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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차면 기운다고 합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온다고 합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고, 비에 젖지 않고 열매 맺는 꽃도 없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주어지는 것은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잃어버리는 것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습니다.
숲에서 초원으로 나온 인류는 직립 보행을 통해서 3가지를 얻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손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겁니다. 자유로운 손으로 도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자유로운 손으로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자유로운 손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인류의 문화와 예술은 인류의 손을 통해서 표현되었습니다. 둘째는 성대의 발달입니다. 직립보행을 하면서 인류는 다양한 소리를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소리는 말이 되었고, 말을 통해서 인류는 소통하고 협조할 수 있게 되었으며, 말을 통해서 역사와 전통이 전해졌습니다. 말은 노래가 되었고, 말은 시가 되었고, 말은 사랑이 되었습니다. 셋째는 두뇌의 크기입니다. 직립보행하면서 인류는 두뇌가 커졌습니다. 커진 두뇌는 감성, 이성, 오성을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감성은 예술이 되었고, 이성은 과학과 학문이 되었고, 오성은 종교와 신앙이 되었습니다. 인류는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이 세상에 왔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직립 보행을 통해서 잃은 것도 있습니다. 첫째는 척추의 문제입니다. 두 다리로 척추를 지탱하는 것은 네 다리로 척추를 지탱하는 것보다 힘들고 어렵습니다. 다른 동물에 비해서 인간은 척추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는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올바른 보행 자세와, 적당한 체중 조절이 중요합니다. 둘째는 출산의 문제입니다. 임신 기간이 길기도 하지만, 직립 보행을 하면서 골반이 좁아졌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출산의 고통으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의학이 발달하고, 위생 상태가 좋아졌지만 여전히 여성에게 출산은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셋째는 소화기 계통의 질환과 치질입니다. 인간의 소화기관은 네 발로 걷기에 적합하게 발달하였습니다. 과음과 과식도 소화기 질환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치질 역시 직립 보행을 하기에 구조적으로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적당한 운동과 충분한 휴식이 중요합니다. 직립 보행을 통해서 얻은 것에 감사한다면, 직립 보행을 통해서 잃은 것도 받아들이는 삶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중국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인류는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교통수단의 발달입니다. 자동차, 기차, 비행기는 우리를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줍니다. 100년 전에 인류에게 여행은 커다란 결단과 모험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인류에게 여행은 휴식과 즐거움을 얻는 선택입니다. 둘째는 대규모 양식 산업의 발달입니다. 인류는 음식을 대규모로 양식하며 재배하고 있습니다. 생명공학의 발달로 더 우수한 품종을 개발하였습니다. 양식과 가공의 과정은 잘 모르지만 우리는 원하는 음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셋째는 도시 생활입니다. 예전의 인류는 삶의 터전이 다양했습니다. 농촌, 어촌, 산촌에서 살았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인류의 대부분은 도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전기, 도로, 수도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의료, 교육, 문화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류의 삶을 위협하는 바이러스와 질병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주었습니다. 교통수단의 발달은 바이러스와 질병이 쉽게 전파될 수 있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몇 년, 몇 달씩 거리던 바이러스와 질병의 전파가 일주일, 하루 만에 전파되기도 합니다. 가축의 대규모 양식과 사육은 변종된 바이러스가 생길 수 있는 환경이 되기도 합니다. 항생제를 처방하기도 하지만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바이러스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도시 생활이 편리함을 주지만 도시는 바이러스와 질병이 머물기에도 좋은 장소가 되었습니다. 과학과 기술 발달로 인한 풍요로운 삶을 받아들였다면 새로운 바이러스와 질병을 무서워하기 보다는 잘 대처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지만 제자들은 지금 빵이 없다고 걱정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며 세상의 것을 걱정하기 보다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 행복하옵니다. 당신이 깨우쳐 주시고, 당신 법으로 가르치시는 사람! 불행의 날에도 평온을 주시나이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주님이 그들의 바람을 채워 주셨네. 그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으셨네.(조재형신부)
하루에도 120번의 발작을 일으켜 모든 의사들이 수술을 포기했던 한 악성 뇌암환자의 수술을 성공시켜 ‘신의 손’이라 불리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의 벤 카슨 박사입니다. 그가 세계 최초로 샴쌍둥이 분리수술을 성공시킨 인물입니다.
벤 카슨은 디트로이트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이혼한 가정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집은 가난했고 흑인이라 백인들에게 따돌림을 받았으며 공부는 늘 꼴찌라 친구들이 바보라고 놀렸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아이가 세계 의학계의 거장이 될 수 있었을까요? 어느 날 한 기자가 벤 카슨에게 찾아와 “오늘의 당신을 만들어준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어머니, 쇼나 카슨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늘 꼴찌를 하면서 따돌림을 당할 때에도, ‘넌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노력만 하면 다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끊임없이 해 주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된 것은 어머니의 이 말씀을 믿고 희망과 용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머니가 왜 공부 안 하냐, 나쁜 친구들과 왜 어울리느냐, 왜 인내심이 없느냐 등의 말만 했다면 벤 카슨이 그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요? 행동을 바꾸려 해서는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믿음’으로 변화되고 믿음으로 재창조됩니다.
