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소설
찢어진 운동화
소백산에서..
한낮의 땡볕이 인정사정 없이 내리 쬐는 어느 여름,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의 작은 시골 동네에 순찰차 한 대가 소재지를
배회하다 어느 식당 앞에 차를 세운다.
“드르륵....”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어머, 최경장님 오늘도 혼자 시네요, 원래 혼자 순찰 도세요”
“아니오, 김순경하고 같이 순찰 도는데, 한사람이 휴가를 가서
김순경이 사무실 지키고 있습니다.”
“어머, 심심 하시겠네요”
“아니요, 혼자 순찰차 타니까 오히려 더 좋은 데요”
“여기 된장찌개 하나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동준은 식탁에 앉아 스포츠 신문을 집어든다.
이른 점심시간이지만, 꽤 많은 손님들이 있다.
작은 시골식당이지만, 비교적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고,
창가로 환한 햇살까지 들어와 밝은 분위기다.
냉장고 위에 덩그러니 올려진 티브이에서는 국회의원들이 핏대를
세우며 청문회를 하고 있는데, 그 청문회에 눈길을 주는 손님은 없는
듯 하다.
에어컨이 놓여 있는 창가 귀퉁이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손님들이 모여
앉아 있고 테이블 사이에 놓이 선풍기가 프로펠러 같은 굉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다. 찌는듯한 더위에 에어컨과 선풍기도 지쳤는지,
기계의 심장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주방으로 통하는 입구에 원주 치악산 마라톤 대회에서 마라톤 복장을
하고 골인하고 있는 성경의 사진이 액자와 함께 걸려 있다.
동준은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성경에게 마라톤에 대해 물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기회가 없다.
주간 근무, 그것도 점심 시간에만 한번씩 성경의 얼굴을 보지만,
밀려드는 손님들로 인해 항상 바쁘다 보니 쉽게 말을 붙일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같이 순찰차를 타는 김순경이 신세대답게 자장면, 햄버거
등으로 점심을 떼우기 일쑤이다 보니, 주간근무마다 성경이 운영하는
식당을 찾아오기도 힘들다.
스포츠 신문을 이리저리 넘기며 기다리는 사이, 성경이 쟁반 가득히
반찬을 내 온다.
혼자 앉아 있는 동준이 손을 내밀어 받으려다가 이내 멋쩍은 듯 손을
거두어 들였다.
성경은 아무 말도 없이 사무적으로 반찬을 식탁 위에 올려놓은 채,
휙 뒤돌아 가버린다.
동준이 젓가락을 집어 들고 먼저 나온 반찬을 끄적거리고 있을 때,
성경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된장찌개와 공기밥을 쟁반에 얹어
내온다.
동준은 된장찌개와 공기밥을 내려놓는 성경의 손을 순간적으로
훔쳐본다.
맑고 깨끗한 손이다.
손가락 어디를 훑어보아도 반지가 없다.
“최경장님, 맛있게 드세요, 밥 모자라면 말씀하세요”
“네”
동준은 숟가락을 들고 된장찌개를 떠 입에 넣는다.
구수한 된장이 입안에 살살 녹는다.
고개를 식탁에 파묻고, 묵묵히 밥을 입으로 가져간다.
식당 안의 남정네들의 낄낄거리는 목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밥을 나르는 성경의 등 뒤에서 성경의 뒷모습을 훔쳐보며 히죽거리고
있다.
동준이 줄여 놓은 무전기의 볼륨을 좀 더 키운다.
희죽거리던 남정네들이 동준의 존재를 인식했는지, 이내 조용해진다.
“사장님 얼마 에요”
“네, 오천원요”
동준은 무전기를 들고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아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운터로 뛰어 오는 성경의 가슴이 출렁거린다.
짧은 반 팔 티셔츠의 속에 감춰진 봉긋한 성경의 가슴이 출렁거린다.
동준이 얼른 시선을 돌린다.
“최경장님 맛있게 드셨어요”
“네, 된장이 아주 맛있네요”
“고마워요 다음에 또 오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밥값을 치르고 식당 문을 나서는 동준에게 성경이 미소를 건넨다.
식당 문을 나서던 동준이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뒤돌아 서며 묻는다
“사장님... 마라톤 하세요”
“네?.. 아...네...”
성경이 밝게 웃으며 대답한다.
“운동하신지 얼마나 됐어요”
“후훗.. 살이나 좀 빼 볼까하고 시작했는데, 얼마 안됐어요..신림면
마라톤 동호회에 들었는데, 일이 바빠 연습도 제대로 못해요”
“네...”
“최경장님도 마라톤 하세요”
“아... 아니오,”
“그냥 마라톤 사진이 있길래..”
“최경장님도 마라톤한번 해 보세요.. 참 좋아요”
“네, 기회가 되면..”
“일요일 아침마다 신림중학교 운동장에 모이거든요. 시간 되시면
나오세요”
“네,.. 잘 먹고 갑니다.”
식당 문을 나서며 순찰차로 돌아오는데, 발걸음이 가볍다.
마라톤이라....
20여년 전...
동준은 고등학교 시설 중장거리 육상 선수였다.
고교 중장거리 강원도 대표에 선발되어 전국체전까지 나갔었지만,
이렇다할 성적은 없었다.
고교시절 만 미터 기록이 32분대...
동준에게 달리기를 가르치던 박코치는 동준이 중장거리 선수로 성공할
만한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날 동준을 조용히 불러,
공부해서 대학 갈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달리기가 좋아서 육상을 시작했을 뿐, 전국체전의 성적과 기록, 대학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동준은 순간 갑자기 날아온 박코치의
일방적인 물음에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순간적으로 갈등했지만,
박코치는 동준의 갈등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고 비정하게
말을 이어갔었다.
“내가 보니 동준이 너는 안되겠다. 다른 애들보다 1-2분이나 기록이
뒤지는데, 그렇게 해서 체육대학 가겠냐. 지금이라도 안 늦었다.
공부시작해라... 너...육상하기 전에 공부도 꽤 잘했다고 하니 달리기
하는 만큼만 공부하면, 충분히 좋은 대학갈 수 있으니... 그렇게 해라.”
동준은 한 마디 댓구도 못한 채, “네..., 네..,.” 소리만 연발했었다.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고,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거리는 사이에, 박코치는 매몰차게 등을
돌려 교무실로 걸어갔다.
운동장 한 구석에서 멀어져 가는 박코치를 바라보는 동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한참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멀어져 가는 박코치의 뒷모습을 쳐다
보았다.
눈물 때문인지 박코치가 교무실로 들어가 버린 때문인지...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박코치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그렇게 동준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첫댓글 마라톤 온라인에 아마츄어 작가분께서 연재해 주신 글 입니다. 저 혼자 읽기 아까워 이렇게 올립니다. 우리 클럽 많은 분들이 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식당 한 번 찾아가야겠습니다. 하루 한 회씩 슬슬 읽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