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을 하다 어느 시점이 지나면 의례 묻고,물어 오는 질문이 있다.
“어느 학교 나왔어요?”
물론 이 질문은 먼저 ‘고향이 어딥니까’로 시작해서 얼마 지난 후에 따라오는 질문이다.
경상도와 전라도가 치고 싸우는 통에 나의 출신지 강원도는 참 편한 대답을 주게 한다. 적어도 그들은 내게 어느 편에서도 적개심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춘천이라는 말에 그들은 그곳이 도청 소재지이니까 내가 아주 촌놈도 아니라고 여긴다. 참 적당한 출신이다. 그래서 대부분,
“아, 강원도 감자 바위요?” 하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질문,
“어느 학교 나왔어요?, 참,춘천이면 춘천고 나왔겠네요?”
“ ------ “
처음엔 꼬박 나는 춘고가 아니고 춘천00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했었다. 그러면 그들의 표정이 속으로 ‘아,그래요. 춘천에 그런 학교가 있었어요? 하긴 도시에 여러 학교가 있으니. 이름도 처음 들어본 별 볼일 없는 학교를 나왔군.참 광주 제일고와 제주 제일고는 명문인데.유사품에 속지 말자가 아니고 유사 학교네’ 하는 식이다. 그래서 고등학교 이름을 말 한 뒤에 번번히 주석을 붙였다.
“사실 제가 나온 학굔요,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 지시에 의해 만들었고, 우리 학교가 만들어 지기 전까지는 춘천고등학교가 명문이었지만 우리 학교가 만들어진 다음엔 우리가 더 좋았고요, 또 시설이, 시설이 있지요, 동양 최고고요, 기숙사가 있고, 그 시절에 스팀이 있었고요, 화장실도 수세식, 헌데 지금은 없어졌는데------ “
“------ “
물은 사람은 단지 어느 학교를 나왔냐고 물었는데, 이처럼 길게 대답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 긴 대답에 상대방은 또 속으로 ‘어, 이 양반 형편없는 학교 나온 게 그리 챙피한가. 뭐 그리 변명이 많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 왠만한 사람이외에는 그냥 ‘춘천고 나왔겠네요’하는 대답에 ‘네’하고 대답한 적도 많았다. 어찌 또 출신학교 뒤에 그 주석을 일일이 달랴.
하지만 그것도 간접적일지라도 거짓말은 거짓말. 학교 시절의 정통영어에 있던 저 유명한 격언 -‘Honest is the best policy (정직은 최상의 방책이다)’는 말을 어긋난 것. 가끔 그 대가를 치룰 때가 있다.
“ 어이, 이 선생. MBC앵커 ‘엄기영’이 선배지?” 또는
“ 이번에 춘고가 고교야구 16강 올라 왔던데 응원안가나?”등등.
여기까지는 그래도 그냥 고개를 끄덕이면 되는데,
“어 참 내 후배가 춘고 *회 졸업생인데, 혹 동기 아니요? 아무개 알아요?” 하는 정도가 되면 그땐 다시 그 변명 아닌 변명이 나와야 한다.
“저, 저는요, 춘고가 아니라요. 00고등학교라는 학교를 나왔는데요. 그때는 제일, 제1 좋았고요----”
학교에는 교직원 식당이 있다. ‘선생들은 너무 까다롭다’는 말을 식당 주인에게 자주 들으며 학교 선생들은 선생대로 식당 식단에 불평이 많았다, 주인들은 계속 그 ‘까다롭고’’너무 싸고’하는 많은 불평을 했고, 일부 선생들은 ‘그럼 가격을 좀 올려주지’하고 볼멘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몇 번 주인이 갈린 다음에 젊은 부부가 식당의 새 주인으로 왔다.
