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4 -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Sharon, Ariel) 사망 샤론 [Sharon, Ariel, 1928.2.27~2014.1.11] 아리엘 샤론 전 이스라엘 총리 타계 아리엘 샤론 전 이스라엘 총리가 타계했습니다. 현지 언론들은 아리엘 샤론 전 이스라엘 총리가 입원 중이던 텔아비브 인근 병원에서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했습니다. 지난 2001년 이스라엘 총리로 취임한 샤론 전 총리는 2006년 재선 유세 도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지난 8년간 혼수상태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왔습니다. 군인 출신인 샤론은 군 장성으로 지난 1967년 '6일 전쟁' 등에서 공로를 세웠고 레바논 침공도 진두지휘했지만 수천 명의 민간인이 숨지면서 아랍권에서 '베이루트의 도살자'라는 오명을 얻었습니다. 샤론은 아라파트 당시 PLO 의장과 폭력 중단과 평화협상 재개에 합의하는 등 평화를 향한 조치를 시도했지만 자신이 이끄는 리쿠드당의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 불가 입장에 따라 무산됐습니다. 지난 2005년에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의 철수를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샤론은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수개월 전에는 국수주의 성향의 리쿠드당에서 이탈해 중도 카디마당을 창당했습니다. /YTN 뉴스 2014-01-12 00:56
2012 - “담배, 국가가 제조·판매는 위헌” 헌법소원 박재갑 전국립의료원장 등 9명 국가가 담배를 제조·수입·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는 ‘담배사업법’에 위헌 소지가 있다며 11일 시민들이 헌법소원을 냈다. 박재갑 전 국립중앙의료원장 등 9명은 이날 “담배사업법은 흡연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국가가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인체 유해 물질인 담배를 합법적으로 제조·수입하게 해 국민에게 판매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법”이라며 이날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 청구서를 냈다. 청구인은 박 전 원장 외에 흡연자로 현재 폐암 투병 중인 시민, 간접흡연 폐해를 우려한 임신부, 청소년 등이다. 청구 대리인은 과거에 헌법연구관을 거친 이석연 전 법제처장이다. 이들은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인 보건권은 국가가 국민의 건강을 소극적으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의무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국민의 보건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할 책무를 지우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며 담배사업법이 국민의 보건권과 생명권, 행복추구권,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어 “담배의 유해성은 과학적으로 입증됐고, 한국에서 매년 5만여명이 담배 관련 질병으로 사망한다”며 “담배사업법으로 이 같은 국민의 기본권을 직접 침해받고 있거나 침해가 분명히 예상된다”고 밝혔다. - Anne Frank 2010 - ‘안네의 일기’ 알린 미프 히스 별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안네 프랑크의 가족을 다락방에 숨겨주고 안네의 일기를 모아 세상에 알린 미프 히스가 11일(현지 시각) 숨졌다고 안네프랑크박물관이 밝혔다. 향년 101. 1909년 오스트리아 태생인 히스는 안네의 일기에서 ‘조력자’라고 표현된 이들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남편 얀 히스(1993년 사망)가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는 동안 그는 암스테르담 한 사무용 빌딩의 다락방에 은신한 프랑크 일가에게 25개월간 책과 음식 등 생필품을 갖다주었다. 1933년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한 게 인연이 됐다. 44년 프랑크 일가가 나치 비밀경찰에게 잡혀간 뒤 히스는 다락방 바닥에 흩어진 안네의 일기를 발견하고 보관했다. 안네는 16살이던 45년 유대인 수용소에서 발진티푸스에 걸려 숨을 거뒀고 그는 살아 돌아온 안네의 아버지 오토에게 그 일기 뭉치를 건넸다. 그 일기는 47년 네덜란드에서 출간된 데 이어 52년 영국에서 <한 어린 소녀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빛을 보게 됐다. 연합뉴스 /한겨레 2010-01-12 오후 08:35:31 2009 - ‘독도 일본영토 아니다’ 일본 현행법령 2건 확인 지금도 법적으로 유효한 일본의 현행 법령 두 건에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하는 규정이 있는 것으로 11일 확인됐다. 1960년 시행된 ‘대장성령 43호’와 1968년 시행된 ‘대장성령 37호’가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하고 있으며, 이 두 법령은 현재에도 법적으로 유효하다고 최재원 유미지재권 법률사무소 선임연구원이 이날 밝혔다. 최 연구원은 일본법령 데이터베이스인 ‘웨스트로 재팬’(www.westlawjapan.com) 등을 활용해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정부 관계자는 “두 법령의 존재는 정부도 이미 파악해 알고 있으며 구체적 분석을 하고 있다”면서도 더이상의 언급은 피했다. 일본의 대장성령 43호는 1951년 공포된 ‘총리부령 24호’(조선총독부 교통국 공제조합의 본방 내에 있는 재산정리에 관한 정령의 시행에 관한 총리부령)를 일부 개정한 것이고, 대장성령 37호는 역시 1951년 공포된 ‘대장성령 4호’(구령에 의한 공제조합 등으로부터의 연금수급자를 위한 특별조처법 제4조 3항의 규정으로 부속 섬을 정하는 성령)를 개정한 현행 법령이다. ‘총리부령 24호’와 ‘대장성령 4호’는 전후 연금수급자 선정 및 일본 점령지역 회사 재산 정리 등을 목적으로 한 법령으로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하고 있는데(<한겨레> 1월5일치 6면), 이에 대해 일본 외무성 관계자는 “문제의 법령은 미국의 일본 점령 당시 일본 정부의 행정권이 미치는 범위를 표시한 것 일 뿐 일본의 영토 범위를 나타낸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고 <요미우리신문>이 7일 보도한 바 있다. 하지만, 대장성령 37호와 43호는 △일본에서 미군정이 종료된 뒤에 공포됐을 뿐만 아니라, 현행 법령으로 지금도 유효하며 △일본이 영토를 정의할 때 행정권을 기준으로 삼기보다는 ‘구 일본 점령지역’과 ‘본방’(본래의 일본 영토) 등의 범주를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는 점 △미군정 이후 개정 과정에서도 독도 및 (러시아와 영토분쟁이 있는)치시마열도는 영토 배제 규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최 연구원은 “특히 대장성령 43호의 모법에 해당하는 1999년 개정법률 160호(구 일본 점령지역에 본점을 갖는 회사의 본방 내에 있는 재산의 정리에 관한 정령)의 제2조 1항 2·3호는 일본의 영토와 ‘구 일본 점령지역’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며 “이에 비춰 문제의 법령들은 당시 일본 정부가 법적으로 독도에 대한 영유권 인식이 없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2차 대전 종전 뒤 일본을 지배한 연합국 최고사령부(GHQ)는 점령 직후인 1946년 발표한 명령(SCAPIN) 제677호 등을 통해 ‘리앙쿠르락스’(독도)를 일본의 관할 대상에서 명시적으로 제외했으나, 일본은 1952년 4월 발효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대일 강화조약)의 영토반환 목록에 독도가 명시돼 있지 않다는 이유로 영유권 주장을 지속적으로 펼쳐 왔다.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 /한겨레 2009-01-12 오전 07:46:45
2009 - 한국의 영화 감독 문여송(文如松) 사망 문여송 [文如松, 1932.6.8~2009.1.11] 오늘의 역사 (1월 11일)[2009년] 영화 감독 문여송씨 별세영화 '진짜진짜 좋아해(1977)'를 연출했던 문여송(77) 감독이 2009년 1월 11일 오후 9시 지병으로 별세했다. 문 감독은 1932년 제주도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대 예술학부를 졸업한 뒤 1966년 고은아와 남궁원이 주연한 반공영화 '간첩작전'으로 데뷔했다. 1976년 년'진짜진짜 잊지마'를 히트시키며 흥행 감독으로 떠오른 그는 이후 '정말 꿈이 있다고'와 '진짜진짜 미안해'를 비롯해 '진짜진짜 좋아해(1977)', '아무도 모를꺼야'(1977) '우리들의 고교시대'(1978) 등을 잇따라 흥행시키며 1970년대 후반 하이틴 영화 붐을 이끌었다. 문 감독은 김응천 감독, 석래명 감독과 함께 당시 하이틴 영화를 이끄는 '삼두마차'로 불리기도 했다.1980년대에도 활발하게 활동했던 문 감독은 1992년 '비황'을 끝으로 연출 활동을 마감했다. /조선
