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오면 만나자던 약속은 겨울을 설레이며 기다리던 해순이는 막상 겨울이 오니 걱정이 태산 같다 원래부터 게을러 회사 쉬는 날이면 하루종일 쇼파에서 배게를 껴안고 텔레비전만 죽사리 보고 혼자 자취하는 부엌은 엉망진창 아침에는 라면 볶음 점심은 국물 있는 떡만두 라면 저녁은 라면 오무라이스로 때우는 라면회사 일등 고객이다 한동안 몹시 추었던 날씨는 급전직하 영하로 즐창 ‘고우고우’ 하고 온 하늘은 싸늘하기만 하다 오로지 믿은 구석은 따뜻한 방 해순이 5평 남짓한 월세 아지트이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조금 설레이는 날 주간 예보대로 내일 함박눈이 온다고 한다 지난 가을 서울에 상경하여 진석이를 만나고 다음번은 첫눈이 오는 날 명동 ‘쉘부르의 우산’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던 것이다 해순이가 다니던 영어학원은 방학을 맞아 모두 용평스키장으로 연수를 떠났고 깜순이 해순이만 남았던 것이다 혹시나 한파로 학원 보일러가 터질까봐 놀기를 싫어하고 방콕만 즐기는 해순이를 당번으로 남겨 놓은 것이다 믿을걸 믿어야지 딱한 원장선생님이시다 자기몸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데 그날 자정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다음날까지 ‘펑펑’ 쏟아진다 해순이는 얼른 일어나 목욕탕으로 미장원으로 분주히 뛰어다녀 떼도 빼끼고 얼굴도 만들고 서울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는다 해남에서 서울까지는 아무리 못 잡아도 5시간은 걸리고 약속장소까지 갈려면 또 2시간정도 그러나 마음은 바빠오는데 몸은 영 호응이 좋지 않다 서울에 도착하니 더 많은 눈이 내리고 온통 해순이 마음처럼 하얗다 한층 목을 세워 택시를 타고 명동으로 간다 그런데 눈이 하도 많이 와 도로가 빙판 자동차와 사람이 엉키어 택시비가 무려 4만원씩이나 나왔다 억울한 해순이는 너무 억울해 눈알이 튀어 나올 지경이고 지갑은 얇아져만 간다 라면으로 때우면 모은 돈이 너무 허무하게 나가는 날이다 모처럼 개폼 똥폼 몽땅 잡아봤는데 택시에 내려 약속 장소 명동 ‘쉘부르의 우산’울 이리저리 물어 간신히 찾아 들어갈려는데 아니 비엉신같은 놈이 스타일 구긴다 지나가던 배달의 기수 자장면 배달 오토바이 뒤바퀴에서 튄 시커먼 눈덩이들이 파편으로 해순이 스커트 부츠 스타킹에 해파리처럼 달라붙어 흉하게 만든다 놀라 처다보니 배달의 기수 왈 ‘아줌마! 미안합니다 참으면 복이 온다고 하던데 미안 안녕 바이바이‘ 하면서 약올리고 달아나 버린다 디런 눈녹인 물과 흙이 묻어 속상한데 아줌마라니 환장 요지복통 돌아가실 것만 같다 갑자기 욕지기가 치밀어 ‘야! 씨부랄 잡놈 똥개놈의 원조야! 자짱면 처 먹다 급체해 디질 놈아! 내가 뭐 아줌마라고 이래봬도 해남에서는 알아주는 미인인데 피부과 원장선생님도 친구들도 다 그랬는데 뭐시기 무어라고 이담에 째보 들창코 여자나 만나라‘ 라며 누런 가래침을 ‘콱’ 뱉고 서둘러 이층 계단으로 올라간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이다 자리에 앉으니 웨이터가 다가와 인상을 쓰면서 물을 놓고 간다 입구에서 가래침을 뱉은 것을 보았던 모양이다 영업집들이 싫어하는 행동을 촌색시가 했으니 꼴깝부지기수이다 2층 창가에 앉아 물을 ‘홀짝 홀짝’ 마시며 들뜬 마음으로 진석이를 기다린다 명동거리에는 화려한 연인들이 눈을 맞으며 걸어가고 있고 간혹 팔짱을 기고 키스하는 연인도 있다 너무 부러워 얼굴이 불그스레해진다 그러데 5시간을 죽치고 