그리고 식당은 완전히 바뀌었다. 완전히. 같은 가격이었는데, 같은 까다로운 선생들이었는데, 식당의 두 부부는 언제나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 해 주었다. 그리고 식단은 너무 황송하게도 매일 생일을 맞이하는 정도로 점심 상을 받았다. 이전에는 ‘점심을 때운다’는 생각이었는데, 모두 출근하면 ‘오늘 점심은 뭘까?” 하고 기대를 하게 되었다. 당연히 밖에 나가서 식사하는 사람이 없어지고 거의 학교 식당을 이용했다. 그래서 불편한 것이 생겼는데 예전에 없이 줄을 길게 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밥을 먹기 위해 줄을 서 있을 때는 묘한 처량함과 조급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거의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다. 어느 학교 기숙사 출신인데.얼마나 긴 줄에서 단련되었는데.
덩치가 제법 크고, 언제나 웃음 띤 얼굴의 이 식당 주인은 인사성도 너무 좋았다. 학교 어느 곳에서 만나도 먼저 웃으며 인사를 한다. 아차 하고 내가 인사할라 치면 웃음띤 얼굴이 이미 말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식사는 잘 하셨어요? 오늘 가락시장에 가보니 싱싱한 표고가 있어서 사왔는데. 내일은 표고버섯을 하려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다니요. 그저 황송할 뿐이죠.)
그래서 선생들은 모여서 식당 얘기를 할 때면 의례 주인 평은 한 마디씩 했다
“참, 좋은 분입니다.”
“그렇구 말구요”
여기에만큼은 늙은 여우 같은(?) 여선생들도 모처럼 동참한다.
“어이, 이 선생, 집에서 이렇게 좋은 밥 못 먹지?”
어찌 보면 학교에 공부 가리키러 온 것이 아니라 먹으러 온 것 같다. 실제로 선생들이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하고 오면 개학은 절대 기다려 지지 않았지만 식당 생각은 간절했다고 할 정도다. 그렇게 3년을 지냈다.
그날은 다른 날 보다 조금 늦게 식당에 내려갔다. 점심 시간이 거의 끝나 사람이 없었다. 식판을 들고 음식을 뜨러 가는 내게 주방에 있던 듬직하고 마음 좋은 식당 사장님이 내게 다가와서 내 앞에 멈췄다. 그리고 예의 안부 인사부터 했다. 그리고 물었다.
“저—고향이 강원도 시라면서요?”
“예”
“저--- 춘천이시라면서요?”
다른 선생들에게 전해 들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예”
그리고 여기서 멈춰야 할 물음을 그 주인은 계속 물었다.
“ 어느 고등학교 나오셨지요?”
“------ “
거기서 나는 조금 ‘어, 이 분이 내게 실례하는 것 아냐?’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야 명문을 나와서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지만, 만일 내가 그렇고 그런 학교를 나왔으면 어쩌랴? 그러니 조금 경우가 없는 질문을 했군. 하지만 그런 것은 속으로의 생각이고 나는 대답했다.
“00고등학교라는 덴데요” 그리고 속으로 ‘알아요?’
식당주인에게서 아, 그래요.’ 하는 대답을 예상했는데, 저쪽에서 전혀 뜻밖의 대답이 날라왔다. “저, 몇 기 시죠?”
순간 흠짓 놀랐다. ‘몇 기라니?’ ‘몇 기?’.
보통 다른 학교들은 ‘기’라는 말 대신 ‘회’를 쓰지 않는가. “몇 횝니까?”이렇게. 헌데 상대방은 내게 ‘몇 기냐고 묻고 있다’ 가만히 주인의 얼굴을 보니 그 듬직한 얼굴이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4깁니다”하자 그 주인님이 대뜸 대답한다.
“아, 저는 5깁니다.”
“------ “
놀라움의 아주 짧은 시간이 둘 사이에 잠시 지나고 내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래? 나, 몰라?”
3년 동안 존대를 해 온 이 의젓하고 덩치 큰 식당 주인님에게 그대로 반 말이 나왔다. 거의 반사적으로. 그리고 정체가 확실치 않은 그 분의 대답은,
“잘 모르겠는데요”였다.