- New Zealand, 5 Dollars (Banknote) 2008 - 에베레스트 첫 등정한 힐러리(Hillary, Edmund) 사망 힐러리 [Hillary, Edmund (Percival), 1919.7.20~2008.1.11] 세계 첫 에베레스트 등정한 에드문드 힐러리 타계 ‘오만하지 않은 정복자’ 찬사의 애도 1953년 5월29일 정상에…남극 원정하기도 동행 셰르파 숨진 뒤에야 “먼저 도착” 공개 평생 네팔 도우며 히말라야 환경보호운동 그는 가장 높은 산을 가장 먼저 올랐다. 하지만, 삶에 겸허했다. 그리고 조용히 죽음의 부름에 따랐다. 세계 최고봉 해발 8848m 에베레스트에 가장 먼저 오른 산악인 에드문드 힐러리가 11일 고향 뉴질랜드의 한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88. 1953년 5월29일, 힐러리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소리쳤다. “우리가 망할 녀석을 때려눕혔다.” 1935년 고등학교 때 학교 등반에 나섰다가 눈을 보고 매료된 뒤, 18년 만이었다. 1957~58년에는 트랙터를 개조해 남극 원정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오만한 ‘정복자’는 아니었다. 평생을 네팔인들을 돕는 데 바쳤다. 1962년 ‘히말라야 트러스트’ 재단을 설립해, 네팔에 병원과 학교, 공항을 세우는 데 힘을 쏟았다. 영국 여왕이 에베레스트 정복 50돌을 기념해 초대했지만, 그는 셰르파 친구들과 보내기 위해 네팔로 떠났다. 120여회 네팔을 찾았고, 2003년 명예 네팔 시민권을 받았다. 또 빈곤 국가에 재조림 작업을 하는 데 앞장섰다. 산에 버려진 산소통, 식료품통, 등산 쓰레기를 치우는 데 노력해, 1987년 유엔이 꼽은 500대 환경보호 운동가로 꼽혔다. <아에프페>(AFP) 통신은 “자신의 명성을 자신의 배를 불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쓴 세계적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헬렌 클라크 뉴질랜드 총리는 “힐러리는 ‘평범한 능력을 가진 보통 사람’이라고 겸손해했지만, 그는 위대한 인물이었다”며 “단지 산을 정복했을 뿐 아니라, 단호하고 겸손하고 관대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했다. 그는 ‘누가 먼저 에베레스트봉을 밟았느냐’는 질문에, “나와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한 팀으로 올랐다”고 말했다. 1986년 노르가이가 숨진 뒤에야, 자신이 3m 먼저 올랐다고 밝혔다. 그는 현존 인물로는 처음으로 뉴질랜드 지폐에 얼굴이 새겨졌다. 힐러리는 이 말을 남겼다. “왜 산에 오르는지 특별한 답은 없다. 그저 오르기 위해 간다.” - Edgar Snow 1997 - '아리랑'의 작가 님 웨일스(Wales, Nym) 사망
웨일스 [Wales, Nym (Helen Foster Snow), 1907.9.21~1997.1.11] '아리랑'의 작가 님 웨일즈 사망 한국인 독립혁명가 김산의 전기 '아리랑'을 지은 언론인 겸 작가 헬렌 포스터 스노(Snow, Helen Foster)가 1997년 1월 11일 89살로 미국에서 사망했다. '님 웨일스'라는 필명으로 더 널리 알려진 스노는 23세 때인 지난 1931년 상하이 주재 미국 영사관에 자리를 얻어 중국에 건너갔으며 당시 중국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에 대한 저술 ‘중국의 붉은 별’로 유명한 에드가 스노(Snow, Edgar, 1905~1972)를 만나 결혼했다. 1937년 초여름. 님 웨일스는 연안의 한 도서관에서 김산(본명 장지락)이라는 한 조선인 혁명가를 우연히 만났다. 그녀는 고통과 좌절, 정열과 희망, 그리고 모험과 투쟁으로 가득찬 이상주의적 혁명가의 모습에서 인간미를 느끼고 그의 인생역정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그녀는 남루한 방에서 그와 대좌, 개인사를 듣고 적는다. 2년 뒤 필리핀에서 그녀는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은 ‘아리랑 ’집필에 전념, 결실을 맺는다. 님 웨일스는 이 책에서 공산혁명가로서 피어린 삶을 살아오면서도 파괴되지 않은 고결한 인간성을 간직한 김산의 내면세계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김산의 어린시절에서부터 동경유학시절,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변에서 활동하던 급진주의자들과 접촉하면서 사상적으로 변신하게 되는 과정, 중국공산당원으로 맹활약한 이야기가 일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님 웨일스는 남편 에드가 스노우와 함께 1930∼40년대 중국을 누비며 마오쩌둥의 대장정에 참가하는 등 중국과 동아시아통으로 통했던 여성 행동가였다. 그녀는 이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번 오르기도 했다. '붉은 중국의 내부' '중국 노동운동' '아리랑' '홍진' '나의 연안일기 '중국에 바친 청춘' 등은 그녀의 손꼽히는 저서들이다. /조선 1991 - 미국의 물리학자 앤더슨(Anderson, Carl) 사망 앤더슨 [Anderson, Carl David, 1905.9.3~1991.1.11] 미국의 물리학자. 뉴욕 출생.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이 대학 조교수를 거쳐 1939년 교수가 되었다. 처음에 X선 광전자 연구를 하였으나, R.A.밀리컨 밑에서 감마선·우주선(宇宙線) 연구에 몰두, 1932년 윌슨의 안개상자 속에 납의 박판을 넣고 우주선의 비적(飛跡)을 촬영하던 중 양전자(陽電子)를 발견하였다. 이것은 P.A.M.디랙의 이론에 따라 예견되었던 양전자의 실증이었고, 이것으로 1936년 오스트리아의 V.F.헤스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백금판을 이용한 같은 장치를 이용하여, 이듬해인 1937년 S.H.네더마이어와 공동으로 무거운 전자, 즉 중간자(中間子)를 발견하였다. 이것은 μ중간자이며 핵력(核力)을 담당하는 중간자와는 다른 것이었으나, 1935년 주장되었던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의 중간자설(핵력이 중간자에 의해서 매개된다는 설)을 실증하는 것으로 인정되어 유카와설의 뒷받침이 되었다. 1949년 μ중간자의 자연붕괴로 생기는 전자의 에너지 스펙트럼 연구 중, μ중간자의 자연 붕괴에 따라 전자와 2개의 중성미자(中性微子:neutrino)가 발생하는 것을 처음으로 밝혔다. /네이버 1978 - 소련, 첫 우주 3중도킹 성공 (2인승 유인우주선 소유즈 27호와 살류트 6호와의 3중 도킹)
소유스 [Soyuz] 우주정거장이 설치되기 전까지 소유스는 우주정거장으로서 우주에 체류하여 활동하였다. 소유스 1~10호는 1~3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지구궤도로 발사되었으며, 이들 중 소유스 9호는 가장 오랜 비행(약 18일)을 기록했다. 그 이후 30회에 걸쳐서 소유스 선이 더 발사되었는데, 이중 거의 대부분이 추가로 수행한 임무는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살류트 우주정거장에 소유스 캡슐을 도킹시키는 것이었다. 이 우주비행에서 소유스선의 승무원은 우주실험실로 건너가 장기간에 걸친 과학실험을 했다. 1981년 소유스 35호 승무원들은 185일 동안 살류트 6호에 머물러 우주비행 역사상 가장 긴 유인(有人)우주비행을 기록했다. 또다른 중요한 소유스 비행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우주탐사인 아폴로-소유스 시험계획이다. 1975년 7월 수행된 이 우주비행에서 3명이 탑승한 미국의 아폴로 우주선이 2명이 탑승한 소유스 19호와 도킹에 성공했으며, 이들은 2일 동안 공동실험을 했다. /브리태니커 살류트 [Salyut] 소련의 우주정거장. 소유스선에 탄 승무원들이 지구궤도에서 과학실험을 하며 주거용으로 사용했다. 소유스선과 프로그레스 화물선은 살류트와 정기적으로 랑데부·도킹하여 우주비행사들과 보급품들을 수송했다. 살류트의 승무원들은 정기적으로 교대하면서 몇 달 동안 계속되는 연구나 조사를 수행했다. 1971년 4월 19일 발사된 살류트 1호는 세계 최초의 우주정거장이다. 살류트 2호는 발사 직후에 파괴되었다. 살류트 3·5호는 군용이었던 반면, 4·6호는 주로 민간용으로 사용되었다. 살류트 6호(1977 발사), 7호(1982 발사)는 앞뒤에 설치된 도킹 개구, 새로운 연료보급장치, 더 나은 주거공간 등을 갖춘 발전된 형태의 우주정거장이었다. /브리태니커
1976 - 유네스코, 파르테논신전 보호 호소
역사속 오늘[1976년 1월 11일] 유네스코, 파르테논신전 보호 호소 1976년 오늘, 유네스코, 즉 유엔과학문화기구는 그리스의 고대 유물 파르테논 신전를 보호하자고 전세계에 호소하고 나섰다. 유네스코는 파르테논 신전이 전쟁과 공해, 그리고 늘어나는 관광객들의 발길로 훼손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페르테논신전은 도리스식 신전의 정수로 평가받았다. 페르시아인이 파괴한 옛 신전 자리에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를 기리기 위해 지은 것으로 BC 438년에 완성됐다. /YTN 2013-01-11
