이 구만리야, 자수하는게 좋아“
“아가리 닥쳐!!”
계속 울러대는 초인종 소리와함께 누렁이는 더 미친듯이 짖어댔다
“잘생각해, 이게 마지막 기회야, 자수해”
“꼰대, 주둥아리 놀리지마!!”
“포기해” 336의 목소리는 한 톤 올라갔다
“좃까는 소리하지 말란 말이야!!” 484는 절규했다
..쾅..
마치 절정을향해 치닫는듯한 바이올린 연주는 한발의 권총소리에 줄이 끊어졌다
순간 누렁이 짖는 소리와 초인종 소리가 멈췄다
심지어는 빗소리마저 멈춘듯했다
혼비백산해서 얼이빠진 경찰들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뭐..뭐야”
“총소리잖아”
경찰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거실유리창을 보고 경악을했다
거실 유리창은 박살이 나있었고 안에는 두명의 죄수가 있었다
한명은 권총으로 과수원 주인을 인질로 잡고 있었고 옆에는 다른 죄수가
서있었다
“저..저건 탈주범..”
“그..그러게..”
본서에서 외곽지역을 순찰하라고해서 건성으로 왔던 경찰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넋을 잃었다
“짭새들!! 조금이라도 허튼짓하면 이 아저씨 머리에 바람구멍이 날거야,
알았어?“
“알..알았다!!”
경찰들은 경찰차 뒤로 몸을 숨기며 행여라도 인질범 성질을 건드릴까봐
악을 썻다
“짭새들!! 경찰차에서 멀리 떨어져!!”
484는 남자를 인질로잡고 화물차로 도망을 갈 생각이다
경찰들이 경찰차에서 물러서는걸 확인한 484는 남자를 인질로 잡은채 게걸음으로
움직였다
여차하면 방아쇠를 당길 생각이다
남자는 아예 눈을 감았다
이렇게 죽는구나
집사람과 딸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때 권총을들은 484의 손을 336이 번개같이 잡아 비틀었다
권총이 허공을향해 발사됐다
336은 484를 안은채 바닥으로 뒹굴렀다
484의 손에서 권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두사람은 한덩어리가 됐다
336이 484위로 올라타며 손으로 멱살을 누른다
484는 캑캑 대면서 손을 허우적대며 전가의 보도처럼 믿었던
권총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썻다
그때 336이 바닥에 떨어져있는 뭔가를 집는다
바둑알통이다
그것으로 484의 안면을 내려친다
비자나무로 만들어진 바둑알통은 묵직하면서도 단단했다
484의 안면을 아무리 내려쳐도 끄떡이 없었다
단지 피투성이가 됐을뿐이다
남자가 336을 말리자 그제서야 336은 제정신이 돌아왔다
484는 이미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안면은 형체도 알아보지 못한채..
판사는 336에게 7년을 선고했다
탈주는 우발적 범행
484에대한 살인은 인명구호를 위한 정당방위로 인정되 비교적
관대한 선고를 받는다
탈주전 잔형 2년까지 합하면 9년형기다
하지만 336에게는 9년이든 90년이든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살 의욕도 없다
336은 죽을때까지 선생을 하는것이 꿈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게 남자에게는 전부였다
그런데 한사람을 죽이고..
그것도 부족해 또 한사람을 죽였다
살인자가 누굴 가르치겠는가
가르치는건 고사하고 숨쉬는것조차 부끄러운 336이다
336의 가슴은 점점 황폐해져갔다
식음도 전폐했다
336의 상태가 심각해지자 교도소는 정신병원에서 치료까지 받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336은 점점 죽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3개월..
336에게 한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봉투를 뜯어보니 글자 하나 써져있지않은 종이가 한장 들어있었다
아..
종이를 보고 남자는 길게 신음했다
그것은 기보였다
과수원 남자와 두었던 바둑이다
그때 끝내지못한 바둑..
과수원 남자가 둘 차례였다
기보에 과수원 남자가 자신의 수를 표시하고 보냈다
336은 몇날몇일을 기보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수를 표시해 보냈다
한달후 과수원 남자에게 다시 답장을 받는다
그렇게 한달에 한수씩 주고 받는다
1년이면 12수
9년이면 108수..
여기서 나갈때쯤이면 바둑이 끝날것이다
336은 희망이 생겼다
살아갈 이유가 생긴것이다
그렇게 서신대국은 계속되었다
7년이 지날때쯤 어느달..
기보가 오지 않았다
336은 기다렸다
애타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나 다음달에도 또 그다음달에도 기보는 오지않았다
그렇게 서신대국은 끝이났다
2년후 어느 여름..