나는 속으로 ‘날 몰라’그러면 00고 안 나온 거 아냐?’(우린 모두 후배가 선배를 알지 않는가. 그렇지?)
얘기를 풀어나가면서 그 분이, 아니 그가 농구 선수였고, 체육관에서 숙식을 했으며 아는 선배는, 하면서 그의 입에서 낯 익은,공부보다 의리를 중시했던, 그 시절 저쪽 부류(?)였던 이름들이 줄줄 나왔다. ‘한광수,홍형만이 형 하고 담배 많이 피웠어요. 뒷 가계에서 술 마시다가요, 아, 달포한테 들켜서 목덜미 붙들려 ---- ””그리고 대욱이 형 사격할 때“나는 그의 말을 막았다. 더 이상 증명이 필요 없었다. 우리는 부등켜 안았다. 강원도에서, 그것도 춘천에서, 그것도 명문인 효자동 산 10번지 00고등학교를 떠나와 이 낯선 서울의 잠실 바닥에서 만났다. 얼마나 반가우랴. 그날 저녁 우리는 둘이서 잠실의 어느 식당에서 동문회를 했다. 우리는 취했다.
“야, 너 말이야”
“예, 선배님 말씀만 하십시오”
---- 그리고 그 달 말에 내 월급 명세서에 ‘식대’가 0, 후배는 내 식사비를 안 받은 것이다. 명세서를 들고 돈을 들고 내려갔지만 후배와 제수씨는 막무가네 였다. 그 다음 달도, 다음 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네 번째 달이 되었을 때 나는 배수의 진을 치고 사정을 했다. “이러면 안 내려 온다.선배더러 이 식당에 오지 말란 말이야”
그러자 그 내외는 겨우 내 청을 받아 들였다.
우리의 관계는 이런 미담과 함께 학교에 여기 저기 퍼져 나갔다. 당연 수업 시간에 나는 식당의 그 우람한 주인님이 내 후배이고 고등학교 때는 농구 선수였고, 저 KIA 농구단의 ‘조동기’선배라는 것을 이야기 했다.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꼭 선후배가 바뀐 것 같다 했다. 그가 워낙 노숙했으므로. 그리고 점심 시간이면 가끔 나는 주방에 들러 쭈구리고 앉아 있곤 한다. 그러면 주방 밖의 식당 안에서 다른 선생들이
“어이. 동문회 하슈?” 한다.
요즘 학생들이 버릇이 대체로 없듯이 우리 학교 학생들은 아예 아주 없다. 시작 종이 치고 선생님이 먼저 교실에 가 있어야 그때 천천히 들어오는 것이 관례가 되어있다. 화장실에서 오는 것은 가까우니 괜찮은데 식당에서 떡볶기 라든지 핫도그를 먹고 오는 경우는 식당이 교실과 멀어 그제서야 오는 모습이 많은 선생님들의 눈에 거슬렸다. 쉬는 시간에 파는 그 간식은 사실 얼마 되지 않은 식당의 운영에 큰 도움이 된다고 익히 후배에게 들은 터였다.
그러나 드디어 어느날 교무회의 시간에 그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그리고 급기야는 늙은 여우(?) 같은 여 선생님들이 주장했다.
“앞으로 쉬는 시간에는 절대로 식당을 이용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시작 종 소리가 났는데도 음식을 먹으면서 저 멀리서 천천히 오는 걸음하며 – 내일부터는 그렇게 하도록 하죠”
미리 준비했는지 많은 선생들이 의견에 동조했다.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다 느끼고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교장님이 공표를 할 차례였다. 교장 선생님이 마이크를 건네 받으려고 손을 내밀려고 하는 순간, 나는 무작정 벌떡 일어섰다. 무작정. 사람들은 모두 한동안 가만히 있는 나를 쳐다보았다. 조금 있어서야 나는 말문을 열 수 밖에 없었다.무작정 일단 일어섰으니.그리고 말했다.