1966 - 인도의 정치가, 총리 샤스트리(Shastri, Lal Bahadur) 사망 샤스트리 [Shastri, Lal Bahadur, 1904.10.2~1966.1.11] 17세 때 학업을 포기하고 M.간디의 반영운동(反英運動)에 참가, 독립투쟁을 하다가 7번이나 투옥되었다. 인도 독립 후에는 우타르프라데시주(州)의 내무장관 ·운수장관으로 있다가 1951년에 국민회의파 서기장이 되었다. 1952년부터 중앙정부의 철도장관 ·상공장관 ·내무장관을 역임하였고, 1964년 총리 J.네루의 사망으로 총리가 되었다. 1965년 카슈미르의 귀속문제로 파키스탄과 분쟁이 재발하였을 때, 이를 수습하기 위한 수뇌회담이 1966년 소련령의 타슈켄트에서 열렸는데, 여기에 참석하여 정전(停戰)과 외교관계 정상화를 약속하는 공동성명에 서명한 후, 심장병으로 현지에서 사망하였다. /naver - Alberto Giacometti - 'The Dog, Abstract' - Switzerland, 100 Franken (Banknote) 1966 - 스위스의 조각가 자코메티(Giacometti, Alberto) 사망 자코메티 [Giacometti, Alberto, 1901.10.10~1966.1.11] 스위스의 조각가. 보르고노보 출생. 스위스의 인상파 화가인 G.자코메티의 아들이다. 1919년에 제네바의 미술 공예학교에서 조각을 배우고, 이어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고대 미술품에 감명받았다. 1922년에 파리로 나와 평생 그곳에서 제작 생활을 하였다. 파리에서의 최초의 4년간은 그랑드 쇼미에르 미술연구소의 E.A.부르델 교수 밑에서 조각과 데생을 시험하여 보았으나 눈에 보이는 것을 조형하는 어려움에 절망하여, 1925년경부터는 사생(寫生)을 중지하고 상상력에 의한 관념적 공간조형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해서 얻게 된 것이 추상적·환상적·상징적·전율적인 일련의 오브제(objet)였으며, 이것들은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서 높이 평가되어 1929∼1934년 초현실주의 그룹의 한 중요 구성원으로서 권위적인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5년 이후는 사생(寫生)에 의한 조각에 몰두하여, 고독과 침묵 속에서의 오랜 탐구 끝에 1948년에 공허 속에서 응결된 것과 같은 가느다란 조상(彫像), 즉 그 자신은 철사와 같이 가느다랗게 깎이면서 그 주위에 강렬한 동적 공간을 내포한 날카로운 조상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들이 주목을 끌어, 이후 조각계의 제1인자로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동시에 입체적인 공간을 유화로 추구하는 일을 계속하였으며, 또한 예리한 묘선(描線)에 의한 데생과 판화에 있어서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이들의 제작은 모두가 눈에 보이는 현실―공허 속에 나타나는 허상(虛像)―그대로를 보이려는 시도였으며, 서유럽 조형미술의 전통에서 가장 현대적·전위적인 표현이었다. 그는 1951년의 상파울루 국제전람회에서 조각상을 받았다. 작품에 철사를 사용하여 새장과 같은 공간구성을 주제로 한 《옆으로 눕는 여자》(1929) 《쉬르리얼리스트 케이지》(1930), 《오전 4시의 궁전》(1932∼1933, 뉴욕 근대미술관 소장) 등과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작품인 《가리키는 남자》(1947. 테이트 갤러리 소장) 《디에고의 초상》(1960, 파리국립근대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naver
1964 - 흡연의 유해성에 관한 최초 보고서 발표
[어제의 오늘]1964년 미 공중위생국 ‘흡연 보고서’ 발표 ㆍ“흡연은 암을 유발한다” ‘루터 테리 상’이라는 게 있다. 미국 암협회가 매년 담배 퇴치와 금연 운동에 공헌한 인물이나 단체에 수여하는 국제적인 상이다. 이 상은 1960년대 이후 담배와의 전쟁에 힘쓴 루터 테리(1911~85)라는 의학자를 기려 제정됐다. 테리는 61년 미 공중위생국장에 임명됐다. 공중위생국장은 미 대통령이 임명하며 미국의 보건위생 프로그램을 총괄한다. 테리는 공중위생국장 자리에 앉자 가장 먼저 흡연의 유해성에 대한 연구를 기획하고 지휘했다. 그 결과 공중위생국은 64년 1월11일 ‘흡연과 건강’이라는 방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흡연은 암을 유발한다.” 테리가 이날 방송을 통해 전달한 보고서의 짧은 결론은 미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특히 흡연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흡연과 건강의 관계에 대해 사실상 무지했던 미국인들이 미 보건행정을 좌우하는 기관의 발표 내용을 의심할 리 없었다. 보고서에 대한 흡연자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뉴욕주의 경우 64년 1월 담배소비세 수입이 63년 같은 기간보다 5%가량 줄었다. 2월의 감소율은 18%였다. 또 64년 미국인 1인당 담배 소비량은 그 전 해와 비교해 3.5% 감소했다. 테리 보고서는 미국인의 흡연의식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았다. 흡연을 죽음에 이르는 나쁜 습관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흡연율이 낮아진 것은 당연했다. 미국 성인 흡연율은 64년의 42%를 정점으로 약간의 등락이 있었지만 꾸준히 하락했다. 2007년 흡연율은 사상 처음 20% 아래(19.8%)로 떨어졌다. 테리 보고서는 담배에 대한 미 정부의 태도를 바꿔놓기도 했다. 보고서 발표 1주일 뒤 미 연방통상위원회는 모든 담뱃갑에 흡연의 유해성을 알리는 경고문 표시 의무화를 추진한다고 밝혔고, 미 의회는 이듬해 경고문 의무화 법안을 통과시켰다. 66년 1월부터 미국에서 판매되는 모든 담뱃갑에는 ‘주의:흡연은 당신의 건강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서영찬 기자 /경향신문 2010-01-10 17:35:16
- Anti-tuberculosis Institute, Maracaibo 1947 - 12th Pan American Sanitary Conference WHO, Venezuela-Caracas, 11-24 Jan 1947
1946 - 알바니아인민공화국 수립
1920년 이탈리아군을 추방하고 독립을 회복한 뒤 국제연맹에 가입했다. 그 뒤 A.B. 조구(Zogu, Ahmed Bey, 1895~1961)가 나타나 F.S. 놀리(Noli, Fan Stylian, 1882~1965)정권을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대통령이 되었다가 1928년 왕제를 선언하고 스스로 국왕 조그 1세(Zog I)가 되었다. 1939년 이탈리아에게 무력으로 합병되었으며, 제2차세계대전중에는 이탈리아의 항복 직후 독일에게 점령되었다. 1941년 알바니아공산당이 결성되어 독일에 대한 파르티잔투쟁이 시작되었고, 1944년 10월 E. 호자(Hoxha, Enver, 1908~1985)를 수반으로 한 임시정권이 수립되어 같은 해 11월 말까지 전국토를 장악하였으며, 1946년 1월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여 사회주의국가가 되었다. /yahoo
- Mar.13, 1940, End of Winter War
1940 - 핀란드-소련 겨울전쟁 6주째 역사속 오늘[1940년 1월 11일] 핀란드-소련 겨울전쟁 6주째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고 (1939.11.30발발) 6주째에 접어든 1940년 오늘! '겨울전쟁'으로 불리는 소련과 핀란드의 전쟁이 강추위 속에 계속됐다. 이 전쟁은 소련군이 쉽게 이길 것으로 보였지만 핀란드 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장기전이 됐다. 전쟁기간 내내 영하의 추위 속에 싸워야했던 양국 군인들 가운데 동상에 걸리거나 얼어죽는 경우가 속출했다. 핀란드는 스웨덴과 노르웨이 등 이웃나라의 군사원조는 물론 세계적인 지지여론을 받았다. 그러나 겨울전쟁은 1940년 3월 26일, 소련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에 패한 핀란드는 카렐리야 지협의 항코반도를 30년 동안 소련에 빌려주기로 하고 휴전조약을 체결했다. /YTN 2013-01-11
1935 - 아멜리아 에어하트, 여성 최초로 하와이-캘리포니아간 태평양 단독 횡단 비행