안개가 자욱한 새벽..
336은 만기 출소를한다
같이 출소한 출소자들은 마중나온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얼싸안고 두부를먹고
야단법석인데 336은 혼자였다
어차피 마중나올 사람도 없지만 그런걸 좋아할 336도 아니었다
그저 심호흡을 한번 크게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갈곳이있다
과수원에 가볼 생각이다
그분을 만날 생각에 336은 마음이 들떠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336을 부른다
“선생님..”
336이 돌아보니 20살쯤 되보이는 여자가 단아하게 서있다
“저를 부르신건가요”
“네..유상천 선생님이시지요”
“선생은 아니지만 유상천인건 맞소만..”
가만, 그러고보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여자를 다시한번 유심히 본 336은 깜짝 놀랐다
조민영 국수
여자로서 최초로 3년연속 국수에 올랐고 작년에는 응씨배와 도요타덴소배
삼성화재와 LG배등 그랜드슬램을 달성해 세계 바둑계를 발칵 뒤집어놨던
기사다
“이거..조민영 국수 아니신지..”
“맞습니다..”
“허어..이런 광영이있나.. 조국수님을 직접뵙게되다니..
가만..그렇데 어떻게 저를..”
“조택수씨를 아시지요”
조택수, 어찌 그이름을 잊을손가
과수원 주인 아닌가
“물론 알지요, 압니다, 그런데..”
“그분이 제 아버님이십니다”
336은 깜짝놀랐다
“그..그런가요..”
“9년전..그때 과수원 사건때 전 서울에서 연구생 생활을 했습니다, 나중에
선생님에대한 얘기를 들었지요“
“아아..”
336은 부끄러워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이어지는 여자의 말에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아버님은.. 돌아가셨습니다”
336은 무슨 말인가 하려고했지만 말이 목에 걸렸다
“2년전이었지요, 담도암으로..”
336은 아무말을 못했다
여자도 잠시 조용히 서있었다
모든것이 멈춰버린듯이 조용했다
336의 마음이 추스려질때쯤 여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서 유언을 남기셨어요
선생님과 끝내지 못한 바둑이 있는데..
저보고 대신 끝내달라고요
아버님처럼 서신으로 할수도 있지만 그건 예의가 아닌것같아
출소때까지 기다렸답니다“
336의 가슴 저 밑바닥에 알수없는 뭔가가 올라왔다
슬픔..
아픔..
기쁨..
회한..
그 무엇도 아니었다
말로 설명할수 없는 무엇..
남자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것을 꿀꺽 삼켰다
“괜찮으시다면 가시지요, 제가 자리를 마련했답니다”
336은 여자의 차에 올라탔다
여자의 차는 속리산밑에 자리잡은 보성선씨 종가집에 도착했다
99칸인 종가집은 지금 택주(宅主)의 증조께서 직접 지은 고옥이다
여자와 336이 도착하자 종부가 예의바르게 맞이한다
미리 약속이된듯 정갈스럽고 정성이 가득한 상을 들인다
336은 음식을 먹는둥 마는둥했다
무슨 맛인지 혀가 느끼질 못했다
상을 무르고 두사람은 대청마루에 바둑판을 가운데두고 앉았다
그분이 만든 비자나무 바둑판이다
여자가 두사람의 바둑을 복기하여 놓는다
두사람이 목례를하고
여자는 한점을 놓았다
"아버님은 기보에 이자리를 표시했습니다
결국 기보를 보내시지는 못했습니다만.."
당연한 자리다, 들여다본 자리를 이었다
336이 둘차례이다
336은 그윽하게 바둑판을 보았다
그리고 앞에 앉은 상대를 본다
앞에는 과수원 주인이 앉아있었다
“나 무시하면 안되요, 이래뵈도 한국기원 공인 5단입니다
자.. 두세요“
“하하..무시하긴 누가 무시합니까, 알지요, 알고말고요..
그럼 두겠습니다“
336은 돌통에서 돌을 하나 집었다
2년동안 장고한 수인만큼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없다
..따악..
착점소리가 명징하게 대청마루에 울려퍼졌다
뜨락에 매미소리가 길게 목을빼 그것에 화답을한다
..매애애애애애애..
끝
[본내용은 작가의 순수 창작물이므로 무단복제나 도용,표절을 금합니다]
♬편지 /어니언스 ♬
첫댓글 Well, the author said I should not copy or use it without permission; but I did it. A beautiful story!!
Yes, it is.
Do you know 바둑, smile nim?
어렸을때 오빠와 한두번 두어본적은 있지만 잘두지는 못해요.
따스한 얘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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