“학생들이 쉬는 시간을 지키지 않고 식당이나 화장실을 오가는 것은 분명 잘 못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강제로 통제하는 것은 학교에서 할 교육이 아니고 군대에서 할 통제 입니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해야 할 일은 통제가 아니라 교육입니다. 시간을 지키라고 교육을 시켜야 할 것 입니다. 그것이 우리, 교육자가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식당의 운영에 많은 부분이 간식을 팔아서 운영되는데, 보다시피 근래에 이렇게 좋은 사장님을 만나 편히 식사한 적이 없습니다. 만일 점심 시간에만 운영케 해서 식당의 운영이 곤란하여 지금의 사장님이 떠난다면 식당때문에 그간 겪었던 이 어려움을 다시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분명하고 또렷하고 단호한 어조였다.
내가 앉자, 같은 의견으로 성토하던 교무실이 조용해 졌다.어느 누구도 내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그 늙은 여우(?)같은 선생들 마저도 숙연해서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침묵이 조금 있고 나서 교장 선생님이 말했다.
“식당 문제는 이 선생님의 의견대로 하는 것이 좋겠어요”
2000년 학기가 되면서 새 정부의 공약 사업인 학교 급식이 시행되게 되어 있었다. 큰 관심사는 학교 급식 업체를 정하는 일이었다. 물론 결정권은 서무과장과 교장,그리고 이사회가 갖고 있었다. 평교사인 나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공개 입찰을 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입찰 공고를 내자 제일제당 등 몇 몇 큰 기업에서까지 신청이 들어왔다. 후배는 사업체도 아닌 개인이었다. 시설 투자비만 해도 몇 억이 들어가는 큰 사업이었다. 후배는 모든 것을 체념한 것 같았다.
“애초에 돈을 벌 생각이었으면 학교에 오지 않았어요. 방학이 있고 아이들도 돌 볼 여유가 있어 학교로 왔었는데--- “ 하며 그는 아쉬워했다.
선생인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킬 것인가를 별로 생각 안 하고 퇴근시간만 기다리는 때에, 후배는 언제나 어떻게 하면 좋은 식단을 준비할까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분명 그는 우리보다 훨씬 보람 있게 살고, 또 바른 사람이었다.
그것을 학교의 모든 사람이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다. 학교에는 새로이 학생 식당이 지어지고 교육청에서는 중,고 총 90학급인 우리학교를 시범학교로 정해서 모범적으로 시행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많은 선생님들과 후배는 그 시설물들을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이제 2월 중순이면 새로운 업체가 지정되고 후배는 떠나야 할 입장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래 봄 방학이 시작되던 날,저녁에 후배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 저쪽에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선배님, 저에게 식당의 입찰이,급식이 제게 맡겨졌어요”
. 기적이었다. 입찰 회의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심적으로 이미 식당의 우리 후배를 점 찍고 있었다. 그리고 회의가 진행되자, 큰 기업체를 선택하지 않고 만장일치로 바로 식당의 주인, 우리 후배를 추천했다는 것이다. 큰 어려움이었던 공사비에 대한 모든 책임은 학교가 지기로 하면서.
그래서 후배는, 우리 00고를 나온 후배는 오늘도 90학급이나 되는 거대한 학교의 급식에 여념이 없다. 큰 사업주의 사장님으로서. 그러면서 아직도 만나는 사람에게 이렇게 묻는 습관은 여전하다. 이것은 그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삶을 보람 있게 사는 지혜다.
“오늘 식사는 어떠셨지요. 무엇을 어떻게 해야 더 나아지겠습니까?” “------“
“이렇게 좋은 후배를 가까이 둔 사람 있으면 나와봐!”
“내게 어느 학교 나왔냐고 물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