1928년 6월 17~18일 비록 조종사 두명의 승객으로 탔지만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1931년 출판업자 조지 P.퍼트넘과 결혼했으나 결혼 전의 이름으로 계속 비행사 경력을 쌓아나갔다. 1928년 비행사로서의 명성을 확인받기 위해 1932년 5월 20~21일 대서양을 단독으로 비행했다. 곧이어 일련의 미국 횡단비행을 실시했고 상업 비행의 발전을 고무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또한 그녀는 이 새로운 분야에서 여성 참여의 길을 넓혀 남성 절대 우위를 종결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935년 1월 하와이에서 캘리포니아까지 단독으로 비행했는데 그 거리는 미국에서 유럽까지의 거리보다 더 길었다. 에어하트는 이 위험한 항로를 비행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인물이었다(그녀 이전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음). 1937년 조종사 프레드 누넌과 함께 쌍발기 '로키드 엘렉트라'로 세계일주 비행을 시작했다. 세계의 2/3가 넘는 거리를 돈 뒤 그녀의 비행기는 국제 날짜변경선 근처 태평양 중심부에서 사라졌다. 그뒤 이 의문의 실종은 많은 의혹을 불러일으켰고 이 사건에 대한 의견도 분분했지만 그 진상의 대부분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남편이 쓴 전기 〈솟구치는 날개 Soaring Wings〉(1939)가 있다. /브리태니커
1929 - 로마 교황청, 로마시 북서부 교황령을 바티칸 시국으로 개명 [오늘속으로(1월10일)] 바티칸 市國 1929년 1월10일 로마 교황청이 로마시 북서부 교황령을 바티칸 시국으로 개명했다. 바티칸 시국은 그 다음달 11일 로마 라테라노 궁전에서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사이에 체결된 라테라노 협정에 따라 공인됐다. 이로써1870년 통일 이탈리아가 로마와 그 둘레의 교황령을 점령하면서 불거진 ‘로마 문제’가 해결되었다. 1861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를 국왕으로 해 탄생한 이탈리아 왕국은 처음에 토리노를 수도로 삼았고 이내 피렌체로 천도했다가, 로마 점령 이후 이 3천년 역사의 고도로 중앙 정부를 다시 옮긴 바 있다. 그 뒤 이탈리아 국가와 가톨릭 교회 사이에 생긴 갈등을 ‘로마 문제’라고 부른다. 무솔리니 정부와 맺은 라테라노 협정에 따라 바티칸은, 중세 이래의 널따란 교황령에 견주면 그 규모가 보잘 것 없긴 했으나, 교황을 주권자로 한 독립적 군주국이 되었다. 또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빼앗긴 교황령에 대해 일정한 보상을 받았다. 교황령은 교황의 세속적 지배권이 미치는 가톨릭 교회의 영유지를 가리키는데, 8세기에 프랑크 왕 피핀이 롬바르디아 왕에게서 빼앗은 땅을 교황스테파누스2세에게 기증한 데서 비롯됐다. 라테라노 협정은 또 가톨릭교가 이탈리아의 유일한 국교임을 확인했고, 초등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중등학교에서도 의무적으로 종교 교육을 실시하도록 했다. 무솔리니도 이 양보의 대가로 교황의 정치적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파시즘과 가톨릭교회 사이의 이 연대는 긴장 속의 연대였다.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라는 공통의 적을 지니고 있었고 농촌적 삶에 대한 믿음을 공유했다는 점에서 파시즘과 교회는 통하는 바가 있었지만, 무솔리니는 근본적으로 이교도적 퍼스낼리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상화한 로마는 교황의 로마가 아니라 기독교 시대 이전 고대의 로마, 곧 황제들의 로마였다. 고종석 /한국일보 2004-01-09 16:24
1928 - 영국의 소설가, 시인 하디(Hardy, Thomas) 사망
하디 [Hardy, Thomas, 1840.6.2~1928.1.11] 영국의 소설가, 시인. 석공(石工)의 아들로 잉글랜드 도싯주 어퍼보컴프턴 출생. 1856년 도체스터 건축기사의 제자가 되었고, 1862년 런던의 건축사무소에 들어갔다. 건축공부를 하는 여가에 소설을 쓴 것이 당시 문단의 대가 G.메레디스에게 인정받았고, 그의 권고로 처녀장편 《최후의 수단》(1871)을 간행하였다. 그 후 《녹음 아래에서 Under the Greenwood Tree》(1872) 《푸른 눈동자 A Pair of Blue Eyes》(1873) 《광란의 무리를 떠나서 Far from the Madding Crowd》(1874)로 호평받고, 작가로서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1874년 결혼하고, 손수 지은 도체스터의 저택에 옮겨 살았다. 그의 소설의 대표작으로는 《귀향 The Return of the Native》(1878) 《캐스터브리지의 시장 The Mayor of Casterbridge》(1886) 《테스 Tess of the d’Urbervilles》(1891) 《미천한 사람 주드 Jude the Obscure》(1895) 등이 있지만, 그 밖에도 많은 장 ·단편 소설을 남겼다. 이들 작품의 거의 모두가 그가 태어났고 또 소설가로 대성한 후에도 계속 살았던 웨식스 지방을 무대로 하였다. 그러나 지명(地名)은 모두 가공의 이름인데, 예를 들어 ‘캐스터브리지’시(市)는 작자가 살고 있던 도체스터시이다. 이렇듯 한정된 지역을 무대로 삼으면서도 그의 작품이 지방색만을 내세운 문학은 아니고, 인간의 의지와 그것을 비극적으로 짓밟아 뭉개는 운명과의 상극(相克)을 테마로 한 비극으로, 그리스 비극 ·셰익스피어 비극과도 비교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19세기 말 영국 사회의 인습, 편협한 종교인의 태도를 용감히 공격하고, 남녀간의 사랑을 성적(性的)인 면에서 대담하게 폭로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도덕가들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고, 마침내 《미천한 사람 주드》를 끝으로 장편소설 집필을 단념하였다. 그러나 그 후 나폴레옹 시대를 무대로 그의 사상을 몽땅 기울인 장편 대서사시극(大敍事詩劇) 《패왕(覇王) The Dynasts》(3부작, 1903∼1908)을 발표하는 등, 그의 창작활동은 그칠 줄 몰랐다. 1910년 메리크훈장을 받았으며 1912년 상처하고, 2년 후 조수로 있던 여성과 재혼, 그의 만년은 영국 문단의 원로로 자타가 공인하는 존재가 되었다. 사후에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 코너’에 묻혔는데, 그의 심장만은 고인의 유지에 따라 고향에 있는 부인의 무덤 옆에 묻혔다. /naver
1922 - 캐나다 의학자 밴팅, 최초로 인슐린 임상실험
[오늘의 경제소사/ 1월 11일] <1591> 인슐린 1922년 1월11일 캐나다 토론토 대학병원. 14세 소년 로버트 톰슨에게 돼지의 췌장에서 추출한 물질을 투입하는 임상실험이 벌어졌다. 톰슨의 병명은 '죽음의 병'인 소아 당뇨병. 발병 3년 만에 체중이 29㎏까지 빠진 톰슨의 부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임상실험을 간청했다. 결과는 대성공. 시술 직후 부작용이 없지 않았지만 병세 악화를 막았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혈당치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톰슨은 27세까지 살았다. 토론토 대학병원 병적부에 '양쪽 엉덩이에 인슐린 7㏄씩 주사'라고 기록된 이날의 임상실험은 '20세기 의학이 거둔 기적의 하나'로 역사에 남아 있다. 당뇨병 극복의 길이 열린 것이다. 시술진은 초빙 연구원 프레더릭 밴팅(당시 31세)과 대학원생이던 실험 조교 찰스 베스트(23세). 임상실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어도 토론토 의대의 생리학 교수인 존 매클라우드(46세)의 공도 컸다. 군의관으로 참전한 1차 대전에서 영웅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 무명의 당뇨병 연구가인 밴팅의 가능성을 믿고 교수로 초빙해 실험실을 제공해가며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했으니까. 당뇨병 임상실험으로부터 불과 1년8개월 뒤 노벨위원회는 밴팅과 매클라우드에게 노벨의학상을 수여했다. 역대 노벨상을 통틀어 이렇게 빠른 시일 안에 업적을 인정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199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존 내시의 경우 업적을 인정받는 데 40여년의 세월이 걸렸었다. 당뇨병이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오늘날, 인슐린은 여전히 탐구의 대상인 동시에 황금알을 낳는 원천이다. 돼지의 췌장이 아니라 인간의 대장균에서 인슐린을 추출하는 기술을 개발해 1982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은 바이오벤처 제넨텍사는 매출 100조원을 올리는 세계적인 제약사로 커졌다. 권홍우편집위원 /서울경제 2010/01/10 18:10:02 아마추어 연구자들의 열정이 이룬 쾌거 - 인슐린 발견 1921년 5월 16일, 프레데릭 밴팅과 찰스 베스트는 토론토 의과대학 생리학교실에서 실험을 시작했다. 밴팅은 개업이 잘 되지 않아 여자 친구와도 헤어지고 틈틈이 의학도서관에 들려 논문을 읽으며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던 29세의 젊은 정형외과 의사였다. 