하느님의 백성도 믿음으로 창조된 백성이지, 행동을 변화시켜 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행위는 믿음이 생기면 자연적으로 따라 나옵니다. 믿음 없는 상태로 하는 행위는 위선이나 흉내입니다.
오늘 복음은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저는 빵 일곱 개를 교회의 7성사로 보고 싶습니다. 7성사는 분명 우리 자신의 옛 본성을 죽이고 하느님 백성으로 재창조되는 힘입니다. 그리고 7성사의 중심은 성체성사입니다.
어쩌면 요즘도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인 이 7성사를 두고도 바리사이처럼 하늘에서 오는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때문에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 이상의 다른 표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한 믿음만으로 충분히 하느님 자녀로 재탄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의 머릿속에는 율법만 잘 지키면 하느님 백성이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로 주시려는 믿음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빵은 분명 ‘양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라고 물으실 때, 그들은 “열둘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열둘은 아무래도 이스라엘 지파의 수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 당신 백성, 곧 교회를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빵 다섯 개는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고 오천 명은 그 몸을 받아 모시는 이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당신 살과 피인 성사에 대한 믿음으로 하느님 백성이 되는 것이지 다른 표징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느님 자녀가 되려고 예수님을 닮으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예수님과 하나다!”를 믿기 위해 이 말을 반복하며 쓰거나 자주 되풀이하며 기도드렸다면, 10년, 아니 1년 뒤에 누가 더 예수님과 가까운 하느님 자녀가 되어있을까요?
예수님을 닮으려고 이러저러한 행동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진전이 없을 것입니다. 행동은 바뀌었겠지만 본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참다운 하느님 백성은 믿음을 바꾸는 사람입니다. 성체성혈로 자신이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음을 믿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 사람은 1년 뒤에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변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없이 행동만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을 조심해야합니다. 믿음 없이 행동만 바꾸려는 사람은 우리를 위선자가 되게 합니다. 벤 카슨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부모는 결국 믿음을 가지게 해서 자녀를 변화시키는 분들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고 하느님의 신성을 모신 성전이라는 믿음을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살릴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2020년 02월 18일 화요일
[녹]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입당송
시편 31(30),3-4 참조
하느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본기도
하느님,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하느님께 유혹을 물리칠 힘을 청해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사명의 참된 의미를 보여 주시고, 그들을 그 사명에 참여시키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1,12-18
12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13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14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15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6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17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습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4(93),12와 13ㄴ.14-15.18-19(◎ 12ㄱㄴ 참조)
◎ 주님, 당신이 깨우쳐 주시는 사람은 행복하옵니다.
○ 주님, 행복하옵니다, 당신이 깨우쳐 주시고, 당신 법으로 가르치시는 사람! 불행의 날에도 평온을 주시나이다. ◎
○ 주님은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 소유를 저버리지 않으신다. 재판이 정의로 돌아오리니, 마음 바른 이 모두 그 뒤를 따르리라. ◎
○ “내 다리가 휘청거린다.”생각하였을 때, 주님, 당신 자애로 저를 받쳐 주셨나이다. 수많은 걱정들 제 속에 쌓여 갈 때, 당신의 위로 제 영혼을 기쁘게 하였나이다. ◎
복음 환호송
요한 14,23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 알렐루야.
복음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4-21
그때에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16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17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 기도
주님,
이 제사로 저희를 깨끗하고 새롭게 하시어
저희가 주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78(77),29-30 참조
그들은 실컷 먹고 배불렀네. 주님이 그들의 바람을 채워 주셨네. 그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으셨네.
<또는>
요한 3,16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상 진미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참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이 구절을 그리스어 원문에 더욱 가깝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빵들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배 안에 제자들과 함께 있는 빵은 한 개뿐이었다.’ 이를 중심으로 이 구절을 살펴보면, ‘빵들’과 ‘빵 한 개’가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먹을 음식인 빵들을 챙기지 않았는데, 어째서 배 안에 빵 한 개가 남아 있던 것일까요? 도대체 그 빵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이 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음식이 아닙니다. 먹는 빵이었다면 제자들이 “빵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고 ‘빵이 한 개밖에 없다.’ 하고 서로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있는 그 빵 한 개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두고 빵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분께서 바로 누룩 없는 빵 곧 파스카 음식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온전하게 믿어 그분을 누룩 없는 빵으로 받아들이라고 일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도 ‘누룩’ 때문에 걱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걱정과 제자들의 걱정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악한 영향력이 미칠까 걱정하시지만, 제자들은 지금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걱정합니다. 같은 말 속에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하나의 걱정이 영적인 것이라면, 다른 걱정은 육적인 것입니다. 하나의 걱정이 구원과 관련된 것이라면, 다른 걱정은 의식주와 관련된 것입니다. 과연 이 두 가지의 걱정에서 우리는 무엇에 주안점을 두어야 하겠습니까? 육적인 것에 마음을 써서 우리 안에 계신 빵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한재호 루카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