앉아 기다려도 진석이 소식은 없고 웨이터 눈치보기가 저승사자같다 카운터에서 전화 소리만 들려도 혹시나 하고 기다려보지만 전부다 다른 연인의 전화이다 벌써 물컵만 5번째 속이 타니 꽁짜물만 즐창 들이킨다 내리는 눈은 점점 그쳐가는데 진석이한테는 소식이 없다 배는 고파오지 물만 잔득 먹으니 화장실은 단골 ‘꼬르륵 꼬르륵’ 하는 소리가 실내 음악에 맞춰 ‘너울너울’ 춤을 춘다 견디다 못해 에스프레소 한잔 주문 메뉴판을 보니 가격도 적당 해남으로 돌아갈 차비 휴게소 점심 오뎅 값 고속터미널 갈 시내버스비와 합이 맞다 처음 먹어보는 에스프레소인지라 먹는 방법을 몰라 우물물을 바가지로 퍼서 먹던 것대로 ‘후르륵’ 소리내어 마신다 그러자 주변의 눈총이 영 사납다 웨이터는 아예 눈을 아래로 내리 깔고 불쌍하다는 듯이 본다 폼과 체면이 왕창 구겨진 해순이는 더 견디지 못하고 가슴에는 눈물만 가득 채우고 벌거진 눈으로 계산을 하고 밖으로 정류장으로 ‘하니’처럼 달려간다 근데 그것도 옥상가옥 미끄덩 넘어져 개구리 뻗듯이 두다리 두팔 뻗고 명동 한복판에 넘어진다 하늘에는 별이 보이고 정신이 하나도 없지만 창피해서 얼른 일어나 버스를 타고 내빼 버린다 해순이가 나간 다음 1시간이 지나자 진석이가 들어선다 기다릴 줄 알았던 해순이가 안 보이자 당황하여 웨이터에게 물어본 결과 오전부터 기다리던 손님이 방금 나갔다고 한다 진석이는 얼른 나와 고속버스터미널로 달려가고 눈은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성남에서 버스를 탄 진석이 버스는 내린 눈으로 20중 충돌 사고가 있어 지금 도착했고 바삐 나오느라 핸펀도 잊어 먹었던 것이다 해순이는 눈물로 해남행 버스를 탄다 그리던 님인데 늘 보고싶고 하루도 생각 안하면 서글퍼 잠못 이루는 밤이 수없이 많았건만 첫눈 오는 날 만나자던 약속에 기다렸던 겨울눈인데 못보고 빈털터리로 내려가는 심정은 정말 기가막히고 어안이 벙벙하다 차가 출발하고 서울을 마지막으로 보는 해순이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차가 터미널을 벗어나 도로에 접어들자 늦게 도착한 진석이가 창문곁에 앉아 하염없이 멀리 바라보며 우는 해순이를 불러 보았지만 귀신만 알아들을 뿐 알아채리지 못한 해순이는 해남으로 가기만한다 이제는 잊어야지 지금은 배신에 마음 아프지만 세월이 치료해 줄거야 ‘나쁜 자식 전화 한통 날리면 어디가 덧나냐 잘 먹고 잘 살아라 흑흑흑흑............................‘ 사랑이 무언지 땅끝마을 해남처녀 해순이를 몹시도 서글프게 만드는 날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해순이와 진석이 60년대 한국 애정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첫댓글 널 사랑해 이 말 너에게만 하고 싶어~~~흐르는 음악이 넘 행복한 노래네요주말이 엄청 춥다네요 얼지않게 조심하세요 행복한 시간되시구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마음이 찡하지만 재미있게 보고갑니다 좋은주말되십시요 ......
좋은글ㅇ 잘머물다 갑니다.
어제는 세문화회관에서 리사이틀를 보고아직도 고운 목소리의 노래 소리가 귓전에서맴도는데커튼을 젖히자 따스한 햇살이 창가에서 손짓 하는 아침에첫눈의 추억을 떠 오르게 하는 고운 글과 함께 해 봅니다추운 날씨에 건강 행복하시길요
첫눈이 와도 기다릴 사람도 기다려 줄 사람도 없는 나이지만 혜순이의 배신감, 그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음악과 잘 어울리는 글에 푹 빠졌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