한편 베스트는 생리학교실의 주임교수 맥클로드가 밴팅의 실험조수로 추천한 21세의 의과대학생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췌장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당뇨병 관련 물질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의학계에서 췌장과 당뇨병의 관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었다. 1889년에 폰메링과 민코프스키가 개에서 췌장을 제거하여 인위적으로 당뇨병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보고한 이 후 여러 사람들이 당뇨병 관련 물질은 췌장의 랑겔한스 섬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나도록 이 물질을 실제로 분리해 낸 사람은 없었다. 밴팅은 아직 아무도 이 물질을 분리하지 못한 이유가 췌장에서 분비되는 효소액이 실험과정에서 당뇨병 관련 물질을 소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의 췌관을 묶어 소화액을 분비하는 조직을 위축시킨 뒤에 나머지 췌장조직에서 원하는 물질을 추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밴팅의 가정은 틀려 있었다. 췌관을 묶은 지 10주가 지나도 조직의 위축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개의 췌장전체를 원료로 실험을 계속했다. 7월 27일, 결국 그들은 당뇨병 관련 물질을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비결은 췌장조직을 분리 즉시 찬 링거액에 담가 저온 상태를 유지하면서 산성 알코올을 추출액으로 사용하였던 데에 있었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었지만 이는 췌장의 단백질 분해효소작용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는 중대한 조건들이었다. 9월 8일에는 추출한 물질을 췌장을 제거한 당뇨병 개에게 다시 주사하여 혈당이 저하하는 것을 확인했다. 두 사람은 이 추출액 속에 들어있을 물질을, 랑겔한스 섬에서 추출한 물질이라는 뜻에서 ‘작은 섬’을 의미하는 ‘아일레친’이라고 명명했다가 나중에 같은 뜻의 라틴어인 ‘인슐린’으로 고쳤다. 이제는 더 많은 양의 인슐린을 얻기 위해 지혜를 짜낼 때였다. 그들은 먼저 도살장에서 소 태아의 췌장을 얻어 다량의 추출액을 얻었다. 이 추출액으로는 당뇨병 개를 70일 동안이나 생존시키는 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얼마 후에는 어른 소의 췌장에서 추출하는 데에도 성공해 인슐린을 더욱 쉽게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1921년 12월 2일, 최초로 인슐린 치료를 받기 위한 당뇨병 환자가 토론토 종합병원에 입원했다. 13세 된 환자의 이름은 레오너드 톰슨이었다. 톰슨 소년이 당뇨병 진단을 받은 것은 2년 전인 1919년 12월의 일이었다. 엄격한 식이요법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체중은 자꾸 줄었고 다량의 당뇨를 배출했다. 이제는 인슐린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해가 바뀐 (1922년) 1월 11일, 드디어 새로운 치료법이 시행되었다. 소의 췌장 추출액을 약하게 희석한 첫 번째 주사를 맞은 톰슨의 혈당은 당장 25퍼센트 저하했다. 매일 주사를 놓자 소년의 소변에서 검출되는 포도당의 양도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월 초 열흘간의 주사가 끝나 치료를 중단하자 소년의 상태는 곧 입원 당시로 되돌아갔다. 다시 인슐린 주사가 개시되었고 한 달 후 환자는 매일 주사를 맞는 조건으로 퇴원했다. (톰슨은 그 후로 13년을 더 살았다. 사망원인은 당뇨병과 전혀 무관한 오토바이 사고였다.) 밴팅과 베스트는 이 경험을 <캐나다의학협회잡지>에 발표했다. 세계 최초로 당뇨병 치료법을 알아내려던 두 젊은이의 모험이 멋진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밴팅과 베스트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이재담 (울산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 /서울아산병원 [건강이야기-메디컬칼럼] 2006-12-1
1914 - 호남선(대전-목포 간) 철도 완공 3년 8개월 동안 구간 별로 시차를 두고 개통해온 대전ㆍ목포간 철도 노선이 1914년 1월11일 전북 정읍과 광주 송정리를 잇는 9번째 철도구간이 마지막으로 완공됨으로써 ‘호남선’이라는 이름아래 하나로 이어졌다. 경부ㆍ경의선이 정치ㆍ군사적인 목적으로 부설된 것과 달리 호남선은 이곳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농수산물을 타지역으로 연결해주는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부설됐다. 철도부설이 처음 논의된 것은 1896년 9월 프랑스의 한 회사가 경성ㆍ목포간 경목선(京木線)부설권을 요구하면서였지만 대한제국은 1898년 직접 호남선 부설을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경목철도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넉넉치 않은 자금사정으로 1904년 6월 부설권을 민간업자에게 넘겨야 했고 철도 이름도 ‘경목철도’에서 ‘호남철도’로 바뀌었다. ‘호남(湖南)’에서 ‘호(湖)’는 금강의 옛 이름인 ‘호강(湖江)’을 가리킨 데서 유래한다. 호남선은 처음부터 한국인 스스로가 추진했다는 점에서 다른 철도와 차별성을 가졌지만, 일본 통감부는 이마저도 일방적으로 12만 9000원을 주고 부설권을 빼앗았다. 더구나 통감부가 호남선 착공을 뒤로하고 경원선(용산ㆍ원산)을 먼저 착공하려하자 화가 난 목포지역 실업가들이 ‘호남철도 급설(急設)운동’을 벌이며 조기착공을 건의, 통감부가 당초의 결정을 뒤엎고 동시착공(1910년 5월)하도록 성사시켰다. 시작은 같았지만 경원선은 호남선보다 8개월이나 늦은 1914년 8월에야 개통됐다. 호남선은 대중가요에도 자주 등장, 국민들과 애환을 같이했다. 김수희의 ‘남행열차’와 1950년대 최고의 히트곡 가운데 하나인 ‘비 내리는 호남선’이 대표곡이다. ‘비 내리는…’은 1956년 대통령선거를 불과 열흘 앞두고 숨진 신익희의 미망인이 슬픔을 이기지 못해 노랫말을 지었다는 소문으로 작곡가 박춘석, 작사가 손로원, 가수 손인호씨 등이 줄줄이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는 얘기가 있다. /조선
1908 - 미국 그랜드캐니언 국립기념지(national monument) 지정 [책갈피 속의 오늘]1908년 美그랜드캐니언 국립기념지 지정 권투와 레슬링선수였고 등산과 사냥, 탐험을 즐긴 야외활동가였으며 군인이자 박물학자, 역사가, 수필가이기도 했던…. 미국인이라면 금세 시어도어 루스벨트 26대 대통령(재임기간 1901∼1909)을 떠올릴 것이다. 다채로운 이력만큼이나 정력과 남성미가 넘쳤던 그는 명실 공히 ‘카우보이 대통령’이었다. 젊은 시절 아내가 아이를 낳다 숨을 거두자 그는 돌연 서부로 이주해 목장을 차리고 무법자들과 싸우며 사냥을 다녔다. 해군부 차관보 재직 때는 스페인과의 전쟁이 터지자 사표를 내고 의용기병대 ‘러프 라이더’를 조직해 쿠바에서 영웅적인 전투를 벌였다. 뉴욕의 부자 집안 출신이었던 루스벨트는 이런 카우보이 경력을 뉴욕 경찰청장, 뉴욕 주지사, 부통령, 대통령에 이르는 정치적 성장에 십분 활용했다. 양가죽바지 차림에 윈체스터 라이플과 콜트 권총을 든 사진은 그의 단골 메뉴였다. 그의 카우보이 이미지는 밀어붙이기 식 일처리와 맞물려 더욱 선명히 부각됐다. 환경운동가로서 그의 명성을 높인 그랜드캐니언 보전은 대표적인 사례. 루스벨트는 1908년 1월 11일 애리조나 서북부의 광대한 협곡을 국립기념지(national monument)로 지정하며 “자연의 위대한 불가사의를 우리 후손 모두를 위한 명소로 보전하자”고 선언했다. 그랜드캐니언은 국립공원의 지위를 얻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국립공원 지정을 위해선 의회의 승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대통령의 권한이었던 국립기념지로 먼저 지정한 것. 그랜드캐니언의 국립공원 지정은 결국 1919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 때야 이뤄졌다. 루스벨트의 말년은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집권 말기엔 의회와 잇따른 충돌로 거센 논란을 일으켰고 1912년 대선 때는 공화당 경선에서 떨어지자 진보당을 만들어 출마했다 맥없이 민주당에 승리를 안겨 주기도 했다. 하지만 루스벨트의 카우보이 정치는 1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많은 후세 대통령의 모델이 돼 왔다.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그의 열성 팬. 그는 취임 얼마 뒤 루스벨트의 전기 ‘국왕 시어도어(Theodore Rex)’ 읽기를 마쳤다며 자랑스러워했다. “부드럽게 말하되 큰 채찍을 준비하라”는 루스벨트의 가르침은 부시 행정부의 외교 노선 지침이 됐다. 부시 대통령의 카우보이 흉내는 비평가들의 조롱을 사기도 한다. 그는 종종 크로퍼드목장에서 기계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모습을 보여 준다. 하지만 말을 타거나 도끼질하는 장면은 볼 수 없다. 사실상 그런 일들은 부시 대통령에겐 너무 힘들고 위험할 것 같다.
