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무신왕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의 신으로 묘사된다.
우선 6살 때(유리왕 28년) 부여 사신을 꾸짖으면서 정계에 처음 등장한다. 이어 10살의 나이로 학반령에서 부여군을 격파하고는 11살 나이로 태자가 되 현토군과 양맥을 정벌한다. 현토와 양맥 정벌은 기록에는 유리왕의 명으로 오이와 마리가 실행한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그 당시에는 대무신왕이 태자자리에 올라 군사와 국사를 맡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가 실행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유리왕이 재위 37년에 죽자 대무신왕은 15세의 나이로 즉위한다. 그리고 재위 3년째 해에 유리왕 29년에 이어 두 번째로 북부여 멸망의 징조가 나타나자 재위 4년 겨울에 부정씨 가문, 괴유, 마로와 함께 부여 원정에 나서 대소를 죽인다. 비록 원정은 실패했지만 대소가 죽은뒤 내분으로 자폭한 부여의 유민들을 거두어들인다. 기록에는 안 나왔지만 갈사국왕의 손녀를 후비로 맞이하였다. 이후 9년에는 개마국과 구다국을 13년에는 매구곡 사람을 굴복시켰다. 11년에는 비록 한나라군대가 국내성을 포위해 방어에만 전념해야 했지만 이는 뛰어난 신하 을두지의 도움으로 극복해냈다. 그리고는 15년에(혹은 20년에) 낙랑국 정벌에 나섰고 20년에는 낙랑국을 완전히 멸망시켰다
정계에 등장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숨 가쁘게 전쟁에 매진한 대무신왕의 상은 잘 알다시피 조작된 것이다. 대무신왕을 호칭에 걸맞게 전쟁의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대무신왕의 업적을 크게 3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부여정벌
2. 낙랑정벌-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
3. 기타 소국 정벌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에도 알려진 부여정벌과 호동왕자의 이야기가 서린 낙랑정벌 이야기다.
부여 정벌 이야기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정계 데뷔(유리왕 28년 8월)와 부여 파멸 징조1(유리왕 29년 6월)-대무신왕: 6세
2. 학반령 전투 승리(유리왕 32년 11월)-대무신왕: 10세
3. 태자 책봉 및 양맥과 현토군 정벌(유리왕 33년)-대무신왕 11세
4. 부여 파멸 징조2(대무신왕 3년 10월)-대무신왕: 17세
5. 부여 원정과 대소의 사망(대무신왕 4년 12월~5년 2월)-대무신왕: 18세~19세
6. 부여의 분열과 멸망-갈사국 탄생과 부여 왕족의 고구려 투항(대무신왕 5년 4월~7월)-대무신왕: 19세
위에 나온 대무신왕의 활약은 3, 5, 6의 일부분을 빼면 조작되었을 것이다. 특히 1과 2는 대무신왕의 나이 때문에 신용할 수 없다. 6살짜리가 엄청 유식한 말을 해 사신을 꾸짖었다거나 10살의 나이로 군대를 지휘했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 북부여 파멸의 징조들은 음양오행에 기초한 상징체계를 이용한 조작임이 분명하다.
부여 원정 자체도 조작되었다.
대무신왕의 원정 이후에도 부여가 수백년간 고구려와는 별개의 나라로 계속 존속한 이상 부여가 자중지란으로 멸망하고, 그 일부가 대무신왕에게 항복해 부여가 고구려에 병합 된 것처럼 묘사 된 것은 조작된 것일 뿐이다.
분명 부여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그렇다고 부여 원정 전체가 거짓인 것은 아니다. 대소의 죽음과 그에 뒤따른 내란이 부여가 망한 것처럼 과장되었을 뿐이다.