- 김유정과 실레마을 김유정문학촌 (춘천 허선구 님 자료제공) 1908 - 한국의 소설가 김유정(金裕貞) 출생
김유정 [金裕貞, 1908.1.11~1937.3.29] [책갈피 속의 오늘]1908년 소설가 김유정 탄생 1908년 1월 11일 소설가 김유정(金裕貞)이 태어났다. 그는 웬만한 천재의 조건을 갖춘 작가였다. 스물두 살에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그만두면서 “더 배울 것이 없어 자퇴한다”고 했다. 스물일곱에 조선중앙일보 등 2개 신문 신춘문예에 동시에 이름을 올리면서 화려하게 등단했다. 이상 임화 등 천재 문인을 쓰러뜨린 폐결핵이 김유정을 비켜가지 않은 것도 흥미롭다. 그는 등단한 지 2년밖에 안 된 1937년 세상을 떠났다. 서른이 채 안 된 나이였다. 물론 김유정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소설이다. 특히 속어와 비어를 뛰어나게 부리는 언어감각은 경탄스럽다. 작가가 벌이는 말잔치 속에서 주인공인 순박한 농민들은 평화롭고 흥겨운 나날을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놀라운 것은 행간에 스며 있는 애처로움이다. 따라 읽다 보면 어깨가 들썩여지면서도 언뜻언뜻 농민의 고단함이 비쳐 쓸쓸해진다. ‘장인에게 닭 마리나 좀 보내지 않는다든가 애벌논 때 품을 좀 안 준다든가 하면 그해 가을에는 영락없이 땅이 뚝뚝 떨어진다. 이 바람에 장인님집 외양간에는 눈깔 커다란 황소 한 놈이 절로 엉금엉금 기어들고 동리 사람은 그 욕을 다 먹어가면서도 그래도 굽신굽신하는 게 아닌가.’(단편 ‘봄봄’ 중에서) 여섯 살 때 고향 강원 춘천을 떠나 서울에서 자란 그는 23세에 귀향했다. 지식인답게 야학당을 열어 농민을 가르치면서 농촌의 삶과 부대꼈다. 작가의 눈에 보인 것은 아름다운 농촌 풍경이 아니라 지주·마름·소작농의 계급 갈등이었다. 작가의 입담에 홀려 놓치기 쉽지만 김유정의 소설이 담고 있는 것은 이런 날카로운 문제의식이다. 탁월한 작가였지만 사랑에는 번번이 실패했다. 명창 박녹주(朴綠珠)를 짝사랑해 요즘 말로 스토커처럼 쫓아다녔지만 거절당했다. 시인 박용철(朴龍喆)의 동생 박봉자(朴鳳子)에게 편지를 30여 통 보냈지만 답장 한 장 받지 못했다. 여성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동료 문인들이 채워줬다. 김유정이 병에 시달릴 때 평론가 김문집(金文輯)이 나서서 후원금을 걷었다. 함께 폐결핵을 앓던 이상(李箱)은 동반 자살하자고 할 정도로 각별했다. 실연의 아픔은 김유정이 귀향해 창작에 몰두한 직접적 계기가 됐다. 늘 그렇듯 사랑은 그 결과가 어떻든 예술의 원천이 된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동아일보 2006-01-11 03:04 http://news.donga.com/3//20060111/8265023/1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 김유정, <동백꽃>
1907 - 프랑스의 정치가, 총리 망데스 프랑스(Mendès-France, Pierre) 출생
망데스(맹데스) 프랑스 [Mendès-France, Pierre, 1907.1.11~1982.10.18] [오늘속으로(1월11일)] 망데스프랑스 1907년 1월11일 프랑스 정치인 피에르 망데스프랑스가 파리에서 태어났다. 1982년 몰(沒). 망데스프랑스는 프랑스의 최고권력자가 된 첫번째 유대인이었고, 지금까지는 유일한 유대인이다. 그는 1954년부터 이듬해까지 총리 겸 외무장관을 지내며 제네바 협정을 통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종결시켰다. 망데스프랑스 이후에도 프랑스 총리가 된 유대인이 있기는 하다. 1984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제3공화정 이래 최연소 총리가 된 로랑 파비위스가 그다. 그러나 파비위스는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강력한 권한을 지니게 된 대통령이 임명한 총리였으므로 최고 권력자는 아니었다. 내각책임제를 채택한 제4공화국 총리 망데스프랑스 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제5공화국 총리 파비위스 위에는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이 있었다. 망데스프랑스는 25세에 급진사회당 소속으로 의회에 진출한 뒤 정치 이력의 전성기를 이 당과 함께 했다. 급진사회당은 공화제를 적극 옹호하고 교회와 독점자본에 적대적이었지만, 프티트부르주아지를 주요 지지층으로 삼으며 재산권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정당은 아니었다. 망데스프랑스는 이 중간파 정당의 왼쪽에 둥지를 틀고 당의 우경화를 막느라 애썼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점령되자, 유대인 망데스프랑스의 운명은 당연히 위태로워졌다. 그는 식민지 모로코에서 체포돼 투옥됐지만, 이내 감옥을 탈출해 영국으로 건너가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군에 가담했다. 망데스프랑스는 파리 해방 직후에도 드골이 이끄는 임시정부의 경제장관을 잠시 지냈지만, 우익 군인 정치인과 유대인 좌파 정치인의관계는 이후 줄곧 적대적이었다. 1958년 망데스프랑스가 급진사회당에서제명된 것도, 당 주류가 동조하고 있던 드골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구상을그가 강력히 비판했기 때문이다. 고종석 /한국일보 2004-01-11 17:18 - 'Ellery Queen'
1905 - 미국의 추리 소설가 맨프레드 리(Lee, Manfred) 출생 리 [Lee, Manfred B(ennington), 1905.1.11~1971.4.3] 엘러리 퀸 [Ellery Queen] 프레데릭 대니와 맨프레드 리의 공동 필명으로 미국 추리 작가. 뉴욕 영화회사에 근무하던 리와 광고대행사에 근무하던 대니는 공동작품에 착안하였다. 1929년 처녀장편 《로마 모자의 수수께끼》 이후 수수께끼 풀이식의 범인 맞추기를 주제로 하는 본격파 작가로서 활동을 하였다. 1932년 버너비 로스라는 별명으로 《X의 비극》 《Y의 비극》 등을 발표했으며, 《엘러리 퀸의 모험》 등의 단편집에서도 C.도일의 정통을 계승하는 단편작가의 제1인자임을 실증하였다. 1941년 《퀸스 미스테리 매거진 Ellery Queen’s Mystery Magazine》을 창간하였다. 범죄문학의 서지(書誌)학자·수집가로서도 공적이 크다. 리가 죽은 후, 대니는 시문선(詩文選) 편집과 평론으로 활약하였다. /네이버
1896 - 캐나다 출생의 실업가, 영국 정보부장 스티븐슨(Stephenson, William) 출생
스티븐슨 [Stephenson, William (Samuel), 1896.1.11~1989.1.31] 캐나다 출생의 백만장자 실업가. 제2차 세계대전중 서방세계에서 영국 정보부장으로 활약했으며, 당시의 활동은 〈용맹이라 불리는 사나이 A Man Called Intrepid〉(1979)라는 책에 연대기로 기록되었다. 목재소 주인의 아들이었던 스티븐슨은 대학을 중퇴하고 1914~15년 캐나다 공병단에서, 1915~18년 프랑스 주둔 영국 비행단에서 근무했다. 전쟁이 끝난 후 스티븐슨은 모험적인 여러 사업에 투자하는 한편 발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실업가로서 그는 라디오·축음기·자동차·비행기 등과 같은 다양한 제품들을 제조했다. 또한 건설·부동산·철강 분야로도 진출했다. 많은 사업거래를 통해서 스티븐슨은 1930년대 독일의 군비증강과 암호해독기의 개발 등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스티븐슨은 이 정보를 영국 정보부에 전달했다. 1940년 윈스턴 처칠이 총리가 되었을 때, 처칠은 스티븐슨을 뉴욕 시에 보내 미국 주둔 영국보안조정국(BSC)을 지휘하도록 했다. 스티븐슨은 서방세계에서 영국의 모든 해외정보활동을 조정하면서 신입 정보원을 모집했고, 캐나다에 비밀기지를 설치해서 적 후방에서 임무를 수행할 정보원들을 훈련시켰다. 1942년 전략정보국(OSS)이 미국의 첩보활동에 대한 책임을 떠맡을 때까지 미국 정부와 BSC 사이의 연락책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BSC 활동의 많은 부분에 자금을 조달했다. 1945년에 기사작위를 받았으며 전후 사업경영으로 되돌아와 주로 자메이카에서 사업을 운영하다가 1968년 은퇴하여 버뮤다에서 죽었다. /브리태니커 1891 - 프랑스의 도시계획가 오스만(Haussmann, Georges-Eugène) 사망 오스만 [Haussmann, Georges-Eugène, 1809.3.27~1891.1.11] 프랑스의 관리. 제2제정(1852~70) 때 파리의 건물을 대규모로 개축하고 근대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법률을 공부하고 1831년 관리가 되었으며 이듬해 파리 부지사로 임명되어 1848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1848~53년에 지방 관리직을 맡았다가 1853년 파리 지사가 되었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그는 건축술에 별다른 취미와 조예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파리를 재건축한 목적 또한 무엇보다도 도시 반란에 사용될 수 있는 건물을 없애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물론 치안유지도 한 요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사업은 파리의 위생·공공설비·운송시설을 근대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불로뉴와 뱅센의 우아한 공원들뿐 아니라 '대로'(大路)체계를 고안했는데 이것은 지금도 파리 시내를 관통하고 있다. 그는 센 강의 섬이자 파리에서 가장 유서깊은 일드라시테(Île de la Cité)를 행정과 종교의 중심지로 바꾸었으며, 파리 오페라 하우스와 1960년대말까지 남아 있던 유명한 중앙 상가인 레잘(Les Halles)을 건설하도록 했다. 파리에 있는 많은 공원·광장·교회·극장·공공건물, 그리고 주거지역은 그의 기획력과 관리 능력, 그리고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신임을 입증한다. 그러나 말년에 공공사업을 하는 데 필요한 엄청난 돈을 다루면서 공금횡령 혐의를 받아 1870년 해임되었다. 1877~81년 코르시카를 대표해 하원의원으로 일했으나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의 〈회고록 Mémoires〉(3권, 1890~93)은 그가 남긴 건축물과 함께 근대 도시계획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71년 하워드 살먼의 〈오스만:변모된 파리 Haussmann:Paris Transformed〉가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1885 - 미국의 여성참정권 운동가 폴(Paul, Alice) 출생
폴 [Paul, Alice, 1885.1.11∼1977.7.9] 미국의 여성참정권 운동 지도자. 처음으로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위한 법률안 개정 운동을 벌였다. 1908년경 영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폴은 영국의 여성참정권론자들과 함께 투쟁적 행위에 참여하여 3번이나 투옥되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연방정부의 여성참정권 법률이 개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투쟁적 전술을 채택할 것을 주장했다. 1913년에 창설되어 후에 전국 여성당이 된 여성참정권회의 연맹의 의장으로서 폴은 시가행진과 백악관에 대한 항의, 집회 등을 조직하고 주관했다. 참정권 개정안이 1920년에 비준된 후 연방에서의 동등한 권리에 관한 개정법안을 연방헌법에 추가시킬 것을 주장했다. 1923년 그녀는 '루크레티아 모트' 개정법안을 작성했으며, 1938년 폴은 세계 여성당으로 알려진 여성평등권을 위한 세계당을 조직했다. 그녀는 또한 국제연합(UN) 헌장 서문과 1964년 미국 민권법에 남녀평등에 관한 언급이 명시되도록 성공적인 로비 활동을 폈다. /브리태니커
1881 - 홍영식, 박정양, 어윤중 등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
조선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면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의 외교정책을 써야 하며, 서양의 여러 나라와 수호통상하여 산업과 무역의 진흥을 꾀하고 서양의 기술을 배워 부국강병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김홍집의 보고를 토대로 대신회의를 거쳐 조선정부는 적극적인 개방외교의 개화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 내용이 알려지면서 반근대적 척사사상에 젖은 양반유생들로부터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1882년 영남 유생 이만손(李晩孫) 등이 소두가 되어 올린 만인소(萬人疏)와 그 뒤 강원 유생 홍재학(洪在鶴) 등의 복합상소 등 척사상소운동을 벌여, 김홍집을 비롯한 척신과 대신들의 실정을 공격하였다. 이처럼 척사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개화정책의 일환으로서 일본의 여러 부문에 걸쳐서 근대화정책을 조사, 연구하기 위하여 1881년 1월 11일 박정양(朴定陽)·엄세영(嚴世永)·강문형(姜文馨)·조병직(趙秉稷)·민종묵(閔鍾默)·조준영(趙準永)·심상학(沈相學)·어윤중(魚允中)·홍영식(洪英植)·이원회(李元會)·김용원(金鏞元)·이헌영 등 젊은 양반자제 38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하였다. 이어 10월 25일 김윤식의 인솔 아래 학도(學徒)·공장(工匠) 등으로 편성한 영선사 38명을 천진에 파견하여, 청나라의 근대식 무기제조와 근대식 군사제도에 대한 실제기술을 배워오게 하였다. /naver
- Leif Erikson, by Stirling Calder 1870 - 미국의 조각가 스털링 칼더(Calder, Stirling) 출생 칼더 [Calder, (Alexander) Stirling, 1870.1.11~1945] Stirling Calder Alexander Stirling Calder (January 11, 1870 in Philadelphia, Pennsylvania – January 7, 1945) was an American sculptor and teacher. Son of the sculptor Alexander Milne Calder and father of the sculptor Alexander (Sandy) Calder, his best-known works are George Washington as President on the Washington Square Arch in New York City, the Swann Memorial Fountain in Philadelphia, and the Leif Eriksson Memorial in Reykjavík, Iceland. Education and career
1859 - 영국의 정치가 커즌(Curzon, George Nathaniel) 출생
커즌 [Curzon, George Nathaniel, 1859.1.11~1925.3.20] 영국의 정치가. 더비셔주(州) 케들스턴 출생. 보수당원으로 정계에 투신하여 1886년 하원의원, 1891년 인도차관, 1895년 외무차관, 1898년 인도총독을 역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국새상서(國璽尙書) ·상원의장으로서 전쟁에 참여하였다. 1919년 외무장관 임시대리로 파리회의에 참석하였고, 그 해 10월 외무장관이 되어 1924년까지 대전 후의 영국외교를 지휘하였다. 소련에 대해서는 적대적 태도를 취하였으며, 1920년 7월 소련폴란드전쟁 때는 파리회의 폴란드문제 특별위원회가 인정한 폴란드의 동방 국경에 근거를 둔 정전(停戰)을 제의하였다. 이후 이 국경선은 제안자의 이름을 따서 ‘커즌 라인(Curzon Line)’이라 불리게 되었다. /naver
1815 - 캐나다의 정치가, 초대 총리 맥도널드(Macdonald, John) 출생
맥도널드 [Macdonald, John Alexander, 1815.1.11~1891.6.6] 존 알렉산더 맥도널드(영어:Sir John Alexander Macdonald, 1815년1월 11일 ~ 1891년6월 6일)는 캐나다의 정치인이다. 1867년 건국된 캐나다의 초대 총리이다.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 태어났으며, 1820년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캐나다로 이주하여 온타리오 주(당시에는 어퍼캐나다)에서 성장하였다. 변호사 자격을 얻었으며, 1844년 보수당 소속으로 캐나다 연합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현 퀘벡주를 중심으로 한 동부지역과 온타리오 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의 연합으로 정부를 구성했고, 그는 1857년 총리가 되었다. 이후로도 프랑스계와 함께 번갈아가며 총리직을 맡았다. 영국령 북아메리카를 통합하여 1867년퀘벡 주·온타리오 주·노바스코샤 주·뉴브런즈윅 주로 구성된 캐나다 자치령이 형성되면서 그는 사실상 독립국으로서의 초대 캐나다 총리가 되었다. 곧 매니토바 주·브리티시컬럼비아 주·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주가 가입하여 영토가 확장되었으며, 캐나다 발전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1873년 철도 건설과 관련된 뇌물 스캔들로 사임하였고 보수당 정권은 붕괴되었다. 1878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다시 총리가 되었으며, 189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재직했다. 그는 캐나다 자치령의 초대 총리를 지냈으나, 영연방의 국민으로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였고 미국의 영향력을 차단하려고 했다. /위키백과
1787 - 영국의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 천왕성의 위성인 티타니아와 오베론을 발견 천왕성의 위성은 현재까지 27개가 발견되었다. 가장 먼저 발견된 위성은 티타니아와 오베론으로, 1787년 1월 11일, 윌리엄 허셜이 발견하였다. 그 다음으로 아리엘과 움브리엘은 1851년 윌리엄 라셀이 발견하였다. 1852년, 허셜의 아들 존 허셜이 이들 발견된 네 위성에 이름을 붙였다. 1948년제러드 카이퍼가 마지막 주요 위성인 미란다을 발견하였다. 1986년 보이저 2호가 천왕성을 지나가면서 10개의 위성을 발견하였다. 나중에 보이저 2호의 사진을 분석하면서 퍼디타를 추가로 발견하였다. 허블 우주 망원경을 이용해서 두 개의 위성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1997년까지는 천왕성은 거대 행성 중에서 유일하게 불규칙 위성을 찾지 못한 행성이었다. 그 후 지상 망원경을 통해 9 개의 불규칙 위성을 추가로 발견하였다. 신화나 고전에서 이름을 따른 다른 행성의 위성과 달리, 천왕성의 위성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알렉산더 포프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을 따랐다. /위키백과 Titania (moon)-Discovery and naming Titania was discovered by William Herschel on January 11, 1787, the same day he discovered Uranus' second largest moon, Oberon. He later reported the discoveries of four more satellites, although they were subsequently revealed as spurious. For nearly fifty years following their discovery, Titania and Oberon would not be observed by any instrument other than William Herschel's, although the moon can be seen from Earth with a present-day high-end amateur telescope.