대무신왕이 후대에까지 유명해진 이유는 비록 원정에는 실패했어도 대소를 죽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대소는 이미 추모왕이 부여에 있을 때부터 고구려의 가장 큰 적이었다. 그는 추모왕을 모함해 부여에서 내쫓았고, 유리왕과 대무신왕 초기에는 거듭 고구려에 압박을 가한 인물이었다. 삼국사기에서 그는 유리왕 14년, 28년, 32년, 대무신왕 3년에 고구려에 볼모를 보내라고 요구하거나 직접 공격을 하곤 했다. 기록에서 누락된 것까지 있다고 가정할 경우 압박 횟수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는 힘이 모자라 유리왕이 대소의 요구에 굴복을 할 정도였다. 때문에 비록 부여를 없애지는 못했지만 고구려에 치욕을 준 대소를 죽이고, 부여를 한번 흔들어 고구려의 위협을 제거한 대무신왕은 당시 고구려에 영웅으로 인식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의 업적을 더욱 찬양하기 위해 나이에 안 맞는 어렸을 적 행적과 북부여 멸망의 징조가 추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라고 생각되는 부분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1)태자책봉-11세
(2)부여 원정-조력자(부정씨 가문, 괴유, 마로)들과의 만남
(3)대소 살해
(4)부여 원정 실패
(5)부여의 내분(단 앞에서 말했듯 부여는 망하지 않았다.)-갈사국 탄생
대무신왕의 또 다른 주 업적중 하나인 낙랑 정벌은 겉으로 보기에 특별히 조작된 부분은 없어 보인다. 비록 낙랑공주와 최리가 다스린 낙랑국이 한나라의 낙랑군과 어떤 관계였는지, 어디에 있었는지가 논쟁거리이지만.(이 문제는 여기서 다루진 않겠다. 논증자체가 아직도 진행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400년대 이후의 고구려인들은 이 낙랑국 정벌을 분명 실제사실로 믿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 위에서 설명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낙랑국 정벌에는 호동왕자와 낙랑 공주의 사랑, 자명고 신화가 주를 이루고 있을 뿐 별다른 과장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바로 호동의 나이다. 호동은 대무신왕과 갈사국 왕의 손녀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이전부터 지적된 것처럼 대무신왕 15년에 낙랑공주와 결혼한 호동의 나이는 아무리 많아야 11살에 불과 했기 때문이다. 11살짜리가 무슨 사랑을 하겠는가. 사랑을 해도 한 나라를 멸망시키고 모함 받아 죽을 정도까진 못한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가 지적한 것처럼 낙랑공주와의 로맨스가 곁들여진 낙랑 정벌은 대무신왕 20년으로 낮춰 잡는 게 더 낫다고 여겨진다. 그때 호동의 나이는 최고 16세, 15세 전후에 장군이 되고 왕이 된 당시 상황에 비춰 봐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기록상에서 낙랑국은 대무신왕 20년에 고구려에 완벽히 점령당한 뒤 7년 뒤인 대무신왕 27년 9월에 후한의 광무제에게 빼앗긴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낙랑이 후한에게 점령당한 직후인 그해 10월에 대무신왕이 죽은 것으로 나타난다. 향년 41세로. 이를 놓고 보면 대무신왕이-칭호와 업적에 걸맞게(--;) 후한을 상대하다가 상처를 입고 그 때문에 죽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기록속의 후한이 쳐들어온 게 9월 언제인지, 왕이 죽은 게 10월 언제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상처를 입고, 그 때문에 죽었을 가능성'이란 말을 꼭 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반대의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동쪽에서 강국으로 군림하던 고구려의 왕이 병상에 누웠다는 것을 알아낸 후한이 쳐들어 온 것이란 식으로.
노파심에서 한마디 하겠다. 당시 고구려가 아직 완벽한 국가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낙랑국 정벌은 허구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 사람에게 말 하겠다. 체제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정벌할 여건까지는 못됐다고 할 수 없다고. 부여까지 갈 힘을 갖췄던 대무신왕 자신의 권력기반은 부여정벌에 실패하고도, 한나라의 공격으로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했다. 비류부에 간섭해 인사를 교체할 정도이기도 했다. 그는 부여정벌이후에도 주변 세력 병합에 전념했었다. 이정도면 기록에 나온 것처럼 몇 년 정도 점령할 수 있다고, 백보 양보해서 점령은 못한다 해도 약탈은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여겨진다.
그 외에 기타 소국의 정벌, 한나라 군대의 공격 방어 이야기가 있지만 이들에는 특별한 점이 없다. 때문에 특별한 조작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이들 이야기는 부여와 낙랑국 정벌에 비해 비중이 적었을 것으로, 일종의 조연 격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정리하자면 대무신왕의 사적은 가장 큰 업적인 부여 정벌과 낙랑국 정벌을 중심으로 삼아 그가 사방의 적을 정복한 위대한 왕이었음을, 그가 대무신이란 호칭에 걸맞게 사방을 정복한 왕이었음을 과시하는 것이 주제임을 알 수 있다.