1747 - 프랑스의 사회개혁가 라 로슈푸코 리앙쿠르(La Rochefoucauld-Liancourt, Francois) 출생
라 로슈푸코 리앙쿠르 [La Rochefoucauld-Liancourt, Francois, 1747.1.11~1827.3.27] 프랑스의 교육자·사회개혁가. 샬롱에 있는 국립고등공예학교를 설립했다. 그가 리앙쿠르에 세운 시범 농장은 프랑스 농업발전에 기여했다. 에스티삭 공작 프랑수아 아르망 드 라 로슈푸코의 아들로 군대에서 복무한 뒤 1769년 영국에 가서 영농방법을 공부하고 돌아와 자신의 시범 농장을 세웠다. 이 농장에서 그는 영국과 스위스 품종의 소를 사육하면서 토질 개량과 목초 시험 재배를 했다. 또 가난한 군인들의 자식을 위해 공예학교를 설립했는데 이 학교는 1788년 루이 16세의 후원을 받는 애국소년학교가 되었다. 클레르몽과 보베의 귀족 대표로 1789년 삼부회에 나간 그는 7월 18일 의회의 의장이 되어 왕당파의 이익을 옹호했다.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었을 때는 왕이 "무슨 일이냐, 이것은 반란이 아니냐!"라고 외치자 그는 "아닙니다. 폐하, 이건 혁명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국민의회의 의료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으며, 1790년 리앙쿠르에 면방직공장을 세웠다. 노르망디 육군 사단 사령관으로 임명된 그는 루앙에 루이 16세의 피난처를 마련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대신 루이 16세를 돕기 위한 막대한 돈을 제공했다. 1792년 8월 파리의 왕궁이 함락되고 난 뒤 영국으로 도피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1799년에야 프랑스로 돌아왔다. 나폴레옹 제정 때 보건·공업·형무 위원회 등에서 일했으며, 천연두 예방 접종 실시 등 진보적인 개혁 조치들을 계속 후원했다. 그는 그리스도교도덕협회 회원이었으며 노예제도 폐지 운동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1800~23년에는 샬롱으로 옮겨와 있던, 자신이 세운 기술학교의 정부 감독관으로 일했다. 1814년 루이 18세는 그를 프랑스의 세습귀족(peer)으로 임명했으며, 1825년 리앙쿠르로 돌아와 최초로 저축 은행을 설립했다. 라 로슈푸코 리앙쿠르의 저작들은 주로 경제 문제에 관한 것인데, 영국의 조세, 빈민구제, 교육제도를 다룬 책들이 있으며 미국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쓴 책도 있다. /브리태니커 1745 - 일본의 지리학자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 출생
이노 다다타카 [伊能忠敬, Inō Tadataka, 1745.1.11~1818.4.13] 일본 에도 시대의 지리학자. 일본 최초로 전국에 대한 과학적 측량을 실시하여 일본 전도(全圖)를 작성했다. 18세 때 양조업에 종사하는 이노가(家)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기울던 가세를 회복했다. 또한 간사이[關西]에서 에도로 쌀을 회송하여 막대한 이득을 얻기도 했다. 만년에 수학과 역학(曆學)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50세 때 은거한 뒤로는 에도의 천문학자 다카하시 요시토키[高橋至時]의 제자가 되었다. 1800년 도호쿠[東北] 지방과 홋카이도[北海道]를 측량하고 자오선을 측정했다. 그후 전국 측량을 목표로 17년에 걸쳐 각지를 섭렵하여 각종 일본 지도를 작성했다. 그동안 바쿠후[幕府]의 측량관리가 되기도 했으나 사재도 투입했다. 바쿠후의 요청으로 1809년 작성·제출한 일본지도의 보완을 위해 측량을 계속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1821년 제자들에 의해 〈대일본연해여지전도 大日本沿海輿地全圖〉가 완성되었다. BIE /브리태니커
1672 - 아이작 뉴튼, 영국 왕립학회 회원으로 등록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최초의 강의도 광학(그 내용은 뉴턴 사후 《광학강의》로 1729년 출판되었다)이었으며, 초기 연구는 광학분야에서 두드러졌다. 광학에 대해서는 이미 울즈소프 시절부터 스스로 수집 ·정비한 실험기구를 이용해 빛의 분산현상을 관찰하였으며, 특히 굴절률과의 관계에 대하여 세밀히 조사하였다. 한편 망원경 제작도 연구, 굴절광은 스펙트럼을 만들지만, 반사광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기초로, 반사식(反射式)이 수차(收差:色收差도 포함)와 효율면에서 한층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1668년 뉴턴식 반사망원경을 제작했다. 이 망원경은 천체관측 등에 크게 공헌하여 이 공적으로 1672년 왕립협회회원으로 추천되었다. 그 해에 《빛과 색의 신이론(新理論)》이라는 연구서를 협회에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백색광이 7색의 복합이라는 사실, 단색(單色)이 존재한다는 사실, 생리적 색과 물리적 색의 구별, 색과 굴절률과의 관련 등을 논한 것이었다. 1675년 박막(薄膜)의 간섭현상인 ‘뉴턴의 원무늬’를 발견하였으며, 빛의 성질에 관한 연구로 광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광학》(1704)을 저술했다. /naver
- 'Young Woman' - 'Madonna with the Rose' - 'Self-portrait' 1503 - 이탈리아의 화가 파르미자니노(Parmigianino) 출생 파르미자니노 [Parmigianino, 1503.1.11~1540.8.24] [오늘<1313>(1월11일)] 파르미자니노 1503년 1월11일 이탈리아 화가 파르미자니노가 파르마에서 태어났다. 1540년 졸(卒). 화가 집안 출신의 파르미자니노는 고향에서 코레조를 직접 사사하고, 세 해 동안 로마에 머무르며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를 사숙한 뒤 독자적 초상화풍을 개척했다. 대표작은 피렌체 우피치미술관에 소장된 ‘목이 긴 성모’다. 이 미완성 유화는 매너리즘(이탈리아어로 마니에리스모) 예술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매너리즘은 고전주의 르네상스 양식에서 바로크 양식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유럽 조형예술계를 풍미한 특정 미술양식을 가리킨다. 순수한 예술양식으로서의 매너리즘에는 흔히 ‘매너리즘에 빠졌다’라고 말할 때의 ‘매너리즘’만큼 부정적 의미가 담겨 있지는 않다. 조형예술 용어로서의 매너(이탈리아어로 마니에라)는 역사적ㆍ개인적으로 규정된 표현방식, 넓은 의미의 양식이나 스타일을 뜻하기 때문이다. 물론 고전주의자들은 미술 용어로서의 매너리즘이라는 말에다가도 진부성ㆍ가식성 같은 부정적 뉘앙스를 씌웠다. 파르미자니노와 엘그레코, 브뤼겔, 틴토레토, 헴스케르크, 로소, 칼로 등으로 대표되는 매너리즘은, 20세기 예술사학자 아르놀트 하우저에 따르면, 고전주의의 너무 단순한 규칙성과 조화를 해체하고 고전주의 예술의 초인격적 규범성을 좀더 주관적이고 암시적인 특징들로 대치하려는 노력이었다. 매너리즘은 한편으로 종교적 체험을 심화하고 내면화하면서 인생을 파악하는 새로운 정신세계의 비전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현실을 의식적ㆍ의도적으로 변형시키며 괴상하고 난해한 데 탐닉하는 주지주의였다. 파르미자니노와 그 동료들의 예술 속에서는 고전주의 형식에 대한 거부의 욕망 위에 자연주의와 정신주의, 무형식주의와 형식주의, 구상성과 추상성 따위가 구별하기 힘들 만큼 복잡하게 통일돼 있었고, 이런 이질성의 통일이 이들을 함께 묶는 양식 전체의 기본 공식이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5/01/10 15:06 life/200501/h2005011015040925340.htm&ver=v002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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